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병으로 큰 공을 세운 사명대사는,
피로인 송환문제를 위해 비공식 외교 사절로 일본으로 건너갑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죽고 난 후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일본의 새로운 쇼군이 됩니다.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사명대사를 도발합니다.
사명대사는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도발을 당당하게 받아 넘깁니다.
사명대사의 뛰어난 외교술과 담대함에 탄복한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조선 피로인의 쇄환을 약속합니다.
사절단이 돌아오는 길목마다 도망쳐 나온 피로인들이 많았다고 합니다.
그리고,
1605년 최소 1000여 명의 피로인들이 그렇게 그리던 본국으로 돌아옵니다.
당시 조선에서의 사명대사 명성이 어느정도였는지 알 수 있습니다.
나라가 없으면 종교도 없다라는 호국 불교의 기치를 내걸고 승병장이 되어,
직접 전쟁에 참여했고, 적장 가토 기요마사와 세차례에 걸쳐 담판을 지을 정도로
외교적 역량도 있었고, 조선 피로인들의 쇄환을 위해 도쿠가와를 상대로 뛰어난 외교를 펼칩니다.
그 결과, 사명대사가 일본에서 쇄환해 온 조선 피로인은 약 3000여명 정도 된다고 합니다.
호국불교는 다른 나라 불교에서는 전혀 나타나지 않는 한국 특유의 불교 사상이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선조는 피로인에 대해 어떤 조치를 취했는 궁금합니다.
다행스럽게도 선조는 피로인 쇄환에 적극적인 모습을 보이며 위 내용과 같은 교지를 내립니다.
그리고 1607년, 공식 '회답 겸 쇄환사'를 일본에 파견합니다.
모처럼 왕다운 처사를 보입니다.
피로인들을 본국으로 돌려 보내거나 데리고 올때, 송환이나 생환, 귀환이 아닌,
쇄환이라고 하는 이유가 궁금합니다.
쇄환은 잘 조사하고 살펴서 돌아오라는 뜻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피로인들의 귀환 공식용어를 '쇄환' 이라고 합니다.
일반적으로 조선에서 일본으로 파견하는 공식 사절단을 '통신사'라고 합니다.
하지만 조선은 '통신사'가 아닌 '회답 겸 쇄환사'라고 하는 사절단을 보냅니다.
통신사와 회답겸 쇄환사의 차이점이 궁금합니다.
통신사의 의미는 '서로 신뢰를 통하는 사신' 이라는 의미라고 합니다.
하지만, 일본은 조선을 상대로 전쟁을 일으키고, 온갖 범죄를 저지른 나라입니다.
히데요시가 죽고, 다시 조선과의 국교 정상화를 원하는 이에야스가 쇼군이 됐다고 해도,
조선으로선 쉽게 용서할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조선에선 아직 일본을 용서하지 않았다는 의미의 '회답 겸 쇄환사'를 파견합니다.
피로인들의 쇄환을 위한, 뚜렷한 목적을 갖고 일본으로 간 회답 겸 쇄환사의 성과는 어땠을까요..
시간이 흐를 수록 심각하게 눈에 띄게 줄어드는게 보입니다.
상당히 많은 수의 피로인들이 돌아오지 못했다고 합니다.
현재 학계에서는 탈출자까지 포함 약 6~7천명 정도로 추정한다고 합니다.
시간이 흐를수록 조선으로 돌아오는 사람들이 줄어드는 이유는 뭘까요..
일반적으로 노예로 끌려간 피로인들이기에 그들을 소유한 일본인들의 입장에선,
피로인들은 사유재산으로 해당된다고 합니다.
그래서, 피로인들을 보내줄 경우 재산상의 손실 때문에 숨겨놓은 경우가 많았고,
또 쇄환사의 파견 기간이 길어질수록 일본 생활에 적응한 피로인들이 다시 본국으로,
돌아오길 포기하는 경우도 많았다고 합니다.
우여곡절 끝에 겨우 고국으로 돌아오게 되면 그야말로 통곡의 바다가 된다고 합니다.
오랜기간 일본에서 생활을 했던 그들에겐 조선에서의 삶의 터전이 없었던 겁니다.
또한, 상당수의 피로인들은 고향으로 돌아가는 길을 알지 못해 쇄환사를 따라오며,
통곡을 하였다고 하니, 오랜시간을 기다려 결국 고국으로 돌아왔지만 피로인으서의 삶보다
더욱 힘든 생활이 기다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또 조선 조정에선 피로인들의 쇄환엔 적극적이었던 반면,
고국에서의 정착을 지원해 주는 일에는 인색했다고 합니다.
더 기가 막힌 사실은, 억울하게 노예로 끌려 갔다가 힘들게 다시 돌아왔지만,
또다시 노예가 되는 경우도 많았다고 합니다.
어린 나이에 일본으로 끌려갔던 피로인들은 본인의 신상정보가 아무것도 남질 않아,
조선의 양반들이 쓸만한 사람은 바로 노비로도 데려 갔다고 합니다.
그러다 보니, 일본에 남아있는 피로인들 사이에 안좋은 소문들이 퍼지면서,
갈수록 조선으로 돌아오는 피로인들이 줄어 들었다고 합니다.
본국으로 돌아왔지만, 시련은 끝이 보이질 않습니다.
피로인이라는 이유하나로 차별까지 받습니다.
심지어 과거에 합격을 해도 피로인이었다는 이유로 벼슬길을 포기할 정도니,
반상의 구분 없이 행해진 차별이 얼마나 심했는지 짐작이 갑니다.
간양록을 저술한 강항의 행적 또한조선으로 돌아온 뒤론 거의 남아 있질 않다고 합니다.
참 안타깝고 아까운 인물입니다.
차별도 모자라 첩자라는 누명까지 쓰고 처형당하는 사람들도 많았다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