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통령은 퇴진하지 않습니다.

나를밟고가라 작성일 16.11.13 02:19: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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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IN 천관율 기자의 글입니다.

혼자 읽고 지나가기 아까운 글이라 생각되어 나누고 싶은 마음에 퍼왔습니다.

 

 

 

 

 

전문

11.12 취재 작업가설 메모

 

대통령은 퇴진하지 않습니다. 

우리 대통령이 만약 새누리당의 미래나 보수의 부활 가능성을 고려하는 리더였다면, 사즉생의 선택이 나올 수도 있습니다. 

지금 반전 카드로 대통령 퇴진만한 걸 떠올리기는 쉽지 않습니다.

하지만 우리 대통령은 매우 사사로운 분입니다. 성실한 사익추구형이었던 전임자와는 또 다르게, 

이 분은 공적 영역과 사적 영역의 구분 자체가 안 됩니다

(전임자의 공사 구분 감각은 탁월했지요. 그게 있어야 공에서 사로의 자원 이동이 매끄럽습니다).

 

이것은 일찍이 우리가 본적 없는 사사로움입니다. 공적 영역도 전부 가족자산으로 보기 때문에, 

일견 매우 공적이라는 착시를 일으키면서 실제로는 아예 퍼블릭이 증발하는 아주 독특한 사사로움입니다. 

그런 분에게 공적 헌신을 기대하기는 어렵습니다.

대통령은 2선 후퇴를 하지 않습니다.

사사로운 대통령에게 현재 남은 유일한 목표는 패밀리 비즈니스입니다. 자신이 감옥에 갈 가능성을 최대한 낮출 것, 

핵심 인물들을 가장 가벼운 혐의로 처리할 것, 가능하다면 가산을 보존할 것. 당의 부활과 보수의 미래보다 이쪽의 우선순위가 단연 높습니다.

이 목표를 이루려면 검찰권력을 놓을 수 없습니다. 야당의 2선 후퇴 요구는 거칠게 요약해서 법무부 장관 - 검찰총장 내놓으라는 말입니다. 

이 요구를 받아주면 패밀리 비즈니스도 파산합니다. 고로 우리 대통령에게 퇴진과 2선 후퇴는 사실상 같은 말입니다. 

2선후퇴안이 퇴진보다 온건한 타협안처럼 보이지만, 대통령이 보기에는 그게 그겁니다.

 

교착됩니다.

다른 정치 리더였다면 존재하였을 정치적 타협의 공간이 사라집니다. 사사로운 리더는 공적 책임감에 구속되지 않고 

지켜야 할 것이 패밀리 비즈니스 외에는 없으므로, 공격하는 쪽에서도 합의점을 잡아내기 어렵습니다. 

원하는게 딱 하나 있는데, 그걸 보장해줄 방법은 별로 없습니다.

우리 대통령은 공화국의 헌정적 정통성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쿠데타 수장이 아닙니다. 지지기반 

회복 포기하고 통치 내팽개치고, 방문 걸어잠그고 버티기로 들어가면 그걸 끌어낼 방법은 없습니다. 그리고 그럴 수 있는 분입니다.

다른 외부 변수가 없다면, 대통령의 사사로움은 상황을 현상태로 교착시킬 겁니다. 거리와 의회의 

압박은 높게 유지되지만 대통령은 더 물러설 곳이 없고, 초헌법적 방법으로 헌정적 정통성을 강제 폐기할 상황은 분명히 아닙니다.

대통령은 변수가 아닙니다.

 

대통령의 사사로움으로부터 출발한 이상의 검토가 옳다면, 집회에 몇 명이 모이든 간에 

그게 대통령의 비용편익 계산을 바꿀 수는 없습니다. 집회가 압박할 수 있는 것은 리더의 공적 책임성인데 그게 원래 없습니다. 

대통령의 목표인 패밀리 비즈니스는 집회로 압박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집회는 우리 대통령의 판단을 바꾸기 어렵습니다.

하지만 대통령 권력의 외부 기반들은 좀 다릅니다. 이들은 대통령과 운명을 함께 할 이유도 

대통령의 패밀리 비즈니스를 몸 바쳐 수호할 이유도 없습니다. 

대통령의 손에 남아 있는 권력 기반은  수사기관과 새누리당 둘입니다. 대통령이 가고도 계속 살아가야 할 이들입니다. 

이들에게는 집회의 사이즈가 압박으로 작동합니다.

수사기관 내에서 언론제보 등이 나와서 여론을 더 흔들거나, 

다음 선거를 치러야 하는 새누리당이 압력을 견디지 못하고 파열음을 내거나 하는 것은 있을 수 있는 일입니다. 

이 경우 대통령의 비용편익 계산은 바뀝니다. 대통령보다는 이 분들이 지켜야 할 것이 많습니다. 

교착 상태를 돌파할 미묘한 가능성이 있다면, 아마도 이 경로일지 모릅니다.

현상변경을 먼저 하는 쪽이 집니다. 

 

교착이 상황의 본질입니다. 서로 최선을 다했을 때 지금 자리에서 서로 꼼짝도 못 하는 상태입니다. 

이럴 때는 현상변경을 하는 쪽이 아니라 상대에게 시키는 쪽이 이깁니다. 이 판의 속성은 

'상대의 본진을 침투하는 쪽이 이기는' 싸움이 아니라 '먼저 허물어지는 쪽이 지는' 싸움이 됩니다. 

버티는 싸움이므로 교착이 오래 갈 가능성이 있습니다. 

적어도 오늘 집회 이후 곧바로 천지가 개벽할 거라는 식의 예측은 지나치게 기대가 섞여 있습니다.

정치인과 수사기관이 집회를 판단의 근거로 삼는 것은 그것이 다음 선거에서 작동할 민심을 미리 보여주는 단서이기 때문입니다. 

그분들은 몇 명이나 거리에 나왔는가, 조직되지 않은 일반인의 비율이 얼마나 되는가, 이거 둘만 봅니다. 

집회 대오가 어디까지 가서 구호를 외쳤는지, 청와대까지 얼마나 접근했는지를 볼 이유는 없습니다. 

더 나아가 공격성이 걷잡을 수 없어진다면 집회 쪽에서 현상변경을 시도한 것이므로 오히려 반길 가능성이 높습니다.

 

모이기만 한다고 뭐가 바뀔까?

트럼프가 당선되자마자 미국에서 증오범죄가 폭발하고 있습니다. 문화의 압력에 눌려 지내던 혐오의 에너지가 중요한 깨달음을 얻은 겁니다.

아 우리가 다수파구나. 나만 그런줄 알았는데, 이 나라의 절반은 나와 같구나. 

다른 인종과 종교와 성 정체성을 마음껏 혐오하고픈 사람들이 이제 서로가 있다는 사실을 서로 알게 되었습니다. 

"니가 있다는 걸 내가 알아. 그리고 내가 널 알게 되었다는 걸 너도 알지." 

이렇게 '공유지식'으로 연결된 사람들은훨씬 더 강하고 대담해집니다.

나와 동의하는 쟤가 있다는 걸, 쟤가 꽤 많다는 걸 이제 내가 알고, 내가 그걸 알고 자신감이 생겼다는 걸 쟤가 알고, 

쟤가 그걸 알고 고조되었다는 걸 또 내가 알고… 내가 아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고, 

그 사실이 꼬리에 꼬리를 물어야 공유지식이 생깁니다. 매우 어렵습니다. 

백만명이 똑같은 티비를 보고 똑같은 뉴스를 본다고 공유지식이 생기는 게 아닙니다.

나는 봤지만, 나머지 99만9999명이 저걸 봤는지, 보고 나와 비슷한 생각을 했는지, 알 도리가 없습니다.

백만명짜리 집회는 그걸 가능하게 합니다. 집회는 공유지식을 생산하는 탁월한 공장입니다. 

그 자리에 동시에 와 있는 순간, 참여자들은 복잡한 과정 없이 꼬리에 꼬리를 무는 공유지식을 단박에 생산해 냅니다. 

그게 사람들이 거실의 60인치 티비를 버려두고 광장 스크린으로 축구를 보는 이유고, 

이 초연결 사회에서도 온라인 집회에 만족하지 않고 굳이 같은 물리적 공간에 서 있으려 하는 이유입니다.


경찰을 향해 휘두르는 쇠파이프를 두려워하는 권력은 없습니다. 

사람들이 서로를 확인하고 연결되는 것이야말로 간담을 서늘하게 만드는 풍경입니다. 

현상변경의 압박을 강하게 받게 됩니다. "모인다고 뭐가 바뀌느냐"는 제 생각에 정확한 질문은 아닙니다.

이상이 오늘 현장에서 제가 취재하면서 갖고 있을 작업가설입니다. 

 

시사IN 거리편집국은 청계광장에 있습니다. 2008년 촛불집회 때 있던 그 자리입니다.

그때 저는 막내기자였습니다. 제가 그때와 다른 뭔가를 볼 눈이 생겼을지 어떨지 궁금합니다. 이제 현장으로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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