넘어져도 괜찮아

온리원럽 작성일 13.04.24 22:34: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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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지가 왜 그래? 자기 옷 맞아?” 퇴근하고 집에 온 남편의 바지가 낯설었다. 

“아는 형님 바지야. 빌려 입었어.” 남편은 대수롭지 않은 듯 헤벌쭉 웃으며 시커멓게 때 탄 바지를 벗었다. 

순간 노란색으로 범벅 된 허벅지가 보였다. “허벅지가 왜 그래?” “일하다 페인트를 쏟았어. 별거 아냐. 

씻으면 다 지워져.” “칠칠치 못하게. 당신 바지는 버린 거야? 산 지 얼마 안 됐는데.” 

남편은 쉴 새 없이 쏟아지는 내 잔소리에 욕실로 냉큼 들어가 버렸다. 얼마 전 남편은 실직했다. 

 불경기라는 말만 들었지 겪고 보니 세상이 그렇게 원망스러울 수가 없었다. 

12월 엄동설한에 실직이라니……. 석 달 전 계약직으로 도서관에서 근무했던 나도 계약 기간이 끝나 퇴직 처리되었다. 

연말이라 일자리가 마땅치 않아 실업 급여를 신청해 놓고 봄이 오길 기다리는데 남편까지 직장을 잃은 것이다.

남편도 무척 괴로울 터, 별말 하지 않고 묵묵히 재기를 기다렸다. 

서로 말 못하는 고통 속에 며칠을 보내던 어느 아침, 남편이 말했다. 

“안되겠어. 어디라도 나가야지. 지인들 만나 얘기 좀 해 봐야겠어.” 남편은 후다닥 씻고 뛰쳐나갔다. 

그날 밤, 남편은 거나하게 취해 전화했다. “옥아, 행복하게 해 주고 싶었는데 못난 오빠 만나 고생이지? 

조금만 더 기다려 줘!” 부모님의 이혼과 새어머니의 등장으로 무척 힘들었던 시기에 남편을 만났다. 

나는 든든하게 곁을 지키는 그와 사랑을 키워 나갔다. 하지만 그가 입대하면서 5년간의 연애에 종지부를 찍었다. 

한데 그게 끝이 아니었다. 혼란스러운 이십 대가 끝날 무렵 우연히 다시 만나 1년 뒤에 결혼했다. 

당시 우리 전 재산은 400만 원. 그 돈으로 어렵사리 결혼식 올리고, 시아버님 도움으로 작은 임대 아파트에 둥지를 틀었다.

결혼한 지 3년이 되도록 혼인 신고도 못했다. 

남편은 하루빨리 이 집에서 벗어나혼인 신고하고, 집도 장만하고, 아기도 낳자며 힘들어하는 나를 위로했다.

그러나 지금은 반대가 되었다. 위태로운 남편 눈빛이 불안하고, 막막하고, 괴로운 심정을 모두 말해 주었다. 

술이 깬 다음 날 남편이 말했다. “나, 다음 주 월요일부터 아르바이트해. 예전에 같이 일했던 형님이 도와 달래. 

그러니까 걱정하지 마. 아르바이트하면서 일자리도 찾을게.” 아르바이트가 바로 페인트칠이었다. 

평생 용접만 한 남편이 페인트칠이라니……. 

새로운 일이라 낯설고 어려울 터, 부주의하다고 잔소리한 나 자신이 원망스러웠다. 

안전 장비 없이 높은 곳에 매달려 일했으니 얼마나 힘들었을까. 남편 실직 뒤 외식과 배달 음식을 모조리 끊었다. 

며칠 내내 김치와 김 반찬만 먹었다. ‘안 쓰는 게 버는 거니까.’라는 생각으로 알뜰하게 살림했다. 

하지만 오늘은 통닭 한 마리 시켜도 되지 않을까 싶어 남편이 씻는 동안 주문했다. 

그러고는 남편 속옷을 들고 욕실 앞에서 기다렸다.

“왜 여기 서 있어?” “왜긴, 오빠가 우리 집 왕이니까 내가 시중드는 거지.

” 남편이 멋쩍게 웃으며 나를 꼭 안아 주었다. 

남편은 내일 새벽 또 낯선 곳에서 낯선 일을 하며 낯선 공기를 마시고 낯선 생각으로 몸과 마음이 힘들 것이다. 

하지만 전혀 내색하지 않고 내 등을 토닥여 준다. 지금은 남편이 잠시 겨울잠을 자는 시간인가 보다. 

남들처럼 번듯한 집이나 자동차가 없어도, 날마다 김치만 먹어도 난 괜찮다. 

이렇게 듬직한 남편이 매일같이 “사랑한다.”라고 속삭여 주고, 

아무리 맛없는 반찬이라도 국물 한 방울 안 남기고 싹싹 먹어 주면 영원히 행복할 듯하다. 아니, 난 충분히 행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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