값진 십만 원

온리원럽 작성일 13.04.28 21:35: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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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가 다니시던 회사는 경영 상태가 좋지 않았다.
아버지는 누군가에게 회사 지분을 반강제적으로 빼앗기셨던 것 같다.
잠결에 아버지가 거실에서 어떤 남자들과 다투시는 소리를 들었다.
어느 날 낯선 남자가 또 다른 사람을 데려와 우리 집 구조를 설명했다.
나는 곧 이사하나 보다 생각했다.

내가 중학교 2학년으로 올라갈 무렵 아버지는 집에만 계셨다.
거실 한구석 나무 의자에 뒤꿈치를 박고 스스로 나무가 되어 가셨다.
턱수염과 머리카락은 가지처럼 울창해졌다.
일 년 동안 나무처럼 앉아만 계시는 아버지를 이해할 수 없었다.
나는 아버지를 거실에 있는 나무라 생각하고 물 주듯 소주를 드렸다.

고등학교에 입학한 어느 초겨울, 집으로 와 보니 살림살이가 골목에 나와 있었다.
공중전화로 달려가서 어머니에게 전화 드렸다.
어머니는 그간 집안 살림을 도맡아 하다 일주일 전 충주에 있는 외삼촌 가게 일을 도우러 내려가신 터였다.
흥분을 가라앉히고 상황을 전하니, 아버지 안부를 먼저 물어보셨다.

‘아차, 아버지!’
전화를 끊자마자 집으로 달려가니 앞집 아주머니가 나와 계셨다.
아주머니는 점심때쯤 여러 사람이 몰려와서 살림살이를 끄집어냈고, 아버지가 짐을 들여 놓으려 하자 사람들이 구석으로 내몰았다고 하셨다.
아버지는 그들이 돌아간 뒤에도 우두커니 서 있다 비가 내리자 비닐과 상자를 구해 와 살림살이를 덮고 어디론가 사라지셨다는 것이다.

대문 자물쇠는 낯선 것으로 바뀌었다.
동생과 나는 당장 머물 곳도, 짐을 둘 공간도 없기에 몰래 담을 넘어 집 안으로 들어가 몇 가지 짐을 들여놓았다.

이튿날 앞집 아주머니가 불쌍하다며 아침밥을 챙겨 주셨다.
그때 알았다.
세상엔 가슴 저린 밥도 있다는 것을.

아버지를 수소문하던 겨울날, 동생 친구에게 전화가 왔다.
아버지를 닮은 분이 안양천 다리 아래 계신다고 했다.
동생 이름을 말하며 아시느냐고 물으니 형인 내 이름까지 말하면서 횡설수설하더라는 것이었다.
눈물이 뺨을 적셨다.
얼른 이 소식을 가족에게 전하고 안양천으로 달려갔다.

한데 다리 아래에는 아무도 없었다.
집으로 전화하니 동생 친구가 아버지를 업고 집으로 오는 중이라고 했다.
다시 집으로 달려가 문을 열자 어머니와 동생, 동생 친구들이 거실에 있었다.
아버지는 두꺼운 이불을 덮고서도 몸을 벌벌 떠셨다.
눈동자는 초점 없고 이불 밑으로 나온 발은 맨발이었다.
시커먼 발바닥은 물수건으로 아무리 닦아도 깨끗해지지 않았다.
마치 까맣게 타 버린 아버지의 인생처럼.

의사는 아버지의 간이 지나친 음주로 매우 상했지만 치료하면 나아질 거라고 했다.
우리 가족은 그제야 한숨을 돌렸다.
한 달가량 입원한 아버지는 상태가 많이 호전돼 반지하 전셋집으로 돌아오셨다.

고등학교 졸업 후 2년간 일만 했다.
의류 공장 아르바이트부터 호프집 종업원, 음식 배달원 등을 하며 생활비와 학비를 벌었다.
일하는 틈틈이 공부해 수능을 봤고, 대학에 입학했다.
대학교 2학년이 지날 때쯤 육군 장교 모집 광고를 보았다.
입대를 앞둔 나에게 좋은 기회라 응시했고, 장교로 선발됐다.

휴가 때 아버지를 찾아뵈었다.
아버지는 건강을 회복하고 아파트 경비원으로 일하셨다.
복귀하기 직전, 아버지의 근무복 주머니에 오십만 원을 몰래 넣어 두었다.
임관 후 제대로 된 선물이나 용돈을 드리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쉬웠던 터다.

부대로 돌아와 휴가 때 사용한 가방 안에서 낯선 종이를 발견했다.
꼬깃꼬깃 접힌 종이를 펴자 십만 원권 수표 한 장과 낯익은 글씨체가 눈에 들어왔다.

“그동안 용돈 준 적이 없는 것 같아 미안하구나. 큰돈 아니다.”
아버지였다. 눈앞이 흐려졌다.
말씀대로 큰돈은 아니지만 당신이 차마 말로 표현하지 못했던 마음이 담겨 있었다.

마른나무 같던 아버지가 이제 조금씩 건강한 가지를 뻗으신다.
언제가 될지 모르지만 빚을 전부 갚고 우리 집을 갖는 날,
그때는 비로소 과거를 서산 저편으로 던져두고 하늘을 향해 울창하게 뻗은 가족이란 나뭇가지 아래서 희망을 아로새길 수 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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