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2년, 한국전쟁은 2년차로 접어들며 지긋지긋하게 흘러가기 시작합니다.
어느 한쪽의 우세가 점쳐지지 않는 분위기였지요.
중공군 인해전술 VS 유엔군 화해전술(火海戰術)
(화해전술 : 우세한 화력을 이용하여 적군의 수적인 우세를 극복하는 전술)
전장은 중공군 개입 초기와는 달리 상황이 많이 달라졌습니다.
중공군이 처음 한반도에 진입할때는 야간행군과 위장을 하며 몰래 들어왔기에 파악할 수 없었지만,
1951년1.4후퇴 이후로는 어느 정도 파악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전선이 길어지면서 중공군의 보급에도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리지웨이장군은 보급의 문제로 그들이 한 번 전투를 하면 최대 8일에 불과한 것을 파악했습니다.
정찰 결과 이러한 확신을 얻은 리지웨이 장군은 드디어 반격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유엔군은 조금씩 조금씩 북상을 하면서 중공군을 격파하기 시작했습니다.
이제는 그 실체가 눈앞에 드러난 중공군에게 유엔군의 막강한 화력을 퍼부을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중공군의 인해전술에 맞서 화해 (火海)전술로 맞설 것이라는 리지웨이는 말 그대로 실행에 옮겼습니다.
유엔군은 3월16일 서울을 재탈환했습니다.
지난 겨울 정신없이 밀려내려오며 이 전쟁에서 패배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불안감에서 회복하며 자신감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 이후로는 전선이 고착화되면서 한 뼘의 땅이라도 더 차지하려는 고지전이 전개됩니다.
그리고 국민들은 전쟁이라는 시국에 적응하기 시작합니다.
두손놓아 넋놓고 있을 수 만은 없었지요.
(우리 민족이 어떤 민족입니까? 오만가지 겪을 거 다 겪은 민족아닙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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