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목사님에게 사춘기를 맞아 탈선하는 중학생 딸이 있었습니다. 딸은 밤늦게 친구들과 어울려 다니고, 거짓말하고, 나중에 반항하며 말대꾸까지 했습니다. 목사님은 다른 죄인은 다 용서해도 자기 딸만은 도저히 용서 못할 것 같았습니다. 딸은 그런 목사님을 위선자로 생각하고 역겨워했고, 목사님도 그런 딸의 모습이 역겨웠습니다.
어느 날, 목사님이 새벽기도 후에 귀가하는데 저 멀리서 누군가 걸어왔습니다. 곧 밤을 새고 터벅터벅 걸어 귀가하는 딸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어제까지도 그토록 미웠지만 막상 딸을 보니 미움은 어디로 가버렸습니다. 사랑하는 딸 앞에서 아빠는 너무 무력했습니다. 목사님은 골목에 숨어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저의 소중한 딸을 지켜주세요!”
모든 사람에게는 그런 아버지의 사랑이 있었습니다. 지금 아버지가 보이지 않아도 아버지의 사랑은 우리 주위를 맴돌고 있습니다. 그 사랑은 앞으로도 계속될 것입니다. 사랑은 이미 넘쳐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 사랑을 깨닫는 것입니다.
자녀가 태어날 때 아빠가 얼마나 기뻐하셨을까요? 그때는 무신론자도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자라면서 자녀는 아빠의 기쁨입니다. 사람들이 “고놈! 아빠 쏙 빼 닮았네.”라는 소리를 들으면 얼마나 좋아하셨는지 모릅니다. 대학입시 때에는 무뚝뚝한 아빠도 조용히 두 손을 모으고, 딸이 시집갈 때는 쉰 살 넘어 처음으로 눈물샘이 젖습니다. 표현 방법들은 다르고, 때로 잘못이 있어도 아빠의 자녀 사랑은 한이 없습니다.
한 가정에 고등학교 2학년 딸이 심하게 말썽을 부렸습니다. 아무리 야단쳐도 소용이 없었습니다. 아빠는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딸이 다시 좋은 아이가 되게 해주세요!” 그때 하나님의 음성이 마음속에 들렸습니다. “딸 때문에 안타깝지? 네가 잘못된 길로 갈 때 내 마음도 그랬단다.” 그 음성은 질책의 음성이 아니라 “내가 너에 대해 많이 참았고 앞으로도 그럴 거야!”라는 사랑의 음성이었습니다. 그때 아빠는 참았던 눈물을 흘렸습니다. 눈물 후에는 신기하게도 딸의 회복에 대한 확신이 생겼습니다.
며칠 후, 그날도 딸이 늦었습니다. 갑자기 불길한 전화벨이 울렸습니다. 친구 셋과 함께 딸이 탄 택시가 전신주와 충돌했다는 전화였습니다. 떨리는 가슴을 부여잡고 응급실로 갔습니다. 다 피투성이였는데 운전석 옆에 앉았던 딸은 약간의 찰과상만 입은 채 하얗게 질려있었습니다. 가장 위험한 곳에 앉았던 딸은 무사했고, 그 일로 딸이 2주 동안 입원했을 때 그들은 깊은 가족사랑을 회복했습니다.
남이 나를 아프게 할 때는 내가 남을 아프게 한 것을 생각할 때입니다. 자녀가 나를 아프게 할 때 필요한 생각은 “자녀가 나를 아프게 한다!”는 생각이 아니라 “내가 아버지를 아프게 했다!”는 생각입니다. 자녀 문제로 안타까울 때는 내 모습으로 안타까워했던 아버지를 그릴 때입니다. 내가 아버지께 돌아가면 자녀도 내게 돌아옵니다. 아버지의 사랑에 대한 ‘헤아림’은 인생의 ‘헤매임’을 잦아들게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