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세기 니체의 다원론은 현시대를 관통하는 철학입니다.
이전 소개 해드렸던 [역사란 무엇인가?] 에서도 니체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비스마르크스가 18세가에 태어났다면(그렇게 되었더라면 그는 비스마르크가 될 수 없었을 것이기 때문에 이는 어리석은 가정이겠지만)독일을 통일시키지 못했을 것이고, 따라서 결코 위인이 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톨스토이처럼 위인을 ‘사건에 이름을 붙여주는 꼬리표’에 불과한 존재로 취급하면서 평가 절하할 것까지는 없다고 생각한다. 물론 때때로 위인 숭배는 불행한 의미를 지닐 수 있다. 니체가 말한 ‘초인(超人, übermensch)은 냉혹한 인물이다. 굳이 히틀러의 경우나 소련에서의 ’개인 숭배‘의 잔인한 결과를 되돌아볼 필요는 없을 것이다.
- 44세일 때 갑자기 광장에 쓰러져 정신이 망가진 후 55세에 죽을 때까지 두 번 다시 제정신을 찾지 못했다.
유명 작곡가 바그너와 친구였다.
프리드리히 니체(Friedrich Nietzsche(1844~1900) 역시 앞에서 본 키에르케골이나 맑스와 마찬가지로, 칸트 이후의 철학적 위기에 나름대로 대치하고자 한 철학자였다. 하지만 그는 새로운 '이성 비판'을 주장하는 대신에 새로운 방식의 인간 실존을 부르짖었다. 니체는 대학의 강단보다 알프스 산길을 좋아한 고독한 사상가였다 (30대 중반에 그는 대학 강단을 뛰쳐나왔다). 그는 평생 저술 작업에 매달리면서 어린 시절 그에게 강력한 영향을 미쳤던 루터교, 독일 민주주의, 어머니, 할머니, 이모, 누이동생에게서 벗어나고자 노력했다(사실, 그는 다른 분야에서보다 이 분야의 노력에서 더 큰 성공을 거두었다).
그런 노력의 결과로 그는 철학사에서 가장 색다른 책들을 펴낼 수 있었다. 우선 제목만 보아도 그렇다. 《비극의 탄생》, 《선악의 피안》, 《도덕의 계보학》,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등등 그의 저작들은 기존의 철학서와는 크게 다르다. 게다가, 그는 자서전에조차 《에케 호모》('이 사람을 보라'는 뜻으로, 빌라도가 예수를 대중 앞에 소개할 때 한 말이다)라는 허풍스런 제목을 붙였으며, 그 안의 장 제목들도 '내가 이토록 지혜로운 이유', '내가 이토록 영리한 이유', '내가 그토록 좋은 책들을 쓴 이유' 등등 괴팍하고도 엉뚱하게 지었다. 짧은 기간 동안에 수많은 책을 써냈던 니체는 1888년 매독으로 인한 광기가 발작함으로써 저술을 중단하게 되었다.
니체의 인식론을 보면 갑자기 소피스트 시대로 돌아가버린 느낌이다. 그의 인식론는 보통 원근법이라고 부르는데, 젊은 시절 문헌학에 심취했던 경험에서 기인한다. 고대 문헌을 연구하는 문헌학자들은 《성서》, 《베다》, 《우파니샤드》, 《일리아드》 등 이른바 경전이라 불리는 것들이 실은 단일한 문헌이 아니라 엄청나게 많은 문헌들로부터 다양한 요소를 모아서 만들어진 문헌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따라서 대부분의 문헌학자들은 그 역사적 고전들의 원본을 찾는 것을 필생의 꿈으로 간직하고 있었다. 그런데 문헌학자로서 니체가 내린 결론은 그런 원본 따위는 없다는 것이었다. 그 고전들과 경전들은 단지 특정한 해석을 통해 최종적인 산물을 나타내도록 하는 어떤 판단의 소산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게다 가 그 '최종적인 산물'이라는 것도 알고 보면 수많은 단편적 문서, 보고서, 역사서, 잡담 등에 존재하는 관계를 상징하는 데 지나지 않는다.
니체는 문헌학에서 체득한 통찰력을 존재론과 인식론으로 옮기기 시작한다. 문헌학에서 원본이 없듯이, 실재와 앎에서도 '순수한 존재'라든가 '원 자료' 같은 건 없다는 것이다. 신도 없고, 플라톤의 형상도 없다. 실체도, '물 자체'도, 심지어 '사물' 같은 것도 없다. 존재하는 것은 오로지 혼돈의 흐름뿐이며, 우리는 여기서 우리의 의지를 부여할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니체에 따르면, 플라톤적 의미에서의 '앎'이란 없다. 모든 앎은 발명이며, 모든 발명은 거짓이다. 그렇다면 남는 것은 오직 거짓뿐이다. 근거 없는 기짓은 자기 기만이다. 니체에 따르면, “진통적으로 거짓을 말하는 자”, 다시 말해서 기존에 확립되어 있는 전통을 이용하여 사기치는 자가 바로 그런 자기 기만에 빠지 있는 사람이다.
어차피 거짓을 말할 수밖에 없다면 “창조적으로 하라.” 이게 바로 니체의 권유다. 즉, 창조적으로 발명하고 창조적인 일을 추구하라는 것이다. 이렇게 하는 것을 가리켜, 니체는 쇼펜하워개념을 빌려 '권력(힘)에의 의지'를 표현하는 것이라고 부른다. 권력 의지를 표현하는 것은 곧 실재(현실)를 자신의 창조적 힘에 굴종시키는 행위다. 니체는 또한 권력 의지를 '자유를 향한 충동'이라 부르기도 한다. 우리의 모든 생물적 본능은 이 자유를 향한 욕구로서 발현된다. 하지만 지금까지 대개의 경우에 그 본능은 표준화의 힘에 의한 제약을 받아왔다(표준화의 힘 역시 권력 의지의 발현이다).
우리의 신체만이 아니라 우리의 생각과 언어도 모두 권력 의지의 발현이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언어와 생각은 자기 기만의 주요한 수단이기도 하다. 니체의 급진적인 유명론(오캄의 유명론을 연상시킨다)에 따르면, 언어의 기능은 바로 거짓말에 있다. 즉, 실제로는 유사하지 않은데도 그것을 거부하고 가공의 유사성을 발명해내는 것이다. 예를 들어 나뭇가지에서 자라나는이파리들을 총칭해서 ‘나뭇잎’이라고 분류하기 위해서는 실상 그 이파리들이 어느 것도 서로 똑같지 않다는 사실을 무시하고 억눌러야만 한다. 실제로는 이파리들 사이에 동일성이 존재한다고 억지 주장을 펴야하는 것이다. 이렇게 언어는 존재를 물화하고 희석화하는용도로 사용된다. 따라서 언어가 “삶의 조건으로서 우리 위에 군림하는 사태'가 생겨난 것이다.
그러나 언어가 거짓을 말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은 또한 언어에 창조적인 가능성이 내재한다는 것과도 통한다. 니체는 전통적인 언어관, 즉 시적인 기능에 비해 산문적인 기능이 우선한다는 견해를 거부한다. 그는 이른바 언어의 산문적 기능은 언어가 지닌 시적 본질의 하위 기능에 불하다고 말한다. 니체에 의하면, 언어는 “은유, 환유, 의인화의 기동타격대"이다(은유란 하나의 이미지가 다른 이미지를 대체함으로써 문맥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는 것을 말한다. [”아킬레우스는 진장의 사자다.”] 환유란 의미가 한 이미지로부터 인접한 다른 이미지로 치한됨으로써 두 이미지가 모두 다른 의미를 지니게 되는 것을 말한다.["그는 황관을 받았다.”] 의인화란 비인간적 세계에 인간의 속성을 투사하는 것을 말한다. [장미가 햇빛을 받기 위해 몸부림친다.] 의인화는 무의식적인 은유와 환유인 경우가 많다.) 은유와 환유를 사슬처럼 엮어 연결하면 실재를 시적으로 탈바꿈시킬 수 있다. 니체는 이것을 권력 의지의 교묘한 표현으로 생각했다.
사실, 니체 자신도 잘 알고 있듯이, 그가 사용한 '권력 의지'라는 용어도 그러한 은유/환유라는 연쇄적 추론의 산물이며, 그밖에 그의 다른 핵심 용어들인 '초인超人', '영겁 회기', ‘신의 죽음’ 등도 마찬가지다. 그렇다면 “모든 존재는 권력 의지다"라는 그의 주장도 철학적 통찰력으로 존재의 궁극적 본성을 말한 것이라기보다는 존재의 시적 해석에 지나지 않는다고 봐야 할것이다.(이런 비난을 받을 때 니체는 이렇게 대답했다. “그게 오히려 더 낫군!")
오직 해석만이 존재하는 게 옳다면, 모든 해석은 똑같이 타당하다고 봐야 할까? 아무리 니체가 상대론적 견해를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그렇게 생각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에게는 삶을 긍정하는 '거짓'만이 진정으로 가치 있는 거짓이다. 그 밖의 다른 거짓들은 모두 허무주의적이며 죽음의 편에 서 있다. 그렇기 때문에 권력 의지는 웃음, 춤, 긍정으로 가득해야 하며, 우리는 플라톤주의('그 공포의 시대')와 그리스도교('대중을 위한 플라톤주의)를 거부해야 하는 것이다. 플라톤주의와 그리스도교는 다른 세계를 동경하며 주어진 현실을 거부한다(즉, 혼돈의 흐름으로 가득한 현실 속에서 개별 의지의 이미지를 만들어내야 한다는 것을 거부한다). 또한 그럼으로써 존재를 동경하는 게 아니라 무와 죽음을 동경한다(이 부분에서 어딘지 모르게 헤겔의 냄새가 풍긴다).
니체는 자신의 학설을 ‘초인der Übermensch’'이라는 목표로 구체화시킨다. 초인이란 곧, 권력 의지의 승화를 뜻한다. 초인은 웃음과 춤을 가르치는 것은 물론, '신의 죽음'과 '영겁 회귀'도 가르친다. 물론, “니체가 말하는 ‘신의 죽음’은 무슨 뜻인가?”라는 질문에 대해 단 하나의 정확한 답은 있을 수 없다(이는 마치 “나는 조용한 바다 위를 매끄럽게 스쳐가는 한 쌍의 거친 발톱이 되어야 했다”는 프루푸록[T. S. 엘리엇의 시에 나오는 인물]의 말이 무슨 뜻인가를 묻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러나 '신의 죽음'이라는 말을 통해 니체가 역사, 정치, 종교, 도덕, 경전 등등 모든 전통적인 권위의 종식을 의도한 것만은 분명하다.("신은 죽었다"는 니체의 말을 다르게 읽어보아도 재미있을 것이다. 예컨대, '신'을 '산타클로스'로 바꿔보자. “산타클로스는 없다"는 말이 산타클로스는 죽었다”는 말보다 덜 비극적으로 들리는 이유는 뭘까?)
'영겁 회귀'란 말 역시 '신의 죽음'과 마찬가지로 해석할 수 있다. 이 수수께끼 같은 용어를 해석하기 위해 지금까지 숱한 학자가 수많은 책을 써냈다. 그러나 다른 의미가 무엇이든 간에 분명한 것은, 니체가 있는 그대로의 현실에 충실하고자 했음을 뜻한다는 점이다. 니체는 쇼펜하워의 비관주의에 대해 반대하는 태도를 취했다. 이를테면, 그는 이렇게 쓰고 있다.
지극히 고결하고 생생하며 세계를 긍정하는 인간 존재의 이상이 있다면, 그는 과거와 현재의 모든 것과 타협하고 함께 어울릴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과거와 현재를 영겁 속에서 반복시키고 싶어할 것이다.
이런 생각을 극단적인 형태까지 밀고 가보자. 그럼 아무런 의미나 목적도 없는 존재 그 자체, 무리는 종말이 없이 끊임없이 필연적으로 되풀이되는 영겁 회기가 나온다.
이 부분에서는 니체의 논리에 내포된 모순과 결함을 쉽게 찾아낼 수 있다. (삶도, 의지도 없고 오직 해석에 대한 해석밖에 없는데, 어떻게 그 자체로 존재하는 삶을 바랄 수 있을까? 모든 것이 거짓이라면, 모든 것이 거짓이라는 그 주장도 역시 거짓이 아닐까?) 그러나 그것은 니체의 핵심이 아니다. 그는 논리적 일관성을 가르치려 한 게 아니라, 기존의 사유와 존재의 모든 형태를 부숴버린 근본적으로 새로운 종류의 파괴적 주체성을 말하려 한 것이다. 하지만 그런 파괴의 댓가는 치루어야 했다. 누구나 자신이 의도하지 않았던 제자들을 거느리게 되는 경우가 있을 수 있다. 실제로 니체의 지적 유산을 잇겠다고 나선 사람들은 많이 있었다. 나치도 그랬고, 정신분석학자, 실존주의자들도 그랬다. 현재에는 '해체주의자'라는 집단이 니체의 계승자로 자처하고 있는데, 그들에 대해서는 새로운 해방자로 여기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새로운 허무주의자라고 보는 사람들도 있다.
용어 해설
해체 deconstruction. 프랑스의 현대 철학자 자크 데리다가 페르디낭 드 소쉬르의 언어학을 독특하고 도발적으로 독해한 결과로 만들어낸 개념, 해체는 텍스트(철학서, 소설, 법학서, 과학서)에 관한 이론으로서, 그에 따르면 사유와 언어의 본성 때문에 거의 모든 전통적 텍스트는 자신을 '해체'하고 있다고 한다. 다시 말해서, 그 텍스트들은 스스로 그 안에 담긴 테제를 침해하며 논박하고 있다는 것이다.
허무주의 nihilism. 아무 것도 존재하지 않으며 아무 것도 존재할 가치가 없다고 보는 견해.
유명론 nominalism. 보편자가 자연 세계에 존재하지 않는 형상, 본질, 일반적 유사성 따위를 지칭하지 않는다고 주장하는 언어와 정신의 이론, 보편자는 세계와의 상호 작용을 위해 인간이 편의상으로 만들어낸 범주일 뿐이다. 중세 세계에서 유명론(이를테면, 윌리엄 오캄의 이론)은 경험론의 한 형태로 간주되었다. 더 급진적이고 근대적인 유명론(이를테면, 니체와 데리다의 이론)은 인간 정신이 실재하는 자연 세계를 인식하는 게 아니라, 다만 자의적으로 창조된 인습의 세계만을 인식한다고 보는 회의적인 학설이다.
물화 reification 추상적인 것, 일반적인 것, 구체화가 불가능한 것을 잘못 구체화한 결과를 말한다. 라틴어의 res(사물)에서 나왔으므로 사물화라고도 한다.
문헌학 philology 고대의 문자 기록에 대한 연구. 보통은 ‘죽은’언어를 연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