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놈의 머리는 비뚜른 능금 또 한 놈의 심장은 벌레 먹은 장미 제비처럼 젖은 놈이 뛰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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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오 패롵[鸚鵡]* 서방! 굳 이브닝!”
“굳 이브닝!”(이 친구 어떠하시오?)
울금향(鬱金香)* 아가씨는 이 밤에도 경사(更紗) 커튼 밑에서 조시는구료!
나는 자작(子爵)의 아들도 아무것도 아니란다. 남달리 손이 희어서 슬프구나!
나는 나라도 집도 없단다 대리석(大理石) 테이블에 닿는 내 뺨이 슬프구나!
오오, 이국종(異國種) 강아지야 내 발을 빨아다오. 내 발을 빨아다오. (학조 창간호, 1926.6)
* 루바쉬카 : 러시아 남자들이 입는 블라우스 풍의 상의. * 보헤미안 : 집시(Gypsy)나 사회 관습에 구애받지 않고 방랑적이며 자유분방한 생활을 하는 사람을 이르는 말. * 페이브먼트: 포장도로. * 패롯 : 앵무새. * 울금향 :튤립(tulip).
********************************************************************************** 이 시는 지상(紙上)에 발표된 정지용 최초의 작품으로 에 나타난 향토적 서정과 상반되는 모더니즘 색채를 띠고 있다. 이 시에서는 생경한 외국어를 그대로 사용함으로써 모더니즘의 특징을 더욱 잘 드러내고 있는데, 아마도 이것은 젊은 시절 영문학도였던 시인 자신의 이국 취미(異國趣味)와도 무관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 시에서는 이러한 모더니즘의 냄새가 막무가내로 풍겨나오는 것이 아니라, 그 속에는 바로 식민지 치하에 놓인 지식인의 힘없는 고뇌가 행간에 속속 배어 있다. 그렇기 때문에 ‘밤비는 뱀눈처럼 가늘’고, 나는 ‘남달리 손이 희어서 슬픈’ 것이다. 이와 같은 차갑고 싸늘한 이미지는 ‘나는 나라도 집도 없단다 / 대리석 테이블에 닿는 내 뺨이 슬프구나!’로 이어지게 됨으로써 시적 화자가 안고 있는 망국민의 설움은 결국 이국종 강아지에게 자신의 발을 빨게 하는 자학적인 심상으로까지 확대되고 만다. 또한 이 시에 등장하는 공간적 배경도 한국적인 것이 아니다. ‘프란스’라는 카페의 이름부터가, 아니 ‘카페’라는 공간 자체가 1920년대의 한국인에게는 너무도 낯선 분위기인 것이다. 이러한 낯선 곳에서 슬픔에 겨워 자학의 눈물을 흘리고 있는 시적 화자의 모습은 바로 무기력했던 당시 지식인의 실제 모습 그대로일 것이다 전 10연의 이 시는, 형태적으로 안정된 1~4연의 앞 단락과 불안정한 5~10연의 뒷 단락으로 나눌 수 있다. 먼저 앞 단락에서는 1연과 3연이, 2연과 4연이 서로 비슷한 형태로 짝을 이루면서 대응되고 있다. 1․3연은 시적 화자가 동료들과 함께 ‘프란스’란 상호(商號)의 카페로 갈 때까지의 거리 모습이다. ‘옮겨다 심은 종려나무’, ‘비뚜로 선 장명등’, ‘밤비는 뱀눈처럼 가는데’, ‘페이브멘트에 흐느끼는 불빛’ 등으로 제시된 시적 화자의 현실 공간은 ‘옮겨다 심은’․‘비뚜로 선’․‘뱀눈처럼 가는데’․‘흐느끼는’에서 알 수 있듯이 다른 곳으로부터 이식된 공간, 또는 화자가 완전히 적응하지 못한 곳임을 알게 한다. 2․4연에서 ‘루바쉬카’는 ‘비뚜른 능금’과, ‘보헤미안 넥타이’는 ‘벌레 먹은 장미’와, ‘비쩍 마른 놈’은 ‘제비처럼 젖은 놈’과의 결합을 통해 이질적인 서구 문화의 풍조 속에서 살아가는 소시민적 지식인의 모습을 보여 주고 있다. 뒷 단락은 ‘카페․프란스’ 내부의 정경이다. 처음 5․6연은 앵무새와의 대화 부분으로 앵무새가 나타내는 말의 이질성을 의도적으로 보여 주고 있으며, 8․9연은 시적 화자가 ‘자작의 아들도 아무것도 아님’, ‘나라도 집도 없음’ 등으로 자신의 처지를 표현하고 있다. ‘카페․프란스’는 거리 모습과 동일한 이국적 공간으로 화자에겐 다만 ‘옮겨다 심은’ 폐쇄적 장소일 뿐이다. 왜냐하면, 그 곳에 존재하는 것은 ‘앵무새’와 ‘졸고 있는 아가씨’와 ‘이국종 강아지’뿐으로 화자와의 대화가 전혀 불가능한 사물들이기 때문이다. 결국, ‘카페․프란스’는 시적 화자의 폐쇄된 현실 공간을 상징하는 곳으로 ‘흰 손’을 가진 지식인 화자의 무기력한 독백만이 가능할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