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과 나는 연년생인 탓인지 사소한 일도 일단 뒤엉켜 싸우고 보는 앙숙이었다.
하지만 단 한 번의 의견 차이 없이
우리가 손을 맞잡은 선명한 기억이 있다.
바로 1982년에 개최된 서울국제무역박람회에 가기 위해서였다.
우리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아버지를 설득하는 데 힘을 모았다.
형의 학교에서 박람회 방문기를 쓰는 숙제도 내주었지만,
그보다 새로운 볼거리가 많을 거란
생각에 필사적이었다.
처음엔 난색을 표하던 아버지도 당신을 보는 형제의 뜨거운 눈빛을 외면하기 힘들었는지 이내 승낙해 주셨다.
넉넉지
못한 형편에 놀이공원 한번 가보지 못한 우리에게 박람회는 그야말로 별천지였다.
새로운 상품들, 처음 보는 외국 물건과 낯선 외국인들,
날 선 수트 차림의 사람들 사이로 우리는 신나게 뛰어다녔다.
아버지는 그런 우리를 묵묵히, 그저 가끔 고개를 끄덕여주며
지켜보셨다.
넓고 북적이는 박람회장을 한참 헤매고 다닌 탓인지 형과 나는 금세 허기를 느꼈다.
우리는 한적한 장소를 찾아
식사를 했다.
집에서 싸온 김밥 세 줄은 순식간에 동났고, 형과 나는 채워지지 않는 식욕을 숨기지 않고 탐욕스럽게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그러다 긴 행렬이 눈에 띄었다.
컵라면을 사는 줄이었다.
지금은 흔하고 싼 즉석 식품이지만 그때만 해도 출시된
지 얼마 안된 신개념 라면이었다.
우리는 또다시 의기투합, 아버지를 향해 갈망의 눈빛을 보냈다.
아버지는 조금 망설이다
“맛보는 것도 좋지.”
하며 줄을 서셨다.
우리는 의기양양, 아버지 옆에 붙어서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뽐내는 시선을 보냈다.
우리에게 있어 최초의 컵라면 시식날이었다.
아버지가 손에 들고 오신 건 단 한 개의 컵라면이었지만 우리는 누구보다 풍요롭고 맛있는
점심을 먹었다.
컵라면 하나를 사이좋게 나눠 먹는 형제를 보시던 아버지의 시선은 따뜻했다.
그러나, 그날 아버지는 집에 돌아와
허겁지겁 찬도 없이 밥을 드셨다.
김밥은 고사하고 하나밖에 사지 못한 컵라면도 결국 우리 배 속으로 들어갔으니 당신의 허기야 오죽했을까.
자식의 기대를 채워주기 위해 티 한 번 안내고 우리 뒤를 봐주시던 아버지.
어머니의 사랑처럼 눈에 보이진 않지만, 아버지가 주신
사랑은 구수한 된장처럼 오래도록 묵직하게 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