60~70년대의 달동네를 그대로 재현해 놓은 박물관은
전시관에 들어가는 순간부터 옛 시절의 파노라마가 쭉 펼쳐진다.
1994년도의 '송현샘 공부방 일지' 확대한 사진은 1991년 3월 15일 금요일에 기록한 일지인데,
일상의 아주 사소로운 부분들까지 적혀 있어 뭔가 남의 일기를 훔쳐 보는 기분이 들었다.
좁은 공간....
둥그런 테이블을 가운데 두고 크고 작은 아이들이 한데 모여
연필을 끄적이는 모습을 상상하고 있으려니, 오빠가 주산 학원에 다니던 시절이 떠오른다.
저녁 시간이 되면 엄마는 으레 내 손에 뜨겁게 데운 보약 한봉지를 쥐어 줬는데
주산 학원에 다니는 3학년 오빠에게 보약 심부름을 하라는 뜻이었다.
약간 산동네에 위치하고 있던 학원까지...8살의 내 걸음으로 약 15분거리.
식기전에 갖다 줘야 하는 임무를 맡은 난....그 비탈진 고개를 종종 걸음으로 올라
학원문을 빼꼼히 열고 오빠를 찾았다.
물론 암산하라고 쥐어준 주판으로 친구들과 한창 스케이트를 타고 있는 오빠를 봤을땐
보약이고 뭐고 목을 짤짤 흔들어 주고 싶었지만,
그런 환경에도 어린 마음에 무척이나 주산 학원에 다니고 싶었다.
얼마 뒤, 여의치 않은 사정이었지만 집에서는 주산학원을 다니는것에 대해 흔쾌히 허락해 주셨다.
어린것이 문 닫힌 학원 앞에서 알짱거리는게 안되보여서 그랬을수도 있겠지만,
내 생각엔.....
산수에 돌대가리가 되어 가는 딸래미의 앞날이 걱정되어 급하게 회비를 챙겨주셨던것 같다.
<대지 이발관 - 주인 ▶박정양(1943~)>
설명 - 박정양씨는 1957년(당시 15세)부터 수도국산 달동네 송현동 83번지에 있던
대지 이발관에서 일하였다.
대지이발관은 인근에서 가장 오래된 이발관으로 한국전쟁 직후부터 있었다.
흙벽에 기와집 이었으며, 약 5평 정도의 크기였다.
박정양씨는 대지이발관에서 이발기술을 처음 배웠는데,
처음 몇년간은 공동수도에서 물을 길어다 물을 데우고 청소를 하는 등 고된 일을 했다.
현대 강화 이발관을 운영하고 있으며, 여전히 달동네 단골손님들의 머리를 단장해주는 일을 하고 있다.
"솜 틀어 드립니다"
설명 - 솜틀집.....뽀송뽀송한 솜이불 한채로 온 가족이 겨울을 포근하게 나던 시절.
변변한 난방기구와 옷가지가 없어 유난히 추웠기에 한겨울 솜이불이 요긴했다.
따라서 솜틀집은 동네 구멍가게 만큼이나 필요했는데,
이곳에서는 뭉쳐진 솜을 뜯어 솜틀 톱니에 넣고 부풀게 만들었다.
우리집은 94년도 말까지 연탄으로 겨울을 나고 물을 뎁혔다.
방도 딱 한칸. 요즘에서야 말하는 개인 프라이버시는 무슨!!
그냥 눈감고 내방이려니~하는수 밖에 없었다.
부엌 한켠에 마련되어진 연탄구멍엔 항상 벌겋게 달궈진 구공탄이 들어있었는데,
그때에는 연탄불이 꺼지면 인생 작살나는줄 알고 항시 번개탄과 구공탄을 재워뒀었다.
당시 내 기억으로 번개탄 하나에 50원인가 100원 정도 한것 같은데,
돌돌 말은 신문지에 불을 붙여 번개탄 아랫쪽을 슥슥 달구면
치이이익~~ 하는 소리와 함께 불이 옮겨 붙었다.
연탄집게로 번개탄과 구공탄의 구멍을 잘 맞추고 나면 연탄 뚜껑을 덮고
그 위에 양철대야에 물을 담아 올려 놓았다.
연탄을 갈고 아랫쪽의 연탄구멍을 반쯤 열어 놓으면 방은 금세 후끈해졌다.
창문 하나 없는 방은 연탄가스로 우리의 목숨을 앗아가기 충분 했지만
희안하게 11년간을 연탄가스로 힘든 적은 한번도 없었다.
아마도 간밤 중간중간 연탄불을 점검하고 환기를 시켰던 엄마의 수고 덕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어떻게 생각을 했을까? (자투리 공간)>
설명 - 달동네 주거 공간은 매우 비좁았다.
하지만 이러한 제약이 오히려 새로운 아이디어를 만드는 배경이 되었다.
좁고 불편한 점을 해소하기 위해 끊임없이 궁리하면서 자기만의 독특한 가옥을 만들었다.
달동네에서는 집을 완전히 고치는 개축보다 노후부분을 조금씩 개보수하고 새로운 공간을 만든다.
수도국산 달동네 역시, 부족한 공간의 한계를 극복하고자 마당을 내부처럼 활용하며,
수납공간을 확보하기 위해 가옥이나 방상부 공간을 이용하는 특징을 가진다.
60~70년대의 부엌은 달동네를 떠나서 많은 가정이 이런 구조이지 않았을까 생각해본다.
상당히 어수선하면서도 투박한 살림살이들. 대충 바른 시멘트 벽에 걸린 바구니와
각종 가재도구들을 보니 위생적인 부분에서는 많이 취약해 보인다.
그런점에서는 현재 우리집 씽크대와 별반 다르지 않은것 같아 입안이 텁텁해진다.
1971년에서 멈춘 달력과 자정이 되면 잘 자는 사람을 심장마비로 돌연사 하게끔 만드는 괘종시계.
댕~댕~댕~댕~댕~댕~댕~댕~댕~댕~댕~대엥~
초등학교 3학년 여름 방학때 놀러간 시골에 괘종 시계가 있었는데,
매일밤 자정 80 데시벨로 쳐대는 12번의 종소리에 화들짝 놀라 경기를 일으킨게 한두번이 아니다.
당시의 이불은 또 어찌나 무거운지 덮고 잔다기 보다 깔려 자곤 했는데,
때문에 세탁을 자주 하지 못한 이불에서는 언제나 콤콤한 곰팡내가 풍겼다.
달동네라지만 게중에서 좀 사는것 같은 집안으로 발을 들였다.
다른 집과는 달리 작지만 마당도 있고 두평 남짓한 대청마루로 있었다.
역시 돈 좀 만진 이 집안에는 그 시대 흔하지 않던 테레비가 안방 한구석을 차지하고 있었다.
드르르륵 하고 돌려야 바뀌는 채널과 아무리 잘 차려 입고 출연해도
검은색과 흰색으로 발광할 뿐인 흑백 테레비.
그리고 뭔가 혼수상태의 세계로 떠나신 재연 마네킹들의 무료한 자세.
원래는 옛날에 방송했던 프로그램을 텔레비전으로 틀어 놓는데 폐장시간이 가까워서 인지
아쉽게도 꺼진 텔레비 앞에서 좌절하고 있는 가족들의 모습 밖에 담을수 없었다.
여러분은 지금 가내 수공업의 현장을 보고 계십니다.
아롱거리는 백열등 아래로 온가족이 둘러 앉아 성냥갑을 만들고 있는 모습을 보고 있으려니
그 시대의 고단함과 억척스러움이 느껴져 가슴이 벅차오를 찰나,
옆에서 요강이다~요강~ 하고 지저귀는 주영이 때문에 기분 잡쳤습니다.
밤이 늦도록 지루하게 반복되는 작업 속에 가족들은 어떤 진솔한 대화를 나눴을까요.
"어머니. 당췌 붙지를 않습니다. 풀칠 좀 제대로 하세요."
"......................너나 잘하렴."
"어머니. 계속 그럴수록 서로간 힘들어질 뿐입니다."
".....................나와라."
아..가슴이 막 따뜻해 집니다.
조악한 문살 너머로 단촐한 밥상이 보인다.
박물관 측에서 마네킹 살 여력이 없었는지 투명 아크릴 판이 어정쩡하게 식사를 재연하고 있다.
네식구가 살기에는 턱없이 좁은 단칸방은 지내기에는 불편할지언정
가까워짐에 있어서는 최상의 조건이 아닐까 싶다.
힘든 삶의 터전에서 돌아와 서로의 살갗을 부비며 '그래도 너희들 때문에 산다.' 하는 아빠와
올망졸망 모여서 후두둑 날리는 보리밥을 오물거리는 자식을 보며 흐뭇하게 바라보는 엄마.
'턱에 구멍났냐?!' 서툰 수저질로 밥알을 흘리는 여동생을 놀리며 씩씩하게 한그릇을 다 비워낸 오빠.
삐뚤어지기 시작하는 동생.
옛날에는 커다란 액자에 여러 장의 사진을 같이 넣어두는 경우가 많았다.
홀딱 벗겨 찍은 애기때 사진부터 학창시절의 잔디밭 단체 사진......
모양 좋은 낙엽 위에 당시 어울리던 친우들의 이름을 적어 책갈피 속에 넣어두고
며칠 기다리면 바싹 마른 낙엽은 때깔 고운 한지 마냥 부드러워 진다.
'우리 우정 변치 말자.', 'love forever.', '삼총사여 영원하라.' 등등
청춘 드라마에 나올법한 문구로 도배된 낙엽은 오래된 앨범이나 액자 속 귀퉁이를 무던히 메우고 있다.
전시물의 사진들은 대개가 태어나서부터 결혼을 하고,
후에 자식과 함께 찍은 사진까지가 지내 온 세월의 마지막이었다.
어둠이 서서히 깔리고 골목 구석구석에서 새어나오는 각각의 구수한 된장국 냄새.
푸싯푸싯 밥 짓는 소리와 깔깔거리며 흩어지는 동네 꼬마 아이들의 뽀얀 웃음소리로 가득한 좁은 골목.
컹컹 개 짓는 소리가 동네 어귀에서 부터 돌림노래 마냥 꼬리를 물고....
노란 빛을 토해내는 자그마한 창틀 사이로 복작거리는 그네들의 대화 소리가 들려온다.
달빛이 가장 빨리 닿는 달동네는 짙어지는 밤기운에도 백열등이 꺼질줄을 모른다.
크게 새로울 것 없는 소쇄한 일상을 떠들고, 어제와 별반 다를것 없는 화제로 긴 하루의 끝을 마감한다.
인분치우기 <이광환 일기 1945~1970>
1967년 8월 20일 - 그간 똥차가 왔다 갔는데도 퍼주지 않아 똥이 차서
오늘은 똥차를 보고 단단이 항의하고 청소조합(淸掃組合)까지 전화를 걸어 항의하여
결국은 시비 끝에 푸기는 하였지만 똥 때문에 싸우는 것은 참으로 유감이었다. (똥차 반복의 압박!)
네. 그랬군요.
故이광환씨의 노고를 치하하는 뜻에서 여기서 잠깐 쉬어가겠습니다.
푸시캣 돌스가 부릅니다~!!!! "똥차~"
똥차 wish your girlfriend was hot like me?
똥차 wish your girlfriend was a freak like me?
똥치아~ 똥치아~
부산에 살던 외할머니네 화장실이 푸세식이었는데,
다년간 공동 변소에서 다리가 덜 저리는 자세를 익힌 내게는 그다지 문제 되지 않았다.
정확한 조준과 마비된 후각. 그리고 흔들리지 않는 편안함...시몬스 침대가 부럽지 않은 내게도
이겨낼수 없는 시련은 있었으니....... 아랫동네에서 꿈틀거리는 밥풀떼기들의 활기찬 움직임이였다.
그들은 내 괄약근의 힘을 앗아갔다.
그리고 변비의 시대가 도래하였다.
덩파리들의 순산으로 아주 기냥 구데기가 빠~글빠~글!!!!!
여러분은 지금 아동학대가 벌어지는 생생한 현장을 보고 계십니다!!!
힘겹게 물지게를 이고 있는 소년을 두고 노골적으로 금전부터 요하는 아주머니의 백태에
각박해진 우리 현실을 재 조명해 볼 필요를 느낍니다.
물파는 집 <공동수도>
설명 - 1960년대 서울 변두리에서는 집마다 수도가 없어 공동 수도에 의존하곤 했다.
공동 수도는 수도를 관리하는 사람이 수돗물을 한통마다 일정 금액을 받고 팔던 것이다.
하지만 물이 항상 나오지 않고 끊어지는 경우가 많아 그럴때에는 물초롱이 긴 꼬리를 만들었다.
달동네는 그런 현상이 더욱 심해 물 부족에 늘 시달렸다.
달동네 사람들은 눈이 오나 비가 오나 공동수도에서 물을 사서 물지게를 지고
가파른 골목길을 올라야 했다.
겨울이면 물지게에서 떨어진 물 때문에 얼음 둔덕이 생겨 물 긷는 이들을 더욱 힘들게 했다.
위의 사진과 같은 모습은 아니지만 나 어릴적에도 물을 뜨러 다녔다.
수도가 끊겨서 라기 보다 식수용으로 물을 공급하는 수도 시설이 있어
새마을 금고에서 파는 100원짜리 표를 가지고 가면
10리터 정도의 약수통 한가득 물을 담아 올수 있었다.
9평 정도의 공간은 세면장처럼 꾸며져 있었고, 입구쪽에 자리 잡은 관리소 할아버지는
항상 꼬장꼬장한 목소리로 절약 또 절약을 외쳐댔다.
"물 틀어 놓고 물통 씻지마라 안카나!!!!!!!!"
"하루에 다섯통 이상은 안됩니다이!!!"
"거 물 넘친다..넘친다!! 넘친다!!!!!!!!"
지금도 꿈에 나올까 두려운 할아버지의 새된 음성.
넘친다!!!
슬레이트 지붕 바람에 날아갈까 오늘도 순이네 천장을 사수하기 위해 나타난 나비.
동네 전봇대란 전봇대에는 죄다 오줌발을 갈겨 놓고 보는 똥 개들.
그러다 여름이 되면 개체수가 확 줄어드는....거역할수 없는 운명을 타고난 가여운 것들.
추억에 묻힌 강냉이 장수.
현재도 시골 시장이나 작은 행사장에서 활동하는 분들이 계시지만
그 옛날의 구성진 맛을 찾아보기엔 힘들다.
"뻥~이요!!!"
하면 펑 터지는 굉음과 함께 뿌연 연기가 시야를 가득 메운다.
압력을 이기지 못하고 철망 밖으로 튀어나온 파편에
신나라~땅에 떨어진 강냉이를 주워 먹던 어린시절.
변변한 과자 없던 그때에는 뻥튀기와 강냉이가 유일한 주전부리였는데
요즘에는 배부른자들의 다이어트용으로 각광받고 있다는 점이 참 아이러니 하다.
돌담에 새겨진 '빵구'에 미소 짓고, 그것을 행위로 표현한 마네킹의 모습에 크게 웃어본다.
벽면 한쪽을 차지하고 있던 책방 전시물.
희뿌연 먼지를 닦아내어 가운데만 선명해진 창가.
그런 소소한 부분까지 완벽하게 재연한 전시장측의 연출에 혀를 내둘렀다.
나보다 연세가 많은 만화책들은 두줄의 검은 고무줄에 고정되어 있고,
게중 하나를 집어 들어 살펴보니
'한국도서잡지주간신문윤리위원회의심의를마친책'
이라는 문구가 날 호흡곤란의 상태로 인도하였다.
만화는 현대의 기준으로 잘그렸다기 보다 익살스런 그림체로
내용 또한 어렵기 보다 가볍고 교훈적인 내용이 주를 이루었다.
송현 상회.
동네마다 하나씩은 끼고 있는 일명 구멍가게라 불리우는 잡화점이다.
규모는 아담하지만 없는게 없었던 가게는 낮에는 꼬맹이들이 문턱이 닿도록 들락거리고
저녁이 되면 난닝구 차림의 할아버지들이 소주니 막걸리니 사들고 동네 어귀에 모여 술판을 벌였다.
간장 한병 살돈도 간당했던 그 시절엔 외상 장부 시스템이 상당히 발달하여
현대의 신용카드 못지 않게 돈 없이도 거래가 이루어지곤 했는데,
그것도 누구네 엄마, 누구네 아들로 통하던 그 시절이었기에 가능했던 일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납세로 자립 경제를 도모하던 1960년대의 담배 '풍년초', '환희', '아리랑', '금잔디'
요즘의 던힐이니 말보루, 레종이니 하는 외국명의 상호가 참 뜬금없다고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나무로 만든 선반에 전시되어 있는 각종 잡화들.
가장 먼저 눈에 띤것은 다름아닌 비닐 우산이였다.
유치원 시절.
비가 오면 어디선가 우산장수가 짱가 처럼 나타나
"튼튼한 우산 오백원~~"
하며 말도 안되는 마케팅을 펼치곤 했다.
바람이 조금만 불어도 대나무 살이 휘어지고, 빗방울이 좀 거세진다 싶으면
어김없이 우산은 샤워기의 형태로 변모하였다.
그래도 투둑하고 비닐에 떨어지는 빗소리가 마냥 듣기 좋아
쉽게 고장나 버리는 비닐 우산임을 알고서도, 비만 오면 우산장수부터 찾았다.
비닐우산은 이제 세월의 뒷켠으로 물러난 추억속 물건이 되버렸지만,
사실 그렇게 보면 지금의 당연한 것들도 10년 20년 뒤에는
추억이란 이름으로 묻어가는게 세월의 묘미가 아닐까 하고 위로해본다.
종이딱지와 고무풍선.
길게 찢어먹는 쫀드기와 라면땅 과자 뽀빠이.
유치원 시절. 할머니 동전 지갑에서 10원씩 꾸준히 빼돌려 100원이 되면
동네 슈퍼에 달려가 아폴로를 색깔별로 사고 그래도 돈이 남으면
새끼 손가락만한 설탕을 사서 왠종일 쪽자 만드느라 혼자 바빴다.
서울에 와서야 뽑기 또는 달고나 라는 명칭으로 불리운다는 것을 알았는데
내가 살던 부산의 동네에서는 그것을 "쪽짜"라 불렀다.
뭔가 야릇하지 않은가............쪽~짜~베이베...
연탄불에 다닥다닥 모여 앉아 시커먼 국자 안에 설탕을 들이 붓고
나무 젓가락으로 한참을 돌리면 찐득하게 녹은 설탕물이 되는데,
여기서 하이라이트는 얼마나 적정량의 소다로 멋지게 쪽짜를 부풀리냐 하는거였다.
적게 넣으면 잘 부풀지 않고, 많이 넣으면 맛이 써진다.
그렇다. 쪽짜는 단순한 놀이가 아니다.
과학이다!!!
보는것만으로도 상당히 김 빠진 기분을 가지게 하는 코라~
그때 그 시절의 발로 그린 포스터와 군더더기 없는 문구들.
"인분을 준 채소를 먹으면 회충, 12지장충에 걸린다!"
사람 똥은 만물을 해롭게 하니 인간은 지구에서 괴멸하라는 뜻인가.
썩은자는 유흥가로~애국자는 일터로~ 낮에는 성실한 애국자로.....
밤이되면 진정한 썩은자로 거듭나는 또라이.
극단적인 표어들은 날 짜릿하게 만든다. 날 좀 더 막 대해! 베이베!
'~읍니다.'의 아련한 추억.....
손으로 직접 그려 인쇄한 당시의 포스터들이 허름한 시멘트 벽을 띄엄띄엄 메우고 있었다.
"하숙생-상당히 음험한 기운을 내포하고 있는 제목."
"적심자를 도와 고단을...............덜자는 건지 달자는 건지 도통 글자를 분간할수 없는 포스터"
<아모레 화장품 - 여행상인과 새 거래 (이광환 일기 1945~1970)>
1967년 5월 17일 - 지부장의 조카딸(판매원)은 집에 오라고 하여도 오지 않으므로,
오늘 새로 딴 여자상인(판매원)을 길에서 만나 거래를 트고,
우선 3개월 월부로 골드크림 1통(250원)과 스킨로션 1병(200원)을 들여 놓았다.
<축음기와 대중가요, 만담 레코드판>
설명 - 1960년대. 축음기와 라디오를 통한 대중가요 가수들의 레코드와 만담이
한시대를 풍미했던 시절이었다. 축음기를 실제로 본건 처음이였다.
언제던가. 나이 지긋하신 남성출연자 분이 옛 추억담으로 야전(야외전축)에 빽판하나 올려 놓고
해 저문 바닷가에 자리 잡으면, 여자들이 저절로 꼬였다는 우스갯소리가 떠오른다.
동시에 배바지를 입고 광끼 어린 모습으로 닭장 고고 댄스를 추는 나도 떠올라서 순간 섬짓 했다.
전시되어 있는 '산아제한 기구'는 1972년 12월 제조된것으로 확인 되며
정부에서 무상으로 공급하니 팔지 말라 명시 되어 있다.
정부의 방해 공작에도, 일제의 고무 풍선에도 굴하지 않고 태어난 1970년도 초의 아가들아!!
당신들이 진정한 챔피언입니다!!
아빠의 말로는 잡은 쥐의 꼬리를 잘라서 줄에 엮은 뒤 학교에 가서 검사를 맡았다 한다.
쥐꼬리로 가득한 교실안 풍경이 어렵지 않게 상상이 가는게...꼬리뼈가 영 간질간질하다. (나 쥐띠)
전시장에 마련된 그림일기 코너.
시간적 여유만 있었더라면 피카소가 부럽지 않을 작품을 남겼을텐데,
폐장 5분전이라고 눈치 주는 관리인의 매정함에 황금색 크레파스만 죄다 훔쳐왔다.
유치원때의 도벽이 여직 고쳐지지 않았어.
그래 난 또라이. 규범을 모르는 여자지.
꼬맹이들이 그려놓은 그림의 8분이 1이 '물지게를 든 내 모습' 이였고,
일기의 주된 내용은
"박물관에 와서 옛날 사람들을 보니 참 좋고 신기했다."
라는 뭐가 좋았고 뭐가 신기한지, 행방불명된 주어로 이뤄진 내용이 대다수 였다.
정말 쓰기 싫은데 억지로 꾸며 적은 개학전의 일기장 같았다고나 할까.
자라나는 꿈나무들. 자꾸 획일화 되어 갈텐가!!
그 밥에 그나물 마냥....꿈나물에서 안주 할텐가!!
옛 시절을 떠올리게 하는 여러가지 추억의 장난감들을 판매하고 있는 기념품 매장.
사진 찍을 자세를 취하니 번개같이 사라지신 주인장 아저씨의 날렵함에
그가 이 어두운 전시장에서 썩기엔 아까운 인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와 함께 절도의 세계로 떠나지 않으시렵니까?
가까이에서 이것저것 구경해 봤지만,
추억에 젖어 사봤자 금세 쓰레기통으로 직행할것이 뻔해 아쉬움을 뒤로 하고 걸음을 옮겼다.
닥종이로 재연한 달동네 사람들.
'우와 귀엽다~귀엽다~' 를 연발하는 주영이는 유리창에 따개비처럼 들러붙어
지문 가득한 유리에 얼굴을 부벼댔다.
질 나쁜 미국 싸이코 스릴러 무비를 보는듯 하였다.
주영이 발작하기 전에 미리 사진을 찍어두어서 다행이라는 생각과 함께
바닥에 널부러져 있는 주영의 동생을 끌고 폐문으로 향했다.
(펌 네이버 또라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