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가을을 참 좋아합니다. 왜냐하면 가을은 감성을 풍부하게 만들거든요. 또 그것만이 아닙니다. 눈부신 파란 하늘과 풍성한 먹거리, 울긋불긋한 단풍과 풀벌레의 속삭임도 빼놓을 수 없지요. 가을을 사랑하는 여러 가지 이유 중에 빼놓을 수 없는 것이 하나 더 있습니다. 늘 노란 국화와 겹쳐지는 얼굴, 바로 그이가 생각나기 때문이지요. 그이를 처음 만난 것이 벌써 이십 칠년 전의 일입니다. 나는 초등학교 오학년이었고, 그이는 나의 담임이었지요. 당시에는 - 지금은 어떤지 모르지만 - 참으로 무식한 선생들이 많았습니다. 여느 학교와 마찬가지로 나의 모교에도 미친개로 불리는 선생이 있었고, 쓰레빠(슬리퍼)로 불리는 선생도 있었으니까요. 쓰레빠는요, 바로 옆 반의 담임이었습니다. 그런데 왜 쓰레빠냐고요? 학생들은 실내화와 실외화를 구별해 신고 다녔지만 선생들은 그러질 않았습니다. 출퇴근 시간외에는 항상 슬리퍼를 신고 다녔지요. 교무실이든 매점이든 교실이든 화장실이든 말입니다. 그런데 그 양반은 툭하면 자신의 슬리퍼를 벗어들고 아이들의 뺨을 사정없이 패주곤 했습니다. 그렇다고 뭐 아이들이 죽을죄를 지은 것도 아닙니다. 좌측통행을 지키지 않았다거나 복도에서 뛰었다는 것이 이유라면 이유지요. 그런 사소한 이유로 인해 아이들은 슬리퍼바닥으로 뺨을 맞았던 겁니다. 뺨을 맞은 아이들은 얼굴이 벌겋게 되어서 울었는데요. 아프기도 아팠겠지만 자존심에 상처를 입은 것이 더 큰 이유였던 것 같습니다. 그런 선생들이 많았지요. 다정다감하고 살갑기보다는 너무나 권위적이고, 무섭기만 했던 선생들 말입니다. 하지만 나의 담임은 여느 선생들과 달랐습니다. 행여 'TV는 사랑을 싣고'라는 프로그램에 출연이라도 하게 된다면 꼭 찾아뵙고 싶은 분이지요. 그 까닭인즉 이렇습니다. 나의 모교에는 운동장모양의 제법 넓은 정원이 있었습니다. 책 읽는 소녀와 김유신 장군과 소년 이승복과 사자와 호랑이의 동상이 있었고, 그 한가운데는 원숭이 서너 마리가 뛰어노는 우리도 있었지요. 해마다 가을이면 꽃을 활짝 피운 화분들이 정원 가장자리에 빙 둘러앉아 고운 자태를 뽐내었고요. 학급별로 환경미화를 하듯 학교를 꾸미기 위해 각 학급마다 따로 주어지는 일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때 우리 학급이 화분을 담당하게 되었지요. 선생님과 아이들이 손에 삽이며 호미며 양동이며 갈퀴를 들고 낙엽과 풀들을 모아왔습니다. 퇴비를 만들기 위한 사전준비였지요. 퇴비거리가 어느 정도 준비되자 선생님은 아이들과 함께 시장으로 향했습니다. 선생님은 어물전마다 쫒아 다니면서 생선에서 떨어져 비린내 나는 물을 양동이에 담았습니다. 아이들은 악취에 코를 감싸 쥐었고, 옷에 물이라도 튈까 싶어 몸을 움츠리곤 했지요. 하지만 선생님은 아랑곳하지 않았습니다. 아이들에게 질책을 하지도 않았고, 그 일을 멈추지도 않았지요. 그렇게 모은 오물이 대여섯 양동이. 선생님과 아이들이 양동이를 나누어 들고 다시 학교로 돌아왔습니다. 그리고는 흙과 풀과 낙엽과 생선비린내로 요동치는 물을 비벼댔지요. 마치 비빔밥을 비비듯이. 그런데요, 날씨가 무척이나 더웠습니다. 얼굴은 물론 겨드랑이와 등줄기로도 땀이 줄줄 흘러 내렸지요. 벌겋게 달아오른 태양아래 구슬땀을 흘린 것은 아이들만이 아니었습니다. 선생님도 흘러내리는 땀방울을 연신 소맷자락으로 닦아내야 했지요. 그렇게 가을이 영글었습니다. 땀방울 하나하나가 꽃봉오리로 맺혔고, 노란국화가 선들바람을 맞으면서 활짝 피어났지요. 교문을 들어섰을 때의 찬란함과 코끝을 찌르던 국화 향! 아직도 그 감동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나는 관찰자가 되어 그런 선생님을 지켜보았습니다. 세치 혀로 일을 시키기만 하던 선생들과는 확연히 다른 모습이었거든요. 별 말씀도 없이 일이 있으면 몸소 실천하시던 선생님, 당신은 내 인생의 표상이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