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슘 농도가 조금만 변해도 부갑상선 호르몬의 변화가 커. 한마디로 칼슘 농도가 우리 몸에서 아주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피곤해서 그 목소리가 잘 들리지 않았다. 집중해서 하기에는 시험이 아직 많이 남았다. 정찬이가 여유를 가지고 시험 준비를 하자고 했기 때문에 모여 있는 것이다.
나는 고개를 숙였다. 눈이 무거웠다. 깨끗한 책상 위에 내 책과 노트가 놓여 있다. 우리가 모인 간호학과 강의실은 스터디 하기에는 더 없이 좋은 장소였다. 저녁 무렵에는 간호학과 학생들은 모두 밖으로 나간다. 텅빈 강의실은 시끄럽게 떠들면서 공부하기도 좋았고, 책상도 고정식이 아니라, 테이블 처럼 둘러 앉을 수도 있었다.
"민성아, 피곤하니?"
정민이 형이 나를 바라본다. 정민이 형은 우리 스터디의 중심이었다. 모두들 미리 준비를 하고 가지만, 형 보다 많이 알 수는 없었다. 형은 아무리 쉬운 것을 우리가 모른다 하더라도 친절하게 가르쳐 주었다. 하지만, 형 눈에도 피곤함이 엿보인다.
"조금요. 오늘 수업이 너무 힘들었어요. 외과 교수님들은 너무 지치지 않고 가르쳐요. 쉬는 시간을 안주잖아요."
정찬이가 고개를 돌려 강의실 벽에 걸려 있는 시계를 보고 있었다. 시계는 10시 10분 전을 가리키고 있었다.
정민이 형이 말을 이었다.
"어차피 시간도 많은데 무리할 필요도 없지. 오늘은 이만 쉬자."
그때 눈 앞이 깜빡이기 시작했다. 앞이 보였다 안보였다한다.
"민성이가 많이 피곤한가 보구나. 빨리 가서 자라."
일어설려고 했으나 몸에 힘이 빠졌다. 그리고 책상 위로 쓰러졌다.
나는 길을 걸어가고 있었다. 아니 내가 아니었다. 처음 보는 길이었다. 그리고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걸어가고 있었다. 누군가의 눈 속으로 들어온 기분이었다. 발 걸음 소리도 명확히 들을 수 있었다. 누군가의 몸 속에 들어온 것이 분명했다. 도대체...
오른 쪽을 돌아보고 있었다. 쇼윈도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고 있었다. 30대 정도로 보이는 남자였다. 여름에 어울리지 않게 롱코트를 입고 있었다. 수염을 조금 만지더니 자신의 코트 안을 확인했다. 거기에는 손도끼가 들어 있었다.
남자는 심호흡을 길게 들이쉬었다. 그리고 빠른 걸음으로 골목으로 들어갔다. 개짖는 소리가 들렸다. 남자는 그쪽을 바라 보았다. 그러나 이내 멈췄던 발걸음을 재촉했다. 더 이상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남자는 파란 문의 집 앞에 멈췄다. 그리고 우편물을 꺼냈다. 라이타를 꺼내더니 라이터 불빛에 의지해서 우편물의 주소를 보았다. 이름을 확인하는 것 같았다.
손목 시계를 보는 듯 하더니 문을 살짝 밀었다. 문은 열려 있었다. 좁은 마당을 통해 남자는 걸어갔다. 소매에서 손도끼를 꺼냈다. 잠시 인기척을 살피는 것 같더니 방문을 두드렸다.
"누구세요?"
방안에서 여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방문이 열리고 여자가 고개를 내밀었다. 남자는 갑자기 여자의 목을 잡으며 방안으로 들어갔다. 여자는 저항하려 했으나 남자의 힘은 너무 셌다.
남자는 주머니에서 두꺼운 테이프를 꺼내어 여자를 묶고, 입을 막았다. 여자의 눈에서 눈물이 마구 흘러내리고 있었다.
"교단을 위험에 빠뜨리는 자는 처형한다."
여자는 바닥에 엎드려 꿈틀대고 있었다.
"너의 신선한 가죽은 신 앞에 바쳐질 것이다. 배신은 죽음을 부르지...."
남자는 여자의 옆에 앉아 담배를 물었다. 담배 연기는 짙은 안개 처럼 천천히 움직인다.
"요것만 피고...."
여자가 몸을 움직이려 했으나, 남자가 손도끼를 치켜드는 자세를 취하자 머리를 바닥에 대고 움직이지 않았다. 여자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눈을 도려낼 거다. 아프지만 참아라."
남자가 여자의 머리카락을 휘어잡았다. 그리고 손도끼로 여자의 눈을 도려내기 시작했다. 피가 사방으로 튀었다.
"민성아 일어났냐?"
눈을 떠보니 간호학과 강의실이었다.
"뭐 그렇게 자냐? 기숙사 가서 자지."
시계를 보자 10시 30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내가 본 것은 무었인가?
"나.....살인 하는 것을 봤어."
"꿈을 아주 징하게 꿨구나."
사람들이 책을 챙기고 있었다.
"너 때문에 스터디 30분 더했잖아. 무슨 기절한 듯이 잠드냐?"
내게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가? 정말 여자가 살인을 당한 건가? 아니면 내가 미친 건가? 꿈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생생했다. 친구들에게 말해주었으나 모두들 믿지 않았다. 너무 황당한 일이라 내가 다른 사람에게 들어도 믿지 않을 것이었다.
하지만, 사실이라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정말로 살인이 일어났다면 경찰서에 가서 말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 하지만, 믿어주지 않을 것이 뻔하다. 다른 사람 몸에 들어갔다는 것을 믿어주는 사람이 어디에 있을까?
그후로 나는 평소와 다름 없이 지냈다. 계속 그런 얘기만 하다가는 나 스스로도 미쳐버릴 것 같았다. 시험 공부에만 전념하기로 했다. 쉽진 않았지만, 정말로 꿈이었던 것처럼 그러한 일을 잊어가는 듯했다.
시험이 끝나고 언제나 그렇듯이 모자란 잠을 자기 위해 기숙사로 들어왔다. 편한 옷으로 갈아 입고 있는데 갑자기 눈 앞이 깜빡거렸다. 침대에 앉아 눈을 감았다. 그러나 그러한 증세는 사라지지 않았다. 눈을 떴다. 그러나 내 눈 앞에 보이는 것은 내방이 아니었다.
차를 타고 가고 있었다. 남자는 거리의 간판을 보고 있었다. 전화벨이 울리고 남자가 전화를 받았다.
"정현씨, 어디까지 왔어요?"
"속초 해수욕장 앞인데.."
핸드폰 저쪽의 목소리는 중년의 여자 목소리였다.
"제물이 준비되었어요. 사람들도 많이 모였어요. 해소여관 지하 알죠? 빨리와요."
"알았어요."
남자는 짧게 대답하고 전화를 끊었다. 차의 속력을 붙이기 시작했다. 조금 뒤, 속력을 줄이더니 차는 큰길에서 왼쪽으로 들어갔다. 해소여관이라고 큰 간판이 걸려 있는 것이 보였다. 그러나 뒤에 보이는 건물은 간판에 비해서는 초라해 보였다.
차에서 내려 트렁크로 갔다. 트렁크를 열자 그 속에 손도끼가 들어 있었다. 남자는 주위를 둘러보더니 손도끼를 소매에 감추었다.
"정현씨 들어와요."
전화를 걸었던 그 여자인 듯했다. 두꺼운 뿔태를 쓴 중년의 여자다. 옷은 추렁추렁 늘어져서 꼭 무당을 생각나게 했다. 저 차림으로 길거리를 가면 분명히 사람들의 눈길을 끌 것이다.
남자는 여자를 따라 여관으로 들어갔다. 그리고는 지하로 내려갔다. 지하에는 여러명의 사람들이 있었다. 남자가 들어오자 웅성거림이 사라졌다. 사람들이 앉았다. 남자는 사람들 가운데로 걸어들어갔다. 지하실 가운데에 늙은 남자가 묶여 있었다. 얼굴에 두려움이 가득했다.
여자가 말했다.
"오늘의 의식을 시작하겠습니다. 우선 제물로 신을 불러 내겠습니다."
남자는 묶여있는 늙은 남자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주저함도 없이 손도끼를 꺼냈다.
"눈을 도려낼 거다. 아프지만 참아라."
그리고는 눈을 천천히 도려내었다. 늙은 남자는 비명을 질렀으나 손도끼는 멈추지 않았다.
눈을 떴다. 내방이었다. 심장이 마구 뛰었다. 방에 있는 조그만 냉장고에서 음료수를 꺼냈다. 경찰에 신고해야 하나? 하지만, 내가 본 것이 사실이라고 확신할 수가 없었다. 정신 분열증이 생각났다. 나는 정신 분열증일 수도 있다. 정신 분열증에 걸리면 없는 것이 정말 존재하는 것처럼 보일 수가 있다고 했다. 하지만, 정신분열증의 증례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상황이었다.
사실인지 확인해야 한다. 사실인지 알아야 내가 병인지, 아니면 다른 원인인지 알 수 있게 된다. 짐을 싸기 시작했다. 그 여관에 가보기로 마음 먹었다. 그 여관이 존재한다면 내가 본 것이 사실인 것이 된다.
고속버스 안에서 그 남자가 본 광경을 확인하려고, 유리창에 가까이 붙었다. 간판들이 보였다. 그때 본 것과 비슷해 보였다. 버스는 속초해수욕장 앞에 있는 터미널에 정차했다. 남자의 입에서 속초해수욕장 앞이라고 한 것이 기억났다. 분명히 이 앞을 지난 것이다.
터미널 앞에서 택시를 잡았다. 해소여관이라고 말하자 택시기사는 더 좋은 곳 많은데 거기를 가느냐고 했다. 고모가 운영하는 곳이라고 말했다. 택시기사가 나를 보는 눈초리가 맘에 들지 않았다. 나는 그저 내 신경이 날카로워져서 그렇다고 생각했다.
택시가 해소여관 앞에 멈췄다. 여관은 존재했다. 그러면 내가 본 것은 사실인 것인가? 조금더 확인해보고 싶었다. 어차피 여관에 하루 정도 묶는 것도 좋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몸이 너무 피곤했다.
카운터에서 돈을 내자 201호 라고 적힌 키를 내밀었다. 2층으로 올라가기 전에 지하로 가는 길이 보였다. 이곳에서 오늘 살인이 벌어진 것이다. 그때 지하에서 사람들이 우르르 올라왔다. 다들 멍한 표정이었다. 중년여자와 살인을 한 남자는 보이지 않았다.
방에는 이불이 펴져 있고, 조그만 tv하나가 놓여 있었다. tv를 켜자 9시 뉴스가 나왔다. 정치적인 얘기들만 나왔다. 살인 사건에 대한 것은 찾아볼 수 없었다. 뉴스가 끝날 때까지 살인 사건에 대해 나오기만을 기다렸으나 나오지 않았다. 살인을 한 것이 사실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조금만 자다가 지하에 내려가볼 것이다. 아마도 혈흔이 있을 것이다. 그러면 내가 본 것이 확실해진다.
tv를 끄고 눈을 감았다. 피곤함이 몰려왔다. 잠이 들려 그러는데, 눈 앞이 깜빡였다. 다시 그 상황이다. 남자가 살인을 하려는 것이다. 눈 앞이 깜빡이다가 남자의 시야가 보였다. 남자는 여관 앞에 있었다. 택시가 서 있고, 앞에는 저녁에 탔던 택시 기사가 서 있었다.
"뭔가 수상하다니까요. 이 여관이 자기네 고모가 하는 거래요."
옆에서 여자 목소리가 들렸다.
"경찰 치곤 너무 젊은데...... 헤치우고 다른 곳으로 옮깁시다. 그 후는 상황을 봐서 행동해요."
남자가 조금 있다 자신의 차로 다가갔다. 트렁크를 열고 손도끼를 꺼냈다. 날에 묻은 피는 깨끗하게 닦여 있었다.
"빨리 처리하세요."
여자가 다가와 남자의 어깨를 두드렸다. 남자는 여관의 카운터에서 잠시 멈추었다. 카운터에 있는 남자가 말했다.
"201호에 있어요. 윗층 첫번째 방이에요. 이건 방 키요."
남자는 2층으로 올라오는 계단을 밟았다. 나무 계단처럼 묵직한 소리가 났다. 2층에 올라오자 천천히 복도를 둘러본다. 복도 끝의 방에서 tv소리가 들려온다. 소리는 복도를 타고, 남자의 귀에 들어온다. 남자는 다시 움직이기 시작한다. 그리고 201호라고 쓰여진 방 문 앞에 섰다. 잠겨있나 문을 확인했다. 그러나 문은 열려 있었다. 남자는 손도끼를 꺼내들었다. 천천히 방으로 들어갔다. 방에는 내가 누워 있었다. 남자가 갑자기 내게 달려들어 내 목을 움켜잡는다. 그러나 나는 깨나지 않았다. 남자는 테이프를 꺼내 내 몸을 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