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의스승 어머니

온리원럽 작성일 13.04.18 23:51: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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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거 어매는 똥도 버릴 게 없는 사람이다.”

오래전에 돌아가신 할머니는 생전에 이런 말씀을 자주 하셨다. 온갖 고생으로 우리 오 남매를 키운 어머니를 그렇게 칭찬하셨다.

가난은 찰거머리처럼 달라붙어 어머니를 힘들게 했다. 새벽 장으로 달려가 채소와 생선을 떼다 팔고 항상 밤이 늦어서야 집에 오시던 어머니. 그렇게 번 돈으로 보리쌀 한 됫박이나 밀가루를 사 오셨다.

나는 신문 한 부에 10원 하던 시절 신문 배달을 했다. 어린 마음에도 밤늦게까지 일하는 어머니의 고생을 조금이나마 덜어 드리고 싶어서였다. 중장비 사업에 실패한 내가 탄광촌으로 들어온 1986년 봄, 어머니가 찾아오셨다.

“광부들은 사고로 잘 죽는다.”라는 말을 들었다며 부산에서 먼 길을 달려오신 것이다.

“광산 일이 위험해도 하기 나름이에요.”

하며 달랬지만 어머니는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열차를 타셨다.

“힘든 일하는데 먹는 거라도 잘 먹어라.”

하며 30만 원을 내 손에 꼭 쥐여 주시고서. 그만한 돈이면 난장 장사로 한 달 이상 벌어 모으셨을 터라 받는 손이 부끄러웠다. 당시만 해도 탄광 일은 정말 위험하고 힘들었다. 웃는 얼굴로 함께 입갱한 동료가 싸늘한 주검이 되어 나오는 것을 여러 번 목격했다.

석탄 산업 전성기엔 탄광 사고로 매년 200명 이상이 목숨을 잃었다. 어둡고 비좁은 갱도에서 손바닥만 한 안전등 빛에만 의존하여 일하다 보니 사고가 잦았다. 산더미 같은 갱목 무게에 허리가 끊어질 것처럼 고통스러울 때도 어금니를 앙 다물고 가슴속으로 ‘어머니!’를 부르며 견뎌 내곤 했다.

더 이상 물러설 곳도 없는 막장. 어차피 배수진을 치고 저승사자에 맞설 수밖에 없었다. 이따금 죽음의 공포가 밀려올 때면 ‘나는 절대 죽을 수 없다.’라고 되새김질하며 독기를 품었다. 자식을 전쟁터에 보낸 심정으로 하루하루 사실 어머니를 생각하면 죽을 수도 없었다. 나는 그렇게 목숨 걸고 일하는 치열함을 ‘막장 정신’이라고 표현한다.

막장 정신은 이후 나를 시인으로, 강원도 의원으로 키운 가장 큰 힘이었다. 어머니의 삶을 통해 막장 정신을 배웠으니 내 인생의 가장 훌륭한 스승은 어머니였던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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