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 피로인

그사나이 작성일 15.06.26 17:20: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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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의) 크롤의 압박이 있습니다.

 

 

 

 피로인(捕虜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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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게이넨 / 일본 안요지사 주지 승려

 1595년 6월부터 약 7개월간 군의관으로 정유재란에 참전 종군승려.

 

 그가 남긴 기록엔 끌려가는 조선인을 이렇게 표현합니다.

 사람이 아니라 마치 가축과 같았다.

 

 얼마나 참담한 상황이었는지 짐작해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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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렇다면 피로인은 뭘까요.. 정말 생소한 단어입니다.

 

 포로는 전쟁에 직접 참가한 군인들이 적군에게 사로잡힌 경우를 말하고, 

 피로인은 군인이 아닌 민간인이 끌려간 경우를 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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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렇다면 피로인의 수는 얼마나 되는 걸까요..

 

 일본에 끌려간 피로인들의 수는 학자들 마다 다르지만, 정설로 약 10만명 정도로 추산한다고 합니다. 

 어떤 학자는 40만명 이상으로 추정하는 경우도 있다고 하니, 

 

 약 10여년에 가까운 임진왜란 기간을 생각해보면 40만명도 큰 무리는 아니라는 생각이 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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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조선의 전체 인구수가 대략 950만명이고, 한양의 인구가 약 12~3만명 정도라고 합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끌려갔었는지 피부로 느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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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일본 학계에서도 임진왜란 당시 민간인 납치를 인정하고 있다고 합니다. 

 

하지만, 일본에서는 대략 2~3만명 정도로 추산하고 있지만, 

이마저도 시간이 흐를수록 계속 축소한다고 합니다. 

 

아마 뇌까지 같이 축소하는 모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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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소까지 모자라 왜곡까지 합니다.

 

일본에서는 피로인을 도래인으로 부르려는 시도가 있다고 합니다. 

도래인도 생소하기만 합니다. 

 

도래인의 의미는 자발적으로 건너온 사람. 즉 이민자.

 

 

자꾸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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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지만, 일본에 의한 민간인 납치 사실이 곳곳에 증거로 남아 있습니다.

 

 일본은 당시 전투 부대만 파병한 것이 아닌, 조선의 선진 문물을 대대적으로 약탈하기 위해, 

 특수부대까지 조직하여 같이 파견합니다. 

 

 거기엔 조선인들의 납치를 담당하는'포로부'라는 부대가 있었습니다. 

 

 이들은 임진왜란 전부터 이미 조선인 납치를 계획하고 있었다고 하니, 

 저들이 주장하는 도래인이라는 말이 얼마나 터무니없는 소리인지 알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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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류근 시인님의 말대로, 

 

 위안부 할머니들을 강제로 끌고 간 것이 아니라, 자발적으로 왔다고 하는 소리와 너무나 똑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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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렇다면 일본으로 끌려간 피로인들의 삶이 궁금합니다. 

 그들은 다른나라의 노예로 팔려 가는 경우도 많았다고 합니다. 

 

 사람 취급을 받지 못합니다.

 

 류근 시인님 말대로 점점 점입가경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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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인 피로인을 사갔던 나라는 주로 포르투갈 상인들 이었다고 합니다.

 

 당시 포르투갈의 대서양 노예무역의 범위가 일본으로까지 확대되면서, 

 일본에 거주하고 있던 포르투갈 상인이 많았는데 그들을 통해 조선인 노예 거래가 활성화 됩니다.

 

 일본으로 끌려간 것도 모자라, 어딘지도 모를 곳으로 다시 팔려 나가야만 했던 피로인들 심정이 어땠을지.. 

 

 정말 가슴 아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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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시 일본의 초기 노예 매매는 자국민을 대상으로 이루어졌다고 합니다. 

 

 16세기 전 세계적으로 성행한 노예 무역은 일본 자국민들도 피할 수는 없었나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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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지만, 

 도요토미 히데요시에 의해 더이상 자국민을 상대로 한 노예 매매를 금지한다고 포르투갈에 요청합니다. 

 

 그리고, 이 천하의 개썅놈은 조선에서 강제로 끌려온 피로인들로 일본인 노예들을 대신합니다. 

 그렇게 팔려간 조선인들은 동남아시아를 비롯 지구 반대편인 유럽으로까지 팔려 나갑니다.

 

 

 정말 기가 막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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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렇다면 조선 피로인은 어느정도에 거래가 되었던 걸까요..

 

 당시 흑인 노예 1명이 포르투갈 화폐단위로 약 100에스쿠도에 매매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그에 반해, 조선 피로인은 12에스쿠도에 5명을 매매했다고 하니 약 1/40 가격 수준입니다.

 

 그리고, 당시 조총 1정이 일본 화폐단위로 120문, 조선 피로인 1명이 약 3문 정도였다고 합니다. 

 

 조선인 노예 40명이 조총 1정과 같은 가격입니다.

 

 

 몇년 전에 끊었던 담배 생각이 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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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윤영휘 교수님 말씀대로 그들이 비참한 삶을 살면서도 견딜수 있었던건, 

 언젠가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막연한 희망이 그들을 비참한 생활로 부터 견디게 했는지 모르겠습니다.

 

 기약없는 그날을 기디리면서 하루하루를 견뎌냈을 그들의 고통이 얼마나 컸을지 짐작조차 힘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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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연한 거겠지만, 납치 대상엔 반상의 구분이나 남녀 노소없이 무분별하게 행해졌고, 

 상대적으로 약한 여성들과 아이들의 비율이 높았다고 합니다.

 

 향후 일본 사회를 위해 양반가의 미색이 뛰어난 여성들도 많이 납치해 가는 치밀함도 보입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가장 큰 피해를 보는 계층은 여성들과 아이들이라고 역사가 증명합니다. 

 

 비교적 최근이라고 할 수 있는 슬픈 역사의 위안부 할머니들을 보더라도,

 하루빨리 모든 분야에서 일본과 동등한 힘을 가져야 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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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시 일본의 진면목과 피로인들의 상황을 세세히 기록하게 되는 '간양록'.

 강항이라는 피로인에 의해 저술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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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7세에 문과에 급제한 강항은 상당한 두뇌를 가진 엘리트 였다는걸 짐작할 수 있습니다.

 

 

 조선시대 선비들은,

 약 5세부터 공부를 시작해 대과에 합격할때까지 약 30여년 동안 공부에만 매달린다고 합니다. 

 

 대과 급제자의 평균 연령이 37~38세 정도가 되고, 50~70세의 비율도 높았다는걸 보면, 

 대단한 인물임에는 틀림없어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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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항은 남원성 군량미 조달의 임무를 맡고 있던 중 남원성이 함락되자,

 의병을 모집하고 저항하지만, 여의치 않게 됩니다.

 

 가족들을 이끌고 서해바다 쪽으로 탈출을 시도하다 사공의 실수로 왜군에 사로잡히고 맙니다.

 

 이후 강항은 자살을 시도하지만 실패하고, 

 가족들이 처참하게 살해당하는 상황을 눈 앞에서 지켜 봐야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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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본놈들은 뼈속부터 잔인하다는걸 다시한번 증명합니다.

 강항의 조카가 바닷물을 먹고 탈이 나자, 왜군들이 산채로 바다에 던져 살해합니다.

 

 아무런 저항도 하지 못하고, 

 눈 앞에서 살해당하는 조카를 그저 바라보기만 하는 강항의 심정이 어땠을지 

 굳이 말하지 않아도 알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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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족들이 비참하게 살해당하는 모습을 그대로 지켜 보기만 해야했던 강항은,

 극단적인 선택을 할 수도 있었지만, 끝까지 살아서 일본의 실상을 낱낱이 기록하여 본국으로 보냅니다.

 

 1598년, 권율 장군의 노비였던 김석복이라는 사람과, 1599년 왕건공, 신정남이라는 명나라 사람에게, 일본의 정세를 기록한 '적중봉소'를 본국으로 보냅니다. 

 

 이 중 왕건공이라는 사람에 의해 조선 조정으로 전달이 됩니다.

 

 

 일본에 대한 정보를 최대한 많이 기록하여 본국으로 보내는게,

 강항이 할 수 있는 최대의 복수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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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항이 일본에서 기록한 '적중봉소', '적중견문록', '고부인격', '섭란서적'의 '간양록'.

 

왜군에 대한 강한 복수의 의지가 담겨 있다고 하니, 어떤 심정으로 글을 써내려 갔을지 짐작이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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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진왜란의 주범인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죽고 난 뒤, 

 그를 기리는 사치스런 신사에 적힌, 그를 찬양하는 글을  보고 강항은 대노합니다.

 

 그리고 그 글들을 먹칠로 지워버리고 히데요시를 꾸짖는 글을 남깁니다.

 

 죽음을 각오한 강항의 분노가 어느정도 였는지 알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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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항은 피로인이라는 신분으로 어떻게 방대한 양의 정보를 얻을수가 있었을까요..

 

조선에서도 상당한 엘리트였던 강항은 일본에서도 그 만큼의 대우를 받게 됩니다.

비록 피로인으로 끌려왔지만, 비범한 인물이었다는걸 일본애들도 알아보긴 했던 모양입니다.

 

그로인해, 일본 상류층들과 접촉할 수 있었고, 그 덕에 각종 고급 정보를 얻는데 매우 유용했던 것으로 봅니다. 

 

아무리 흙 속에 있어도 보석은 빛이 나기 마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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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양록을 살펴보면 일본의 관제 뿐만 아니라, 임진왜란에 참여했던 장수들과 사람들, 

그리고, 그 인물들의 서로간의 관계까지 세세히 적혀 있다고 합니다.

 

 

한창 전시 상황에 입수 되었다면, 

전세를 한번에 뒤짚을 수도 있는 정말 엄청난 정보임에 틀림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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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심지어 일본의 지도까지 본국으로 보내옵니다.

 지도의 출처는 강항이 억류되어 있던 성주의 아버지라고 합니다.

 

 신병주 교수님의 말씀대로 적장의 아버지한테까지 인정받은걸 보면, 

 수완 뿐만 아니라 인성 또 짐작이 됩니다. 

 

 또한, 상당한 지식들을 바탕으로 한 달변가였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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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항의 진면목이 발휘 됩니다

 

 그동안 강항과 교류하던 일본 유력층이 강항의 조선 귀환을 위해, 

 강항이 억류되어 있던 이요의 다이묘를 설득합니다.

 

 그 결과 피로인 3년만에 고국 땅으로 돌아 오지만, 옛 선비들의 기개 때문인지,

 가족 들을 모두 잃고 혼자만 살아 돌아온 죄책감 때문인지, 

 스스로를 죄인이라 여기고 은둔하게 됩니다. 

 

 또 '간양록'을 죄인이 타는 수레라는 뜻의 '건차록'이라고 합니다.

 

 이 후, 조선에서의 강항의 행적은 끊기고 맙니다. 

 

 

 개인적으로 많은 아쉬움이 남는 인물입니다.

 일본의 정세를 잘 알고 있었음은 물론 조선으로 돌려보낼 정도의 힘을 갖고 있는 

 일본 유력층들과의 두터운 인맥을 쌓았던 그였기에 조정에서 잘 활용했었다면, 

 역사에 보다 큰 족적을 남길수 있었던 인물이 아니었나 생각을 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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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항과는 달리 고국으로 돌아오지 못하는,

 역사에 기록되지 못한 수많은 피로인들의 애끓는 마음이 전해져 오는 듯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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