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긋한 내음……. 두 사람이 처음 만난 것은 '매화원'의 꽃들이 한창일 때였다. 다리를 사이에 두고 처음 만난 두 사람, 흔들리는 눈동자는 앞으로 일어날 어떤 이야기를 암시하는 듯하다.
1. 만발하였더라.
방안을 가득 채운 쿨링팬소리, 가끔씩 들리는 딸깍딸깍 클릭소리, 그리고 모니터 불빛 외에 방에는 아무것도 없는 듯 했다. 모니터 앞에서 삐딱한 자세로 앉아있는 소년의 이름은 윤성진, 얼마 후 고등학교에 입학하기 때문에 입학 전 끝장을 보려고 무지막지한 시간을 컴퓨터를 붙잡고 있었다. 중학교 때까지 공부도 중상위권이었고 친구들과도 잘 어울렸다. 체력장에서도 가뿐하게 1급을 넘겼다. 누가 봐도 모범생이라는 말이 붙어있지만 그 뒷면의 얼굴, 취미로 보면 정신상에 조그마한 문제가 있는 것 같기도 하다.
[태유랑군의 차례입니다.]
슈퍼플레이어, 전설로 자리 잡은 게이머에게 주어지는 칭호.
성진의 턴이 돌아왔다. 얼마 전에 거금 60000원을 들여 산 삼국지11, GOA의 최신작이다. 성진의 책장에는 빼곡하게 차있는 삼국지와 관련 서적들이 즐비하고 있다. 그리고 한편에는 레어 아이템인 삼국지1에서부터 10까지 주르르 서있다. 정말 지독한 마니아다. 전부 현찰로 밀어붙이면 족히 몇 백은 될 만한 수집품들이다. 장식장에는 게임이나 만화로 나온 삼국지에 등장인물들의 피규어가 진열되어있고 연필꽂이의 필기구들에는 유명한 명도검모양 지우개가 연필에 장식되어있다. 어떻게 구했는지 그 노고가 느껴지는 신비한 물품들이다.
"슬슬 낙양을 접수해보실까?"
병력을 출진시켰다. 목표는 조조군이 진을 치고 있는 낙양이다. 낙양본성으로 200만이라는 어마어마한 대군일 집결시키기로 했다.
"후후 장장 2시간 반에 걸쳐 모은 대병이다. 죽어봐라."
전투신은 액션게임의 형식으로 진행됐다. 일주일하고도 나흘이나 걸려 키운 나의 분신 '태유랑'! 호랑이 잡이 이벤트로 얻은 주작도를 휘두를 때마다 주황색잔상이 퍼져나갔다. 일섬일섬에 적군이 6~8명씩 쓸려나갔다. 유쾌상쾌통쾌!!! 적당히 잡고 있을 때쯤 조조가 나타났다.
[역적을 멸하겠다!]
카리스마가 철철 넘치는 조조의 대사, 하지만 조조 본인이 아닌 성우의 압박인 것이다!
"빙신, 역적은 무슨.."
깐죽거리며 칼질을 하던 조조는 허무하게 주작도의 부리에 조금 쪼이더니 비명횡사했다.
"낙양접수~" [적의 총대장을 격파했다! 패잔병을 추격하라!] "잠시 쉴까?"
모니터에는 낙양을 점령하고 전투결과를 나타내는 표가 출력되고 있었다. 조금 피곤하다고 느낀 성진은 졸음을 떨쳐버리기 위해 세수를 하기로 했다.
"음.. 그러고 보니 목욕을 한지 제법 지났네..." "벌써 일주일이라고 일주일……."
성진의 등 뒤에 조금 어수룩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성희, 성진의 동생이다. 참고로 이 집은 성진과 성희만 사는 집으로 부모님은 넓디넓은 대한민국을 놔두고 외국에 계신다. 아버지는 현지사발령, 어머니는 이혼으로 별거중……. 아무튼 결국 이 넓디넓은 2층집에 귀엽지 못한 여동생과 단 둘이 생활해야 했다. 덕분에 요리솜씨라든가 빨래솜씨는 베테랑 주부급.
"음냐.. 그래.. 목욕하러 들어갈 테니 속옷 좀 가져다 줘~" "오빠는 내가 숙녀라는 걸아는 거야 모르는 거야?" "넌 내가 오라버니라는 자각을 하고 있는 거니?"
더 건드려봐야 소용없다는 것을 파악한 성희가 잠깐 째려보더니 방으로 올라갔다. 적당히 씻은 후 탕에 들어갔다. 성진은 뜨거운 물을 정말 좋아했다.
"파아.... 시원하다.... 엉? 시원해? 나도 늙었구나.. 뜨거운 물에서 시원해...라니.."
나이에 맞지 않는 건방진 소리도 잠시, 성진이 물끄러미 방금 사용한 비누를 쳐다보았다. 외국에서 들여온 초고가 초고급 비누라며 아껴서 쓰라고 하던 성희가 생각났다.
"방금 너무 과하게 쓴 것 아닌가 몰라..."
하지만 성진의 생각은 거기까지였다. 붕어에 가까운 아이큐를 발휘하며 욕실을 나올 때도 성진은 초고가 초고급 비누를 왕창 비비고 나왔다. 때 빼고 광을 낸 성진은 용모 수려한 청소년이 되어있었다. 얼마간 빗지도 않아 잔뜩 헝클어져 있던 머리는 차분함을 찾았고 촉촉하고 찰랑찰랑 거렸다. 2학기부터 계속 기르기 시작한 것이 어느덧 눈을 가리고 내려왔다. 성진의 자랑이기도 하다, 약품을 전혀 모르는 원조 '생머리'인 것이다. 얼굴은... 예의상 적당히 생겼다. 커버를 위해 머리를 기른 듯 하고 제법 잘 어울려 꽤 생겨 보인다.
"미소년 성진 부활!" "놀고 있네."
성희가 불만을 잔뜩 품은 눈으로 내 모습을 쳐다봤다. 잠시 후 그 눈은 붉게 충혈 되고 물기를 머금었다.
‘들켰나.’
사람을 괴롭히는데도 도가 있다, 기초부터 탄탄히 쌓아온 실력자의 경우 평범한 말 한마디로 상대방을 탈력시켜 뇌사직전까지도 몰아갈 수 있는 것이다. 항상 들어오던 잔소리, 몇 번을 들어도 적응되지 않았다.
목욕 뒤의 상쾌함을 그렇게 날려버리고 다시 본래의 자리로 돌아가는 성진
"자 그럼 다시 삼국통일에 발을 디뎌보실까?"
성진이 방문을 여는 순간.... 이것이 웬 일? 본체는 켜져 있는데 모니터가 먹통이었다. 절전모드도 아니고, 보호기모드도 아니다. 모니터의 전원이 꺼져있었다. 아무리 전원을 눌러보아도 모니터는 켜지지 않았다.
"코드가 빠졌나?"
그리고는 본체 뒤편으로 눈을 돌렸다. 역시 선은 꼽혀있었다.
"안 돼!!!!! 모니터 고장인 거야!!! 제길!!! 칙쇼!!! 켜져!! 켜져!!!"
모니터와 본체를 마구 두드렸다. 방학시작부터 4일간 밤잠도 안자고 의자생활을 해왔다. 식사, 화장실 이용 외에 약간의 미동도 하지 않았다. 성진의 집념도 집념이지만 거기까지 리부팅 없이 버텨준 컴퓨터에게도 감사해야할 일이었다.
"켜져!! 제발!! 안 돼!!"
흥분을 참지 못하고 본체의 뒤편에 꼽혀있는 모니터 선을 뽑았다. 논스톱 논세이브로 버텨온 충격도 있었지만 미친 듯이 아껴아껴 산 컴퓨터가 먹통인 것이 더더욱 성진을 채찍질했다.
"제발!! 제발!!!"
꼽았다뽑았다를 반복, 처절한 몸부림의 연속이다. 좀 더 심한 말로 쓸 때 없는 짓이라 하겠다.
순간!
번쩍!!!! 손에 들고 있던 모니터코드가 빛을 뿜었다. 섬광과 함께 성진은 의식을 놓았다. 눈앞이 흑 빛으로 오직 심장소리만이 귀에 들려왔다. 두근두근두근... 그렇게 심장소리만 들려왔고... 얼마나 지났을까? 눈을 떴을 때 해는 중천에 떠있었다. 이상하리 만치 밝았고, 분명 어제까지 겨울이건만 따뜻한 햇살이 느껴졌다.
"으음.... 잘 잤다.. 어쩌다 이런데서 잔거지.."
주위를 확인하며 천천히 일어섰다. 언제 왔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무래도 공원에서 잠든 듯 했다. 꽃이 한창이었다.
'음.... 여긴 어디지... 경치는 죽이는데..'
천천히 일어섰다. 그리고는 자신의 엉덩이를 털다 말고 내심 깜짝 놀랐다.
"잠옷차림이라니... 여기서 잘 작정을 하고 잔 것인가... 왜? 술이라도 마신 것인가?"
그의 앞에 조그마한 시내가 흐르고 있었으며 그 위에 얹어진 짧은 다리가 보였다. 그냥 뛰어넘으면 될 것 같은 시내에 무슨 놈의 다리인가? 그리고... 완전히 일어서서 정면을 쳐다봤을 때 머릿속이 새하얗게 물드는 것을 어쩔 수 없었다. 한순간 눈앞에 있는 서있는 것이 인간인지 아닌지 의심을 하게 되었다. 바닥까지 끌리는 하얀 천으로 가운처럼 몸을 감싸고 있는 이상한 복장, 상상이나 하던 선녀의 모습이랄까? 날개옷이 없는 게 서운했지만 그것은 그녀의 미모로 커버가 되었다. 진작 엔터테인먼트에 스카웃되서 드라마촬영이라든가 영화촬영을 해야 하지 않을까? 이런 곳에 놀고 있을 시간이 있을까? 혹시 이곳이 영화촬영장 아닐까? 그렇다면 이 여자는 신인? 저런 미모는 자기 동네에서나 학교에서나 본 일이 없지 않은가?
'여태까지 본 연예인들과 비할 수가 없구나... 신인인가... 아니... 너무 편중된 생각 아닌가? 분명 공주다 공주님.'
그녀의 눈은 계속 성진에게 고정되어있었다. 성진은 눈을 살짝 내렸다. 그녀의 몸매가 보이는 순간 얼굴이 화끈거려 다시 눈을 피했다. 행여 눈길이 들키지는 않았을까 그녀를 올려다 보았는데 아직도 성진을 쳐다보고 있었다.
“어째서 저렇게 쳐다보는 거야... 이거 무안해 죽겠네...”
한참 생각하던 성진이 문뜩 느낀 것이 있었다. 주위풍경도 이상했다. 영화나 게임에서만 보던 동향 풍의 넓은 정원, 주위에 피어있는 꽃과 매화나무가 한대 어우러져 진풍경을 이루고 있었다. 사진기라도 있으면 찍어두고 싶었다. 덤으로 눈앞에 있는 그녀까지 찍는다면 오타쿠가 되어도 좋았다.
"어떻게 이곳에 왔는지는 모르겠지만 사람을 부르지 않을 테니 곧장 들어온 곳으로 나가도록 하세요."
그녀가 한자 한자 유리구슬 굴러가듯 맑은 목소리로 말했다.
'으...음... 어떻게 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영화촬영장은 아닌 것 같으니 일단 나가자.'
"아 죄송합니다. 생각을 하며 발이 가는 데로 오다보니 이런 곳에 있군요.. 돌아 가보겠습니다. 죄송합니다."
이때다 싶어서 얼른 움직이려했다. 하지만... 정원의 출구로 보이는 곳이 사방, 섣불리 움직이면 낭패를 볼 것 같았다.
"저... 죄송합니다만……. "뭐죠?"
그녀가 조금 놀란 듯 움찔하며 대답했다. 왜 놀라는 것일까..
"나가는 길을 모르겠습니다."
그녀가 이상하다는 듯 성진을 훑어봤다. 그리고는 이내 고개를 끄덕이며 성진에게 말을 걸었다.
"거동을 보아하니 손님의 행색은 아닌 것 같고 하인이구나.. 온지 얼마 안 된 게냐? 길을 잃은 거로구나?"
'하..하인... 음... 갑부집 따님인가.. 하인을 부리는 집인가... 부럽다.. 어버이! 어찌하여 저는 평민이란 말입니까!! 결국 그녀는 오르지 못할 나무인가!!! 잠깐... 괜히 사실을 말하면 불법침입자가 된다.. 일단 그렇다고 해둘까.. 어차피 탈출만 하면 모르는 사람이다.. 아니 조금은 아는 척 해도 되겠지? 아 비극적이야... 첫눈에 반한 사람이 공주님이라니..'
“지금 내 이야기 듣고 있는 거야?” "아..아! 예.. 제가 길눈이 어두워서... 길을 못 찾겠습니다." "후후.. 이름이 무어냐?"
'음.. 본명을 대면 안 되겠지?'
이런 생각을 하는 성진의 입에서 무언가가 튀어나왔다.
"유랑입니다."
성진은 아차 했다. 표정으로 드러나지 않게 최대한 관리를 했지만 조절이 풀려 어색하게 웃고 말았다. 거울이라도 있었다면 표정이 가관이라고 한바탕 웃으며 굴렀을 것이다. 앞에 있던 소녀도 비슷한 경험을 한 듯 입을 가렸다. 표정변화가 있는 듯 했다.
'이런 본명이 있을 리가 없잖아!!! 저렇게 번지르르한 이름을 내놓다니... 특이하다고 물으면 순수한글이름이라고 할까..'
'음... 지금 가는 곳이 더 복잡한 곳이면 어떻게 하지? 나갈 수 있을까? 내 잠옷은 신기한 복장인가? 향이라니.. 비누향 말하는 건가.. 역시 비싼 것이 효과를 발휘하는 것인가? 말투도 조금 이상하고... 생각해보면 건방지기 짝이 없다.'
한참을 따라가다 보니 개방형 복도가 나왔다. 슬리퍼소리가 나지 않도록 조심조심 발걸음을 옮겼다. 그것도 그럴 것이 부근이 조용하고 바람소리와 나뭇잎소리만 나는지라 행여 슬리퍼 끄는 소리만 나면 실례를 범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한참을 걸어가고 있을 때 마침 가는 길목에 문을 열고 나오는 사람이 있었다. 그대로 보자면 할아버지다. 마음씨 좋게 보이는 사람이다.
"오, 초아야 매화원에 다녀오는 길이냐?" "예, 오늘따라 매화원의 풍경도 만발입니다." "그렇다면 이 아비도 한번 다녀와야겠구나.."
소녀의 이름이 초아인 듯하다. 귀여운 이름이라고 생각하고 있을 때, 초아를 흡족하게 쳐다보던 할아버지가 나를 쳐다보기 시작했다. 초아도 눈치 챈 듯하다.
"아.. 새로 들어온 하인인데 마음에 들어 데리고 왔습니다." "데리고 왔다고는 하나 표정은 마치 끌고 다닌 것처럼 보이는구나? 저쪽은 매화원의 방향이 아니냐? 그렇다면 매화원에서 왔다는 것인데... 게다가 옷차림은 이방인의 것이요, 관상이 범상치 않을 뿐 아니라 무엇인가 타고 난 듯하구나. 그리고 분명 남아들이 거하는 곳은 반대쪽이 아니더냐?"
성진이 흠칫 놀랐다. 자기 앞에 서있는 사람이 옆에 있는 사람보다 더 보통사람이 아님을 느꼈기 때문이다. 조잡하고 정밀하게 상대를 파악하고 약점을 동시에 타격하는 어투는 정치인이라 해도 손색이 없었다. 음.. 분명 정치인일 꺼다. 괜히 복잡하게 생각하고 있는지는 모르지만 방금 전의 한마디로 추리력이 얼마나 날카로운지 느껴졌다. 모범생은 이런 것도 느껴야 하는 생물인 거다. 초아가 할배의 물음에 대신 응답했다.
"화원의 바위위치를 조금 옮겨보았습니다. 일손이 필요해 부른 것입니다. 염려놓으소서. 곧 입성하셔야 할 터인데 너무 신경 쓰지 마시지요." "허허허, 초아 내 말이 옳구나. 그럼 다녀오마." "다녀오시옵소서."
무서운 할아버지는 초아의 인사를 받고는 우리가 온 매화원 쪽으로 향했다.
"아.. 들키면 어쩌나 했습니다. 그런데 저 사람은 누구죠?" "훗, 주인을 모르는 게냐? 저분이 바로 사도 왕윤님이시다."
순간 말문이 막혔다.. 그냥 왕윤이라고 했다면 이름으로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사도황윤이란다..
"하... 설마 저 할아버지랑 삼국지의 사도 왕윤을 착각하시는 것은 아니겠죠?"
다시 한 번 초아가 이상한 눈으로 성진을 보았다.
"삼국지라니? 행색만이 아니라 하는 말도 이상하구나?" "지금이 몇 년이죠?" "...189년 4월이로구나... 그런데 무슨 일이냐?" "농담이죠? 상당한 삼국지마니아시네요, 그냥 왕윤은 알아도 사도 왕윤이라고 자세히 알고 있는 사람은 드문데 말이죠."
초선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조금 짜증이 섞인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머리가 이상하게 된 모양이구나. 같이 있다가는 내 머리가 어지럽혀지겠다."
이 소리를 들었는지 못 들었는지 성진은 천천히 머리를 식히면서 단순하게 생각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래, 어쩌다가 후한으로 넘어온 모양이군.. 그래그래 지금은 190년대야, 아마 영화를 찍고 있는 중이거나 몰래카메라일 거야.'
계속 자기 세뇌를 하던 성진이 문뜩 떠올린 것은 바로 앞에 있는 소녀를 부른 명칭이었다. 분명히 초아라 그랬다. 왕윤에게 초아라 불렸다면...
'초선역인가.. 멋진데? 제작진도 힘들었겠어? 아직 왕윤이 그 말을 안 한 시기인 모양이구나...'
"이 길을 쭉 따라가면 숙소가 보일게다." "감사합니다. 저.. 뭐라고 부르면 좋을까요?" "그냥 편하게 부르거라."
'펴..편하게 부르는 게 어떻게 부르는 거지...'
"그..그럼 그냥 초아라고... 불러도 될까......"
잠시 둘 사이에 찬바람이 불었다.
'음.. 뭔가 잘못이..?'
그때 초선의 얼굴이 생기가 돋았다.
"그거다. 그거! 난 여태까지 이곳에서만 머물러 친구가 없구나. 네가 처음으로 존칭을 쓰지 않았으니 이제부터 초아의 친우가 되는 거다."
초선이 생글생글 웃었다. 주위가 환해진 듯 하다.
'초선이란 사람은 정말로 상냥한 사람이었나 보구나.. 실존인물이라는 것도 대단하지만 저토록 상냥한 사람이면 누구나 빠지겠다. 미인계라는 것이 사실이었구나.. 잠깐.. 그렇다면 몇 편 후에 이렇게 귀여운 애가 여포랑 동탁에게... 음흠흠, 길게 생각할 것 없이 뭐 이쯤에서... 끝을...'
"저... 그럼.. 초아야 이제 그만 밝히는 것이 어때? 몰래카메라지?" "카메라? 그게 뭐지? 신기한 말만 하는구나?" "그럼 나보고 지금이 후한 189년이고 하진이 죽고 동탁이 헌제를 옹립하고 정권을 잡는 시기라고 믿으라고? 동탁이 이후에 어떻게 죽지? 어렵지? 이렇게까지는 모르겠지? 순순히 자백해, 삼국지에 대해서는 자부심도 있다고."
에헴~ 하는 표정으로 팔짱까지 꼈다. 본래는 이렇게까지 쏘아붙일 생각은 아니었지만 속는다는 것이 기분 좋게만 받아들일 순 없었기 때문이다. 나중에 다른 사람들이 이 프로를 재미있다고 웃으며 볼 것이 아닌가? 지식에 관해서는 자신 있었다. 관련 서적과 자료, 수많은 소설과 정사 연의를 모두 읽고 분석한 성진이다. 몰아붙여 멋있게 방송을 타고 싶었던 것이다. 초선이 조금 놀란 듯 성진을 바라봤다.
'얼굴에 쓰여 있다. 궁지에 몰렸다고, 후후.. 항복하시지'
성진은 기대했다. 자신에게 ‘지금까지 몰래카메라였습니다!’라고 소리치며 나오는 방송관계자들을, 하지만 초선의 입에서는 예상 밖의 대답이 나왔다.
"정세에 대해 한 식견하구나? 정말 하인 맞는 거야? 정말이라면 하인으로 쓰기는 아깝구나.. 아버님도 머지않아 동탁이 자기 명을 재촉하리라 하시더구나. 동탁의 성격문제로 주위사람들과 대립할지도 모른다고 하셨어. 여태까지 아버님의 예측을 벗어난 일이 없었건만.. 아버님과 같은 예측을 하다니.. 삼국지라 함은 비서라도 되는 것이냐?"
‘읏.. 고수로군, 받아치기인가? 하지만 이 말대로 라면.. 이 이야기에서 왕윤은 상당한 지략가란 말이로군.. 이미 예측을 하고 있단 말인가? 그것도 그렇고.. 초선이란 인물도 상당히 영악한 인물로 나오는구나. 새로운 삼국지의 풀이다. 재미있는데?’
성진은 할 말을 잃었다. 조금 전의 각오는 흐지부지 되었다. 끝까지 발뺌을 하려는 것인지, 실제인지 알 수 없었다. 성진의 결정은 일보후퇴였다. 자신이 곤란한 상황이 아니라면 조금은 속아주어도 상관이 없을 것이라고 판단했다.
'그..그래 일단 맞장구 쳐주고 그 다음 일은 역시 나중에... 출연료정돈 주겠지.. 학교는... 아 그래! 혹시 여기서 뜨면 난 연예계에 진출하는 거구나! 후후, 학교수업정도는 빼주겠지?'
“뭘 그렇게 생각해?” “아..아니 그런 것이 아니고.. 그냥 이리저리 소문이.. 들은 것이 있어서 정리 좀 하려고.. 그건 그렇고 초아도 대단하네? 그런 걸 다 기억하고 있으니?” “...별거 아냐..”
수줍다는 듯 살짝 꼬는 초선, 문뜩 무언가 알아차린 듯 움직였다.
"유랑아? 그럼 나는 가볼 테니 나중에 보자~" "으..응! 잘 가! 꼭 나중에!"
그녀가 살포시 웃으면서 발을 옮겼다. 거리가 멀어졌다. 조금 떨어졌는데 그리움이 생겼다. 뒷모습도 예술이다. 왠지 모르게 씁쓸하고 가슴이 아팠다. 저런 여자애가 내 여자 친구였으면…….
"저, 저기!!" "응?"
뒤를 돌아보는 초아 옷깃이 흔들리는 것이 선녀의 자태이다. 심장이 가슴을 찢을 것만 같았다. 부르긴 했는데 그 다음의 말을 생각 못한 성진이었다. 문뜩 아까 못한 말이 떠올라 소리쳤다.
"폐월이라고 불려도!!! 추...충분하다고 생각해!"
초아의 두 볼이 발그레해졌다. 대꾸하지 않고 도망치듯 저편으로 멀어져갔다. 치마끝자락이 사라질 때까지, 눈길을 놓지 않았다.
“소설쓰냐... 내가 한 말이지만 정말 닭살이군... 으으... 소름돋아...”
이리저리 비틀고 사시나무 떨듯 바들거리던 성진, 그녀가 사라진 출구를 계속 보고 있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