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거 아닌 별거 가정 (14) - 내가 첫사랑과 결혼한 이유

무럭무럭열매 작성일 22.05.14 20:40: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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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첫사랑과 결혼할 수 있는지 정말 신기하다.”

 

언젠가 친구가 내게 말했다. 사업을 하는 그 친구가 말하기를, 몇 년 동안 굴릴 사업 아이템을 정하는 데도 고심에 고심을 거듭하는데, 평생을 함께할 사람을 정하는 건 어려운 수준을 넘어서 두렵기까지 하다고 했다.

 

하고 싶은 게 많은 친구인 그는 독서모임을 운영하는 모임장이기도 했다. 나는 모임장인 친구의 권유로 독서모임에 들어가서 지금까지 활동을 이어오고 있는데, 휴가철을 맞아서 여덟 명의 멤버들과 독서모임 워크숍―세상에는 분명 이런 게 존재한다―을 간 적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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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초의 한 리조트에 짐을 푼 독서모임 멤버들은 테이블 두 개를 붙여놓고 앉아서 추천하고 싶은 책 교환하기, 천연비누 만들기, 그림 심리테스트 등 ‘워크숍’이라는 이름에 걸맞은 활동을 부지런히 했다. 그림 심리테스트를 할 때 크레파스를 들고 집중하는 멤버들의 모습은 마치 유치원 우등생들 같아서 내가 잊고 있었던 과거로 거슬러 올라간 기분이 들기도 했다.

 

밤이 깊어지자 우리는 테이블을 치우고 바닥에 동그랗게 둘러앉아 술을 한잔씩 기울면서 이야기를 나눴다. 멤버들은 여러 가지 주제로 이야기꽃을 피웠는데, 한번은 '연애 경험은 많을수록 좋은가'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연애 경험은 많을수록 좋다, 꼭 그런 것도 아니다, 연애 경험은 많든 적든 상관없다 등 각자 의견을 뜨겁게 주고받는 와중에 멤버 중 한 명이 넌지시 사랑에 대한 어려움을 고백했다.

 

“저는 사랑하는 사람을 친구에게도 빼앗겨봤고, 사랑하는 사람에게 배신도 당해봤고, 아무튼 사랑 때문에 상처를 많이 받았어요. 사랑을 할수록 점점 사랑이 뭔지 모르겠는 기분이 드는 게 두려워요.”

 

자신의 사연을 울면서 고백하는 멤버 앞에서 우리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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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은 경험이 많을수록 좋은 걸까. 이 문제는 ‘사랑은 많이 할수록 능숙해지는가’라는 문제와는 다르다. 사랑은 당연히 많이 할수록 능숙해진다. 연애경험이 많을수록 데이트 코스를 수월하게 짤 수 있고, 스킨십을 하는 데 삐걱대지 않으며, 상대방을 기쁘게 해줄 센스 있는 선물을 고를 수 있는 능력이 주어진다.

 

그러나 사랑에 조금 삐걱대도 남부럽지 않은 사랑을 할 수 있다고 나는 믿는다. 유머감각이나 가치관(정치ㆍ경제ㆍ종교 등)이 맞으면 사랑에 능숙해지기 전에도 얼마든지 예쁜 사랑을 할 수 있다. 따라서 본인의 연애경험과는 상관없이 그 사람과의 '결'이 맞으면 진지한 관계를 고민해도 괜찮을 것 같다.

 

상대방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에서 서로의 실체를 조금씩 알아가는 게 사랑이다. 그런 점에서 사랑은 무엇보다 운이 필요한 영역이라고 생각한다. 사랑은 할수록 능숙해지는 ‘어빌리티’의 영역도 분명 있지만, 좋은 사람을 잡는 것은 능력이 아닌 타이밍이다.

 

지난 버스 붙잡아야 소용없다는 말은 유독 사랑에 대해 자주 쓰이는 말이다. 사랑을 하고 있는, 그리고 사랑을 하고 싶은 사람이라면 이 통상적인 말을 조금 비틀어서 이렇게 기억하고 있으면 좋을 것 같다. 지난 버스가 알고 보니 가장 좋은 버스였을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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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도야 놀자>를 그린 이수지 작가는 말했다. 나는 뒤에 뭔가가 더 있어, 라고 말하지 않고 그냥 앞에서 내놓는 게 전부인 사람을 보면 기분이 좋다고. 작가의 글에 공감했다. 나 역시 그런 사람을 마주하면 바람이 솔솔 들어오는 활짝 열린 창문 앞에 있는 느낌에 기분이 좋기 때문이다.

 

이수지 작가의 글을 읽으면서 아내가 떠올랐다. 내가 연애 경험이 없음에도, 지금의 아내가 내 첫사랑임에도 결혼을 결심한 이유가 이 글 안에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내의 성격은 투명하다. 기분이 나쁘면 나쁜 대로, 기분이 좋으면 좋은 대로 얼굴에 그대로 드러난다. 패를 숨기면서 큰돈을 걸고 도박을 하기는 어려운 성격이라고 할 수 있다. 나는 아내의 그런 성격이 참 좋다. 그런 사람과 같이 살면 삶이 복잡하지 않고 단순해지는 기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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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진정한 능력은 마음 가장 깊숙한 곳의 아픔을 치유할 수 있다는 데 있다. 별거 가정에서 자라면서 나는 늘 건강한 웃음이 있는 가정에서 살고 싶었다. 아내를 만난 게 긍정적인 마음을 키운 계기가 되었는지, 긍정적인 마음을 키워서 지금의 아내를 만날 수 있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아내를 만나서 비로소 내가 바랐던 가정의 모습에 가까이 다가갈 수 있었다.

 

다른 것들과 마찬가지로 사랑 역시 지금에 최선을 다하는 수밖에 없다. 지금에 집중해야 예쁜 사랑을 할 수 있고, 지금에 집중해야 사랑의 예쁜 순간을 느낄 수 있다. 워크숍에서 사랑이 두렵다고 털어놓았던 독서모임 멤버는 그날 모인 다른 멤버와 인연이 되어 2년 동안 예쁜 사랑을 이어오다가 최근에는 결혼을 준비하고 있다고 한다.

 

그들의 사랑을 지켜보면서 생각했다. 나 역시 바람이 솔솔 들어오는 창문 같은 사랑의 소중함을 잊지 말아야지. 나의 삐걱대는 사랑을 두 팔 벌려 받아준 지금의 사람에게 감사해야지.

 

 

 

글이 작품이 되는 공간, Brunc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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