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거 아닌 별거 가정 (11) - 별거 가정에서 자라서 좋은 점

무럭무럭열매 작성일 22.05.02 10:34: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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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거 가정에서 자라서 좋은 점이 있기는 할까, 싶을 것이다. 적어도 내게는 별거 가정에서 자라서 좋은 점이 몇 가지 있다.

 

 

 

1. 행복 기준선이 올라간다.

 

아이비리그 3대 명강의 중 하나인 하버드대학교 탈 벤 샤하르 교수의 행복론 강의에서는 ‘행복 기준선’이라는 개념이 등장한다. 행복 기준선이란, 자신을 위기의 중심으로 몰아넣고 그 위기를 극복한 뒤에 얻을 수 있는 ‘행복 역량’을 말한다.

 

예를 들면, 격한 운동이 신체적ㆍ정신적 위기를 가져오는 데도 불구하고 꾸준히 운동하는 습관을 기른다면 계단을 오르거나 무거운 것을 나를 때 받는 스트레스는 현저히 줄어들 것이다. 따라서 운동은 내가 스트레스를 안정적으로 조절하는 데 결과적으로 도움이 된다. 운동이 행복 기준선을 높이는 활동이 될 수 있는 것이다.

 

나는 별거 가정에서 자랐기 때문에 작은 것들에 감사하는 마음을 가질 수 있었다. 주어진 것들이 당연하다고 느낄 수 있었던 많은 순간이 내게는 당연하지 않은 소중한 순간으로 다가왔다. 별거 가정이라는 환경이 의도치 않게 내 행복 기준선을 올려준 덕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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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마음의 시야가 넓어진다.

 

나는 별거 가정에서 자라면서 마음의 시야가 넓어졌다. 쉽게 말하면 눈치가 빨라졌고, 다른 사람의 내면을 살필 수 있게 되었다. 숨길 게 없는 사람은 눈치가 없다. 아니, 없어도 된다. 누군가 허술해 보이는 부분을 건드려도 거리낄 게 없는 사람은 말과 행동이 서슴없는 법이다.

 

반면 숨기고 싶은 게 많았던 나는 어릴 때부터 다른 사람의 마음을 부지런히 살폈다. 집이 가난했기 때문에 당시 유행하는 운동화나 게임기 같은 물건으로는 친구들의 관심을 끌 수 없었던 나는 대신 친구들이 어떤 이야기를 좋아하는지 유심히 살피고는 친구들 앞에서 열심히 입을 털었다. 만화도 부지런히 그렸다. 그렇게 얻은 관심 뒤편으로 나의 집안사정은 감춰지길 바랬다.

 

최신 운동화와 게임기가 강력한 화력을 가진 무기라면, 나의 그림 실력과 입을 터는 능력은 일종의 비대칭전력이었다. 최신 운동화와 게임기를 보유한 강대국에 맞설 수 있는 내가 가진 유일한 무기였다.

 

아이들은 고민 없이 천진한 친구들과 어울리고 싶어 하는 법이다. 고민을 한껏 머금은 표정을 짓는 아이는 대체로 친구들 사이에서 관심을 받기보다는 외면을 받는다. 나는 친구들의 환심을 얻는 기술을 부지런히 갈고 닦으면서 나와 같은 고민을 하는 사람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타인의 고민에 마음을 기울이는 사람이 세상을 빛나게 한다고 나는 믿는다. 별거 가정에서 자랐기 때문에 나는 빛나는 사람이 되는 길에 한 발짝 성큼 다가설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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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철이 일찍 든다.

 

장점에 넣을까 말까 고민을 많이 했다. 철이 든다는 건 어쩐지 조금 슬픈 일이기 때문이다. 지금도 철이 일찍 든 아이들을 볼 때면 나는 어딘가 가여운 마음이 든다. 그래도 철이 들어서 좋은 점이 있다면, 삶의 방향을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의지가 주어진다는 점이다.

 

법륜 스님은 말했다. 부처는 쥐약을 먹으면 안 된다고 말하는 분이 아니라 그저 '거기 쥐약 들었다'라고 알려주는 분이라고. 삶의 선택은 누구도 대신 해줄 수 없으며, 다만 자신이 처한 상황을 직시해야 한다는 부처의 통찰이다.

 

자신이 처한 상황을 직시하는 사람에게는 스스로 삶의 방향을 삶을 선택할 수 있는 길, 즉 철드는 길이 열린다. 나는 별거 가정에서 자랐고, 내 의지와는 무관하게 그런 환경이 주어졌다는 사실에 절망했다. 한때는 게임과 만화 속으로 깊숙이 몸을 던져 현실로부터 최대한 멀리 도망치려고도 했다. 그러다 어느 날 깨달았다. 쥐약이 도처에 깔린 곳에서 태어났다면, 주저앉아서 현실을 원망하는 데 시간을 보낼지, 아니면 그런 환경에서 벗어날 방법을 고민해 볼지는 결국 본인이 선택해야 한다는 사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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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기하는 자신의 책 <상관없는 거 아닌가?>에서 말했다. 인생은 서핑과 비슷한 것 같다고. 우리는 몰려오는 파도만큼만 서핑을 할 수 있는 존재다. 파도가 언제, 어떻게 올지는 누구도 알 수 없다. 그저 순간순간 최선을 다해서 자신만의 파도를 탈뿐이다.

 

내 어린 시절을 돌아보면 별거 가정이라는 파도 위에서 내 나름대로 서핑을 했던 게 아닐까 싶다. 그리고 이제는 내 앞으로 몰아칠 파도를 향해 기꺼이 서핑을 할 준비가 되어있다. 땡스 투 별거 가정.

 

분열된 가정에서 아픔을 안고 자란 모든 이들을 응원한다. 잔잔한 물살을 비웃으며 파도를 멋지게 오르는 우리가 되기를 바란다.

 

 

 

글이 작품이 되는 공간, Brunc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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