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지 장수 관구검

신지현 작성일 12.01.30 22:15: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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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구검(?~255)

 

관구검은 위나라에 있어 빼놓을 수 없는 명장인 동시에 우리에게는 고구려를 침공했던 악연이 있는 인물이다. 사마씨가 전횡을 일삼던 무렵 관구검은 홀로 분연히 일어나 위나라를 지키려했지만 결국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다.

 

관구검은 자가 중공이고 하동군 문희현 사람이다. 부친 관구흥은 위나라 황초 연간(220~226)에 무위태수를 지내 공적을 쌓았다. 서북 일대를 안정시켜 당시 명성이 자자한 금성태수 소칙과 어깨를 나란히 할 정도였다고 한다.

 

관구검은 그런 부친의 뒤를 이어 평원후문학이 되었고 위 명제 조예가 즉위하자 상서랑에 올랐다. 조예와 관구검은 어릴 때부터 친해 조예는 관구검을 각별히 총애했다.

 

그러나 관구검은 이런 총애를 믿고 함부로 행동하지 않았다. 오히려 조예가 무리하게 토목공사를 일으켰을 때 상소를 올려 이를 간하기도 했다. 이후 관구검은 형주자사를 지내고 청룡 연간(233~237)에 조예가 요동을 정벌하기 위해 관구검을 다시 유주자사로 전임시켰다.

 

관구검과 우리와의 악연은 여기서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다. 당시 관구검은 우북평과 요서 일대의 오환족을 제압하고 이어 사마의와 함께 요동에서 자립한 공손연을 토벌했다.

 

당시 고구려 동천왕은 서진정책을 추진하고 있었는데 위나라가 공손연을 토벌하자 결국 위나라와 대결할 수 밖에 없게 되었다. 사실 고구려와 위나라는 예전부터 소규모로 잦은 충돌이 있었다. 고구려는 동천왕 즉위 이후 서안평을 줄곧 공격하여 위나라에 압박을 가하고 있었고 관구검은 고구려를 넓은 평야로 유인하여 격퇴하려 했지만 뜻대로 되지 않았다. 

 

동천왕 20년(245) 관구검은 1만의 병력을 이끌고 현도를 지나 고구려를 공격했다. 관구검은 현도태수 겸 부장 왕기를 보냈지만 동천왕은 군사를 내어 비류수에서 위나라군을 격파하고 이어 양맥에서 다시 한번 격파했다.

 

그러나 2번의 승리로 잠깐 방심한 동천왕은 관구검의 방진(方陣)에 걸려 대패하고 수세에 몰리게 되었다. 다행히 밀우와 유옥구, 유유 등의 분전으로 가까스로 위나라 군을 격파하긴 했지만 고구려는 환도성이 불타고 많은 사람이 포로로 잡혔다.

 

관구검은 이렇듯 우리와는 악연이 있는 장수였다. 그런데 여기서 한가지 짚고 넘어갈 것이 있다.

 

<삼국사기>에서는 관구검이 밀우, 유유 등의 분전에 따라 결국 고구려를 완파하지 못하고 물러날 때 바로 낙랑을 거쳐갔다고 기록했다. 당시 관구검의 공격루트가 현도를 지나 고구려를 공격했다는 점, 퇴각할 때는 낙랑을 거쳐갔다는 점을 보면 당시 현도와 낙랑은 한반도에 있을 수 없다는 얘기가 된다.

 

평안도에 낙랑이 있다고 한다면 관구검이 평안도를 통해 다시 중국으로 돌아갔다는 이야기인데 이 말은 즉 관구검이 뱃길로 중국으로 갔다는 얘기가 된다. 그러나 관구검은 고구려를 공격할 때 육로로 공격했을 뿐 수군을 동원한 적이 없었다. 관구검이 고구려에 타격을 입혀 추격을 염려하지 않는 마당에 다시 수고를 들여 힘들게 뱃길로 중국으로 돌아갈 이유는 전혀 없다.

 

낙랑이 평안도에 있다는 말은 즉,  관구검이 현도를 나와 고구려 환도성 남쪽 압록강을 건너 평안도로 내려와 중국으로 돌아갔다는 얘기란 말이다. 전혀 말도 안 되는 루트가 그려지는 셈이다.

 

즉 이 말은 한사군이 한반도에 없었다는 주요한 근거 중 하나가 될 수 있다. 또한 훗날 수 양제가 고구려를 공격할 때 루트 중 하나가 부여도를 나와 낙랑도로 들어가려던 것이다. 만약 낙랑이 한반도에 있다면 고구려 북방인 부여도와 완전히 어긋난다. 송화강 유역인 부여도에서 어떻게 평안도로 바로 들어갈 수 있을까. 낙랑군이 한반도에 있다는 소리는 이처럼 말이 안 되는 이야기이다.

 

이는 한사군이 한반도에 있어 한반도 이북은 중국의 관할이었다(한사군 이전에 이미 요동과 요서는 고조선의 관할 구역이었다. 중국은 고조선을 부정하고 오히려 소수민족 정권으로 폄하했다)는 터무니없는 동북공정의 반박논리로 주요한 근거가 된다.

 

어쨌든 관구검은 좌장군, 예주자사 등을 역임하며 진남장군이 되었고 오나라 방면의 수비를 맡게 되었다. 제갈탄과 오나라 군을 여러차례 막아내고 오나라의 태부 제갈각이 군사를 이끌고 합비의 신성을 포위하자 문흠과 함께 지켜냈다.

 

관구검은 위나라를 위해 여러차례 전장을 누볐다. 그 때문에 위나라 조정에서도 관구검의 신임은 두터웠고 관구검도 충성심이 매우 높았다. 따라서 사마씨가 정권을 잡게 되자 그가 불만을 가진 것은 당연했다.

 

당시 관구검은 하후현, 이풍, 문흠 등과 매우 친했는데 하후현과 이풍 등이 조정에서 사마사에게 살해당하자 불안감을 느끼기 시작했다. 또한 사마사가 황제 조방을 폐위시키자 이에 격분하여 기회를 보고 있었다.

 

정원2년(255)에 혜성이 출현했는데 문흠이 이를 길조로 여겼고 관구검은 문흠과 함께 태후의 조서를 꾸며 사마사의 죄상을 폭로하고 회남일대에서 거병했다. 사마사는 예주자사 제갈탄에게 먼저 관구검을 치게 하고 직접 여양에 주둔하면서 왕기에게는 남돈을 점거하게 하고 전군에게 일러 수비를 단단히 하게 했다.

 

처음에 관구검과 문흠은 기세가 올라 진격하다가 수비가 두텁자 나아가지 못하고 다시 근거지인 수춘이 불안해지자 진퇴양난에 빠졌다. 사마사가 다시 연주자사 등애를 악가로 보내 관구검을 유인했고 등애의 군세를 본 관구검은 후퇴했다. 사마사는 그 뒤를 쫓아 관구검 군을 크게 격파했다.

 

관구검은 군사를 일으키기만 했을 뿐 구체적인 전략이나 탁월한 전술을 택하지 않고 우왕좌왕하다가 결국 사마사에게 패하고 말았다. 초창기 여러 전장을 누비며 전공을 쌓아왔던 모습은 사라지고 없었다. 결국 관구검은 이렇다 할 대응도 제대로 못하고 무너져 도망치던 중 안풍진에서 도위 장속에게 살해되었다.

 

관구검의 아들 관구전은 가족들을 데리고 피하다가 추격군에게 잡혀 살해되었고 관구검의 동생 관구수와 손자 관구중은 오나라로 망명했다. 처음에는 우리 고구려를 침공하여 맞설만큼 용맹한 장수였으나 후반에 어이없게도 쉽게 무너져버린 것이다.

 

그러나 당시 사마씨의 전횡이 심해지고 있을 무렵 이를 무너뜨리고 다시 사직을 보존하려 했던 그의 충심은 분명 위나라에 있어서 매우 필요한 것이었다. 만약 그가 영민하여 사마씨에게 제대로 대응했더라면 정세가 어떻게 흘러갈 지 모를 일이다.

 

[출처] 삼국지 위나라 명장 관구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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