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치 보는 남편
사랑스럽던 아내가 문득 해병대 조교처럼 변해간다. 남편은 실수 연발, 쩔쩔 매는 신병 같다. 눈치 보는 남편이 말한다.
회식, 접대, 친목회, 동창회 등 캄캄한 밤에 약속이 많은 남자들은 태생적으로 아내에게 미안하다. 또 기가 막힌 사실 하나. 술은 물이 아니다. 취한다. 취하면 제 정신이 아니다. 의식하지 못한 사이 내 손이 카드를 꺼내서 술값을 계산한다.
‘서귀포횟집 21만원 결제’
1분도 안 돼서 문자메시지를 받은 아내로부터 전화가 걸려온다.
“미쳤어? 이게 뭐야? 왜 당신이 계산을 해? 집에 들어오면 각오해.”
내가 왜 그랬을까? 호기 어린 손을 때려보지만 되돌릴 길이 없다. 이후 일주일 동안 핀치에 몰린 채 그로기 상태로 살아야 한다. 간혹 독한 놈들도 있다. 그들은 스스로 정체성을 버린 채 마치 여자처럼 산다. 술 대신 아메리카노를 마시며 수다를 떨고, 저녁 약속도 거의 잡지 않고 가능하면 칼 퇴근해서 아내와 저녁을 먹고 밤엔 아이를 돌본다. 재수 없어! 그런 놈들에게 묻고 싶다.
“그래, 그렇게 사는 게 진정 재밌는가?”
가장 무서운 것은 다른 가족과 함께 떠나는 여행이다. 그 여정에서 평소에 보지 못한 아내의 모습을 발견한다. 처음부터 끝까지 현모양처의 모습이다. 숯불에 고기를 굽는 저녁 자리에는 아내가 마련한 술도 올라온다. 맛있다. 아내가 말한다.
“오늘은 실컷 마셔.”
진심일까? 그럴 리 없다. 연애시절의 모습으로 아내가 변신했을 때 남자는 긴장해야 한다. 그러나 술은 물이 아니다. 맛있다. 더군다나 공기 좋은 강원도, 날씨도 좋은 봄밤이다. 마구 마신다. 나도 모르게 평소 남자들끼리 하던 농담이 나온다.
“여자는 말이지. 뭐니 뭐니 해도 몸매가 좋아야 해. 아나운서 00 있잖아요? 좀 좋아! 보기만 해도 살맛이 난다고. 안 그래?”
비슷한 농담을 수없이 던지지만 어쩐지 분위기가 살지 않고, 다음 날 집에 돌아오는 차 안은 한 마디로 지옥이다.
“그런 싸구려 농담을 하면 동행한 가족이 우리를 어떻게 보겠어?”, “당신 원래 그렇게 저급해?”, “당신 입을 꿰매고 싶어.”
내가 내 입을 꿰매고 싶다. 한편으로는 억울하다. 내가 언제 술 마신다고 했나? 그대가 나보고 원 없이 먹으라고 하지 않았는가? 그리고 술 마시면 쉰소리도 하고 그러는 거지. 민초의 삶이 그런 것 아닌가? 술 한 잔과 실없는 농담에 삶의 고단함도 잊고, 다음 날 열심히 일하고. 어? 아내 앞에선 꺼내보지도 못한 말이 혼자 있을 때 잘도 나온다.
간혹 독한 놈들도 있다. 가족 단위 여행 가서 와인 한 잔 정도 마시고, 시립미술관에서 하는 어떤 전시 이야기를 주제로 꺼내고. 그런 놈들에게 정말 묻고 싶다. “그래, 그런 여행이 진정 즐거운가?”
우리도 아내가 원하는 남자로 살 수 있다. 와인 한 잔에 미술을 논할 수 있다. 와인도 먹을 만큼 먹어봤고, 전시도 가볼 만큼 가봤다. 그런데, 그러고 싶지 않다. 내가 뭘 그렇게 잘못했다고 술자리에서 농담도 못 하는가? 두툼하게 썬 광어 회 한 점과 소주 한 잔을 입 안에 털어넣고 아나운서 몸매 이야기하고 싶은 남자의 타는 가슴을 평생 숨기며 살라는 건가?
그렇다. 그러라는 이야기다. 타는 가슴은 우리끼리 있을 때 불사르고, 다른 가족과 있을 때는 모네와 고흐를 이야기하라는 뜻이다. 알았다. 그렇게 하겠다. 당신이 원한다면. 아내에게 길든 결혼생활이 10년쯤 지나면 우리에게도 놀라운 변화가 찾아온다. 술 먹고 쉰소리 하라고 해도 나오지 않고, 몸매 좋은 아나운서를 봐도 아무 느낌도 없다. 술 약속이 있어도 웬만하면 집으로 향하고 아내와 함께 TV를 보다가 잠이 든다. 아내가 외친다.
“여보, 자기 좋아하는 아나운서 나왔어.” 내가 대답한다. “아, 걔? 시집갔어.”
그냥 혼자 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