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른아홉, 피아노를 배우기 시작했다

온리원럽 작성일 13.12.28 22:54: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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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서태지 같은 음악가가 되고 싶었다. 

고등학생 때부터 컴퓨터 음악에 푹 빠져서 집에 돌아오면 문을 잠가 놓고 음악을 만들었다. 

그걸 억지로 들어 본 친구들은 음악들이 죄다 동요나 트로트 같다고 놀려 댔다. 

피아노를 칠 수 없어도 건반으로 대충 멜로디 입력 정도는 할 수 있었고, 세세한 것은 컴퓨터로 다 수정이 가능했다. 

컴퓨터만 있으면 어떤 음악이든 만들 수 있다고 믿었다. 전자 공학을 전공해서 그랬는지도 모른다. 

아무튼 음악에 대한 열정은 대학을 졸업할 때쯤 식어 버렸고, 정신을 차려 보니 소설가가 되어 있었다.

얼마 전, 도서관에서 강좌를 하고 나오다 피아노와 작곡 레슨을 한다는 카페를 지나쳤다. 

그곳에서 흘러나오는 따뜻한 불빛 때문이었을까? 

마지막으로 음악을 만들어 본 지 십 년은 훌쩍 지났는데, 왜 저절로 발걸음이 카페로 향했는지 모르겠다.

주인장은 실용 음악 학원 강사 일을 오랫동안 하다가 가족과 시간을 좀 더 보내기 위해서 

건물을 구입해 리모델링을 했다고 했다. 1층이 카페 겸 레슨실이고 2층은 녹음실, 3층은 집이었다. 

작년에 태어난 아이를 아내와 돌보면서 남는 시간에 레슨을 하고, 공연하고, 음악 작업도 했다. 

입시를 위한 레슨을 하지 않고 음악이 좋아서 배우는 사람들을 위해서만 개인 레슨을 한다고 했다.

카페 분위기가 소박해서인지 주인장이 맘에 들어서인지는 잘 모르겠다. 얼떨결에 피아노 레슨을 신청해 버렸다. 

사실은 오래전부터 피아노를 배우고 싶었던 것이다.

나는 피아노 학원을 다녀 본 적이 없었다. 

어릴 적엔 집안 사정이 그리 좋지 않아서, 대학생 땐 나이 들어 피아노 학원에 갈 엄두를 내지 못했다.

“뭘 배우고 싶으세요?”

선생님은 레슨 첫 시간에 물었다. 나는 노래 반주를 하고 싶다고 했다.

“프러포즈를 할 때 바 같은 데서 피아노 치며 노래할 수 있는 정도면 되지 않을까요?”

남자 주인공이 정성을 다해서 노래 부르는 드라마의 한 장면이 생각났다. 

결혼식장에서 신부에게 ‘다행이다’를 부르는 신랑도 생각났다. 

보는 사람이 부끄러울 정도지만 내심 그런 남자들을 부러워했다. 

피아노를 연주하고 노래 부를 수 있다는 것은 대단한 거니까.

피아노를 배우는 건 생각보다 쉽고, 생각보다 어렵기도 했다. 

수많은 건반을 오른손과 왼손을 따로 써 가며 어떻게 동시에 칠 수 있단 말인가?

하지만 아무리 어렵게 보여도 그 속에는 원칙과 방법이 있었다. 

왼손으로는 베이스 음을 치고 오른 손으로는 코드를 짚어 가면서 반주하는 법을 차차 터득해 갔다.

예전에 음악을 만들 때 궁금했던 화성학도 몇 번의 레슨을 듣고 직접 피아노를 치면서 파악했다. 

마이너 화음과 메이저 화음의 차이가 무언지, 세븐 코드와 투 코드, 서스 포와 오그멘트 등등. 

어렵게만 보였던 것들이 원리를 터득하고 나니 이해가 가능한 것들이었던 것이다!

레슨 받은 지 3개월이 지났다. 아내는 나를 위해서 건반을 하나 장만했다. 

글을 쓰다 보면 자투리 시간이 많이 났다. 그런 시간에 연습하다 보니 실력이 점점 늘었다. 

악기 연주처럼 실력이 시간과 비례해서 정직하게 늘어나는 것도 없을 것이다. 

여기엔 잔꾀 같은 건 존재하지 않는다. 손으로 많이 익힌 만큼 실력이 는다.

아내는 같은 곡을 수백 번 반복해서 들어야 하는 고통을 잘 참아 주었다. 

이제는 쉬운 코드로 이루어진 대부분의 발라드 곡은 반주할 수 있다. 

인터넷을 검색해서 악보나 동영상을 보고 대충 반주를 따라할 수 있다. 

이런 걸 진즉에 배웠더라면 어땠을까? 나는 서태지 같은 음악가가 되었을까? 잘 모르겠다.

진부한 말이지만, 하고 싶은 게 있다면 아무리 늦다고 생각하더라도 한 번 시도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 

피아노든, 색소폰이든, 혹은 수영이든 운전이든, 영어든 중국어든, 소설 쓰기든 시 쓰기든 

기회가 닿지 않아 배워 보지 못한 게 있다면 올여름에 시작해 보는 건 어떨까?

진짜로 하고 싶었던 것이라면 생각보다 그리 어렵지 않을지도 모른다. 

잘 모르기 때문에 어려워 보이는 것이다. 인생은 길고, 우리가 즐기고 배워야 할 것은 아직도 많이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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