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쁜 숨소리

온리원럽 작성일 13.03.30 22:0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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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다리던 겨울 방학식이 끝나자마자 집으로 내달렸다. 개근상도 상이랍시고 자랑하고 싶었는데 어머니는 병원에 가시고 없었다. 그래도 내일부터 실컷 놀 생각에 들뜬 나는 옆집에 사는 영재를 만나러 갔다. 아버지가 다니는 공장의 사장 아들인 영재는 전자오락에 빠져 날마다 오락실에 있었다. 그날도 연방 오락기 버튼을 눌러 댔다. 영재 뒤엔 항상 나를 비롯해 한 무리의 아이가 부러운 마음으로 침만 삼켰다. 그때 영재가 제안했다.

“야! 너 이 돈으로 과자 좀 사 와. 한 판 하게 해 줄게.” 치사했지만 쏜살같이 달려가 과자를 사 왔다. 그리고 한 판을 기대하며 영재 옆자리에 앉았다. 오락하고 싶은 마음이 과했던 탓일까? 화면 속 비행기를 따라 비비꼬다 그만 영재 팔을 건드리고 말았다. 순간 영재가 “어! 너 때문에 죽었잖아. 이 자식아. 꺼져.” 하고 소리쳤다. 복받치는 설움을 안고 집으로 돌아와 이불을 뒤집어쓰고 울었다. 얼마나 울었을까? 문득 전날 밤 장롱 서랍장에서 뭔가 꺼내 보시던 어머니 모습이 떠올랐다. 문밖을 살핀 뒤 조심스레 서랍장을 여니 돈이 든 황토색 봉투가 있었다. 나는 봉투를 쥐고 오락실로 향했다. 떨리는 마음으로 잔돈을 교환하고 꿈에 그리던 오락기 앞에 앉았다. 만날 구경만 하던 내가 오락기 앞에 앉자 부러움 섞인 탄성과 함께 한 무리의 아이가 몰려왔다. 한참을 정신없이 오락하는데 친구가 한 판만 시켜 달라고 사정했다. 뒤에서 바라보던 마음을 알기에 선뜻 돈을 건넸다.

그러자 갑자기 다른 친구들도 “나도! 나도!” 하며 나를 둥그렇게 에워싸고 손에 쥔 봉투에서 돈을 꺼내 갔다. 얼마 뒤 허기를 느껴 오락실 옆 빵집으로 향했다. 뒤따르던 아이들에게 빵을 한 개씩 건네고 다시 오락실로 갔다. 꿈만 같던 시간이 지나고 밖으로 나오니 어느덧 캄캄했다. 그제야 두려움이 엄습했다. 집에 들어서니 어머니와 누나가 도둑이 들었다며 혼비백산한 채 집 안 여기저기를 뒤졌다. 어머니가 나를 붙잡고 말씀하셨다. “이놈아, 집에 좀 붙어 있지. 수상한 사람 없었어? 아이고, 이제 어쩐데…….” 어머니가 목 놓아 우셨다. 누나도, 나도 따라 울었다. 그로부터 며칠이 지났다. 중학생인 누나는 보충 수업 때문에 학교에 가고, 아버지는 지방에 있는 친구 분 댁에 가신 날이었다. 어머니와 가깝게 지내던 아주머니가 놀러 오셨다.

“아니, 이 사람아. 병원에 가야지. 몸이 이 지경인데.” “아니에요. 견딜만해요. 헉헉…….” “며칠 전에 도둑 들었다면서? 생전 그런 적 없더니 뭔 일인지 몰라.” “죄송해서 어떡해요. 지난번에 애아범 통해서 융통해 주신 거요. 어찌 알았는지 귀신같이 그것만 쏙 빼 갔네요.” 그 말을 들은 아주머니는 나를 쳐다보며 “충국이 잠깐 나가 놀아. 엄마랑 이야기 좀 하게.” 하셨다. 나는 친구들과 공을 차며 놀다 해 질 무렵 돌아왔다. 그런데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여전히 가쁜 숨을 몰아쉬던 어머니가 말씀하셨다. “너 엊그제 무슨 돈으로 동네 애들 오락시켜 주고 빵 사 줬어?” “말씀드리려고 했는데. 엉엉……. 잘못했어요.” “이놈아. 그 큰돈을 어찌 다 써 버려. 누가 돈 가져오라고 때렸어? 아이고.” 어머니는 기가 막힌 듯 눈물을 쏟아내셨다. 그날 나는 밤새 차디찬 윗목에 무릎 꿇고 앉아 있다 스르르 잠들었다. 어머니의 가늘고 짧은 숨소리가 밤새 계속됐다.

아침이 밝았다. 여느 날처럼 어머니와 나뿐이었다. 어머니는 기운이 없으신지 일어나지 못했다. 얼마 후 어머니가 창백한 얼굴로 나를 부르셨다. “아가~ 헉헉. 답답해서 그러는데 등 좀 두드려 줄래?” 밤새 추위에 움츠린 몸을 가까스로 펴 어머니 등 뒤에 앉았다. 다 늘어난 내복 위로 앙상하게 드러난 뼈……. “왜? 얼른 안 두드리고 뭐해?” “암것도 아니에요.” 토닥토닥 몇 번을 두드렸을까? 어머니 몸이 오른쪽으로 기우는 것을 느꼈다. 그러다 툭, 쓰러지셨다. 그렇게 어머니는 다시 일어나지 못하셨다. 나중에 알았다. 내가 철없이 쓴 돈이 어머니 약값과 병원비였다는 것을. 어른들은 “너 때문이 아니다.” 라고 말씀하셨지만 어머니가 돌아가신 게 내 탓이라고 생각하며 어머니의 빈자리가 느껴질 때마다 오래도록 울었다. 이제 서른넷. 한없이 죄송한 마음으로 그때 어머니와 같은 삼십 대를 보내고 있다. 가슴에 남은 죄스러운 마음을 고백하며 용서를 구해 본다. 어머니, 죄송합니다. 그리고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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