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67년 무렵, 기새인티무르라고 불리는 사람이 요동의 동녕부에 나타났습니다. 그는 기황후의 조카이자 기철의 아들로, 원나라의 평장사(平章事) 노릇을 하다가 아버지 기철이 고려에서 주살되자 그것을 이유로 고려의 북변을 공략하고 있었습니다.
대륙을 정세를 살펴보면, 장사성과 진우량이라는 경쟁자를 물리친 주원장이 1364년 무렵 오왕에 오르게 되었습니다. 이때쯤 유복통과 한림하는 파죽지세로 원나라를 격파하여 수도 대도를 압박했습니다. 원순제는 천도할것까지 고려했으나 대신들의 반대로 그만두었고, 원나라 장수 차칸티무르(察罕帖木兒)는 역공을 가해 유복통을 죽이고 그 세력을 흩어놓았습니다. 한림하는 주원장에게 왔는데 그 후 죽었습니다. 주원장이 일부러 죽였다는 이야기가 유력합니다. 유복통은 실패했지만 원나라의 남은 세력을 약화시키는데 큰 힘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주원장은 서달과 상우춘에게 25만의 대군을 주어 북벌을 감행, 대도를 함락시키고 원나라의 세력을 청소하고 있었습니다.
원나라는 망하고 북쪽으로 올라 북원이 되고, 명나라가 새로 대두하고, 고려는 이제 줄을 바꾸기는 해야 하는데 명나라가 어떻게 나올지는 모르겠고 여하간 미묘하고 복잡한 상황이었습니다. 일단 조선왕조실록과 고려사절요에서는 고려왕이 북원과의 관계를 끊기위해, 동녕부 공격을 준비했다고 합니다. 이 해의 12월 무렵, 고려 조정은 이성계를 동북면 원수(東北面元帥)로 삼고, 지용수(池龍壽)와 양백연(楊伯淵)을 서북면 원수(西北面元帥)로 삼아 공격 준비를 마치게 됩니다.
그리고 다음 해인 1370년의 1월, 이성계는 출격을 하게 됩니다. 병력 규모는 보병이 1만이 기병이 5천으로 상당한 규모였습니다. 우선 동북면에서 함흥을 넘어 6백여리를 가고, 평북 강계를 넘어 7백여리를 가서 마침내 압록강을 건넜습니다. 중국 땅으로 접어든 것입니다.
그러려니 하는 기록으로 이성계가 압록강을 건넌 그날에 서북방 하늘에서 자줏빛의 기운이 올라, "용맹한 장수의 기운이다!" "내가 이성계를 보냈으니 그 때문이다!" 라고 좋아라 했다고 합니다.
동령부에서 버티고 있던건 이오르티무르라는 사람이었습니다. 뒤에 항복해서 이원경이라고 불리는데, 그의 후손이 조선 세조때 반란을 한 이시애라고 하더군요. 여하간에 이오르티무르는 이성계가 이끄는 군대가 온다는 소식을 듣고, 우라산성(봉천성奉天省 회인현懷仁縣 동가강?佳江 지역)으로 군대를 이동시키고 험한 지형을 이용해 수비 준비를 갖추었습니다
이성계의 고려군은 야돈촌(也頓村)이라는 지역에 도착했는데, 그 다음이 좀 이상한것이, 이오르티무르가 이성계에 와서 좀 싸우는둥 하더니 느닷없이 "나는 본래 고려 사람인데, 원컨대 부하가 되기를 원합니다." 하고 항복했습니다. 뭐 별다른 과정 설명도 없고 기록에서는 "이오르티무르가 도전하더니 무기를 버리고 두번 절했다." 고 합니다. 이 정도면 처음부터 항복하려고 마음을 먹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이오르티무르는 삼백여 호를 거느리고 이성계의 군대에 항복했는데……우라 산성이 떨어지진 않았습니다. (여진) 추장이었던 고안위(高安慰)가 버티고 항복하지 않았던 것이죠.
그리고 이성계의 활 실력에 대한 온갖 기록 중에서도 가장 경악스러운 언급이 나오게 됩니다. 본래 활을 쏘려던 이성계는 마침 활을 가지고 오지 않아서, 부하에게 활을 빌린다음 애기살을 매었습니다. 그리고 편전을 이용해서 산성에서 눈 앞에 보이던 적을 향해 화살을 쏘았습니다. 화살은 정확하게 적의 머리통을 꿰뚫어버렸습니다. 저쪽에서는 경악스럽지만, 이성계는 눈 앞에 적의 머리가 조금이라도 보이는 족족 화살을 쏘아 꿰뚫어버렸습니다.
이렇게 죽인 사람이 70여명 입니다. 좀 심한 기록이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 이 기록을 믿는다면 정말 우라 산성에서는 공포에 질릴 수밖에 없죠. 아무 반항도 못하고 옆에 있는 사람이 족족 죽어나가는 것입니다. 성안에서는 사기가 바닥으로 떨어지고, 겁에 질린 고안위는 그 날 밤에 처자식도 버리고 줄을 타고 성 아래로 내려와 달아났습니다.
항전을 주장하던 고안위가 달아나자, 우라산성에서는 굳이 이성계의 1만 5천 대군과 싸울 이유가 없었습니다. 다음날이 밝기가 무섭게 20여명의 지도자가 성문을 열고 나와서 이성계에 항복을 했고, 우라산성이 이렇게 떨어지자 소문만 듣고 요동의 여러 성들이 항복했습니다.
그렇게 얻은 호가 무려 일만호. 기록을 보면 제대로 된 교전이었는지도 의심스러운 이오르티무르와의 싸움을 제외하면, 이성계는 병력이 피해를 입을만한 전투 한번 없이 이런 대공을 세운 것이었습니다. 이 과정에서 이들이 뺏은 천여마리의 소와 수백필의 말을 본래 주인에게 돌려주었는데, 그때문에 민심이 크게 진동하여 고려로 귀순하는 사람들의 숫자가 어마어마했다고 합니다.
이 일이 있고 난 뒤에 몇달 뒤, 고려 조정은 다시 명령을 내렸습니다. 동북면 원수 이성계와 서북면 원수 지용수에게 마침내 동녕부 공격을 명령한것이었죠.
명령에 따라 12월이 될 무렵, 이성계는 의주에서 다시 압록강을 건너 중국땅에 진입합니다. 부교를 만들어서 건넜는데 전병력이 건너는데만 삼일이 걸렸습니다. 군대의 이동이 끝난 그날의 저녁, 갑자기 천둥과 비가 내리자 사람들이 두려워했는데, 병마사 이구가 이들을 안심시켰습니다.
"이건 길조입니다. 우리 상원수의 이름이 지용수 아닙니까? 이름이 용인데 강을 건너는 날에 천둥 치고 비가 내리는것은 싸워 이길 징조지요."
공격하려는곳은 요성(遼城)이었는데, 그곳까지의 거리가 이틀 정도 되자 이성계는 전투를 원활히 하기 위해서 딱 7일분의 군량만 가지고 공격하였습니다. 우선은 비장인 홍인계(洪仁桂)·최공철(崔公哲)이 기병 3천여명을 이끌고 요성을 습격하게 했습니다.
요성에선 당초에 그 병력만 보고, "고려군의 숫자는 대수롭지 않은걸." 이라고 생각했으나, 그건 어디까지나 선발대 였고 그 뒤로 강을 건너는데 삼일이나 걸린 고려군의 대군이 속속 도착하는걸 보자 절망에 빠집니다. 성 내에서 싸울 의지가 사라졌는데도, 그곳의 장수 처명(處明)이란 자가 홀로 대적하기를 원하자 이성계가 이오르티무르, 이제는 이원경이죠. 이원경을 시켜 살살 달래보았습니다.
"너를 죽이는 일이야 어찌 어렵겠느냐만은, 재주가 아깝구나. 살려서 쓰고 싶으니 항복하여라!"
처명은 당연히 거절했습니다. 그러자 우라 산성에서 이성계의 지릴듯한 실력을 본 이원경은 단호하게 말했습니다.
"네가 지금 우리 장군의 재주를 몰라서 그러는 것이다. 만약 항복하지 않으면…화살이 네 가슴을 꿰뚫을 것이다!"
처명은 또다시 거절했습니다. 가만히 이 모습을 보고 있던 이성계는 화살을 들어 처명의 투구를 살짝 스치게 쏘고는, 놀라고 있을 처명을 다시 이원경을 시켜 설득했습니다. 처명이 그래도 버티고 있자, 이번에는 아예 다리를 맞추어 버리고 처명은 달아나고 맙니다.
아마도 응급치료 목적으로 보이지만,잠시 달아났던 처명은 다시 돌아와서 대적하려고 했습니다. 이성계는 다시 이원경에게 항복을 권하게 했습니다.
"끝까지 항복하지 않으면 결국은 네 머리를 향해 화살을 쏠 것이다!"
포스에 지려버린 처명은 결국 말에서 내려 항복하고 맙니다. 요성은 매우 높고 가파르며, 화살이 빗발처럼 내려오며 또 나무와 돌까지 섞여서 내려왔지만 고려군의 보병들은 이를 무릎쓰고 성에 가까이 접근하여 결국 요성을 떨어뜨리고 맙니다. 이때 성 내의 주민들은 항복하려고 헀지만 성을 지키는 장수가 강제로 싸우게 했던 것이라, 조금 더 일이 수월했습니다.
기새인티무르는 달아나서 잡을 수가 없었지만, 같은 패거리인 김백안은 사로잡을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나하추 등에게 기새인티무르의 행방을 탐문하게 하고는 돌아갔습니다.
고려군이 후퇴한 이유는 여러가지가 있겠지만 병량 문제가 컸는데, 거기다가 요성을 함락시킬때 하필 병사들이 창고에 불을 지르는 바람에...먹을 것이 없어 소와 말도 잡아먹어야 했습니다. 그렇게 추격군도 염려하면서 사잇길등을 이용해서 돌아가는데, 잠도 들에서 자야 하는데 이성계는 변소와 마굿간을 만들것을 명령했습니다. 진을 칠만한 상황도 못 되었는데도 일부러 이런 명령을 내린것이었죠.
실제로 추격군은 있었습니다. 전에 복종을 표시했던 나하추는 이 무렵 군대를 이끌고 슬금슬금 고려군의 뒤를 따라붙고 있었는데, 고려군이 진을 쳤던 곳에서 마굿간과 변소가 다 만들어져 있는것을 보자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고 맙니다.
"군사들의 행진이 정돈되고 가지런하군. 이래선 습격하기 어렵겠는걸."
나하추는 그리하여 돌아가고 말았습니다. 중국 사람들이 이때 고려군의 모습을 보고는, “성(城)을 공격하면 반드시 빼앗게 됨은 고려와 같은 나라가 없을 것이다!” 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이 싸움에서 이성계는 항복시킨 처명을 데리고 왔습니다. 처명은 나이가 많았는데, 이성계는 처명과 이원경, 이두란과 자주 사냥을 다녔습니다. 처명은 사냥을 하다 얼음때문에 미끄러지고 맙니다. 이 모습을 본 이성계는 말을 타고 달려와 화살을 쏘아 곰을 죽였는데, 처명은 탄복하면서 말했습니다.
"제가 사람은 여럿 보았지만, 공의 재주는 천하 제일이군요."
이 무렵 이성계는 그전의 공으로 지문하부사(知門下府事)가 되고, 화령의 부윤이 되었습니다. 조정에서 맡긴 임무는 왜적, 왜구를 감시하라는 이야기 였죠. 화령인데 왜구? 라고 생각할수 있지만, 고려 말의 왜구는 이미 삼남지방은 물론이고 강화도, 황해도를 가리지 않고 전국을 공격하는 무리들이었습니다. 고려의 전 국토가 왜구의 칼날에 신음하고 있었습니다.
이제 황산 대첩의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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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구(상) : http://gall.dcinside.com/board/view/?id=samgugji&no=295087&page=
왜구(하) : http://gall.dcinside.com/board/view/?id=samgugji&no=295088&pag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