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앞에 나타났을 때, 나에게는 놀라움이나 낯가림보다는 오랜 그리움. 진창 되어 갈 길을 잃었으니..
눈길을 피할 수 없어 계속 바라만 보았구나..
3. 아무리 생각해도 알수없다.
초선의 폭탄선언이 있은 후 성진는 계속 초선의 말을 따라야 했다. 자신을 친우로 대해준다고 했건만 현실은 일거리가 늘어나 성진이 상상했던 것처럼 달콤하지 않았다. 매화전의 가지에 그네를 걸고, 어지럽게 흩어진 화단의 돌 조각들을 주워 모으는 등 정원의 잡무를 처리했다. 얼굴색 하나 바꾸지 않고 부탁하는 말투로 이것저것 시키며 부려먹는 초선을 보며 성진은 고수에게 잘못 걸린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전문적으로 이런 일을 하는 ‘조련사’일지도 모른다는 의심도 생겼다. 하지만, 여우의 미향은 이미 머리끝까지 차 올라 약효가 극에 달했다. 성진은 불만을 이야기하려 할 때마다 초선의 눈웃음에 밀려 한마디도 못하고 쫓겨 나오는 신세였다.
'이런 일이 진정 친구에게 부탁할만한 일이란 말인가? 만약 그렇다면 그녀에게 친구가 없는 이유를 알 것도 같군. 그래도.. 역시 영웅은 미녀에 약하다지..'
"차라리 마당 쓸기가 좋았다!"
연못의 잉어들에게 먹이를 던지며 투덜거렸다. 그의 화풀이대상은 이 잉어들이었다. 이 연못에 올 때마다 푸념과 욕설을 잉어들에게 뱉어놓은 것이다. 그 효과가 있었는지 연못의 잉어들은 다른 곳의 잉어들과는 다르게 먹이를 줘도 별로 반기는 기색이 없어졌다고 한다.
'역시 정원이라는 것은 손이 많이 가는구나. 큰 정원 딸린 집에서 살겠다는 목표가 사그러든다...'
물론 중간에 빠져나가려는 시도도 했으나 그때마다 어디서 지키고 있었는지 초선이 나와 말을 걸어 그 기회를 잃었다. 얼떨결에 왕윤의 처소에 머물게 된 후, 어느덧 4번째 태양을 맞이하게 되었다. 그간 이상한 점을 느꼈는데 처소곳곳을 뒤져보아도 남하인은커녕 여하인 조차 보이지 않는 것이었다.
'정리해고인가... 아니면 인건비가 모자라서 일을 안 준건가.. 혹시... 그전에 생각한 대로 나만 부려먹기 위해서인가!'
상상의 샘은 마를 줄을 몰랐고 성진의 머릿속에는 결국 광선이 오가는 장면까지도 떠올랐다. 성진은 이른바 '망상가'라고 불리는 존재였다. 집에서야 책이라도 보며 공부에 집중할 수 있었지만 이 곳 생활은 그저 '일 끝나면 쉬고 일 끝나면 쉬고'가 반복되는 패턴이었고, 그 중간 중간의 쉬는 시간에 성진이 하는 일은 온갖 공상과학물을 떠올리는 것이었다. 그렇게 넋을 놓고 있어, 어느새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인영의 존재를 잊어버리고 말았다.
"험험!"
어린아이의 헛기침소리가 들려왔다. 정신이 든 성진이 소리가 난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이제 막 10살이 조금 넘었을 듯한 여자아이가 자신을 쏘아보며 서있었다.
"귀엽게 생겼네? 넌 누구니?"
약간의 썩은 미소를 섞어 구토를 유발시킬 만한 목소리로 말을 건넸다.
"그 아이는 '사희'라고 해, 아버님께서 소개해주신 영특한 아이야."
성진은 사희라고 불린 아이를 힐끗 쳐다봤다. 어딜 찾아봐도 영특함보다는 여리고 앳되보였다. 흰 천, 리본쯤으로 보이는 길다란 천으로 완전히 양갈래로 나눠 묶은 흑발, 그것도 무릎까지 내려오는 긴 머리카락이었다. 머리카락 끝 부분도 흩어지지 않도록 모아 묶은 것이 흡사 '맥도널드'를 연상시켰다. 제법 큰 눈으로 눈초리가 조금 올라가 보였는데 그것 때문에 인상이 크게 날카롭거나 하는 느낌을 주진 않았다. 흰 저고리에 겉은 어두운 보라색의 원피스쯤으로 치맛자락이 무릎까지 내려왔는데 자세히 보니 속치마를 껴입은 모양으로 속치마는 종아리까지 내려왔다.
'처음 보는 복장이로군... 이것이 시녀들의 복장일까? 초선이 입어도 어울릴텐데...'
"반가워! 나는 '유랑'이라고 해, '오빠'쯤으로 부르면 될 꺼야." "어."
다시 한번 썩은 미소를 곁들여 구토를 유발시킬 만한 목소리를 들려준 성진, 하지만... 사희의 반응은 덤덤했다. 목소리 하나만 놓고 본다면 정말 귀여워서 깨물어주고 싶은 심정이었으나, 그 톤은 흡사 국어 책을 읽는 듯 전혀 감정이 실려있지 않았다...
'최대한 성의 있게 말을 걸었건만... 인사를 저런 식으로..'
"저... 유랑아? 사희는 원래 말을 잘 하지 않아..." "원래 말이 없다고?" "벙어리는 아니지만, 꼭 필요한 말이 아니면.."
초선의 해명을 듣고 조금씩 표정이 일그러지던 성진은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유랑의 일을 거들어주게 하려고... 그럼 난 볼일이 있어서 가봐야겠어."
그녀만의 필살기인 살인미소로 성진에게 인사한 다음, 사희의 볼을 쓰다듬어주고는 매화원 출구저편으로 사라졌다. 도와줄 사람이 한사람 늘었다는 점에 안도를 해야할까, 아니면 그 도와줄 사람에 대한 불평을 털어놓아야 할까, 성진은 복잡한 심정으로 그녀가 떠나간 곳과 사희를 번갈아 보았다.
'뭔가 혹 하나를 붙여주고 간 느낌이군.'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옆에 서있는 이 꼬마가 짐이라고 느껴졌다. 가까워져 가는 두 사람 사이에 끼어 온갖 방해물로써 발목을 잡을 듯한 느낌도 들었다. 칼 같은 한마디가 초선이 빠져나간 빈자리를 메웠다.
"재수 없어." "그래.....,,,,?!?!?! 지..지금 뭐라고?" "재수 없다고."
뭔가 환청을 들은 것이 아닌가하는 의문이 들었다. 조금 전과는 다른 제법 성숙한 목소리로 진지한 대사를 뿜어낸 것이다.
"누, 누가?..... 초...초아가 재수 없어?" "네가 재수 없어."
성진의 입이 쩍 벌어졌다. 초딩꼬마가 방금 자기를 보고 '재수가 없다.'라고 쏘아붙인 것이다. 그것도 처음 만난 사람에게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 말이다..
"....너... 언제 봤다고 초딩주제에 반말이야? 이게 오프라인이냐?" "흥"
화가 머리끝까지 올랐으나 그렇다고 사희를 쥐어박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행여 초선에게 달려가 고자질이라도 하면 그간 상냥했던 자신의 이미지가 깎여나갈 가능성도 있었기 때문이다.
'초선만 아니면 너 같은 꼬맹이는 그대로 단박에..'
사희와 성진의 첫 대면이후, 두 사람 사이에는 한동안 대화라고 할만한 대화가 없었다. 의사소통이라고 해봐야 가끔 째려보고 고개를 획 돌려버리는 것이 전부였다. 두 사람 사이에 한랭전선이 생성됐다.
‘저 꼬마.. 어린 나이에 의외로 빈틈이 없구나.’
사희의 손이 움직이는 곳마다 풍경이 조화와 안정을 찾아갔다. 초선에게 잡혀 ‘정원사’일을 시작한지 3일째 되는 초보 성진의 눈에도 대단해 보일 정도로 확연한 차이였다.
“그렇게 열심히 하지 않아도 되는데?” “신경 쓰지마.”
이번에도 거침없이 싸늘한 목소리로 대화에 가위질 했다.
‘정말 열 받게 하는 녀석이다. 건방지고 무뚝뚝해서 도무지 좋은 점이 보여도 정이 생기지 않는구나..’
“그래도 니가 와서 조금 덜 심심한 것 같다.”
평소 주위 사람들에게 무시당해본 경험이 없어서 이런 상황에 대한 적응력이 부족했다. 성진이 이 말을 하기 위해서 얼마나 큰 인내심을 발동시켰는지 모른다. 언제까지 같이 있을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관계개선은 필요불가결의 사항이라 생각됐기 때문이다. 사희가 손을 쓴 덕분인지, 아니면 자신이 일에 숙달된 때문인지, 전날 자기 혼자 할 때보다 일을 일찍 끝낼 수 있었다.
‘뭔가 빠진 듯한 기분이 들지만 그리 중요할 것 같진 않구나..’
매화원을 빠져 나와 언제나처럼 본관계단에 앉아 허공을 쳐다봤다. 약간의 땀으로 축축해진 잠옷이 살에 달라붙어 조금 답답함을 느꼈다.
“자, 여기 매실차.”
초선이 나타났다. 언제나처럼 인기척도 없이 다가온 것이다. 그녀가 내민 찻잔에서 안면근육이 들썩일 만큼 침샘을 자극하는 향이 풍겨져 나왔다.
“매실은... 이곳에서 얻는 거야?” “그래, 이맘때에 생기는 열매들로 건매실을 만들기도 하고.. 매실 즙을 만들어 병에 담거나.. 그런 식으로 비축해두고 있어.” “매실원액 돈주고 장만하려면 여간 비싼 것이 아니어서... 아! 차 잘먹겠습니다.” “응, 또 있으니 마시고 싶음 말해. 사희야? 너도 이리 와서 매실차 마셔.”
기둥 뒤에 숨어있던 사희가 쪼르르 달려왔다. 왜 숨어있었는지, 언제부터 숨어있었는지는 불명이다. 차 한 모금을 축이자 입안 가득 매실의 진한 향이 퍼졌다. 예전부터 주머니에 동전만 생기면 ‘몸에존 매실’이나 ‘첨매실’등을 즐겨 마셨던 성진에게 고품질 매실차는 더 없는 행복감을 안겨주었다.
“한잔 더!”
하지만 ‘음미’라는 단어는 모르는 듯 했다.
하늘에는 구름인지 진짜 솜사탕인지 구별이 안가는 형상의 구름 한 쌍이 본관처마에 걸려 움직일 생각을 않고 머물러 있었다. 여유로운 시간이 계속되면 될수록 성진의 눈꺼풀은 점점 무거워졌다. 사희는 초선의 다리를 베고 이미 꿈나라에 가있었다. 성진이 그 모습을 보고 입을 열었다.
“모습만 놓고 본다면 영락없는 자매로군..” “날 언니처럼 잘 따르니까 나도 동생처럼 대해주고 있지.. “자는 모습은 여느 아이들이랑 다를 바가 없는데.. 원래 그렇게 무뚝뚝하고 말이 없는 아이야?” “무뚝뚝하다니? 말은 없어도 정이 많은 아이야. 한 걸음 한 걸음에서도 무언가 다치지 않을까 걱정을 하는걸, 사람을 대할 때도 마찬가지야. 자신의 말에 상대방이 상처를 입을까봐 두려워해, 느낄 수 있어, 그래서 말을 신중하게 한다는 걸....”
‘내가 갖고 있는 이미지와는 완전히 다르군, 다른 사람을 생각하고 있는 것 같다. 아까 내가 들은 말들은 뭐란 말인가? 신중하게 생각하고 내린 답변이란 말인가?’
어린아이답지 않은 긴 속눈썹이 사르르 떨렸다. 엷게 미소를 짓고 있는 표정이 좋은 꿈이라도 꾸는 듯 했다.
“자는 모습만큼은 그럴 듯 하군..” “뭐라고?” “아, 아냐...”
시간이 가면 갈수록 성진은 자신에게 무언가 빠진 것 같다는 느낌이 점점 커지고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그 해답을 얻어낼 수 있었다.
‘컴퓨터를 안하고 있어..’
현대인들에게 있어서 이제 그 존재감이 더 없이 커진 컴퓨터, 인터넷에 의한 끊임없는 정보습득, 그리고 그 과정에서 생겨난 증후군, 중독증이다. 성진도 졸업 후 컴퓨터에 빠져 얼마 전까지 대책이 없는 미디어중독증 환자였다. 단 하루만 컴퓨터를 하지 않아도 자신을 암습 해오는 불안감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다. 자신도 느낄 수 있을 만큼 신경이 날카로워진 적도 있었다. 그런 그가 이곳에 머문 지 이제 4일째, 그 동안 금단현상과 비슷한 일조차도 일어나지 않았다. 특별히 몸을 혹사시켜 피로로 물리친 것도 아니었다. 다만, 컴퓨터에 관련된 일을 모조리 잊어버리고 있었다.
‘신기한 일이다. 마치 없었던 일처럼 기억이 나지 않았구나.. 없었던 일? 그러고 보니 정말로 없었던...’
꾸르르르륵~ 뱃속에서 요상한 소리가 들려왔다.
“배고파...” “그렇지... 슬슬 식사시간이로구나. 사희야? 가서 식사준비 좀 해줄래? 오늘은 소월정에서 먹자꾸나.” “예, 아가씨”
순간 성진은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예상을 깨고 귀엽고 가녀린 목소리로 대답한 것이다. 정원에서 들렸던 가위부림이 머릿속에 맴돌았다. 스르르 멀어지는 사희를 보며 한편으로 존경심이 느껴졌다.
‘정말 심심지 않은 구경거리야. 사람이 저렇게 바뀔 수 있다는 자체로 베테랑 연기자다.’
성진은 초선의 안내에 따라 본관뒤편으로 한참 이동했다. 본관 뒤편에 있는 문을 넘어 별관이 지어진 곳과 또 다른 문, 자물쇠가 걸려있어 건너편을 보지 못한 성진이 후문이라고 생각했던 문을 지나갔다. 그리고, 그곳을 들어간 두 사람의 눈앞에 펼쳐진 것은 산과 작은 집 한 채, 그리고 거대한 바위 위에 지어진 정자 한 채였다.
“이곳은 도대체...” “뭐 잘못 된 것이 있어??” “여긴 도대체 어디야?”
성진이 정자 쪽으로 발을 옮기며 물었다. 정자에 다가간 그의 눈에 들어온 것은 자신의 밑으로 펼쳐진 제법 높은 절벽이었다. 그리고 자신의 앞으로 펼쳐져 있는 산을 바라보았다. 한번씩 담 너머로 볼 때마다 그저 뒷산이라고 생각했지만 이곳에 와서 보니 차원이 틀렸다. 정말 웅장한 산이 펼쳐지고 있었던 것이다. 아마도 이 처소가 산봉우리쯤에 자리를 잡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여...여긴... 산봉우리... 인가?” “응.” “지금까지 산에 있었어? 그리고.. 이거 분명 산 속에... 집을 지어놓은 거잖아?” “그래. 뭐 잘못됐어?” “규모가 작은 것도 아니고... 이렇게 넓은 곳을?” “무슨 소릴 하는 거야? 여기가 어딘지 모르는 거야?”
다시 한번 주변을 돌아보는 성진, 눈에 들어오는 경치는 지금까지 들어온 한반도지리지식을 갈아엎을 만한 광경이었다. 구름 층에 삼켜진 봉우리들, 삼켜졌음에도 불구하고 둘레로 예측하건대 중턱쯤에 걸려있는 듯 했다. 천천히 고개를 저으며 초선에게 말을 건넸다.
“여기가 도대체 어디쯤이야? 이 산, 이름이 뭐야?” “여기가 어딘지 모른다고? 너, ‘화산’을 모르면서 어떻게 ‘연화관’의 하인이 된거야?”
성진은 순간 숨이 턱 막힘을 느꼈다. 화산 연화관, 삼국지에 관해 여러 가지 자료를 모으던 때에 들어본 명칭이다. 무협지에서 자주 등장하던 화산, 중국 오악 중의 한 곳에 지어졌단 소리다.
‘연화...연화....연화..... 연화봉... 화산의 서봉이구나...... 난 정말로 중국에 있는 것인가? 자고 있는 사이에 중국에 오다니.. 게다가.. 이런 건물이 있었단 말인가..’
그의 머릿속에 한 가닥 빛줄기가 스쳐지나갔다. 왕윤이 살고 있던 시대, 제후들의 대립으로 나라가 혼란에 빠지고 수많은 영웅담과 전략전술이 판을 치던 시대... 그저 헛소리라고만 생각했던 그들의 말들...
“그 부분에 관해서 할 이야기가 있는데.. 내가 농간에 빠진 것이 아니고 이곳이 정말 ‘한나라’라고 한다면 난 이곳에 있을 사람이 아니야..” “뭐??” “확실한 물증을 잡거나 지금 상황이 정리가 되는 데로 설명해 줄 테니 그때 까진 기다려 줘.. 아직은 의문점이 많거든..”
초선은 이해가 안된 듯 고개만 갸우뚱거렸다. 성진이 소월정에서 산새를 둘러보고 있을 때 사희가 도착해 초선에게 쪼르르 달려갔다.
“아가씨? 식사준비가 끝났습니다.” “알겠다. 차려오너라.”
별안간 미녀6명이 쟁반을 들고 난입했다. 한 명 한 명의 미모가 꽃과 같았으며 저마다 성숙한 여인으로써의 매력을 물씬 풍기고 있었다. 쟁반을 움직이는 손이 소월정 쪽으로 이어졌다.
“저... 저럴 수가.. 저런 누님들이 어디서 나타난 거야?!”
군침 도는 향기에 고개를 돌린 성진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소리쳤다. 사실 그가 놀란 일은 그녀들의 자태 때문만은 아니었다. 이곳, 연화관에 머물면서 제대로 된 인기척을 느끼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녀들이 어딘가에 출타하였거나 숨어있지 않은 이상 눈에 띌 것은 자명했다.
“그녀들을 만난 적이 없어?” “한번도...” “신기한 일이네... 연화관의 거의 모든 잡무를 처리하는 시녀들인데... 혹시 쑥스러워서 피한 건 아니야? 소개해줄까?” “절대 아냐!!......... 하지만 소개는 필요할 것 같은데.. 되도록 자세하게!” “그, 그래..... 그런데... 방금 무서웠어..”
과연 성진의 눈이 불타오르고 있었다. 이미 이성을 잃은 짐승의 눈이었고, 계속 그녀들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녀들은 음식을 모두 정자 안의 탁자에 차려놓은 다음 그 옆에 주르르 늘어섰다. 이제 성진은 무언가를 바라는 어린아이의 눈빛으로 초선의 입을 응시했다.
“그, 그러니까... 아버님께서 그녀들을 의자매로 묶어주셨지... 그녀들의 악기연주가 뛰어나서, 타지에서는 그녀들을 보고 ‘연화환녀’라고 불려.." “악기를 다룬다고?! 멋지다!!" "편종의 ‘소월’, 생황의 ‘효령’, 쟁의 ‘운진’, 비파의 ‘추선’, 얼후의 ‘소소’, 금의 ‘임경’으로 그 중에 소월이 맏이야.” “언제 한번 연주 들려 줄 수 있어?” “음... 소월아? 해줄 수 있어?” “예, 아가씨.”
‘나이스!! 중국 전통음악을 공짜로 들을 수 있겠군.. 기대되는데..’
“준비가 필요하니 조금만 기다려주시길..” “악기를 옮기는 건가요? 저도 도와드리죠.”
이때다 싶어 나선 성진, 하지만 소월의 다음 한마디에 무릎을 꿇어야 했다.
“보석보다 귀한 악기들이라서 행여 피해가 갈까 우려되옵니다..” “그럼... 옆에서 구경만...” “악기를 구경하고 싶은 거야?”
초선이 물어왔다. 성진은 머리를 긁적이며 끄덕였다.
“그럼 내가 구경시켜줄게. 저들은 개인악기를 따로 가지고 있으니까 따라가도 소용없어. 별채에 연회용으로 수집해두신 악기들이 있을 꺼야.”
듣도 보도 못한 전통요리들을 맛본 성진은 다시 초선을 따라 별채로 향했다. 별채는 몇몇 방을 제외하고는 모두 창고로 쓰는 듯 했다. 아니, 창고이기보다는 소형박물관으로 보였다. 왕윤은 상당한 수집광인 것 같았다. 주위를 둘러보던 중 성진의 눈에도 낯익은 물건이 있었다. 모래시계모양의 악기... 모양은 조금 다르지만 그것은 자신이 중학교에 다닐 때 재미로 든 특활에서 다루던 것이었다.
“저것은... 장구?” “뭐가?” “저거... 생김새는 조금 다르지만.. 장구라고 하지 않아?” “아! 장구가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저건 그런 이름을 갖고 있지 않아. 저건 ‘갈고’라고 해.”
분명 장구와는 생김새가 달랐다. 줄을 조이는 부전이 양쪽에 달려 있었다.
“음... 나 비슷한 악기를 치던 적이 있어.” “정말? 갈고는 연주하는 것을 본적이 없어. 할 수 있어?” “...... 치는 방법이 다를 지도 모르지만... 할 수 있을 것 같기도..”
그녀는 악기가 놓여있던 선반 밑에 달린 서랍에서 무언가를 뒤적거렸다.
“찾았다! 여기 갈고채!”
그녀가 준 채는 두 개였다. 둘다 같은 모양. 장구의 열채와 같았다.
“그.. 그것뿐?” “이거 맞는데? 저 서랍에 모두 분류돼서 들어 있다고..”
‘양쪽 다 저 채로 치는 악기인 모양이군. 모양만 다른 것이 아니잖아..’
“음... 다른 걸 찾아봐도 될까?” “뭔가 다른 모양이네? 그렇게 해.”
성진은 조심조심 서랍을 뒤졌다. 여러 서랍을 열 때마다 비슷비슷하지만 어딘가 분위기가 다른 채들이 가득했다. 한참 뒤지던 성진은 8번째로 열어본 서랍귀퉁이에서 궁채와 비슷한 모양을 한 채를 보았다.
“그것은 박채잖아? 박을 칠 때 쓰는 거라고..” “박채? 박을 칠 때도 채를 쓸 필요가 있어?”
성진은 몰랐다. 중국의 전통 악기 중에 ‘박’이란 것이 있었다는 사실을..
“이 몸은 이걸 쓰시겠단 말씀이야, 핫핫!”
많이 해보던 솜씨로 채를 잡는 성진, 그런 성진을 보고 초선이 걱정스런 목소리로 말했다.
“정말 이상하게 잡는구나.. 그렇게 잡고서 칠 수 있는 거야?” “물론이지!.... 그런데.. 여긴 좁아서 울릴 것 같은데.. 밖으로 나가자.” “정말? 그렇게 소리가 클 것 같진 않은데..”
흐뭇한 표정으로 갈고를 들고 유유히 걸어나가는 성진, 평소 사극이나 영화에서처럼 경치 좋은 절벽에서 폼잡고 쳐보고 싶었던 소망을 풀 기회였다. 그간 쌓인 스트레스도 그의 의욕이 충천인 이유중의 하나였다. 절벽 가까이 자리를 잡고 앉은 성진은 부전을 조여 올렸다.
“축수를 너무 세게 조이면 찢어질 지도 몰라... 그리고 한쪽은 왜 조금만 올렸어?” “축수?” “방금 건드린 것 말야...”
그의 손이 바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갑작스런 큰소리에 놀랐는지 초선은 살짝 뒤로 물러나 있었다. 갈고의 소리가 산을 울리고 메아리로 되돌아왔다. 대한의 옛 조상들의 소리가 화산에 울려 퍼졌다. 성진이 중학3년 동안 겪어온 대회들이 그의 가락에 연륜을 더하고 있었다. 초선은 처음 들어보는 음색에 거부반응을 보였으나 장단이 어느 정도 무르익자 고개를 끄덕이며 박자를 맞추었다. 그리고 한편으론 성진의 갈고를 넘나드는 손동작과 광적인 몸 동작을 보면서 신기해하는 표정이었다. 사희도 초선의 옆에 자리를 잡고 연주를 듣고 있었다. 이윽고 연주가 끝났다.
“후아... 겨우 몇 달 안쳤다고 팔이 굳었네.. 에구 힘들어..” “와아!! 유랑!! 멋지다!!” “존함이 어찌되십니까?”
목소리가 들리는 곳에는 조금 전부터 와있었던 연화환녀들이 서있었다. 아마도 소월이 말을 건 모양이다.
“조,, 존함이라니... 그런 건 아니지만... 유랑이라 합니다..” “방금의 갈고, 정말 잘 들었습니다. 처음 보는 연주법에 가락도 한의 것이 아니군요.” “뭐, 그렇다고 할 수 있죠. 저는 이 나라 사람이 아니니까요.. 예상대로 여러분은 단번에 맞추셨어요.” “가슴을 울리는 소리였습니다. 흡사 천둥을 치는 것 같더군요. 타악기 한가지로 그렇게 다양한 연주를 할 수 있다는 것에 감탄했습니다.” “저희 민족도 이것과 비슷한 악기를 쓰는데 그 악기를 하늘과 땅의 소리를 만드는 물건이라고 전해져왔죠. 본래는 3가지의 다른 악기와 한 대 어우러져 삶에 지친 사람들의 한을 풀어주는 역할을 했습니다.”
소월의 뒤에서 이야기를 듣고 있던 추선이 소월을 향해 입을 열었다.
“월언니? 우리도 답례를 해드려야 하지 않을까요?” “그렇구나. 이번엔 본녀들이 이곳에서 닦은 음을 들려드리겠습니다.”
어느새 자리를 잡은 여섯 사람이 연주를 하기 시작했다. 그녀들의 연주는 화려함 그 자체였다. 저마다의 특기가 한 줄을 타고 흘러 성진이 띄운 분위기를 천천히 잠재워 주었다. 중심에서 음을 이끌어주는 편종이 소월의 맏이역할을 제대로 해주었으며 임선과 추월이 금슬을 돋구었고 효령과 운진, 소소가 사이사이의 비어있는 부분을 장식해주었다. 그녀들의 연주를 듣던 성진은 이런 음악을 전에도 들어본 적이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이거... 초아가 그날 밤에 불러줬던 곡이지?” “월연가야... 달이 구름을 기다리는 내용을 담은 노래지...” “.... 아리랑..” “뭐?” “아니야..”
그녀들의 연주를 조용히 듣던 초선이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어제도 고개를 돌리었구나, 작은 등불 머리맡에 두고 가신 백운님 부르리라, 오소서, 바람 타고 오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