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 말 명장 이성계(1) - 동북면을 평정하다

맹장곽공칙 작성일 14.03.17 00:33: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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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계는 고려말 제일의 명장으로, 북방과 남방을 가릴것 없이 고려의 전 영토에서 전쟁을 벌여 당시 동아시아에서 고려가 상대할 수 있었던 모든 적과 싸워 승리를 했던 경력의 지휘관입니다. 보통 일반적으로 인식이 되는 것은 위화도 회군 직후부터 태종의 왕자의 난까지의 이미지이기에, 그런 무장으로서의 경력은 그다지 주목을 받지 못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또한, 무엇보다 일국의 왕인데다 그 중에서도 왕조의 정통성과 직결되는 개국 군주이기에, 그런 이성계의 능력을 포장하기 위해 기록을 과장했다는 의혹을 제기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과장으로 기록을 조작했다쳐도)그렇게 이성계가 기록을 남길 수 있는 위치에 서게 한 것이 다름아닌 무장으로서의 경력과 공으로 인한 입지라는것을 생각하면, 실제로 이성계의 전공과 능력은 대단했다고 보는것또한 맞을 수 있을 것입니다.

고려 조정에서의 이성계의 커리어는 1356년입니다. 그 전해인 1355년에 오로사불화(吾魯思不花) 즉 이후에 환조가 되는 아버지 이자춘이 고려 조정에 내알하였지요. 이때가 이성계 나이 22세로, 젊은이의 용력이 절정에 달할 시점이었습니다. 실제로 격구를 해서 놀라운 재주를 부려 주위 사람들이 모두 기겁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당분간 전란이 없었기에, 이성계는 별다른 두각을 나타내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이성계가 본격적인 무장으로서의 입지를 쌓기 시작한것은 무려 5년아니 지난 1361년 부터였습니다. 독로강(禿魯江)의 만호(萬戶) 박의(朴儀)라는 자가 반란을 일으킨게 문제였습니다.

박의는 천호(千戶)였던 임자부(任子富)와 김천룡(金天龍)등을 살해하였기에 고려 조정에서는 형부상서 김진(金縝)을 보내 토벌하게 했는데, 별로 싸움이 좋지가 못했던 모양입니다. 그때 이성계는 통의 대부(通議大夫) 금오위 상장군(金吾衛上將軍) 동북면 상만호(東北面上萬戶)가 되어 김란을 지원하러 떠났습니다. 상만호는 순금만호부에서 두번째 정도 되는 자리인데, 순금만호부가 "도적을 막고 반란을 금하는" 관청이라 박의의 난을 진압하러 간건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이때 이성계가 이끈 병력은 1천5백여명이었다고 합니다.

이성계가 박의의 난을 막았느냐, 하는건 어쨰 조선왕조실록에 보면 "그곳에 가니, 박의는 이미 그 무리를 거느리고 도망하여 강계(江界 평안북도라고 합니다. 독로강이 평안북도 옆의 소백산에서 발원한다고..)로 도망하였으나, 다 잡아서 목을 베었다" 고 좀 모호하게 되어있는데, 이 문맥만 보면 이성계가 도착했을무렵 박의의 반란은 거진 실패하여 마침 도착한 이성계가 숟가락만 엎은 모양이 됩니다. 이성계보다 먼저 박의와 싸운 김진에 대해서는 "능히 제어하지 못했다" 라고 역시 애매한 표현인데, "실패했다"는 소리는 없으니 실제적으로 김진이 진압했을수도 있겠습니다.



 

 홍건적의 침입

문제는 박의의 변란 따위가 아니었습니다. 1361년의 겨울에 이르면 저 북쪽에서 무려 20만명의 홍건적이 압록강을 건너서 고려로 쳐들어오고 있었던 것입니다. 홍건적은 "우리 군대가 무려 110만임 ㅇㅇ" 하고 으름장을 놓았는데, 그 뒤의 조선왕조실록 기록을 보면 밑도 끝도 없이 이성계가 적의 왕 원수(王元帥) 이하 백여 명의 목을 베고 한 명을 사로잡아서 왕에게 바쳤다고 나옵니다. 뭐 어쩌다가 싸웠는지 그런것도 없이 그냥 죽였다고만 나옵니다. 왕원수라는것이 "홍건적군의 총대장" 이라는 소리가 아니라 성이 왕씨고 그냥 왕원수로 불리었던 모양인데....무슨 별명이 그러느냐고 말할 수 있지만, 홍건적군이 도적때다 보니 다른 지휘관중에 한명은 아예 관선생(關先生)이고 다른 사람은 왕원수 비슷하게 주원수(朱元帥)라는 사람도 있습니다.

홍건적의 대군은 파죽지세로 밀고 내려왔고, 11월 무렵 결국 공민왕은 수도를 버리고 경상북도로 달아났습니다. 11월 24일 되면, 홍건적은 수도 개경을 함락해서 궁궐을 불태우는 등 만행을 부렸는데, 도적 무리라 보니 별다른 작전이 없어서인지 개경에서 2개월만 머물며 전혀 별다른 움직임을 보여주지 않았습니다.

그 귀중한 시간 동안 고려는 급히 군사를 모집했는데, 노비였던 자들까지 싹싹 긁어모아 20만의 대군을 만들어냈습니다. 어차피 적군도 도적때니 병사 질이 중요한게 아니고....여하간 정세운을 총병관으로 삼아 개경을 포위, 대담하게도 적의 주력을 바로 공격해들어갔습니다. 이때 이성계도 친병 2천명을 거느리고 참전, 앞장서서 성으로 들어가며 적을 대파했습니다. 조선왕조실록에는 사유와 관선생등 적의 우두머리들이 그냥 죽었다고 나오는데, 고려 사절요에서는 무려 이성계가 사유와 관선생을 베었다고 나옵니다.

고려군은 쥐가 구석에 몰리면 고양이를 무는 법칙때문에 일부러 성문을 열어주어서 홍건적이 도망치게 내버려 두었습니다. 한번은 포위중에 적이 달아나자 이성계가 곧바로 달려가서 적을 무찔렀는데, 복잡한 싸움끝에 이성계의 뒤에서 적병이 창을 내찌르는데 오른쪽 귀를 찌를 정도라 엄청나게 다급했습니다만, 직접 베고 위기를 넘어갔습니다. ?前七八人인데 조선왕조실록에서는 7,8명을 (직접)베었다고 하고, <U>http://osmstar.com.ne.kr/goreosajelo/kframe1.htm</U> 여기서는 78명을 베었다 고 하네요.

여기까지 이성계는 좋은 모습을 보이고 있었지만, 아직 단독으로 사령관으로서의 뛰어난 업적을 보여주진 못했습니다. 그러나 전란이 끊임없이 닥치면서 좋은 기회가 왔는데, 홍건적의 난이 간신히 진압되자마자 2월 경, 북방에서 또다른 적이 쳐들어왔습니다. 이번엔 홍건적보단 숫자가 적지만 군대의 질은 비할바 없는 상대였는데, 나하추의 공격이었습니다.



 

 나하추와의 대혈투

나하추는 일종의 원나라 군벌 세력입니다. 일전에 명나라의 주원장이 세력을 키우면서 태평이란 지역을 점거한적이 있는데, 그곳에 있던 나하추를 주원장이 사로잡았다가 북방으로 보냈는데, 나하추는 당초에 주원장에게 충성을 하면서 요동에서 세력을 쌓다가 원나라가 북방으로 도주하자 자립해버렸습니다.

나하추를 끌고 온 사람은 조소생(趙小生)이었습니다. 조소생은 쌍성총관부의 총관으로, 고려의 공민왕이 이 지역의 수복을 시도하자 여진으로 도망갔다가, 이번에 나하추등의 다른 세력을 끌어들인 것이었습니다.

나하추의 군대의 규모는 정확하게 나오질 않으나, "수만"이라는 언급이 있는데, 동북면 도지휘사 정휘(鄭暉)는 당초에 나하추와 싸웠으나 계속 패전하였습니다.

이때 고려는 아직 홍건적과의 싸움이 끝나지 않았습니다. 일단 개경은 수복하긴 했는데, 도주하는 홍건적을을 도처에서 계속 공격했던 것이죠. 그런 혼란 속에 고려 조정은 4월 무렵에야 이성계를 상호군(上護軍) 동북면 병마사(東北面兵馬使)에 임명해서 보낼 준비를 합니다. 이 과정이 "고려사절요"에서는 그냥 "태조를 보냈다" 는데, 조선왕조실록에는 나하추에게 패배한 정휘가 "이성계를 보낼것은 요청"해서 보냈다고 합니다.

7월 무렵에 나하추는 조소생등과 함께 수만의 군대를 이끌고 다시 와 진을 치고, 먼저 1천여명의 병사를 선봉으로 삼아 내보냈습니다. 그런데 이 병력이 덕산동이라는곳에서 이성계와 마주칩니다.

갑작스러운 전투에 나하추의 선봉대는 달아났고, 이성계는 함관령과 차유령의 두 고개를 넘어 맹렬히 추격, 적을 거의 섬멸했는데 워낙에 갑작스러운지라 나하추의 군대는 무기와 식량도 버리고 달아나야했습니다. 이성계는 승리 후에 우선 물러나서 답상곡이라는 곳에 진영을 쳤습니다.

아직 달단동이라는 곳에서 움직이지 않았던 나하추의 본대는 이 소식을 들었고, 분노한 나하추는 군대를 움직여 이성계가 전투를 벌였던 덕산동으로 움직였으나, 고려군의 야습에 크게 당해서 다시 본래 있던 달단동으로 돌아가고, 이성계는 다시 진영을 사음동이라는곳으로 옮겼습니다. 이성계나 나하추나 우선 바로 전면전을 벌이는것은 피하고 상황을 재고 있었습니다.

대치가 이어지던중, 이성계는 척후병의 보고에 의해서 많은 숫자의 나하추군이 나무를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내가 병법을 좀 보았는데, 마땅히 약한 적을 먼저 치는것이라더군!"

이성계는 즉시 기습을 하여 나무를 베던 적군을 섬멸하고, 다시 600명의 기병을 선발하여 적군을 급습했습니다.

이때 이색적인 기록이 있는데, 이성계가 기병 10기을 거느리고 적의 비장을 직접 죽였던 것입니다. 이성계가 처음 이 지역에 도착해서 상황을 살펴보면서 물어본적이 있었습니다.

"대체 싸우기만 하면 거푸 지는 원인이 무엇인가?"

"싸움이 벌어지는 한창 중에 적진에서 쇠갑옷에 붉은 기꼬리를 장식한 장수가 창을 들고 튀어나오는데, 병사들이 겁을 먹고 도망을 쳐서 싸울수가 없습니다."

이때 이성계는 적을 공격하다 일부러 힘에 부치는 듯 퇴각을 했는데, 적진에서도 들은바가 있었던 장수가 공을 탐냈는지 튀어 나오는 것이었습니다. 적장은 창을 내질렀는데 이성계는 안장에 의지해서 이를 피했고, 무거운 창을 헛지르면서 적장도 굴러떨어져버렸는데, 이성계는 이틈에 화살로 그 장수를 쏘아죽였습니다. 장수가 죽자 나하추군은 금세 도망을 쳐버렸고, 이성계는 나하추의 본대가 진을 친곳까지 도달했지만 숫자가 적고, 밤이 오는 통에 별수없이 퇴각해야 했습니다.

무협지 같은 기록은 계속 이어지는데, 이 날 이성계의 무용을 듣고 나하추의 아내가 나하추에게 간언을 하는 것입니다.

"그대가 세상을 이곳저곳 다닌지가 오래에요. 그런데 저런 장수를 본 적이 있습니까? 차라리 피하는것이 낫지 않겠어요?"

조선왕조실록에는 없지만 고려사절요에는 여기에 더해서 나하추의 누이가 이성계를 보고 탄복해서 "저런 사람이 없겠다" 고 했다는 기록까지 있습니다.....진짜 무협소설도 아니고....

싸움은 다시 소강상태로 접어들었고, 이성계는 대담하게 나하추가 진을 치고 있는 달단동까지 군대를 움직여서 양군은 바로 대치하게 되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나하추는 대화를 요구하여 이성계와 나하추는 약간의 호위병만을 이끌고 만나게 됩니다.

"이보시오. 내가 이곳에 처음 온것은 사유, 관선생등의 무리(홍건적)을 잡으려고 뒤쫒아온것이지, 귀국을 침범하려 온것은 아니외다. 지금 나는 계속 패전을 해서 병사를 1만이나 잃었고 비장도 여러 사람 죽었소이다. 내 마땅히 싸움을 그만두고 다만 명령대로 따르겠소이다."

그런데 이성계가 판단하기에는 형세가 불리해서 항복하겠다는 군대가, 오히려 사기가 왕성했기에 아무래도 나하추가 무슨 수작을 부리는것으로 판단을 하였습니다.

무협지 같은 기록은 또 이어집니다...나하추의 말을 믿지 않은 이성계는 그 자리에서 곧바로 화살을 쏘아 나하추의 부장을 죽여버렸고, 그러면서 나하추의 항복을 요구했습니다. 그러면서 이번엔 나하추의 말까지 쏘아 죽여대는 것입니다. 나하추는 기겁해서 말을 바꾸어서 탔는데, 그러자 이번에는 바꾸어 탄 말까지 쏘아 죽였습니다.

이에 한참 동안 크게 싸우니, 서로 승부(勝負)가 있었다

이 말을 보면 이성계가 나하추와 일기토 를 했다고 봐도 무방합니다. 이성계는 나하추를 추격했고, 나하추는 기겁해서 소리쳤습니다.

"이 만호여, 어찌 우리 두 장수가 원수 진일이 없는데 어찌 이리 핍박하시오?"

그런데 이성계는 듣지도 않고 활을 쏘아서 나하추의 말을 또 쏘고, 나하추는 옆에 있는 병사의 말을 빌려타서 간신히 도주에 성공했다고 합니다....

이런 기록은 계~속 이어집니다. 나하추를 추격하던 이성계는 날이 어두워지자 우선 퇴각을 했습니다. 양군이 진영을 친곳은 산길로 여러 길로 되어있고 구불구불했는데, 높은곳에 있던 이성계는 낮은곳에서 누군가가 자신을 부르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환자(宦者), 즉 환관이었던 이파라실(李波羅實)이 부르는 소리였습니다.

"사람 살려주시오! 사람을 살려주시오!"

상황을 내려다보니 갑옷을 입은 두 명의 적군이 이파라실을 쫒아 거의 죽이게 되었기에, 이 두명을 활로 쏘아 죽였습니다. 그 다음이 가관인데, 혼자서 적군 20여명을 순삭 시키고는, 적군을 쫒아내었습니다. 그리고는 적병이 창을 휘두르자 말에서 떨어지듯이 누워서 피하고는, 말에 거꾸로 누워있는 상태에서 적병을 죽이고, 적병이 화살을 쏘자 말 위에서 서서 말등에 올라 겨드랑이 사이로 화살을 피하고 다시 화살을 쏘아 적의 무릎을 맞추었습니다.

안끝납니다. 강가로 간 이성계는 이번에는 온몸에 갑주를 입은데다 얼굴에도 투구에 턱갑옷까지 쓴 적병을 보았는데 화살을 맞출 방법이 없었습니다. 그러자 이성계는 일부러 그 적병의 말을 쏘고, 말이 고통스러워하여 날뛰자 적병이 말의 고삐를 당기느라 입이 벌려지는 틈을 타 그 입 안에 화살을 쏘아 넣어 죽였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이성계는 철기병으로 적군을 다진고기로 만들듯이 공격했습니다. 적군은 고려군에 맞아죽고, 자기들끼리 엉키면서 죽고 난리통이었고 간신히 달아나는것만 성공합니다.

한바탕 대승을 거둔 이성계는 정주(定州)에서 진영을 치고 병사들을 며칠동안 푹 쉬게 한다음 다시 나하추를 잡으러 떠났습니다. 이성계는 병사를 셋으로 나누어 진격시키고 자신은 중군을 이끌었는데, 마침 또 함흥평야에서 나하추를 바로 만나게 됩니다.

서로가 대치한 가운데, 또 다시 시작되는 무협지의 기록으로는 이성계가 단기필마로 적군의 앞으로 돌진해 적진을 살피자, 나하추의 군대에서는 세명의 장군이 이성계를 잡으러 뛰어나왔습니다. 이성계는 마치 당해낼수 없다는듯이 달아났는데, 갑자기 말을 오른편으로 돌렸고 적의 장수들은 미처 돌진하는 말을 제어하지 못해 계속 앞으로 달려갔습니다. 적의 뒤를 잡은 이성계는 화살을 거푸 쏘았고, 적장들은 모두 죽었다고 합니다-_-

그러면서 사방에서 복병들이 공격을 하자 나하추는 도저히 이거 안되겠다 싶어서 달아났고, 싸울 마음도 싹 사라져 사람을 보내어 좋은 말과 비고(?鼓)등을 바치면서 물러났습니다. 나하추는 돌아가면서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이자춘(이성계의 아버지)이 원나라 조정에서 조회할때, 나에게 "재주 있는 아들이 있다"고 자랑하더니 과연 거짓이 아닌걸!"

이러면서 나하추로 동북면의 난은 완전히 평정되었습니다.

 

 

 

 

최유 - 덕흥군과의 전투

 

숨가쁘던 1361년-1362년이 지나고, 2년이 지났을 무렵 또다른 변란이 북쪽에서 도착했습니다. 일전에 공민왕은 개혁의 일환으로 기씨 일족을 주살했는데, 이것이 원나라에 있던 기황후의 심기를 건드린 것입니다.

그런 기황후에게 붙어있던 인물이 최유였습니다. 최유는 전형적인 매국노로 고려인이었지만 원나라에 알랑거리며 권세를 얻었고, 여자를 마구 겁탈하고 다니는 나쁜 놈이었습니다. 또한 원나라의 명령으로 고려에서 군사를 뜯어가기 위해 행패를 부렸는데, 공민왕은 그 자를 달래기 위해서 벼슬을 주어야 했습니다.

마침 최유는 기황후의 심정을 알고 아첨을 하기 위해 공민왕을 폐하고, 덕흥군이라는 인물을 대신 고려 왕으로 삼자고 말하여, 1만의 군대를 이끌고 쳐들어왔습니다.

최유의 군대는 압록강을 건너 의주로 쳐들어왔습니다. 도지휘사(都指揮使) 안우경(安遇慶)은 이런 최유의 군대를 일곱번 싸워 일곱 번 모두 무찔렀는데, 하지만 지원군이 없고 숫자가 역부족이라 최유가 일곱으로 군대를 나누어 포위를 하자 몹시 위태로운 지경에 몰렸습니다.

고려 조정은 이 문제에 대해 곧바로 대처하여 최영에게 정예병을 주어 보냈습니다. 또 동북면 병마사인 이성계 역시 1천여명의 정예 기병을 모아 합류했습니다. 이에 기세가 크게 오르게 됩니다. 또한 안우경이 최유의 기병을 격파하여 적의 장수를 죽이는 성과도 있었습니다.

고려군은 안우경등을 좌익으로, 이성계등을 우익으로, 다시 최영을 중군으로 하여 진격했습니다. 그 무렵에 이성계는 여러번의 패배를 보고 다른 장수들에게 말을 했다고 합니다.

"계속 진건 그대들이 겁을 먹고 힘써 싸우지 않아서 그런것 아니오?"

그러자 다른 장수들이 불쾌하게 여긴것입니다.

"좋아, 그렇다면 내일은 자네 혼자 싸워보게!"

아무러한 이성계도 상황이 이렇게 되자 내심 걱정을 했다고 합니다. 다음날, 적군은 세 방향으로 나누어서 쳐들어왔고, 이성계 역시 자기 수하의 노장 두명에게 병사를 주고 자신 역시 나서서 세방향으로 적군을 막았습니다. 혈투중에 이성계의 말이 진흙에 빠져 위험한 처지가 되는 불상사도 있었지만 빠져나오는데 성공했고, 적군을 물리치게 되었습니다.

본래 최유의 밑에 있던 몽고-한족 병사들은, 최유가 "우리 군대가 가기만 하면 고려왕은 항복할것이다!' 라고 하여 그 말을 믿고 쳐들어왔는데, 상황이 이상하게 변해가자 사기가 땅바닥에 떨어져버렸습니다. 그리하여 자기들끼리도 뒤숭숭하여 후퇴하다가 고려군의 공격을 받고 문자 그대로 괴멸, 사방으로 흩어져서 당초 출발한 연경에 도착한 병사는 1만명 중에 고작 17명에 지나지 않았다고 합니다.

 

 

 

 

 

여진족 삼선 - 삼개의 난 진압

 

원나라 장수 조무가 공주를 점거하자 이를 물리치고 조무를 항복시킨 이성계는 이제 동북면으로 돌아오면서 여진족의 난을 평정했습니다. 이성계의 할아버지, 도조는 자신의 딸을 다루가치 김방괘(金方卦)에게 시집을 보냈는데, 둘 사이에서 나온 자식이 삼선과 삼개였습니다.

그러니까 삼선과 삼개는 이성계와는 친척입니다. 이성계하고는 이종형제이죠.

여진족 땅에서 살며 삼선과 삼개는 힘이 쎄고 불량배를 모아 행패를 부렸는데, 이성계에게는 쪽도 못쓰고 살고 있었습니다. 이성계가 여진지방에서 가지던 영향력을 볼수가 있는데, 어린시절부터 그 ㅎㄷㄷ함과 주위에 쌓아온 은혜가 엄청나게 많아 그 지역에서는 고려 백성들이나 여진인들이나 절대로 이성계에게 함부로 하지를 못했습니다.

삼선과 삼개도 이성계때문에 가만히 숨을 죽이고 살았는데, 마침 이성계가 최유를 물리치는 일때문에 서북면으로 갔다는 소식을 접했습니다. 그 틈을 탄 삼선과 삼개는 자기에게 호의적이던 여진족들 꾀어 함주를 함락시키고 화주까지 이르며 관군에 연전연승해습니다. 관군은 철관에 의지한채 이성계가 어서 돌아오기만을 바라고 있었습니다.

2월이 되고, 승리를 거둔 이성계는 철관에 도착했습니다. 그 지역에서 이성계의 영향력이 어느정도인지, 이성계가 도착했다는 소식만으로 인심이 안정되고 병사들의 사기가 치솟는 지경에 이르렀는데, 이성계가 공격을 가하자 마자 삼선 삼개는 여진족 땅으로 도망쳐서 소식이 끊겼고 잃었던 고을도 한꺼번에 재평정되었습니다.

고려 조정에서도 이 공들을 높이 보아 이성계를 밀직 부사(密直副使)로 삼고, 봉익 대부(奉翊大夫)로 관계(官階)를 더하고 단성 양절 익대 공신(端誠亮節翊戴功臣)의 칭호를 내렸으며, 또 금대(金帶)를 내리게 됩니다.

 

하지만 이성계의 전투가 여기서 끝난것은 아니었습니다. 우리나라 역사에서 마지막으로 압록강을 넘어야 했고, 이번엔 다시 남쪽으로 내려와야 했죠. 이번의 적은 왜구였습니다.

 

 

출처 : http://gall.dcinside.com/board/view/?id=samgugji&no=294607&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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