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엄마와 난 조금 특이한 관계다.
친구들이 장난삼아 ‘미국식 엄마’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사실 엄마는 미국은 관광으로 잠시 다녀온 것이 전부인 마산 출신이다.
끈끈하기는커녕 쿨하디쿨한 엄마.
어릴 때 노래 부르는 걸 좋아하던 내가
“엄마, 나 노래 잘해?”
하고 어린이답게 물어봤더니
“음, 넌 목소리가 안 좋아 큰일이구나.”
라고 차분하게 대답했다든지, 성적이 잘 나와서
“엄마, 나 올 백 맞았어요!”
하고 자랑했더니
“그래, 냉장고에서 아이스크림이나 꺼내 먹어라.”
하고 퉁명스레 대답해서 우물우물 빵빠레를 먹으며 인생이 이런 거구나 생각했다.
당시 그런 엄마가 섭섭하기보다 ‘나한테 별로 관심이 없나?’ 정도로 생각했던 것 같다.
그런 방침 덕에 보통 아이들보다 강해진 나는 엄마와 고 3 때 묘한 계약을 했다.
엄마가 어느 날 “내가 인정할 만한 학교에 합격한다면 마음먹은 건 해내는 사람으로 인정할 테니 그때부터는 네 마음대로 살아도 된다.”
라고 제안했고, 난 이래저래 열심히 공부해서 그 조건을 달성했는데 다음부터가 엉망이었다.
학사 경고를 세 번 받아 대학에서 제적당하고, 일본 어학연수를 부모 도움 없이 가겠다고 겁 없이 날뛰다가 상당한 빚을 지고…….
정말 천방지축으로 20대 초반을 보냈다.
하지만 엄마는 단 한 번도 나에게 큰소리치거나 상처 주는 말을 하지 않았다.
스스로 저지른 잘못을 수습하는 데 20대 중반까지의 시간을 보내고 조금 철이 든 나는 그제야 엄마에게 당시의 기분에 대해 물었다.
그러자 엄마가 깜짝 놀랄 말을 했다.
“사실 확 직이 뿌고 싶었다!”
물론 농담이었지만 엄마가 그간 나에게 하지 못하고 삼킨 말의 무게를 느낄 수 있었다.
엄마가 나한테 관심이 없었을 리 있나.
간섭하는 게 참고 지켜보는 것보다 훨씬 쉬웠겠지만 엄마는 내가 인생길을 선택하고 끝까지 걷는 것을 힘들게 지켜봐 주었다.
결코 평탄하지 않은 길이었지만 그 덕에 이렇게 음악 하고 글 쓰는 사람이 될 수 있지 않았나 싶다.
지금도 자기 전에 항상 내가 건강하길 기도하는 엄마.
하지만 전화 통화는 1분 이상 하지 않는 엄마.
앞으로도 서로의 가장 큰 지지자로 오랜 시간 함께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