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 최부자집은 박정희에게 어떻게 몰락했나

Cross_X 작성일 17.06.25 13:4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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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최부자는 ‘사방 백리 안에 굶어죽는 사람이 없게 하라’는 원칙을 세우고 소작인에게 8할을 받던 소작료를 1600년대부터 절반만 받는 등 한국판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표상으로 최근 재평가받고 있다. 해방 직후에는 독립운동가인 고 최준 선생이 전 재산을 털어 대구대를 설립했으나, 박정희 정권 때 자신의 의사에 반해 영남대로 넘어갔다. 경북 경주 교동의 최씨 고택도, 경주와 울산의 선산도 영남대 소유다. 1월29일 교동 고택 사랑채 안에서 종손 최염(80)씨가 “박근혜 당선인이 대통령이 되는 만큼 정치적 중립성을 위해 영남대를 사회에 환원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한국판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표상은 박정희의 영남대에 어떻게 무너졌나

 

▶부동산 투기를 하고, 동네 빵집에 진출하고, 권력 앞에 비겁하고, 시류에 영합하는 부자만 있는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서라벌’에 정의로운 부자가 살았습니다. 병자호란 이후 300년 넘게 민중의 사랑을 받던 경주 최부자는 일제에 저항하고 해방 뒤 대학에 전 재산을 기부했다가 박정희 정권과의 악연으로 끝을 맞이하게 됩니다. 지금은 남의 땅에서 조상을 모시고 제사를 지내는 최부잣집의 기구한 사연을 들어보시죠.



″전 재산을 사실상 강탈, 선산 조상님들까지 나가라니…″

 

 

 

 

 

1970년 서울 무교동의 한 주점. 당시 서른일곱이던 그는 길거리에서 우연히 만난 고교 동창생 두 명과 회포를 풀러 평소 다니던 단골집에 온 터였다. 셋은 학교생활을 추억하며 왁자지껄 술을 마셨다. 그러던 중 최씨의 무슨 말 때문이었을까? 어느 순간 친구 둘의 안색이 굳어졌다. 차례로 화장실에 간다면서 자리를 떴다. 최씨는 그래도 남은 술을 다 먹고 가겠다며 혼자 남았다. 얼마나 지나지 않아 경찰관이 들어왔다. “반공법 위반으로 체포하겠습니다.”

 

-도대체 무슨 이야기를 한 거죠?

 

“친구들이 물었죠. 너희 가족 전 재산을 넣은 대구대학교를 삼성그룹 창업자 이병철에게 넘겼는데, 그 이병철이 박정희한테 상납을 했으니까 굉장한 보상을 받았을 거 아니냐? 나는 이병철한테 돈 한 푼 받은 거 없고 우리 할아버지도 그럴 분 아니라고. 화가 나서 큰 소리로 말했죠. 박정희, 이병철이 정경유착해서 남의 것 빼앗고 나라 팔아먹은 사람들 아니냐….”

 

신고한 사람이 종업원이었는지 친구들이었는지 아직도 그는 모른다. 박정희 대통령이 3선 개헌을 마친 뒤 유신체제를 준비하고 있던 시절, 종로의 술집 종업원들을 정보과 형사들이 모아두고 수상한 사람은 즉각 신고하라고 교육하던 시절이었다.

 

-경찰에 끌려가서는요?

 

“구둣발로 차이고 실신하고… 밤새 조사를 받았습니다. 조서를 보니까 내가 하지도 않은 말이 쓰여 있더라고요. 내가 종업원들한테 ‘이북 가면 대접받는데 왜 여기서 술심부름이나 하고 있냐’고 했다는 겁니다. 게다가 내가 이북에 갔다 왔다고 조서에 써 있었습니다. 완력으로 지장을 찍었어요. 80일 구치소에 있다가 1심에서 징역 10월에 집행유예 2년을 받고 풀려났습니다.”

 

 

 

 

 

조선시대부터 이어져온 여섯가지 가훈

 

그는 독립운동가이자 마지막 ‘경주 최부자’ 고 최준 선생의 손자 최염(80)씨다. 한국판 ‘노블레스 오블리주’인 경주 최부자의 정신을 유일하게 이어온 종손이자, 일제와 군부독재 시대 경주 최부자의 도전과 핍박 역사의 산증인이다. 그가 회장을 맡고 있는 서울 종로구 운니동 경주최씨 중앙종친회 사무실에서 지난 1월14일과 22일 두차례 인터뷰를 했다.

 

-경주 최부자의 역사는 어떻게 시작됐나요?

 

“할아버지(최준)는 생전에 어른들 얘기를 많이 해주셨어요. 13대조 정무공 최진립(1568~1636) 어른이 중시조입니다. 공조참판에 기용됐으나 벼슬을 사양하고, 병자호란 때 종과 수하를 데리고 경기도 용인에서 청군과 전투를 벌이다 전사했습니다. 우리 가문이 모두 13대까지 이어져왔는데 흔히 ‘9대(에 걸쳐) 진사, 12대 만석꾼’이라고 합니다. 다만 정무공은 청백리로 살았기 때문에 엄밀히 따져 부자는 아니었습니다.”

 

-부자가 된 건 언제지요?

 

“11대조인 최국선(1631~81) 할아버지 때부터입니다. 처음부터 부자는 아니었어요. 당시 지주는 소작인에게 소작을 주고 8할을 거둬가던 시절이었는데, 소작인들은 섣달이 되면 양식이 없어 장리를 썼어요. 장리는 양식을 빌려 두 배로 갚는 고리채였지요. 한번은 명화적(조선시대 횃불을 들고 약탈하던 강도집단)이 국선 할아버지 댁에 쳐들어왔습니다. 할아버지네 소작농과 그 자식들도 들어가 있었어요. 그런데 이 패거리가 양식은 안 가져가고 장리의 증표인 채권서류만 가져간 거예요. 이튿날 친척과 가복들은 ‘우리 덕분에 먹고살았는데 이럴 수 있느냐’며 배은망덕한 소작놈들을 경주 부윤에 일러 처벌해야 한다고 어르신에게 일렀죠. 한참 말이 없던 국선 어르신은 드디어 입을 열었답니다. ‘그만둬라. 남은 채권 문서도 모두 돌려주어라. 그리고 앞으로 소작료도 5할만 받도록 하겠다.’”

 

1923년 경남 진주에서 열린 소작노동자대회에서 나온 요구사항이 ‘소작료를 5할로 낮춰달라’는 것이었으니, 최국선의 결정은 자그마치 300년을 앞선 ‘진보적인’ 조처였다. 최부자를 연구하는 학계에서도 사회적 나눔이 오히려 부를 불러온다는 선순환의 사례로 이 사건을 지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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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최부자의 종손 최염(80)씨가 29일 울산 울주군 선산에서 가문의 역사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최염씨의 할아버지 고 최준 선생은 이 땅을 영남대의 전신인 대구대에 기부했고, 박정희 일가로 넘어간 영남대는 이 땅을 민간에 팔아, 최씨는 묘를 이장해야 할 처지에 놓았다.


 

‘백리 안에 굶어죽는 자 없게 하라’
소작농에 파격적인 소작료
임시정부땐 독립운동 자금줄 역할
해방 뒤 할아버지 최준은
전 재산을 기부해 대구대를 세워
삼성 이병철에게 무상양도했다

 

“최고 대학 만들겠다”던
이병철은 약속을 저버렸다
대구대를 박정희에게 헌납했고
박정희는 영남대로 바꾸면서
최씨 집안의 고택·논·선산이
동시에 영남대 소유로 넘어갔다


 

 “1988년 영남대가 울주군 두동면의 선산(330만㎡·10만평)을 판다는 소문을 들었어요. 당시 조일문 재단이사장한테 달려가서 경주 최씨가 기부한 땅이면 선량하게 관리할 의무도 있지 않느냐고 따졌습니다. 헐값인 평당 760원에 판다길래 두 배 쳐줄 테니 나와 계약하자고 해도 안 된다고 합디다. 그리고 바로 그 다음날 민간에 팔았습니다. 그때가 박근혜와 측근들이 재단이사로 재직하던 때입니다. 7대 조모가 계시는 경주시 구정동의 4만3000㎡도 온천지구로 고시돼 100억원 이상의 시세가 됐는데도, 단돈 4억원에 차아무개씨에게 매도했습니다.”

 

 -할아버지는 언제 돌아가셨습니까?

 

 “1970년입니다. 박정희와 이병철한테 당한 수모를 할아버지는 돌아가실 때까지 풀지 못하셨습니다. 하지만 잘 되도록 도우라고 하셨어요.”


 

실질적인 운영 권한은 아직도 박근혜  

 

 ‘박근혜 체제’의 영남대는 순탄치 않았다. 부정입학 등 재단비리가 적발돼 1988년 사립대학으로선 초유의 국정감사를 받게 되고, 박근혜 당선인은 이사직에서마저 물러난다. 2009년까지 영남대는 교육부가 파견한 임시이사 체제로 운영되면서 박정희-박근혜 쪽의 인사들은 형사처벌을 받는 등 학교경영 일선에서 손을 뗀다. 일부 영남대 교수들은 임시이사들과 직선총장이 이끌던 이 기간을 정치적으로 가장 자유로웠던 시기로 꼽는다. 이 기간 최염씨도 재경영남대동창회장을 맡으면서 학교를 도왔다.

 

 -이사로 복귀하고 싶은 생각은 없었습니까? 임시이사 체제에선 가능했을 것 같은데.

 

 “할아버지는 항상 대학은 개인의 것이 아니라고 하셨습니다. 이사를 할 생각은 앞으로도 없습니다. 대신 동창회장으로 열심히 뛰었습니다. 유창우 총장 시절 국책공과대학에 선정되고 영남대학술진흥재단으로 일하면서 5년 동안 400억원의 국고 지원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박근혜가 다시 나타나리라고 생각지 못했습니다.”

 

 2009년 영남대의 임시이사 체제가 끝나면서 사학분쟁조정위원회는 전직 이사에게 정이사 추천권을 부여했다. 박근혜 당선인은 당시 7명의 이사 가운데 4명을 추천했다. 2007년 박근혜 대선캠프 법률지원 특보단장을 맡은 강신욱 전 대법관 등 모두 측근이나 친박계로 분류되는 이들이었다. 그뒤 영남대는 ‘박정희의 대학’으로 돌아가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박근혜 당선인의 최측근인 최외출 교수가 대외협력부총장으로 학교경영 일선에 나서고, 박정희리더십연구원, 박정희새마을정책대학원 등이 설립된다.

 

 -영남대가 박정희의 대학으로 생각하시나요?

 

 “지금 실질적인 운영 권한은 박근혜 당선인이 행사한다고 봅니다. (1988년 11월3일 <조선일보> 기사를 보여주며) 당시 박근혜는 영남대를 떠나면서 ‘차제에 학교 일에서 완전히 손떼겠다’고 성명을 발표했습니다. 그런데 2009년 이사 추천권을 행사했어요. 과거 했던 말과 다르지요. 대통령에 당선된 만큼 영남대가 정치에서 자유로워지려면 손을 떼야 합니다.”

 

 -어떤 방식이 있을까요?

 

 “먼저 박근혜의 측근으로 분류된 이사들이 사퇴해야 됩니다.”

 

 지난 1월29일 최염씨는 조상 묘 3위가 있는 울산 울주군의 선산에 찾아가 절을 올렸다. 최씨 집안의 땅도 영남대의 땅도 아니다. 영남대가 민간에 팔았기 때문이다. 최염씨의 7대 조모의 산소가 있는 경북 경주 구정동의 선산도 팔았다. 두 산을 소유한 민간업체는 묘소를 이장하길 원하고 있다. 그는 “얼마 전까지 묘지 이장 촉구문이 붙어 있었다. 보기 흉해 인척들이 뽑아 버렸다”고 말했다.

 

 경주 최부자의 종손 최염씨도 이제 여든이다. 산 오르는 데 힘이 부쳐 애먼 길을 헤매고 말았다. 7대조 할아버지 최언경 어른은 이날 찾아뵙지 못했다. 내려오는 길에 그가 씁쓸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우리 집안 땅에 자신을 모시지 않아서 할아버지께서 화나셨나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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