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학 기초 언어학 15 페르디낭 드 소쉬르

로오데 작성일 22.03.13 13:54: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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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르디낭 드 소쉬르(프랑스어: Ferdinand de Saussure, 1857년 11월 26일 ~ 1913년 2월 22일)

 

언어는 구별하기 위한 체계다

 

 14세에 첫 논문을 작성할 정도로 매우 뛰어났지만 사후 제자들이 편찬한 [일반언어학 강의] 이외에는 살아생전에 단 한권의 책도 내지 않았다.

 

 결국 존재란 무엇이란 말인가? 그 답의 하나로서 스위스 언어학자 소쉬르의 철학이 참고가 될지 모르겠다.

소쉬르는 대대로 학자를 배출한 명가 출신으로, 제네바 대학의 언어학 교수였다. 하지만 그는 그때까지의 기존 언어학에 불만을 느끼고 있었다. 그 당시 언어학은 ‘어떤 나라의 언어는 시간이 지남에 따라 이런 식으로 변해갔다’는 역사적인 경위만을 조사하거나 비슷한 언어를 사용하는 나라의 말들을 비교해 공통의 기원을 찾는 것이 주류인 연구였다. 그러나 평소 소쉬르는 ‘왠지 이게 아닌 것 같은데’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좀더 인간과 세계의 연결을 나타낼 수 있는, 지금까지 없던 새로운 언어학을 만들 수는 없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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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네바 대학

 

 이런 생각에 사로잡힌 소쉬르는 새로운 언어학의 발명을 목표로 밤낮을 가릴 것 없이 연구를 계속했다. 하지만 그는 기존의 언어학 연구에는 소홀히 해 학회에서 어떠한 성과도 인정받지 못하고 학자로서 불우한 인생을 살았다. 그런 삶을 살던 어느 날, 소쉬르는 마침내 새로운 언어학 발명에 성공한다. 그는 그것을 대학 강의에서 학생들 앞에서 발표했다. 당시 제네바 대학은 매우 수준이 높은 대학은 아니었던 듯하다. 지방도시의 이류 대학이라는 이유 때문일까. 당시 학생들도 소쉬르의 강의를 잘 이해하지는 못했다고 한다.

 

 학생들 대부분은 열심히 할 마음이 없었고 절반은 잠들생각으로 강의에 참여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학생들은 소쉬르의 강의를 듣고 충격을 받았다. 이류 대학생인 자신들처럼 학계에서 대단한 평가를 받지 못하던 소쉬르 선생이 지금까지 들어본 적 없는 획기적인 언어학 이론을 강의에서 설명하기 시작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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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언어학 강의

 

 하지만 비극은 거기서 시작된다. 소쉬르는 학생들에게 새로운 이론을 가르친 후, 그것을 세상에 알리기도 전에 병사했다. 새로운 언어학을 추구했던 소쉬르는 마지막까지 불우 하게 죽어버렸다. 소쉬르는 자신이 획기적인 언어학을 어디에도 논문으로 발표하지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그의 이론을 알고 있는 사람은 그의 강의를 들었던 학생들뿐이었다. 소쉬르가 불우한 상황을 감수하면서까지 생애에 걸쳐 추구했던 학문의 성과를 이대로 묻어버려도 되는 것일까. 제자들은 “절대로 그래서는 안된다! 이 이론을 그대로 방치해둔다면 우리는 무엇을 위해서 학문의 인재로서 대학에 들어왔단 말인가!” 하고 생각했다.

 소쉬르 강의에 참여했던 학생들은 분발했다. 그들은 강의 내용을 적은 노트를 서로 가지고 와서 모두 협력하여 한권의 책으로 정리했다. 그것이 [일반언어학 강의]라는 책이다. 학생들의 서투른 해석으로 인해 여러 가지 모순도 있고 결코 완벽하지 않은 책이었지만 소쉬르가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었는지 전달하기에는 충분했다. 그리고 그 책은 순식간에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그 결과 그들이 참여했던 소쉬르 선생의 수업은 언어학계의 전설로 남는다.

 이리하여 소쉬르는 오늘날 ‘근대언어학의 아버지’로 불리는 위대한 언어학자로서 역사에 이름을 새겼다.

 

 

 

차이의 체계

 

 소쉬르의 언어학은 대체 어떤 것이었을까? 본래 소쉬르 이전에는 언어란 ‘사물에 붙여진 상표 같은 것’으로 이해됐다. 예를 들면 현실에 존재하는 빨갛고 둥근 과일이라는 사물에 그 사물과 대응하는 ‘사 . 과’라는 언어가 상표처럼 붙여진다는 사고방식이었다. 그러나 소쉬르는 그런 상표 언어관을 뒤집고 다음과 같이 새롭게 언어를 정의했다.

 

 “언어란 차이의 체계라 할 수 있네.”

 

 여기서 차이는 ‘다름’이라는 의미지만 머릿속에 떠올리기 쉽게 보다 간단한 단어로 ‘구별’이라는 표현을 써보겠다. 그러면 이렇게 된다.

 

 “언어란 구별의 체계라 할 수 있네.”

 

 이 정의에서 알 수 있듯이 소쉬르는 언어란 어떤 사물을 어떤 사물이라 구별하기 위해 만들어졌다는 새로운 언어관을 제시했다. 즉, 단순히 빨간 무언가를 사과로 인식하고 싶기 때문에 사과라는 이름을 붙인 것이 아니라 빨간 무언가를 다른 존재와 구별하고 싶기 때문에 사과라는 이름을 붙였다고 생각한 것이다. 이렇게 들으면 극히 미묘한 차이처럼 생각될지도 모르겠다. 결국 사과를 사과라고 식별하기 위해서 ‘사과’라는 이름을 붙인 것이 아닐까 하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는 매우 중요한 점이기 때문에 조금 더 자세히 설명해 보겠다. 아래 시진을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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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에 많은 돌이 보인다. 우리는 이 사진을 보고 “많은 돌이 있네”라고 말한다. 그리고 이 사진 속에 있는 각각의 돌에 어떤 이름을 붙이려고 하지 않을 것이다. 일반적으로 “가장 왼쪽에 있는 것은 이시그, 그 옆에는 이시코”라고 사물에 이름을 붙이지는 않는다. 전부 통틀어서 ‘돌’이라는 이름으로 부를 것이다.

 

“가장 왼쪽에 있는 게 뭐지?”

“돌이야.”

“그럼 그 옆에 있는 건?”

“그것도 돌이지.”

 

 하지만 자세히 보면 각각 형태도 다르고 크기도 다르다. 명확히 똑같은 것은 하나도 없다. 그래도 우리는 “이것도 저것도 다 똑같은 돌이네”라고 말하며 그 차이를 무시한다. 그런 차이는 아무래도 상관없기 때문이다. 즉, 우리는 각각의 돌이 지닌 차이를 구별할 가치를 발견하지 못한다. 그리고 구별할 가치가 없기 때문에 구별할 필요도 없다. 결국 우리는 구별할 필요가 없기 때문에 각각의 돌을 지시하는 단어를 만들지 않고 ‘돌’이라는 단 한 가지 단어로 정리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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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러면 위의 사진을 보자. 다양한 과일이 놓인 사진이다. 우리는 이 사진을 보고 “왼쪽부터 사과, 오렌지, 포도가 놓여 있네”라고 말한다. 왜 그럴까? 돌 사진에서는 전부 통틀어서 “전부 돌이네”라고 말했다. 그런데 왜 이 사진을 보고는 그렇게 하나로 말하지 않을까? 이 사진에 그려진 사물은 우리에게 구별할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즉, 구별할 가치가 있다. 그렇기 때문에 구별할 필요가 있고 각각의 과일을 지시하는 단어(언어)가 발생한 것이다.

 

 그러면 여기서 우리와 완전히 다른 식생활과 가치관을 가진 우주인이 있다고 가정해보자. 그들은 인간처럼 유기물 과일을 먹지 않는다. 그런 그들에게 이 과일 그림을 보여줬을때 어떤 반응을 보일까? 아마도 우리가 돌 그림을 봤을 때처럼 "‘유기물 덩어리’가 가득 있는 사진이네" 라는 반응을 보이지 않을까?

 

 그들은 이러한 과일(유기물 덩어리)을 사과, 오렌지, 포도로 구별할 필요가 없다. 유기물을 먹지 않는 그들에게 이러한 것들은 구별할 가치가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은 우리가 말하는 사과나 오렌지, 그리고 포도에 상응하는 단어를 가지고 있지 않다.

 우주인에게 “자세히 보라고! 저건 빨갛고 이건 노란색에 생긴 것도 크기도 전혀 다르잖아!”라고 해도 소용없다. 그들에게 이 과일들이 지닌 차이는 돌의 차이와도 같다. 반대로 돌을 식사로 하는 우주인이 우리에게 “잘 보라고! 다양한 돌이 있잖아!”라고 해봤자 서로 곤란해질 뿐이다.

 결국 사과나 오렌지 같은 단어는 단순히 사물이 있기 때문에 그것에 대응하는 단어로서 발생한 것이 아니라, ‘구별할 가치’가 있기 때문에 구별에 대응하는 단어로서 발생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즉, 언어는 '존재를 어떤 식으로 구별하고 싶은가'라는 가치관에서 발생했으며, 그 가치관의 차이야말로 언어체계의 차이를 만들어낸다. 이 내용을 요약해서 짧게 정리하면, ‘언어체계의 차이 = 구별체계의 차이(무엇을 구별할 것인지에 대한 가치관의 가치)라는 이야기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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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알기 쉽게 우주인이라는 특수한 생명체로 설명했지만, 우주인과 인간의 언어 차이는 같은 인간끼리도 일어난다. 한자를 사용하는 우리는 ‘나비’‘나방’을 구별해 각각 다른 언어로 표현하고, 완전히 다른 존재로 파악해 전혀 다른 이미지를 부여한다. 하지만 프랑스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은 나비와 나방을 ‘papillon(빠삐용)이라는 한 가지 단어로 표현하고 따로 구별하지 않는다.

 또한 ‘누나’‘여동생’이라는 단어도 그렇다. 우리는 ‘누나’‘여동생’을 명확히 구별하지만 영어권 사람들은 구별하지 않고 ‘sister’라는 한 가지 단어로 표현한다. 영어권에 서는 자신의 여동생을 소개할 때 ‘my sister’라고 소개한다. 그들의 가치관에서는 그 대상이 연상이나 연하인지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에게는 “여동생인지 아닌지 엄청 중요하지!” 하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누나와 여동생의 구별은 중요하다. 아마도 우리에게는 존댓말이라는 문화가 있기 때문에 연상인지 아닌지가 중요한 정보일 것이다.

 

 그 외에도 프랑스어는 ‘개’와 ‘너구리’를 따로 구별하지 않고 ‘chien’이라는 한 가지 단어로 표현하는 등, 나라가 다르면 사물의 구별(이름 붙이는 방식)도 완전히 바뀌는 사례는 얼마든지 찾을 수 있다. 이러한 사례에 대해 “그게 아니라고! 완전히 다르잖아!”라고 다른 언어체계를 지닌 사람들에게 주장해봤자 “응? 아니 뭐, 다른 건 알겠지만 그래도 대단한 차이는 아니니까"라며 상대방은 대수롭지 않게 받아들일 것이다.

 

 반대로 영어권 사람들은 하얀 토끼와 갈색 토끼를 엄밀하게 다른 단어로 구별하고 두 토끼에 각기 전혀 다른 이미지를 부여한다. 그러나 우리가 보면 둘 다 똑같은 ‘토끼’다. 이런 두 종류의 토끼를 보고 “전혀 다르잖아!” 하며 외국인이 주장해도 우리의 입장에서는 “확실히 색깔은 다르지만 그것만 다를 뿐이지 둘 다 똑같은 토끼잖아”라는 생각이 들기 때문에 이해가 잘 되지 않는다. 우리와 그들은 자라온 문화(가치관의 기반)가 다르고, 우리는 ‘우리의 문화에서 어떤 것을 구별할지’가 상식으로 배어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구별체계(가치체계)가 언어체계로서 눈에 보이는 형태로 표현된다는 것이 바로 ‘언어란 차이(구별)의 체계’라고 말한 소쉬르 철학의 본질이다.

 

 

 

 

존재에서 가치를 발견해야 존재한다

 

 

 이러한 소쉬르의 언어관을 근거로 존재에 대해 조금 더 생각해보자. 소쉬르는 인간이 세상 속에서 무언가를 구별하고, 구별하여 분리하기 위해서 ‘이름’을 붙인다고 했다. 그러면 이러한 구별은 어디에서 온 것일까?

 우리는 이 세계가 원자로 구성되어 있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 원자라는 확고한 존재가 있는 것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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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에처럼 원자핵과 전자로 구성되어 있으며 이 둘을 하나로 합친 것에 그저 ‘원자’라고 이름 붙인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원자핵도 그다지 확고한 존재가 아니라 사실 중성자와 양자로 만들어졌으며, 이 둘을 하나로 합친 것을 그저 ‘원자핵’이라고 부를 뿐이다. 중성자도 수많은 쿼크로 구성되어 있고 이것을 하나로 합친 것을 ‘중성자’라고 부를 뿐이다.

 여기서 원자는 우리가 상상하는 것처럼 단단한 공 같은 확고한 존재로 있는 것이 아니라, 사실은 단순히 ‘어떤 요소를 하나로 합친 것’ ‘원자’라는 단위로 구별했을 뿐이라는 점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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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기서 잘 생각해보자. 이러한 구별 방식은 특별히 어떤 언어로 구별하든 상관없다. 예를 들어 도식 x처럼 구별하든, 도식Y처럼 구별하든 별문제가 없다. 그리고 구별한 것을 ‘요자’라고 부르든 ‘소자’라고 하든 마음대로 이름을 붙여도 상관없다. 만약 이런 식으로 구별이 이루어졌다면 세상이 기술하는 방식도 바뀌었을 것이다. 물론 오늘날의 원자 구별 방식이 여러 면에서 편리했기 때문에 이렇게 구별했다고 말할 수도 있다. 따라서 반드시 이렇게 구별해야만 하는 필연성이 있는 것은 아니다. 그저 우리는 어릴 적부터 이렇게 구별해서 인식한다고 배웠기 때문에 그 이외의 구별 방식을 생각하지 못했을 뿐이다. 다른 구별 방식을 취한 인간이나 생물이 있다고 해도 크게 상관이 없을 것이다.

 덧붙여 이러한 구별 방식의 문제(어디를 구별할 것인가)는 원자와 같은 미세한 것만의 이야기가 아니라 인간, 사회, 국가 등 거대한 것에 관해서도 똑같다.

 우리는 어떤 인간 집단을 ‘가족’이라 부르고 어떤 가족 집단을 ‘국가’라고 불러 구별하지만 다른 방식으로 불러도 상관이 없다. 만약 부르는 방식을 바꿨다면 전혀 다른 세계가 모습을 드러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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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잠시 이런 상상을 해보자. 우주 저멀리서 인간과는 전혀 다른 지성을 지닌 기이한 무언가가 우리를 찾아왔다고 하자. 하늘을 덮는 거대하고 기이한 괴물이 무서운 눈으로 구름 사이를 쳐다본다는 설정이다. 과연 그 괴물은 우리를 인간으로 바라볼까? 그렇지 않을 것이다. 어쩌면 그 괴물은 인간을 봐도 단순한 원자 결정이 굴러가고 있을 뿐이라 생각할지도 모른다.(괴물은 무기물과 유기물을 구별할 이유가 없다.)

 

 만약 그 괴물이 인간을 그렇게 바라보고 있다면 토끼, 사과도 인간과 같은 원자 결정으로 간주하고 구별하지 않을 것이다. 그뿐만이 아니라 인간과 돌을 구별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괴물에게는 한쪽은 조금 진동하는 원자 결정이고, 다른 쪽은 그다지 진동하지 않는 원자 결정 정도의 차이에 불과할 것이다. 그리고 그런 차이는 이 거대한 괴물에게 본질적인 차이가 아니기 때문에 그 차이를 구별할 필요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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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괴물의 시점은 우리가 눈 내린 한 폭의 경치를 보는 것가 같다. 어느 곳을 봐도 눈이어서 얼음 결정만이 가득할 뿐이다. 하지만 자세히 바라보면 바람이 불어 바람에 날리는 얼음 결정, 펄렁거리는 얼음 결정도 있을 것이다. 그런 작은 변화에 이름을 붙이고 다른 것과 구별하려는 생각은 하지 않는다. 우리는 그저 그 경치를 ‘많은 얼음 결정이 있다’고 간주할 뿐이다.

 이와 같이 하늘에서 우리를 바라보는 거대한 괴물에게는 인간, 개, 사과, 책상, 돌 등 모두가 완전히 똑같은 하나의 얼음 결정에 불과하다. 그리고 괴물이 마음을 바꿔 손을 뻗어 결정을 집어 결정의 형태를 변화시켰다고 해도 어떤 감정도 느끼지 않을 것이다. 우리가 눈을 주물럭거려 눈사람을 만드는 것과 같은 수준의 감각이다. 거기에 얼음 결정의 죽음이 있을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할 것이다. 

  그러면 여기서 한 가지 문제를 제기해보자. 이 거대한 괴물이 바라보는 세계와 우리가 바라보는 세계는 정말로 똑같은 세계일까? 물론 그 답은 ‘세계’라는 단어의 정의에 따라 다르다. 신과 같은 위치에 있는 시점이라면 괴물과 인간은 같은 세계의 주인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역시 그것도 신의 시점, 다시 말해 ‘괴물과 인간을 구별할 수 있음을 전제한 시점’에서 보는 세계의 이야기다. 만약 어디까지나 각각의 시점에서 보는 것을 세계라고 부른다면 명확히 괴물의 세계와 인간의 세계는 서로 다르다. 괴물의 세계에는 인간도, 사과도, 돌도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왜 괴물의 세계에서는 인간도 사과도 돌도 존재하지 않는 걸까? 지금까지의 이야기에서 설명한 것처럼 그 괴물은 우리와 사물의 구별 방식, 다시 말해 무엇을 구별할지에 대한 가치관의 체계(언어체계)가 다르기 때문이다. 결국 서로 다른 가치관을 가진 괴물과 인간은 각자의 가치관에 대응해 서로 다른 존재가 있는 세계를 바라보고 있다고 생각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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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러면 사과 같은 존재는 사과라는 물질이 있기 때문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사과를 사과로 구별하는 가치관이 있어 비로소 그곳에 존재한다고 할 수 있다. 이런 가치관을 가지고 있지 않다면 사과 같은 것은 어디에도 존재할 수 없다. 즉. 사과라고 ‘구별’해야 사과가 ‘존재’한다. 만약 사과라고 구별하는 일이 우주에서 완전히 사라져버린다면 어떻게 될까?

 우리는 기본적으로 자신이나 누가 죽어도 세계는 아무 변화 없이 그대로 지속된다고 강하게 믿는다. 그렇기 때문에 눈앞에 있는 사과는 자신이 죽든 누가 죽든 변함없이 사과로서 존재할 것이라 생각한다. 이는 ‘사과’라는 것을 구별하는 존재가 아직 남아 있기 때문에 이렇게 생각하는 것에 불과하다. 만약 스케일을 키워서 그 빨갛고 둥근 유기물을 발견하고 구별하던 종족이 전멸한다면 그때는 이미 ‘사과’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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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따라서 만약 인류가 멸종한다면 세계는 우리가 상상하는 삼차원 공간에 원자가 떠다니는 형식으로 지속되지 못한다. 삼차원 공간이나 원자는 인간이 만들어낸 ‘구별’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렇게 구별하는 것이 없어진다면 삼차원 공간도, 원자도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그저 아무 변화 없이 똑같은 연속체 - 어디에도 구별이 없는 세계, 오로지 새하얀 설경, 어떤 것이 존재한다고 할 수 없는 혼돈의 상태가 될 것이다.

 이러한 관점으로 생각해보면, 만약 당신에게 결코 양보할수 없고 가장 소중한 ‘가치가 있는 무언가’가 존재한다 해도 당신이 죽으면 그 존재도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당신이 바라보는 세계는 당신 특유의 가치로 재단한 세계이며, 이 세계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당신 특유의 가치로 재단한 존재다. 그렇기 때문에 당신이 없는 세계는 당신이 생각하고 있던 세계 그대로 결코 존재하지 않고 지속되지도 않는다.

 

 존재란 그 존재의 가치를 발견하는 존재가 있어야 비로소 존재하기 때문이다.

 

 

 

 소쉬르의 언어학속에 비트겐슈타인이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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