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실의 모든 모습

휴대호빵 작성일 19.03.28 02:00: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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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만 더 ㅋㅋ 

 

 

 

 

 

오늘은 금강경의 사구게에 대해 질문하는 나이 지긋한 어르신의 질문에 대한 

스님의 답변이 많은 감동을 주었기에 자세히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어려운 불교 교리이지만 스님께서 쉬운 생활 용어로 답변을 해주시니 

참석자들이 공감하면서 웃기도 하고 유익한 시간이 되었습니다. 








저는 인디애나폴리스에서 42년 살고 있습니다. 유학생으로 여기에 왔고요. 

내년이 칠순이고 천주교 신자입니다. 

저는 과거에 30년 가까이 시간이 날 때마다 불경을 독학으로 공부했습니다. 

무비스님의 금강경을 두 번 읽어보고 도올 선생의 금강경도 공부했는데, 

책으로 독학하면서 불경을 공부하는 것은 아주 어려운 일인 것 같았습니다. 

저는 일생에 스님을 만난 것이 법륜스님이 처음입니다. 

그래서 굉장히 기쁜 마음으로 여기에 오게 되었습니다. 

금강경에 

‘범소유상 개시허망 약견제상비상 즉견여래(凡所有相 皆是虛妄 若見諸相非相 卽見如來)’ 

라는 시구에 대해 설법을 청합니다. 

제가 글로 읽었기 때문에, 무비스님이나 도올선생이 설명하신 내용은 대충 알지만 

이 내용이 너무 중요한 것 같아서 상세히 스님께 설법을 듣고 싶습니다. 








그분들이 한 얘기를 질문자가 이해한 수준에서 요점 정리해서 얘기해보시겠어요? 

들어보고 그 정도면 되었다 싶으면 시간을 낭비할 필요가 없고, 

부족하다 싶으면 더 얘기를 해야 하니까요. 








제가 기억하기로는 금강경에 나오는 그 내용이 

‘무릇 모양이 있는 모든 것은 허망하기 때문에 그 허망한 사실을 이해한다면 그 상태가 결국 여래, 

즉 부처님을 만날 수 있다’는 내용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글귀를 해석하면 그렇게 되는데 그게 구체적으로 무슨 말일까요? 








우리가 어떤 욕심을 낸다던가, 허욕을 부린다던가 하는 그 자체가 존재하는 사실이 아니기 때문에, 

즉 무상하기 때문에, 

그런 것을 좀 넘어서서 자기 자신이 조금 더 다른 사람을 위해서 봉사할 수도 있다는 뜻 같습니다. 

이 내용을 이해한다면 더 좋은 불자가 될 수 있다고 저 나름대로 해석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질문자의 삶이 조금 바뀌었습니까? 








제가 스스로 생각하기에는 많이 바뀌었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천주교 신자이기 때문에 성서를 미국 성경 전문가 강의로 독학으로 오래 공부했습니다. 

더 많은 것을 알고 싶어서 마음의 문을 열고 불경을 공부하기 시작했는데 

아무리 공부해도 그 내용을 이해하기가 어렵습니다. 








이 앞에 바구니 두개와 접시가 있는데 보이십니까? 

그럼 제가 질문자에게 여쭤볼 테니까 본인 생각대로 얘기하세요. 

가운데에 있는 노란 바구니와 흰 바구니를 봤을 때 노란 바구니가 큽니까? 작습니까? 

 

 

 



크죠. 








그럼 이 노란 바구니와 이 모래를 담아놓은 그릇하고 비교하면 노란 바구니는 커요? 작아요? 








작죠 








질문자는 지금 이 바구니를 두고 한 번은 크다고 했고 한 번은 작다고 했지요. 

그렇다면, 이 바구니 하나만 두고 생각했을 때 이 바구니는 큽니까? 작습니까? 








중간 사이즈입니다. (청중들 웃음) 








우리가 중간 사이즈라고 하든지, 크다고 하든지, 작다고 하든지 간에, 

머리 속에 어떤 다른 것 하나를 연상해서 그것과 비교해서 

”크다“ 혹은 ”작다“ 고 말하는 것이지요. 

그렇게 무언가와 비교해서 말하는 것을 ‘상대적’이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정확히 말한다면 상대적으로 크고, 상대적으로 작고, 상대적으로 중간사이즈이지요. 

크다고 할 때에는 다른 작은 것을 연상한 것이고, 

작다고 할 때에는 다른 큰 것을 연상하고 말한 것입니다. 

그렇게 인식은 상대적인 것이지요. 








예,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상대적으로 보지 않은, 절대적인 차원에서 이 바구니 자체는 어떻게 말해야 할까요? 








존재하지 않다고 봐도 되겠습니다. 








존재하지 않는다니요? 이렇게 눈 앞에 있는데요. (청중들 웃음) 

그럴 때 언어에는 여러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처음에 질문이 ”큽니까, 작습니까” 였죠? 질문의 언어를 빌리는 방법으로는 

“크지도 않고 작지도 않습니다” 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아닐 비(非)자를 써서 ‘비대비소’라고 할 수도 있고, 

아닐 불(不)자를 써서 ‘불대불소’라고 할 수도 있어요. 

만약 상대적인 용어를 하나도 안 쓰고 직설적으로 표현하라고 한다면 “한 물건”이라고 합니다. 

즉, ‘그것은 다만 그것일 뿐’이다. 큰 것도 아니고 작은 것도 아니고 

‘그것은 그것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그것일 뿐이지 큰 것도, 작은 것도, 깨끗한 것도, 더러운 것도, 

새 것도, 헌 것도, 짧은 것도, 긴 것도 아니고 다만 그것은 그것일 뿐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런 언어로 표현하는 것을 선적인 언어라고 합니다. 

이것을 여러분이 아는 글로 말하면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다’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그 말은 ‘다만 그것은 그것일 뿐이다’ 라는 얘기입니다. 

이것을 대승불교의 철학적인 언어로 표현하면 ‘공(空)이다’ 라고 표현합니다. 

‘공’이라는 말은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이 아닙니다. 

‘공’이라는 말은, 누군가가 ”크다“고 한다면 ”큰 것이 아니다“, 

”작다“고 한다면 ”작은 것이 아니다“, ”새것이다“ 라고 한다면 ”새것도 아니다“, 

”헌 것이다“ 라고 한다면 ”헌 것도 아니“라는 뜻이예요. 

‘실상(實相)’ 즉, 실제 모습이 어떤가, 즉 진실상을 표현할 때 이런 여러 가지 언어표현을 사용합니다. 

선불교에서는 이런 언어마저도 써서는 안 된다는 주장도 있습니다. 

그러니까 '한 물건이라고 해도 옳지 않다'고 표현하기도 합니다. 

옛날에 어떤 제자가 산 넘고 물 건너 스승을 찾아와서 

'스승님께 여쭤보면 바로 깨칠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하고 

인사를 하고 질문을 해야지 하고 문을 열었는데, 

두 발이 다 들어가기도 전에 스승이 벽력같이 고함을 쳤어요. 

“어떤 물건이 이렇게 왔는고!” 하고요. 쉽게 얘기하면 “너 누구냐?” 이 말이에요. 

그렇게 물으니 그 제자는 대답을 못했어요. 만약 금강경 구절을 물었거나, 법화경 구절을 물었거나, 

교리를 물었으면 청산유수같이 대답을 했을 텐데 말이에요. 

이럴 때 “법륜입니다”하고 대답을 했다고 합시다. 그런데 그것은 제 이름이죠. 

그렇지만 이름을 물은 게 아니잖아요. “네 이름이 뭐냐?”고 물었다면 “법륜입니다”가 맞았지만 

“너 누구냐?” 라고 물었지요. 또 “스님입니다”라고 대답했다고 합시다. 

직업을 말하는 것이지요, 하지만 직업을 물은 게 아니잖아요. 

이런 것 같이 그 제자는 “너 누구냐?” 하고 물으니까 딱 막혀버렸어요. 

‘나’라고 하는 것이 무엇인가 하고요. 

그래서 이 분이 방문을 열고 들어가지 못했어요. 

내가 어떤 것을 물을 때 내가 누군지도 모르는데 묻는다는 것 자체가 웃긴 것 아니에요. 

그 사람은 그 고생을 하고 찾아와서 방문을 열고도 한 발도 못 들어가고 멍하게 있다가 

그냥 문을 닫고 나올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것을 화두라고 합니다. ‘이게 무엇인가? (What is this?)'라는 겁니다. 

여기서 ’나라고 하는 것이 무엇인가 (Who am I?)'라는 것이지요. 

그래서 그 사람이 7년을 참구하다가 다시 스승을 찾아갔습니다. 

그리고 절을 하면서 “스승님, 설령 한 물건이라고 해도 옳지 않습니다”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래서 스승은 제자가 이미 이 본질을 깨우친 줄 알기에 인가를 해주었습니다. 

금강경의 그 글귀는 이런 것과 같은 얘기입니다. 

우리가 옳으니 그르니, 맞니 틀리니, 있니 없니 하는 것은 다 주관 즉, 자기 생각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보통 긴지, 짧은지, 새것인지, 헌것인지, 넓은지, 좁은지 하는 것을 객관이라고 하잖아요. 

그러나 우리가 객관이라고 생각하는 ‘크다’나 ‘작다’는 것도 자세히 들여다보면 

존재 자체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 존재를 인식하는 문제입니다. 

‘크다’고 인식하기도 하고, ‘작다’고 인식하기도, ‘중간크기이다’라고 인식하기도 하는 등 

인식 상에서 나타나는 것이에요. 존재 자체는 크다고 할 수도 없고, 작다고 할 수도 없고, 

새것이라고 할 수도 없고, 헌것이라고 할 수도 없고, 

네 것이라고 할 수도 없고, 내 것이라고 할 수도 없는데, 

우리는 어떤 사물을 인식할 때 ‘내거다, 네거다, 새거다, 헌거다, 

더럽다, 깨끗하다’고 인식하는 것입니다. 

하나를 두고도 사람마다, 같은 사람이라도 경우에 따라 인식을 달리 하고 있습니다. 

한편, 우리는 주관을 객관화시킵니다. 

예를 들어, 우리가 인식을 할 때 이것을 ‘크다’고 인식을 했다고 합시다. 

우리는 존재 자체는 큰 것도 아니고 작은 것도 아니지만 

이 상황에서 내가 크다고 인식했다고 생각을 하지 않고, ’이것 자체가 크다‘, 

’이것이 크기 때문에 크다고 내가 인식한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주관을 객관화시킨 것입니다. 

자기가 그렇게 인식한 것을 다른 사람은 달리 인식할 수도 있는데, 

그것을 가지고 ‘실제가 그렇다’고 자기는 알고 있다는 거예요. 

내가 만약 눈에 빨간 안경을 끼고 저 흰 벽을 바라보면 저 벽이 빨갛게 보이겠죠? 

그럴 때 나는 ‘저 벽 색깔이 붉다’고 착각을 합니다. 

사실은 저 벽 색깔이 빨갛다고 하면 안 되고 ‘내 눈에 빨갛게 보였다’고 해야 정확한 표현이죠. 

그런데 나는 ‘저 벽 색깔이 붉기 때문에 내가 붉게 인식했다’고 생각해요. 

그런데 푸른 색깔의 안경을 끼고 있는 사람이 저 벽을 보면 “저 벽은 푸르다”고 할 거 아닙니까? 

‘상‘이라는 것, 즉 ’모양 짓는 것‘은 자기가 주관적으로 인식한 것을 

객관적으로 바르게 인식했다고 착각하는 것입니다. 

즉, 주관을 개관화시키는 것을 ‘상을 짓는다’고 합니다. ‘너를 보니까 내 감정이 나쁘다’인데 

‘네가 나쁜 놈이다’라고 하는 거에요. 내가 그렇게 느끼는 것인데, 

그 사람이 그렇기 때문이라고 착각한단 말이에요. 

이것을 상이라고 합니다. 

‘범소유상 개시허망 약견제상비상 즉견여래(凡所有相 皆是虛妄 若見諸相非相 卽見如來)’에서 

‘범소유상 개시허망’은 무릇 내가 지은 모든 상은 다 허망하다는 뜻입니다. 

이때 허망하다는 것을 허무하다고 이해하면 안돼요. 

‘허망하다’는 것은 

‘실체가 없다’, ‘진실상이 아니다’, ‘사실이 아니다’, ‘실제가 아니다’, ‘환영이다’ 라는 말입니다. 

‘약견제상비상 즉견여래’는 만약 모든 상은 상이 아님을 안다면 

즉, 크다 작다 옳다 그르다 맞다 틀렸다 하는 것을 크다 할 것도 없고, 

작다 할 것도 없고, 옳다고 할 것도 없고, 그르다고 할 것도 없고, 맞다고 할 것도 없고, 

틀리다고 할 것도 없다는 것을 안다면, 이는 부처를 아는 것이다. 

즉, 그것이 바로 부처이고 깨달음이다는 뜻입니다 

이것을 보고 뭐라고 합니까? 물잔이라고 하죠. 

어떤 것은 커피잔, 어떤 것은 포도주잔, 소주잔, 정종잔, 이렇게 많이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런 명칭이 붙으면 정종잔에는 정종을 마셔야 하고, 물잔으로는 물을 마셔야 하고, 

커피잔에는 커피를 마셔야 하잖아요. 

그래서 커피 좀 달라고 하면 “아이고, 우리 집에 커피잔에 없어서” 이렇게 말한단 말이에요. 

이것은 상을 지었기 때문이에요. 즉, 이 존재는 커피잔, 물잔으로 용도가 정해져 있지 않아요. 

그것을 놔버리면 무엇이든 담을 수 있습니다. 

물잔이라서 물을 담는 것이 아니고 물을 담으면 물잔이 됩니다. 

물을 담으면 물잔이 되고, 커피를 담으면 커피잔이 되고, 술을 담으면 술잔이 되고, 

밥을 담으면 밥그릇이 되고, 국을 담으면 국그릇이 되고, 

애가 오줌을 쌀 때 얼른 받으면 요강이 되고(청중들 웃음) 그런 거예요. 

그러니까 걸림 없이 자유로워지잖아요. 이런 것을 의미하는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것은 불교의 핵심사상인 

‘공(空)’사상을 공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지 않고 설명한 것입니다. 








예, 감사합니다 (청중들 박수) 


 

 




그러니까 여러분들과 즉문즉설을 할 때에도 바탕에 이런 관점이 잡혀있는 거예요. 

“애인이 있는데 다른 사람을 만나면 안 되지 않느냐“ 고 하는데 

‘안되지 않느냐’하는 생각을 놓아버리면, 

상을 짓는 것을 놓아버리면, 자유로워진다는 얘기예요. 

“그렇다면 여기 잔에다가 아무거나 받아먹어도 되나요?” 한다면 “그렇습니다.” 라고 하는 겁니다. 

그런데 이것도 생각해보세요. 

우리 집에 소주잔도 있고 커피잔도 있고 물잔도 있고 포도주잔도 있는데도 

굳이 이거 하나만 가지고 밥도 여기다 먹고, 국도 여기다 먹고 하면서 ‘모두 공이니까’ 하는 것은 

또 공에 집착하는 것이지요. 공이라고 하는 상을 지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생활 속에서는 이것을 물잔으로 쓸 때에는 그냥 물잔으로 쓰는 거예요. 

다른 것은 다른 데에 쓸 데가 있으니까요. 없으면 이걸로 커피잔을 써도 되고, 

포도주잔으로도 써도 된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서울 가는 길은 어느 방향입니까?” 하고 누가 물어본다면 

어느 방향이라고 말할 수가 없습니다. 이걸 가지고 무유정법(無有定法) 

즉, ‘어느 방향이라고 정해놓은 법은 없다’라고 합니다. 그러면 서울 가는 방향이 없다는 말일까요? 

아니면 정해진 것이 없으니까 아무렇게나 가도 된다는 말일가요? 그렇지 않습니다. 

공이라는 말은 ‘텅 비었다’, ‘없다’고 표현하지만 없다는 뜻이 아니고, 있고 없음을 넘어선 의미예요. 

인천 사람이 물어보면 “동쪽으로 가세요” 얘기하겠죠, 그것을 누가 듣고 ‘동쪽으로 가면 되겠구나, 

서울 가는 길은 동쪽이야’라고 생각하고 춘천 사람이 서울 가는 길을 물었을 때 동쪽으로 가라고 하면 

그 사람은 동해 바다에 빠져 죽어요. 

춘천 사람이 물으면 “서쪽으로 가세요”, 수원사람이 물으면 “북쪽으로 가세요” 해야죠. 

그렇게 해서 제법이 공한 줄을 알면, 

인연을 따라 그 사람의 위치와 시공간이 정해지면 정확하게 동이면 동, 서이면 서, 남이면 남, 

북이면 북, 동북이면 동북, 서북이면 서북으로 정해지는 것입니다. 

또 정해진다고 해서 절대화시켜도 안 되고요. 언어를 절대화시키면 상을 지은 것입니다. 

‘절대화시키면 안된다’, ‘공이다‘라고 해서 아무 것도 방향을 잡을 수 없다든지, 

잡으면 안 된다고 하는 것은 다시 공에 빠진 거예요. 이것을 ’공상을 지었다‘고 말해요. 

그래서 ’어느 방향이라고 특정한 방향을 정할 수 없다‘는 것은 동시에 

인연을 따라서 ’어느 방향이라도 될 수 있다‘는 뜻입니다. 

아무렇게나가 아니라 인연을 따라서 말이에요. 

무언가가 상을 지은 것을 불교용어로 ‘색’이라고 하고, 상을 짓지 않는 것을 ‘공’이라고 해서, 

색은 곧 공이고, 공은 곧 색이라고 합니다. 

이것을 ‘색즉시공 공즉시색(色卽是空 空卽是色)’이라고 하죠. 

여기서 ’색즉시공‘이라고 한번만 말하면 되지, 왜 똑같은 말을 바꿔서 ’공즉시색‘이라고 또 할까요? 

수학에서 ’A=B임을 증명하라‘고 하면 

먼저 ’A이면 B이다’라는 명제가 성립하는 것을 증명하면 ‘A는 B가 되기 위한 충분조건’이라고 말하죠. 

그리고 다음 ‘B이면 A이다‘라는 명제가 성립하면 ’A는 B가 되기 위한 필요조건‘, 

고로 

1), 2)에서 ’A는 B가 되기 위한 필요충분조건’ 

고로 

‘A=B이다’라고 하는 거죠. 

달리 말하면, 두 개가 같다는 것이 성립하려면, 그 역도 성립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색이 곧 공이고 공이 곧 색이다’라고 표현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색즉시공 공즉시색이라는 말은, 



즉 현상과 본질이 동시에 어우러져있는 것입니다. 

현상은 엉터리이고 본질만이 진실이라고 보는 것은 또 진실의 절반을 보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것이 크냐 작으냐”고 물었을 때, 

항상 “큰 것도 아니고, 작은 것도 아니다”라고 대답하면 안 돼요. 

구체적인 조건에서 물어봤을 때에는 “크다”고 얘기해야 됩니다. 

이것이 ‘색’이예요. 이 상황, 이 인연에서는 크다, 이 인연에서는 작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인연을 떠나서 절대적으로 물으면 

“큰 것도 아니고, 작은 것도 아니다, 다만 그것이다” 또는 “공이다” 라고 얘기해야 합니다. 

그러니까 이 원리가 우리의 삶에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는 거예요. 

도가 트면 윤리 도덕도 없는 인간이 되는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현실에서는 늘 윤리, 도덕을 맞춰서 살지만 때로는 윤리나 도덕이 인간을 억압하고 

고통스럽게 할 때에는 과감하게 윤리, 도덕을 부정하기도 한다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모든 것은 인간을 자유롭고 행복하게 하는 것에 초점이 있는 것이지, 

윤리나 도덕이 절대화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부처님의 가르침도, 예수님의 가르침도 마찬가지예요. 

중심은 인간을 행복하게, 자유롭게 하는 데에 있고 그 길로 가기 위해서 이런 저런 방법이 있는 것인데, 

지금 방법을 절대화시키고 거기에 인간을 끼워 맞추려고 하기 때문에 문제가 생기는 것입니다. 

옛날에는 피부가 검은지 흰지로 차별했지만 지금은 피부 빛깔로 인간을 차별할 수 없습니다. 

남녀는 성별로 차별할 수 없고요. 신체가 건강한지 장애가 있는지에 따라 차별할 수 없고, 

마찬가지로 성적 취향으로 차별할 수가 없습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이런 문제는 어려운 문제가 아닌데, 자꾸 카르마, 자신의 업식, 

윤리관, 관습으로 사물을 보기 때문에 이런 문제가 발생하는 것입니다. 








스님의 쉽고 명쾌한 답변에 청중들의 뜨거운 박수가 쏟아졌습니니다. 

질문자도 즐겁고 기쁜 표정을 짓습니다. 

많은 분들이 스님의 지혜를 나눠 받을 수 있었으면 하는 바램이 들었습니다. 

답변을 모두 마치고, 

마지막으로 스님께서는 진리란 무엇인지 강조해 주시면서 이렇게 정리말씀을 해주셨습니다. 








재미있으셨습니까? 진리는 재미도 있고 유익해야 해요. 

오늘 강연이 거기에 조금 근접한 시간이었으면 좋겠습니다. 

재미가 있다는 것은 지금 좋다는 뜻이고, 유익하다는 것은 나중에 좋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인생은 지금에도 좋고, 나중에도 좋아야 합니다. 

나중을 위해서 지금을 희생하거나, 지금 좋다고 나중을 희생하면 안 돼요. 

또 나에게는 좋고 남에게는 손해이면, 그 사람이 반격을 하기 때문에 오래 못갑니다. 

반대로 그 사람은 좋은데 내가 손해이면, 

세상에서는 희생이라고 굉장히 칭찬하지만 희생은 오래 가지 못합니다. 

그래서 내가 참는 데에도 한도가 있기 때문에 이것도 지속적이지 못하지요. 

그래서 지속적이려면 나도 좋고 너도 좋아야 합니다. 

그래서 진리는 두 가지 성격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가 지금도 좋고 나중도 좋고, 나도 좋고 너도 좋아야 된다는 관점을 가지고 인생을 산다면 

지금보다는 훨씬 더 행복하게 살 수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들, 나날이 행복하시기를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내용이 마음에 드셨다면 다른분들이 좀더 이 글을 선택하실 수 있게 추천 부탁드립니다^^


출처는 여기입니다


http://www.jungto.org/buddhist/budd8.html?sm=v&b_no=652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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