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각을 면하려고 광화문 거리를 빛의 속도로 달리는 중이었다. 퍽! 갑자기 얼굴을 강타당했다. 눈앞에 별똥별이 부서졌다. 가까스로 정신을 차리고 보니 날아들던 비둘기와 정면충돌한 것이었다.
뭐, 이런 경우가……. 비둘기의 표정은 딱 그거였다. 나는 아프기도 하고, 그보다 몹시 부끄러워서 얼굴을 가리고 달리기 시작했다.
‘아, 더는 안 되겠어.’ 한 달 뒤, 직장을 그만두었다.
“잘 다니던 직장을 때려치우고 폼 나는 제2의 인생을 시작했다.”라는 말이 참으로 부러웠다.
일단 배낭을 메고 여행을 떠났다. 여름이 시작될 무렵에 떠났는데 지구 반대편 남미는 겨울이었다. 남미의 겨울 따위 훗, 했다가 큰 코 다쳤다. 추위가 뼛속까지 사무쳤다. 게다가 내가 아는 스페인 어라고는 생존을 위한
“아구아(물).”와 당최 써먹을 데 없는 “베사메무쵸(흠뻑 키스해 주세요).”
뿐이었다. 나는 얇은 티셔츠 몇 장을 겹쳐 입은 과묵한 여행자가 되었다.
추위와 고독, 고산증에 지친 나는 여행이고 뭐고, 하루빨리 집에 돌아가기로 했다. 그래서 볼리비아 국경 근처 숙소에서 새벽같이 일어났다. 늦으면 국경을 넘을수 없었기 때문이다. 숙소를 나서니 바깥은 칠흑 같은 어둠에 싸였다. 하얀 숨을 훅훅 내쉬며 국경을 향해 걸었다. 그때였다.
“무쵸 프리오?”
고개를 돌려보니 인디오 복장을 한 아주머니가 미소 지었다. 처음 듣는 스페인 어지만 이상하게도 이해할 수 있었다. 내게는 그 말이 이렇게 들렸다.
“무척 춥지?”
어쩐지 눈물이 핑 돌았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프리오. 무쵸 프리오.”
아주머니는 자신의 숄을 내게 둘러 줬다. 우리는 어둠 속을 타박타박 걸었다. 더 이상 아무 말도 나누지 않았지만 그 순간, 더 할수 없는 위안을 받았다.
그것이 새로운 인생의 서막이었다. 오랫동안 가슴속에 품은 꿈을 이루겠다는, 무모한 짓이 시작됐다. 그것은 준비 없이 나선 여행처럼 녹록치 않았고 예상치 못한 남미의 추위만큼 매서웠다. 이제 그만둘까? 나는 막막한 어둠 속에서 혼자 중얼거렸다. 그렇게 제법 시간이 흘렀다. 그리고 어느 날 전화를 받았다.
“축하합니다. 소설 당선되셨어요.” 내게는 그 말이 이렇게 들렸다.
“무척 추웠죠?”
(무쵸 프리오는 ‘몹시 춥다’란 뜻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