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년 전 학원사업을 벌이면서 또 하나의 학원을 무리하게 확장했다.
그 바람에 원생이 모이지 않았고, 설상가상으로 투자한 회사가 상장 폐지를 당하는 이중고를 겪었다.
순식간에 경제적인 고통을 받았지만 누구에게도 어려움을 호소할 길이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아버지 생신에 형제들이 친정 가까이에 있는 이름난 갈빗집에서 모이기로 했다는 연락을 받았다.
당시 나는 모임에 나가는 게 여의치 않을 만큼 돈이 궁했다.
생신 당일 가족이 모두 모여 20인분도 넘는 갈비를 먹었다.
식대가 은근히 걱정되었다.
선물 드리는 시간에 간신히 준비한 10만 원을 봉투에 넣어 아버지께 드렸다.
식사가 끝나고 계산할 시간이 되자 마음이 조마조마했다.
나는 큰동생에게 다가가 쭈뼛거리며 말했다.
“요즘 내가 좀 어려워서…….”
말끝을 흐리며 도망치듯 식당을 나왔다.
가족이 뿔뿔이 흩어진 뒤 아버지와 단둘이 차를 탔다.
가는 길에 아버지가 말씀하셨다.
“요즘 어렵지. 여자 혼자 애 셋을 키우는 게 얼마나 힘든데…….”
“하나도 안 힘들어요.”
“네가 벌면 얼마나 번다고.”
아버지는 갑자기 주머니에서 내가 드린 봉투와 또 다른 봉투를 꺼내 가방에 넣어 주셨다.
나는 차마 봉투를 받을 수 없었다.
아버지에게 못난 딸의 모습을 들킨 것 같아 만류했지만 막무가내셨다.
그러면서 말씀하셨다.
“내가 매주 로또를 한 장씩 사거든.
지난주에 운 좋게 4등을 한 거야.
그날 밤 당첨금이 몇 천은 될 줄 알고 좀처럼 잠도 안 오더라.
근데 다음날 은행에 갔더니 고작 6만 원 조금 넘게 주더라.
당첨금 너한테 다 주려고 했는데 얼마 안 돼서 원…….”
아버지 말씀에 고개를 들 수 없었다.
경제적으로 어려운 딸을 위해 일흔이 넘은 나이에 로또를 사기 시작하셨다는 사실을 알고 콧등이 시큰거렸다.
사업의 어려움은 경제 관념이 없던 내게 첫 시련이기도 했지만 그보다 값으로 매길 수 없는 아버지의 큰 사랑을 느끼게 해주었다.
진정한 효도란, 부모님 마음을 편하게 해드리는 것이라는 식상한 진리가 새삼 마음에 다가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