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찬가지로 우리는 우리가 20대들을, 대학생들을 잘 모른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그들이 어떻게 생각하고 살아가는지에 대해 제대로된 정보만 있으면 이들을 잘 이해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대다수의 부모와 선생이 이런 착각에 빠져 있다. 그러나 '제대로 된 정보'만 있으면 된다는 생각은 지배와 통제에대한 욕심이지 이해에 대한 갈망이 아니다. 학생부터 대학, 기업까지 우리 사회는 모두가 대학 서열 놀이에 빠져 있다. 우리 사회는 어느 대학에 입학하는가가 평생을 두고 그 사람의 운명을 결정한다. 자신이 나온 대학이 어떤 범주로 묶이는가에 따라 그 사람의 신분이 결정된다. 그 붙기 어렵다는 사법고시에 합격해도 서울대 출신이냐,아니면 지방대 출신이냐에 따라 상당 부분 자신의 미래가 결정된다고 한다. 앞에서 끌어주고 뒤에서 밀어줄 동문들이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대학생들은과거처럼 자신들이 대학생이라는 이름만으로 동류의식을 갖게 되지 않는다. 얼마 전 있었던 고려대 학생 김예슬 씨의 <대학 거부 선언>에 386세대의뜨거운 지지와는 달리 현재 대학생들은 그리 열렬한 반응을 보이지 않은 이유도 바로 이 때문이다. 이들이 '명문대생' 김예슬에게 '대학생'이라는동류의식을 가지기에는 명문대와 지방대 사이의 간극은 지나치게 크다.지금 대학생들은 자기 의지와 생각을 가지고 세상을 주체적으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여전히 남에게 의존해서 살아간다. 사적으로 맺어진 수많은관계에서 상대방의 사적인 욕망과 이해애 따라 '배신자'에서 '밥버러지'까지 다양하게 불리는 타율적인 존재에 불과하다. 이 모든 호칭을 한마디로 정리하면 바로 성장이 정체된 '잉여'이다. 대학생에 대한 호칭은 '지성인'에서 '잉여'로 넘어갔다. 수업시간에 학생들은 잉여라는 말만 나와도 까르르 넘어간다.그 웃음에는 자신들이 이 사회에서 어떤 처지에 놓여 있는지에 대한 서글픈 인식이 들어 있다. 잉여가 무엇인가? 남아도는 인생이란 뜻이다. 남아도는인생이기에 이 사회에 필요한 그 무엇도 아니다. 한 학생의 말처럼 불필요한 존재이다.자유의 이름으로 대학생들은 눈코 뜰새 없이 바쁘다. 생각할 시간 따위는 없다. 대학생들이 관리해야 하는 목록은 점점 더 늘어간다. 학생들이 취업을 할 때 써야 하는 자기소개서를 살펴보면 쉽게 알 수 있다. 대다수 기업들이 제시하는 자기소개서 양식을 채우려면 대학생들은 정말이지 가랑이 찢어지게 뛰어다녀야 한다. 학벌과 학점과 영어 시험에서 시작된 취업 스펙 3종 세트는 자격증과 해외 연수를 포함한 5종 세트로 발전하였다. 이제 인상 관리에 성형이 포함된 7종 세트의 시대라고까지 이야기한다. 문제는 요구하는 양이 많다는 것만이 아니다. 상충하는 것을 한꺼번에 요구한다는 것이 더 큰 문제이다. 대학생들은 자유로운 시간에 책도 많이 읽어야 하지만 동시에 전공 공부도 열심히 해야 한다. 사회적 네트워크도 넓혀야 하지만 동시에 스펙을 쌓기 위해 세상과 단절되기도 해야 한다. 한편에서 원칙적이어야 하면서 다른 한편에서는 유연해야 한다. 전문지식을 가지고 있으면서 동시에 교양도 가지고 있어야 하며, 목표지향적인 냉혈이어야 하면서 동시에 대인관계도 좋아야 한다. 그래서 학생들은 자기소개서를 '자기소설서'라고 부른다.왜 자본은 애초부터 불가능한 것을 대학생들에게 요구할까? 현재 체제가 잉여를 해소하는 시스템이 아니라 잉여를 생산하는 시스템이기 때문이다.애초부터 시장은 학생들의 스펙에 관심도 없었다. 왜냐하면 우리 사회에서 스펙을 요구하는 것은 자기를 계발하는 능력을 긍정하기 위해서가 아니기 때문이다. 인턴만 하더라도 대다수는 복사기나 돌리는 잔심부름이나 하는 것이 전부다. 생생한 직업 체험이나 경력 관리와는 애초부터 거리가 멀다.솔직히 말해 스펙은 이 잉여인가의 시대에 '자기관리'라는 도깨비 방망이로 탈락시킬 놈을 찾기 위해 강조되고 있다. 청년실업 문제를 해결할 의사도없는 시장의 무능을 '자유'의 이름으로 개인의 무능으로 돌려버린 것이 바로 스펙의 실체이다. 그리고 이 전략은 성공하였다. 이 체제에서 시장이 정말 성공하였다면 그것은 모든 사람을 자기계발의 화신으로 만들었기 때문이 아니라 실패를 자신의 책임으로 돌릴 수 있게 하였기 때문이다. 상당수의 대학생들은 자신의 무능과 무기력과 줏대 없음과 나태함과 방탕함을 자신의 탓으로 돌린다. 이 모든 문제는 게으르고 찌질한 자신의 탓이 되어버렸다. 체제는 완벽하게 승리하였다. 청춘을 자학하는 잉여로 만들어서 말이다. 자기를 계발하는 주체의 이면은 자학하는 주체이다.이들에게 가치의 척도는 상품화이다. 우리 사회에 팔릴만한 상품이 되기 위해 수 많은 아이템으로 무장해야 한다. 그래서 이들에게 김예슬은 '대학을 거부한 젊은이'가 아니라 '글을 참 잘 쓰는 부러운 또래'이다. 이들에게 중요한 것은 김예슬이 무엇에 대해 어떤 선언을 하였는지가 아니라 그가 소유한 '글쓰기 솜씨'라는 아이템이다. 이런 관점에서 김예슬 선언을 바라보는 학생들에게 그의 학벌과 글 솜씨는 유이의 '꿀벅지'와 다르지 않다.글 솜씨든 꿀벅지든 이 사회에서 살아남기 위해 우리 모두가 탐해야 하는 아이템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386들은 이런 대학생들을 속물이라고, '찌질이'라고 격렬히 비판한다. 그러나 우리가 속물주의의 이면에서 발견할 수 있는 것은 잉여로 내쳐진 자들의 살아남기 위한 처절한 노력이다. 역설적으로 속물이 되어야만 살아남을 수 있는 것이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시대이다. 우리는 누군가 자신의 허벅지를 음흉한 시선으로 바라보며 '꿀벅지'라고 불렀을 때 자신의 존엄이 침해되었다고 항의할 권리가 없다. 오히려 이런 호명은 자신이이 사회에서 상품으로서의 가치를 인정받는 영광스러운 일이다. 상품으로 인정받지 못하면 그 사람은 사회에서 아무런 가치도 없는 쓰레기로 전락하기 때문이다. 나 스스로 나에게 어떤 가치가 있는지를 드러내고 상품으로 치장하여야 한다. 우리 모두는 본래 속물이 아니라 살아남기 위해서 속물이 되어야만 하는 존재이다. 한국의 교육은 '말하는 법'을 가르쳐주지 않았다고 비판한다. 한국의 교육이 가르쳐준 것은 단지 '언제나 완성된 형태로 잘 말해야 한다는 것뿐'이라는 것이다 . 그러니 당연하게도 잘 말하는 법을 모르는 아이들은 자신이 혹시 실수라도 해서 반 친구들에게 웃음거리가 되지 않을까, 혹시 말실수를 하지는 않을까 하는 두려움에 늘 시달릴 수 박에 없다.오늘날 학교 안의 권력관계는 판이하게 다르다. 공부 잘하는 아이는 정의의 편도 아니고 중재자도 아니다. 오히려 이 아이들이야 말로 힘 셈 아이들, 잘사는 아이들과 함께 삼위일체가 되어 반에서 가장 덜떨어진 아이를 괴롭힌다. 괴롭힘을 당하는 아이는 가난하고, 공부 못하고, 무엇보다 덜떨어진존재이다. 그리고 이들을 중재할 수 있는 사람은 교실에 존재하지 않는다.급격한 변화이다. 괴롭힘을 당하는 아이가 약자가 아니라 덜떨어진 존재로 인식된다. 맞는 것에도 다 이유가 있는 법이라는 식으로 폭력은 정당화된다.무엇보다 학교 안 권력자의 삼위일체가 말하는 것은 학교 폭력이 우정에 대한 도덕적 폭력이 아니라 경제/문화/육체 자본의 삼단 합체 속에서 벌어지는 계급적 폭력이라는 사실이다. 교육이야말로 권력으로부터 가장 초월한 척하지만 권력의 속성을 가장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학교라는 공간에서 교육의 목적은 지식의 전달만이 아니라 사회가 요구하는 몸과 마음을 만들어내는 훈육이기 때문이다. 훈육이란 말 자체가 폭력적이지 않는가? 그래서 학생들이 가장 믿지 않는 말이 이 모든 것은 너를 위한 교육이고 사랑이라는 말, 바로 그 거짓말이다.우리는 상품에 대한 소비에서 타인의 시선을 소비하는 것으로 옮겨야 한다는 것을, 그리고 이제는 타인의 시선을 소비하기 위해서 시간과 공간을 소비해야 한다는 것을 깨닫는다. 명품을 소비할 때 명품만 소비하는 것이 아니다. 명품을 사기 위해 걷는 백화점이라는 공간, 그 공간에서의 서비스, 그리고 남들이 나를 바라보는 시선, 그 시선 속에서 만들어지는 동류의식, 이 모든 것을 한꺼번에 소비한다. 우리가 최종적으로 소비하는 이미지는 자기 자신의 이미지, 즉 자신을 바라보는 자신의 시선이다. 우리는 소비의 현장에서 두 가지 자아를 발견한다. 그곳에서 물건을 소비하며 흡족해하는 자기 자신과 그러한자기 자신을 바라보는 나르시시즘에 젖어 있는 자기 자신, 나르시시즘에 젖은 내가 소비하는 것은 나의 정체성과 합리성이다. 정체성은 내가 같은 것을소비하는 사람들과 공유하는 과정이다. 합리성을 소비한다는 것은 이런 나의 소비가 낭비나 궁상이 아니라 대단히 합리적인 행위라는 것을 증명하는 과정이다. 이런 점에서 소비주의는 비합리적인 것이 아니라 합리성의 새로운 형식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우리는 돈에서 헤어나지 못한다. 돈이 우리의 사회적 관계를 매개한다. 우리는 돈이 행복을 가져다주지는 않지만 돈이 없다면 삶이 고립된다는사실을 잘 알고 있다. 돈이 없다는 것은 불편함 이상이다. 그것은 자유의 박탈이고 존재의 박탈이다. 이들은 돈의 본질을 꿰뚫고 있다. 돈은 행복이 아니라자유이다. 돈을 돈으로 봄으로써 돈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이 아니라 우리는 돈을 통해서 자유로워진다. 돈에 종속될 때 자유를 얻는다. 자유의 의미가 변하였다. 자유는 정치적으로 내가 아무 소리나 할 수 있고 누구와 아무렇게나 말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자유란 내가 무엇인가를 소비자로서 선택할 수 있는 힘을 의미한다. 돈이 없다면 우리는 아무것도 소비할 수 없다. 소비자란 돈을 소유한 사람이다. 소비자의 민주주의라고 온세상이 떠들고 소비자가 세상을 바꾼다고 이야기하지만 그것은 결국 무엇을 소비할 수 있는 힘이 있는 사람들에게 권력이 넘어갔고 그들만이 자유를 누릴수 있다는 의미이다. 이 자유가 '선택의 자유'이다 이 자유를 가지기 위해서 우리 모두는 '소비자'가 되어야 한다. 또한 앞에서 계속 살펴본 것처럼 소비를통해 우리는 다른 사람들과 관계를 맺는다. 소비자가 아니면 고립된 삶을 살거나 주변 사람을 외면하며 살아야 한다. 소비자의 이름으로만 우리는 사회적으로 존재할 수 있다 .따라서 돈이 우리를 자유롭게 한다. 이것을 이들은 너무 잘 알고 있다. 나는 이것이 수업의 힘이라고 생각한다. 인간 됨이 쉽지 않음을 발견하는 것, 이보다 더 인문학적인 발견이 어디에 있겠는가. 내가 맞다고 생각하는 것이그리 맞지 않으며, 내가 정당하다고 생각하는 것이 그리 쉽게 이야기할 수 없다는 발견(깨달음) 말이다. 그래서 우리에게 판단과 심판의 언어보다 더 중요한 것은 성찰의 언어이다. 그리고 나는 내 말이 가진 무게를 깨닫도록 해주는 것이 수업이라고 믿는다. 그렇게 많은 것을 다 하려고 노력하지 않아도 괜찮다고,하고 싶은 것이 없어도 좋고, 꿈이 없어도 좋고, 못하는 것이 많아도 좋고, 우리가 우리 자신에게솔직하기만 하다면, 우리의 본질은 꽤 괜찮은 것이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