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년 전, 방송국에 근무할 때였다.
연극
연출하는 K라는 친구가 부업으로 명동에 주막을 낸 적이 있었다.
K는 개업하는 날 친한 친구들을 불렀다.
처음 보는 사람이
대부분이었지만 막걸리 잔이 몇 순배 돌아가더니 이내 서먹한 분위기는 싹 가셨다.
내 정면에 앳돼 보이는 여성이 자리했다.
검정 가죽 미니 스커트에 망사스타킹이 유난히 눈에 띄었다.
그날 많은 사람과 여러 이야기를 나누었지만 이상스럽게도 그녀와 유난히 많은 눈빛을 주고받았다.
그녀는 친구의 학교 후배로
사진학과를 졸업했다.
사진을 전공했다는 말에 나의 관심은 더욱 부풀었다.
오늘 헤어지면 다시 만날 기회가 없을 것 같았다.
순간 떠오른 작전 하나.
나는 그녀가 이야기하는 중에 갑자기 일어섰다.
“미안합니다만, 먼저 일어섭니다. 다음 약속이 있어서...”
얼핏 그녀의 서운한 표정이 눈에 들어왔다.
나 역시 일어나기 싫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그러고는
계산대에 있는 친구 누님에게 내 명함을 눈치채지 않게 살짝 전했다.
“누님, 부탁 하나 들어줘요. 저기 검정 가죽옷 입은 여자...”
한쪽 눈을 찡긋 감고 밖으로 나왔다.
꼭 눈이라도 올 것 같은 싸늘한 밤이었다.
속으로 생각했다.
지금은 좀 서운하지만 며칠 뒤에는 활짝 웃을 거라고.
다음날 오후 퇴근 시간쯤이었다.
전화벨이 울렸다.
그녀였다.
한달음에 충무로에 있는 약속 장소로
나갔다.
거기엔 어제의 그녀가 웃음을 머금은 채 앉아 있었다.
그림과 사진 얘기로 꽃을 피우다 우리는 깜짝 놀라고 말았다.
얼마 전 국전에 낙선한 사진 작품 수십 점을
방송에 사용하려고 가져온 적이 있었다.
그중 마음에 쏙 드는 작품 하나를 내 사무실 책상 위에 걸어 놓았다.
아! 그 작품의
주인공이 지금 내 앞에 있는 그녀였다.
인연의 끈은 묘하기도 했다.
우리는 만난 지 세 달 만에 결혼식을 올렸다.
혹시라도 누가 인연의 끈을
끊어 버릴까 봐 그랬던 모양이다.
창조주는 아직 반쪽을 찾지 못한 이들에게도 반드시 인연의 끈을 잡게 할 것이다.
그게 그분의 할
일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