율곡 이이의 합격기록... 이분은 신이셨다

면죄자 작성일 11.01.03 19:4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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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역사 500년간 최고의 천재를 꼽으라면 단연 율곡(栗谷) 이이(李珥)를 들 수 있다.
 
율곡은 ‘구도장원공’(九度壯元公)이라는 별명을 지녔는데, 이는 과거시험에서 9번 장원급제했다는 의미다.

한번도 급제하기 쉽지 않은 시험이 과거시험이고, 여기서 장원급제는 그야말로 하늘의 별따기인데, 9번이나 장원급제했으니 가히 조선 500년 역사의 최고 천재라 할 수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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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율곡이 외할머니등에 업힌 채 석류의 모양을 보고 시를 읊은 나이가 세살이었다. 오죽헌엔 지금도 석류나무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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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태극팔괘. 율곡은 선조에게 태극도설을 지어 바치기도 했다.    

 

 

조선 역사 500년간 최고의 천재를 꼽으라면 단연 율곡(栗谷) 이이(李珥)를 들 수 있다. 율곡은 ‘구도장원공’(九度壯元公)이라는 별명을 지녔는데, 이는 과거시험에서 9번 장원급제했다는 의미다. 한번도 급제하기 쉽지 않은 시험이 과거시험이고, 여기서 장원급제는 그야말로 하늘의 별따기인데, 9번이나 장원급제했으니 가히 조선 500년 역사의 최고 천재라 할 수있을 것이다.
 
◇ 과거답안지 ‘천도책’으로 중국까지 명성
율곡은 강릉 오죽헌에서 출생해 자라다가 6세 때에 서울로 올라와 10년간 살았다. 어릴 때부터 총명하여 신동으로 불렸다. 13세이던 1548년(명종 3년) 진사초시에 합격하고, 19세에 금강산에 들어가 불교를 공부하다가, 다음해 하산하여 성리학에 전념했다.

하산 후 강릉 외가에서 새로이 학문에 정진한 지 1년이 되던 1556년 겨울, 율곡의 나이 스물두 살 때 한성 별시(別試)문과에서 ‘천도책(天道策)’으로 장원급제했다. 율곡이 훗날 ‘구도장원공’이라는 장안의 찬사를 받게 된 *점이 바로 이때의 장원급제였다.

천도책은 음양이라는 기(氣)의 작용으로 천지조화를 설명한 것으로 율곡의 자연 철학에 대한 근본 사상이 잘 나타나 있다. 당시 시험관이었던 정사룡과 양응정은 율곡의 답안을 채점하면서, 자신들은 시험 문제를 만드는 데도 여러 날을 고심했건만 이 젊은이는 짧은 기간 내에 이토록 놀라운 내용의 글을 지었다면서, 실로 천재가 나타났다고 감탄했다 한다. 이 천도책은 중국에까지 널리 알려져서 율곡이 47세 때 명나라 사신을 접대하게 됐을 때, 명나라 사신인 황홍헌(黃弘軒)과 왕경민(王敬敏) 등은 율곡에게 ‘선생님’이라고 예를 표했다.

스물여섯 되던 해 5월에는 부친상을 당하여 파주 선산에서 3년 동안 시묘를 하며 보냈고, 상복을 벗은 이듬해 명종 재위 19년 7월과 8월에는 소과와 대과에 연속으로 장원급제했다.
22세때에 별시에서 천도책(天道策)을 지어 장원하고, 이 때부터 29세에 응시한 문과 전시(殿試)에 이르기까지 아홉 차례의 과거에 모두 장원하여 ‘구도장원공(九度壯元公)’이라 일컬어졌다.

율곡의 천재성은 3살 때 석류가 벌어진 모양을 보고 석류피리쇄홍주(石榴皮裏碎紅珠 석류껍질 안에 들어 있는 씨 모양이 붉은 구슬처럼 빛나는구나)라고 읊었다는 데서 드러난다. 남들이 말을 배울 시기에 율곡은 이미 글까지 깨쳤던 것이다.
 
◇ 훈구세력 사라지고 사림 세력 부상하던 시기
율곡의 사상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당시 사회상을 알아볼 필요가 있는데, 당시 조선은 새로운 사회적 분위기가 움트려하던 중이었다. 율곡이 관직생활을 시작한 명종 말~선조 초는 명종대에 정치를 좌우한 척신이 제거되고 새로운 정치세력인 사림(士林)이 부상한 정치적 변동기였다.

율곡은 16세기의 조선 사회를, 건국초의 기강이 무너지는 ‘중쇠기(中衰期)’라고 진단했다. 따라서 율곡은 국가 재정비를 위해 일대 혁신이 필요하다고 보고 ‘동호문답(東胡問答)’ ‘만언봉사(萬言奉事)’ 등의 저술을 통해 국정 개혁안을 선조에게 제시했다. 이를 율곡의 경장론(更張論)이라 한다.

율곡은 시대가 바뀌면 현실에 맞게 제도를 개혁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율곡은 국가 통치체제 정비를 통한 기강 확립, 공안(貢案)과 군정(軍政)등 부세(賦稅)제도의 개혁을 통한 백성의 고통을 덜어주어야 한다는 것 등을 주장했다. 그러나 당시 드러나는 신분사회의 모순에 대해서는 침묵하고 있었다. 아무리 천재라도 당시의 사회상을 뛰어넘기는 힘든 법. 이 때문에 율곡은 서원향약(西原鄕約) 해주향약(海州鄕約) 등을 통해 사림이 꿈꾸는 이상적인 향촌사회건설에는 관심을 기울였지만 사회 전체적인 모순을 꿰뚫지는 못했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 이기이원론적일원론으로 성리학 집대성
대개 천재들은 자기 이전의 사상을 집대성하는 업적을 보인다.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도 결국은 그 당시까지 알려진 양자역학 등 물리학 이론을 집대성한 것이다. 수학 최고의 난제로 불렸던 ‘페르마의 정리’를 증명한 와일즈교수도 그 이전까지의 수학이론을 집대성한 것이다. 기존이론과 학설을 집대성하려면 본인이 일단 학문적 자세를 지켜야한다.
 
율곡 이전의 성리학은 주기론(主氣論)과 주리론(主理論)으로 나뉜다. 주기론은 서경덕, 기대승 등이 주장했고 주리론은 퇴계 이황이 주장했다. 율곡은 이를 모두 비판하면서 집대성해 이기이원론적일원론을 제창했는데, 이는 실학과도 일부 맞닿아있고 구한말 대한제국 시기 사회개혁론으로 계승된다.

퇴계는 이기론에 있어서 기뿐만 아니라 이도 발한다는 이기호발설(理氣互發設)을 주장했다. 율곡은 이발을 인정하지 않고 ‘발하는 것은 기(氣)이며 발하는 까닭이 이(理)’라고 봤다. 율곡은 이와 기는 논리적으로는 구별할 수 있지만 현실적으로 분리시킬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봤다. 모든 사물에 있어 이는 기의 주재(主宰)역할을 하고, 기는 이의 재료가 된다는 점에서 양자를 불리(不離)의 관계에서 파악하고, 하나이며 둘이고 둘이면서 하나인 이들의 관계를 ‘이기지묘(理氣之妙)’라고 표현했다.

결국 율곡의 이기론은 다양한 현상(氣)속에 보편적 원리(理)가 존재한다는 것이다. 율곡은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변화하고 제한적인 기(氣局) 속에는 항상 보편적 이(理通)가 존재한다는 ‘이통기국설(理通氣局說)’을 제시했다.
 
◇ 주요관직인 청요직(淸要職) 두루 섭렵
율곡의 스승에 대해서는 뚜렷한 기록이 없는데, 일부에서는 율곡의 학자적 소양은 어머니 신사임당에게서 모두 나온 것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율곡이 퇴계 이황(1501~1570)을 만난 것은 23세 때 성주 처가에서 강릉 외가로 가는 도중이었다. 이 때 퇴계는 이미 58세였다. 젊은 율곡과 원숙한 대학자간의 만남은 짧았지만, 율곡에게 많은 영향을 끼쳤다. 이 때의 인연으로 두 사람은 시를 주고받고, 학문에 대해서도 서로 강론하며 후에 편지도 주고받았다. 율곡은 퇴계를 스승처럼 존경했으며, 퇴계는 율곡을 만난 후 여러 사람에게 ‘율곡이야 말로 후생가외(後生可畏 후배들의 약진이 두려울 정도라는 뜻)’라고 칭찬했다.

율곡은 29세에 문과와 명경과에 장원급제한 후 호조좌랑으로 벼슬을 시작, 40세까지 예조좌랑, 이조좌랑, 홍문관 교리, 청주목사, 우부승지, 황해도 관찰사, 홍문관 부제학 등을 지냈다. 41세 이후 은퇴와 관직제수를 거듭했는데, 대사헌, 호조판서, 이조판서, 형조판서, 병조판서 등을 역임했다. 1583년 4월 48세에 선조와의 경연석상에서 유명한 10만양병설을 건의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 임란예견 화석정 전설은 모두 낭설
율곡의 10만양병론에 대해서는 임란을 예언했다는 둥, 율곡이 은퇴한 뒤 선조의 피난길을 위해 정자에 매일 기름을 먹였다가 나중 횃불처럼 사용했다는 말들이 있지만 이는 모두 후세인들이 신격화를 위해 지어낸 낭설이라는 것이 정설이다. 율곡의 10만양병론은 서애 유성룡도 당시 반대를 할 정도로 조정에서는 먹혀들지 않았다.
 
사실, 당시 조선은 10만은커녕 1만의 병력도 양성할 체계가 갖춰지지 않았다고 보는 것이 정확할 것이다. 더욱이 율곡이 10만 양병을 주장한 때가 병조판서를 지내고 대사헌으로 있을 때였는데, 대부분의 군신들은 병조판서로 있을 때는 침묵하다가 나중에 10만 양병 운운하는 율곡을 호되게 비판하기도 했다.

율곡에 대한 또 다른 신화의 하나인 파주 임진강 가에 있는 화석정 역시 사실이 아니다. 율곡은 임금이 북으로 피난 갈 것을 미리 알고, 이 정자에다가 기름을 먹여서 폭우 속에서도 훨훨 잘 타게 해 두었던 것이, 마침내 임진란을 만나 크게 효과를 보았다는 것도낭설이다.
그 당시 임금을 모시고 가던 서애 유성룡이 쓴 ‘징비록’은

「…나루를 건너서니 이미 날이 어두워 앞을 분간하기 어렵다. 임진강 남쪽 기슭에 옛 승청(丞廳)이 있는데, 혹시 왜적이 거기 있는 재목을 가지고 뗏목을 매어 건너올까 해서 임금의 명령으로 불을 붙여 태우니 그 불빛이 강 북쪽까지 비쳐 길을 찾아 갈 수가 있었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선조 수정실록 등 여러 기록에도 똑같은 기사들이 나온다. 지형 상으로도 동파(東坡)로 건너가는 임진강 나루터와 율곡리에 있는 화석정과는 서로 떨어져 있어 상관없는 곳이다.

미인박명이라고, 율곡은 만 49세에 숨졌는데 만약 율곡이 10년만 더 살다 갔다면 많은 것들이 바뀌었을 것이다. 역사에 가정은 없지만 69세까지 산 퇴계의 문하에는 기라성 같은 인재들이 넘쳤지만, 율곡 사후에는 빼어난 인재가 없었던 것도 모두 율곡의 너무 이른 죽음 때문이라는 주장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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