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금은 즐겁다. 속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저런 여자 애를 만난 다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니까. 이렇게 설레는 경험도 다신 없을 꺼야. 기쁜 마음으로 속아주자.
2. 바람과 달의 주인.
해가 중천에 떠서 내려갈까 말까 궁리하던 무렵, 성진은 열심히 빗자루 돌리기를 하고 있었다. 숙소로 간 성진에게 탈출의 시간은 주어지지 않았다. 선배하인으로 보이는 사람들에게 잡혀 청소 질을 부탁 당한 것이다. 얼떨결에 진짜 하인 일을 하게된 성진은 불만도가 치솟아 이곳을 알려준 초선까지도 미워질 지경이었다.
"무슨 놈의 마당이 이 따위로 넓다냐? 땅값이 껌값인가?"
족히 250평은 되어 보이는 넓은 마당이다. 그런데 여기가 앞마당이란다. 평소에 귀찮다고 안 하던 방 청소가 얼마나 쉬운 일인지 몸소 체험할 수 있는 구실이 되었다. 계속되는 반복작업에 자랑거리였던 체력도 얼마 남지 않았다. 촬영장소를 어찌 잡았는지, 세트건설비용이 얼마나 들었는지, 이 촬영이 끝나면 꼬치꼬치 케물어줄 심산이다.
'대충 다 쓴 것 같으니 쉬도록 할까..'
하인들은 모두 어디로 도망갔는지 코빼기도 안보였다. 아마도 방송사 측에서 자신을 골탕먹이고 찍으려고 숨었거나 촬영중지하고 놀러갔음이 틀림없다. 길다란 빗자루를 세우고 잠시 몸을 받쳤다.
"벌써 쉬는 게냐?"
저편에서 초선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4장정도 떨어져있는 본관기둥뒤쪽이다. 어찌 이리 자세히 알 수 있냐고? 성진은 모범생이다. 모범생은 쉬는 시간의 시끄러움 속에서 선생님의 발자국소리를 분별할 수 있어야 한다. 선생님의 시야에 들어가는 순간 자세를 바로잡고 아무 일 없었다는 듯 학업에 전념해야 하는 것이다. 물론 쉬는 시간에 안 쉬고 공부를 하는 녀석들도 있긴 하지만 그런 녀석들은 어리석음의 극의를 달리는 자들이다. 역시 쉬는 시간에는 쉬어주어야 몸이 학업을 버텨주는 것이다.
"뭐야, 초아냐? 나를 악의 구렁텅이로 몰아넣더니 이제 실컷 부려먹으려고 작정을 했구나?"
열심히 쓸던 빗자루를 앞으로 팽개치고 그대로 철푸덕 앉았다. 조금 빨리 앉았는지 빗자루에서 뿜어져나온 먼지를 그대로 들이마시는 꼴이 되었다. 호흡에 괴로운 점이 많았지만 체면상 아무렇지도 않게 한숨을 푹푹 쉬었다. 반대로 생각하면 쉰만큼 마셨단 소리다.
"무슨 말이야? 악의 구렁텅이?"
그녀가 기둥 뒤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그녀의 손에는 빗자루가 들려있었다. 상황파악을 한 성진이 먼지를 들이마셔 약간은 코 섞인 목소리로 대꾸했다.
"....아냐, 방금 이곳이 천국이라고 생각했어."
둘은 하루종일 같이 다니며 빗자루 질을 했다. 이렇게 쓸어야 잘 쓸린다는 둥, 이제 얼마만큼 남았다는 둥, 이야기를 하면서 쓸었으니 구석구석 쓸릴 턱이 없었으나 성진은 그런 것에 신경 쓰지 않았다. 이 곳 마당이 자신의 방보다 더욱 깨끗했기 때문이다. 앞마당청소가 끝났으나 초선은 재미가 들렸는지 뒷마당까지 쓸어버리자고 했고 억지8할로 인해 뒷마당까지 모두 쓸어버렸다. 엉성하긴 하지만 일단 청소란 것을 했기 때문에 조금은 상쾌한 기분도 들었다. 초선과 성진은 근처의 돌계단에 앉아 차를 마시기로 했다. 시간은 흘러 이제 하늘에 떠있는 뭉게 구름은 조각조각마다 붉은 염약으로 물들여놓은 것이 꼭 출렁이는 저녁바다를 보는 것 같았다. 기온도 제법 내려가 조금은 차진 바람이 초선의 옷을 뚫고 살결에 부딪었다.
'분명 마지막 기억 속에 창 밖은 눈이 내리고 있었다, 그런데 어째서 지금은 봄 날씨인 것일까? 특수효과일까? 음... 자기전의 기억이 별로 없는데 어떻게 된 거지..'
성진이 그런 생각을 하며 차를 마시고 있을 때 두계단 위쪽에 앉아있던 초선은 조금 추운 듯 파르르 떨었다. 봄 날씨라곤 하지만 저녁이 되면 제법 추울 정도로 온도가 내려간다. 의지가 되는 것은 따스한 찻잔뿐이다. 뒤쪽의 인기척이 커지자 성진은 초선이 떨고 있음을 알아차렸다.
"코디들은 뭘 하기에 그렇게 얇게 입혀놨다냐? 여기 이거 걸쳐.."
성진이 입고 있던 잠옷상의를 벗어 초선에게 걸쳐주었다. 초선은 옷을 빌려준 성진에게 고마움을 느끼는 한편 성진의 옷에 쓰인 옷감에 대하여 조금 놀라고 있었다.
'이상한 말만 하는 구나.. 다른 민족의 언어인 모양이야. 그건 그렇고, 이 옷 부드럽고 따스하다.. 유랑의 체온이 남은 이유도 있지만 실제로 바람이 별로 들어오지 않는구나... 겨울옷은 아닌 모양인데..'
그대로 둘은 아무 말 없이 떨어지는 해를 바라만 보았다. 성진은 이 상황이 왠지 기분 좋아 유지하기 위해 가만히 있었고 초선은 성진에게 어떻게 고마움을 표시해야할지 몰라 고민중이었다. 해가 차츰 더 기울어 이제는 저편에 모습을 감추었다. 그저 검푸른 하늘만 남아 있었다.
"저.. 유랑아?“ “왜?” “나와 매화전에 다시 한번 가보지 않으려냐?" "매화전? 아까 그 정원? 거기는 남자출입금지구역이라며...." "이제 친우사이니까 누구한테 들켜도 나에게 맡기면 되는 거다." “권력남용이야?” “빨리!”
그렇게 말하는 그녀의 손에 이끌려 매화전방향으로 몸을 돌렸다. 하늘은 푸르스름한 기운도 잃고 점점 어둑어둑해졌으며, 언제 뜬것인지 구름에 가려져 뿌옇게 윤곽만 비추고 있는 달이 보였다. 그녀의 손에 주황색 빛을 발하는 등불이 들렸다. 이윽고 매화전 앞에 도착했다. 이제 하늘은 간간이 구름사이로 별이 보일 정도로 어두워졌다. 어둠 속에 뭍이여 아무 것도 보이지 않고 물 흐르는 소리만 들려왔다.
“들어와, 조금 있으면 나올 꺼야.”
매화원에 발을 들여놓자, 주위가 따스해진 느낌이 들었다. 추위에 떨다가 뽀송뽀송한 이불 속으로 파고든 느낌이었다.
‘이 곳만 따뜻한 것은... 이 곳이 혹시 실내정원? 저 뻥 뚫린 하늘이 사실은 유리온실이란 소린가? 초아가 나온다고 한 것은 도대체 뭐지?’
하늘의 뿌연 달빛을 제외하면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 어둠의 연속이었다. 낮에 보였던 매화도, 담장도 지금은 보이지 않는다.
"아무 것도 안보여, 왜 온 거야 여기?" "아! 나온다! 나온다!"
초선이 등불을 들고 이리저리 춤추기 시작했다. 유수 같은 몸놀림과 섬세한 손짓에 성진의 눈은 마치 귀신 홀린 듯 빠져 들어갔다. 동향의 무용은 등불이 초선의 움직임에 맞춰 흔들린다. 구름이 비켜가고 감춰져 있던 달이 환한 빛을 뿜으며 나타났다. 달빛에 밝혀진 정원, 아직 어둡지만 나무와 꽃, 다리, 시냇가와 담장이 그 모습을 나타냈다. 그리고 잠시 후, 정원 구석구석에서 조그마한 불빛이 하나둘씩 켜지는 것이 아닌가?
"설마 바.. 반딧불이? 천연기념물이 저렇게 많아? 여긴 도대체!!"
정원전체에 반딧불이 하나둘씩 켜지고 천천히 하늘로 날아올랐다. 하나, 둘, 셋, 열, 스물 서른, 더 이상 셀 엄두도 나지 않았다. 계속 늘어나는 반딧불에 정원은 더욱더 밝아졌고, 마침내는 매화꽃의 색까지도 확인할 수 있었다.
"매화원의 자랑거리야, 여기는 다른 곳보다 일찍 오랫동안 반딧불이를 볼 수 있어. 사도처소의 자랑거리이기도 하지.."
'사도처소? 반딧불이를 볼 수 있는 곳이 흔한 것도 아닌데? 이 곳은 도대체 어디?'
반딧불이는 책이나 각종 영상매체에서만 볼 수 있던 희귀곤충이다. 우리 나라에서도 볼 수 있는 곳이 있겠지만 개체수가 이렇게 많다면 관광명소가 될 것이 자명하다. 달빛의 밝기도 무시할 수준은 아니다. 하지만 반딧불이 늘어나면서 정원이 더욱 환해지지 않았는가?? 성진은 이 신비한 광경에 탄성이 절로 나왔다. 이어서 바닥에서 가습기를 틀어 놓은 듯한 운무가 곳곳으로 올라오고 그 사이를 돌아다니는 반딧불과 달빛이 뿌옇게 퍼져 화원 전체가 형광으로 물들었다. 처음 초아와 만났던 다리, 흰 돌다리가 지금은 그 빛을 더욱 발했다. 환술 이라도 빠진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 성진은 현기증이 나서 그 다리난간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이런 곳이 있다니 정말 신기한걸? 덕분에 좋은 구경했다."
성진은 이 광경을 하나하나 자세히 봤다. 나중에 ‘난 반딧불을 봤어’정도로 밖에 기억 못 할 지라도 조금이나마 오랫동안 추억으로 간직하고자 하는 마음에서였다.
"이 옷 빌려준 보답이라고 생각해."
초선이 맞은편 난간에 앉으며 말했다. 다소곳이 모은 다리에 성진이 준 잠옷을 덮었다.
'보답은 무슨? 차까지 얻어 마시고, 체향이 내 잠옷에 머물러 주면 그것으로 나는 만족~....!? 내가 언제부터 변태가 된 걸까?... 벗고 좀 춥긴 했지만.. 응? 내가 언제부터 잠옷 안에 반팔을 껴입고 있었지?'
잘못하면 상반신을 보여줄 뻔했다는 생각이 정신을 강타했다. 특별히 흉해서 그런 것은 아니지만 볼품이 있는 것도 아니었기 때문에 어쨌든 숨기고 싶었다. 그녀가 일어서서 달을 응시했다. 손을 올려 머리카락을 세 갈래로 틀어 올려 속박하고 있던 이상한 장식을 풀었다. 장식이 달빛을 받자 붉은 빛을 머금었다. 루비인 듯 하다. 어둠 속에 삼켜질 것 같던 머리카락이 사르륵 소리를 내며 떨어지고, 허리까지 내려오는 긴 머리카락이 그늘을 비웃듯 각성했다. 귀뚜라미 우는소리가 없었다면 이 적막을 깨뜨릴 자가 없으리라.
‘역시... 폐월이라는 별호도 멋지지만 달빛아래에서 보는 편이 훨씬 더 아름답구나.. 아마도 왕윤은 초선보다 달을 더 열심히 본 모양이야..’
달빛아래의 초선은 신비였다. 건드리면 부서질까 다가갈 엄두조차 나지 않았다. 조용히 달을 감상하던 초선이 노래를 들려주었다. 들어본 적이 없는, 하지만 동양인의 심금을 울리는 곡조였다.
어제도 고개를 돌리었구나, 작은 등불 머리맡에 두고 가신 백운님 부르리라, 오소서, 바람 타고 오소서.
오늘은 님이 오시었으나 어인 일로 이리되시었소, 세상의 짐을 지고 오시었네, 오소서, 내 품에 오소서.
노래가 끝난 후에도 한참동안 그녀의 목소리가 귓전에 맴돌았다.
“좋은 노래야... 작곡작사를 직접 한 거야? 처음 듣는걸...” “이 노래를 몰라? 모르는 사람이 있었다니.. 그렇게 말해주니 불러놓고 쑥스럽네...”
그녀의 말을 듣고 보니 그 노래는 아마도 유행가인 듯 했다. 이런 노래가 있었다니 처음 듣는 일이다. 집에 있을 때 시간만 나면 성희가 최신유행가를 주르르 읊었기 때문에 나름대로 못 들어본 노래가 없다고 생각했다. 혹시 이 프로그램이 사극이나 미니시리즈쯤 되어서 거기 나오는 OST쯤이 아닐까 생각했다.
"정말 모르는 듯 하네.. 아까부터 궁금했는데 유랑이는 정체가 뭐야?" "정체?" "이상한 말을 쓰고.. 옷도 한의 옷이 아니고.. 한나라사람이 아니지?"
‘연기력 만점이다.’ 라고 생각했지만 자신을 쳐다보는 초아의 눈이 너무 깊어 감히 장난 삼아 대꾸할 의욕이 없어졌다. 신기한 장면을 너무 많이 본지라 이제 현실과 가실의 경계조차 금이 갔다.
“으응, 사실 난 한족이 아니고 대륙의 동쪽에서 왔어.” “설마 ‘산월’족? 아니면 ‘왜’족?”
왜족... 이란다... 고노와타시가 니온진다토?(이 내가 일본인이라고?“) 일본을 특별히 증오하거나 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다른 나라사람으로 불리기는 싫었다. 게다가 같은 한글을 쓰고 있지 않은가?
“둘다 틀렸어, 그래, 지금으로 따지자면 저 동쪽에 ‘고구려’라는 나라가 있는데 내 고향이 거기야. 음.. 정확히 내 고향 위치가 거기 어디쯤인데 지금은 나라가 세 개로 나눠져 있어. 내 고향을 놓고 다투고 있으니까 정확히 어느 나라인지는 모르겠다..” “너희 고향도 전란중이구나...”
‘음.. 그렇게 되는 건가.. 별로 심각하게 느껴지지는 않는군.. 단군 자손으로써의 자각이 부족한 것일지도.. 잠깐... 나라가 다른데 어째서 초선이랑 말이 통하는 거지? 한글을 써? 후후, 이렇게 간단한 약점을 들키다니..’
“초아야 한글 언제 배웠어?” “한글?” “한글 말야, 우리나랏말이잖아?” “지금 너 한족어로 말하고 있잖아?”
약점을 잡아 상황종료를 노렸던 성진은 이번엔 자신의 정신상태를 의심하게 되었다.
“지금 내가 하는 말이 한족어로 들린다고?” “응. 분명, 자기가 말해놓고 무슨 소릴 하는 거야?”
‘한족어? 한족들이 쓰는 언어, 한문, 중국어.....’
성진은 한쪽 흙바닥에 글자를 썼다.
“초아야? 이거 읽어봐.”
성진은 자신이 생각하는 한, 정말로 어렵고 잘 쓰지도 않는 사자성어를 썼다. 행여 틀리진 않았을까 이리저리 훑어보았다. 끝자의 점을 하나 더 긋는 것을 잊어버렸다. 고치려고 팔을 뻗었다.
“분명 ‘매실의 시디신 것을 상상해 침을 만들어 갈증을 푼다.’를 쓰려고 한 것 같은데 획이 하나 빠졌구나? 재미있는 내용이네?”
틀린 부분까지 채워서 해석했다. 望梅解渴 망매해갈, 초아의 해석그대로였다. 이렇게 되면 자신이 어렵다고 생각한 것이 쉬웠다거나, 이 여자가 실제로는 수능공부 등을 하고 있는, 애늙은이라던가, 여러 상황을 생각해볼 수 있다. 이번엔 심심해서 재미로 외웠던 내용을 써보았다.
“만의 보물길? 이상한 말?”
‘萬寶路’ 만보루, 말보루의 중문표기이다. 초선의 해석을 듣고 웃음이 뿜어져 나오려는 것을 억지로 참았다. 이제 성진에게는 사실확인보다는 해석을 시키는 재미에 빠졌다. 그녀에게 여러 가지를 물어보며 시간을 보냈다. 물론 초선은 이용만 당한 것이다. 문뜩 성진은 초선을 의심해서 좋을 것도 없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뭐 좋아, 이왕 이렇게 된 것 끝날 때까지 즐겨야지~’
시간은 계속 가고 두 사람의 목소리도 서서히 작아졌다. 어느새 정원의 잔디밭에는 두 사람의 인영이 웅크리고 잠에 빠져들고 있었다.
달은 조용히 구름사이로 몸을 숨겼다.
-그리고 그 다음날-
성진은 잔디 밟는 소리에 잠에서 깨어났다. 주위는 대낮이었다.
‘정말 길게 잤구나. 늦잠은 이래서...’
어젯밤의 일을 기억해보려 했다. 하나하나 빼놓지 않고 기억하려 했으나 드문드문 빠져있거나 흐려져 있었다. 그때 본 광경을 잊지 않으려고 그렇게 열심히 봤건만... 인간은 망각의 동물이란 거다... 초선은 아직도 옆에서 자고 있었다. 자는 모습이 너무 편안해 보여 그대로 두기로 했다.
‘응? 그럼 발자국소리 주인은 누구지?’
주위를 둘러보았다. 매화는 여전히 만발해있었고 지금은 나비도 날아다닌다. 시냇가도 전날 보았던 그대로다. 천천히 고개를 돌리던 성진의 동공이 벌어졌다.
“네가 어찌 이곳에 있느냐?”
감정이 없는 무뚝뚝한 목소리, 왕윤할아버지다.
“일단 자리를 옮기시지요.”
무슨 일이 있어도 초선이란 빽이 있으니 걱정이 없었다. 그저 조금 신경 쓰이는 것이 있다면 초선의 단잠을 방해하고 싶지 않았다.
“옳구나, 초아가 자는구나..”
다리를 건너왔다. 이 정도면 목소리에 깰 일은 없을 것 같았다.
“대인, 해명을...” “아니다. 대충 알겠느니라.”
이리저리 둘러대려던 성진이 왕윤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우리 초아의 말동무가 되어준 모양이구나, 바닥에 적혀있는 글들을 보고 알았느니라. 역시 일전에 너의 관상을 보았을 때 비범함을 느꼈는데 분명 예사사람이 아니구나? 저 글들은 한 구절 한 구절 넓고 깊은 뜻이 숨어있구나.”
성진이 자신이 쓴 글들을 바라보았다. 그 중에 특별히 눈에 띄는 말들이 있다면 만보루와 가구가락(可口可樂 코카콜라의 중문표기...)이었다. 아무 것도 모르고 읽었다면 분명 깊은 뜻이 숨겨져 있을 법한 글들이지만 표기의 뜻을 알고 있는 성진에게는 참을 수 없는 폭소의 도화선이었다. 우연히 초선을 가지고 논 것이 해명의 번거로움에서 벗어나는 구실이 되었으니 이 이상의 행운도 없었다.
“대인께서 그리 말씀해주시니 몸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성진은 터져 나오는 무언가를 억누르고 최대한 정색해서 기가 막힌 대사를 말했다. 한편으론 칭찬을 받았으니 기분 좋아졌다. 영화나 비디오에서 듣던 대사를 직접 읊으려니 닭살이 돋았다. 왕윤이 무언가 결심한 듯 말을 건넸다.
“내 너의 능력을 보니 하인으로 쓰기에는 너무도 아깝구나, 그 능력을 평가해 보건데 내 서재의 관리를 맡지 않겠는가? 내 서재라면 글공부하기에도 평탄할 것이야..”
왕윤이 성진을 스카웃 하려 하는 것이다. 하인에서 서재관리인으로 신분상승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보통 하인이라면 입 찢어지며 앞 뒤 안 가리고 달려들었을 것임이 자명하다. 물론 성진은 겉만 번드르르한 것이기에 들킬 염려가 있다고 판단, 그럴 듯 하게 피해가기로 했다.
“말씀은 감사합니다만 소인은 지금 이대로도 만족합니다. 소인의 지력은 대인께서 추측하시는 것처럼 대단치 못합니다. 그리고 저는 영화나 학업에 대한 욕심이 없습니다.”
정말 멋들어진 대사였다. 공중파를 타고, TV에 나오는 성진의 모습이 벌써부터 눈에 선했다. 이러다 정말 학교의 출석인정을 받으며 방송국을 들락날락 거리는 것이 아닌가 김칫국부터 마시고 있었다.
“허허, 참으로 깊구나, 이 왕윤의 생각이 짧았구나. 그대 같은 사람은 역시 한의 신하로서 나라를 보필하여야 하지 않겠는가?”
집요하게 물고 늘어지는 할아버지라고 생각했다. 아니, 말 길을 못 알아듣는 노망난 할아버지임이 분명하다.
‘정말 이 할아버지의 속은 깊고 깊다. 그 끝을 알 수가 없구나. 이대로 가다간 내가 천하통일을 하고 대륙을 호령해야 한다고 할지도? 아니 아니.. 스케일이 너무 큰가?’
“말씀이 너무나 깊으셔서 고개가 절로 숙여집니다. 대인, 저는 조그마한 가정에서 아무 걱정 없이 농사나 짓고 자연을 벗삼아 살고 싶은 마음뿐입니다. 헤아려주소서.”
‘다시 한번 명대사가 터져 나왔다. 이것이야말로 청념결백의 관리가 하야하면서 주군에게 하직인사를 하는 것과 같지 않은가? 서울시민들이어~ 기다려라! 내가간다!!!’
왕윤은 이 말을 듣고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건넸다.
“자네 같은 사람이 신하가 되어야 한 왕조가 살고 충신들이 일어서는 것이거늘... 어찌 지금의 한은 이리 어지럽단 말인가?” “그것은 황건의 난 때 나타난 영웅들 때문입니다.” “영웅들 때문이라고? 자네의 말은 도대체 무엇을 뜻하는 것인가?”
성진은 자신이 방금 한말이 크나큰 실수임을 깨달았다. 자신이 한 말이 후한의 핵심을 찌르는 말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한이 멸하고 조가의 위가 선 것은 황건의 난에 의한 인물들이 배출에서 비롯된 것이다. 고로 이점을 현시점에서 밝히게 된다면 머지 않아 한이 약점을 딛고 일어설 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잘못하면 역사가 바뀔 수도 있는 중요한 위치에 서게 되자 후일 자신의 조국이 어떻게 될지도 몰라 이 상황은 어떻게든 둘러보기로 했다.
“아.... 그...것은 !? 저... 장각! 장각형제들 때문입니다. 그들도 엄밀히 따지자면 영웅인 것이지요. 그들 영웅이 배출됨으로써 제위들에게 혼란을 가져오지 않았습니까?” “그런가, 본 대인은 하진을 말살한 동탁 때문이라 생각했거늘.. 그렇군... 핵심은 거기서부터 시작되었던 것인가.. 본 대인이 오늘 자네에게 한 수 배웠으니 감사해야겠네.”
‘수, 수습은 성공했나..’
성진이 한숨을 돌리고 있을 때 초선이 잠에서 깨어났다. 이미 해가 중천임을 알고는 놀라며 벌떡 일어섰다. 다리 건너편에 유랑과 왕윤이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모습을 보고 천천히 다가갔다.
“아버님, 늦었지만 문안인사 올립니다.” “초아도 평안했느냐? 오늘은 얼굴이 더욱 좋아 보이는 구나?”
조명발이란 것은 이럴 때를 두고 하는 것일까? 아침햇살 속의 그녀의 살결은 더욱 뽀얗게 보였다. 어젯밤의 달빛 밑에서 본 청아함보다는 활발하고 귀여움이 더 강조되어 보였다. 지금의 초선은 아마도 동명이인일지도 모른다.
“아버님, 유랑을 제가 데리고 있어도 괜찮습니까?”
돌발상황이다. 모든 방법이 안되면 틈을 봐서 빠져나가려던 계략이 물거품이 될 순간이다.
“초, 초아야, 네가 친우로 받아줬다고는 하지만 난 본래 하인이고 역시 이런 일은 여자아이들에게....” “좋도록 해라. 필시 도움이 되리라 생각한다. 초아도 사람 보는 눈이 있구나! 유랑이라고 했느냐? 너도 괜찮지 않느냐?” “저.. 저기... 저기... 제 의견은...”
초아가 옆에서 궁시렁 거리고 있던 성진을 보고는 목소리를 조금 키워 말했다.
“자기 입으로 보통 하인이라 했는데 주인을 거역할 리가 없지 않습니까, 아버님?”
당했다. 초선이라는 인물은 영악하기 짝이 없어 훗날 위, 촉, 오 중 한쪽에 넘어갔다면 와룡봉추와 함께 폐월이란 별호로 어깨를 나란히 했을 것임이 자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