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적에 대하여

나츠쿰 작성일 04.11.20 12:29: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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___|207:+::+::+::+::+::+::+::+::+::+::+:일단은 제대로 올려줘님의 비판적 시각에서의 글을 잘읽어 보았습니다.

전에도 얘기했지만,
인간이 살아가는데 있어서 종교의 역활은 매우 중요합니다.
교회도 필요하고, 사찰도 필요한 요소들입니다.
그것을 운영하는 사람들도 아주 다양한 형태를 갖추고 있습니다.

자기들의 방식만이 최선의 길이라고 표현하는데 빠져서 헤어나지 못하는 사람은
그만한 수준에 머무를 것이요,
시작은 그것으로 했지만, 스스로 노력하여 깨우쳐 나가는 사람은 저절로 한까지씩 의문의 껍질을 벗게 될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바른길을 찾아낸다는것이 어려운것입니다.
누가 가르쳐 준다고해서 알게되는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오늘은 기적을 바라는 사람들에게 한마디 할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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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왜 기적을 보고 환호 할까요?
예수님은 왜 당신이 기적을 행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왜 기적을 쫒는 사람들을
무섭게 질타하였을까요?

현세에서도 많은 기적이 발생하고 있고,
그 현상에 많은 사람들이 매료되어 추종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쉽게 접할 수 있는 성경에서
우선, 예수님의 기적을 살펴봅시다.

소경을 고치고, 앉은뱅이를 일으켰고, 죽은 이를 살려내었고,
오병이어의 엄청난 기적을 보였습니다.

그분의 깊은 마음을 어찌 간단하게 짐작 할 수 있겠습니까 마는
그분의 기적은 지극히 불쌍하고 힘든 사람에게 베풀어졌다는 것입니다.

그분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던 사람들은 어떤 부류였을까요?
예나 지금이나 부자들은 어디서든지 환대를 받습니다.
교회에도 예외일수는 없습니다.
헐벗고 가난한 사람들은 교회에서조차 환영을 받지 못하는 존재였고,
이 같은 사실은 당시 유대사회나 그 후 유럽의 사회상을 보면 여실히 드러납니다.

성장기의 기록이 없는 (성경에 예수님의 기록이 없는 것은 아시아권, 특히 인도에서의
행적이 뚜렷하다.)
예수께서는 서른 살이 되어서 유대 땅에 등장합니다.
그분의 말씀은 당시의 교회(모세율법에 충실하던)에 큰 충격을 주었습니다.

그분의 말씀 한마디 한마디가 당시로써는 파격적이었고,
교회의 잘못을 얘기하고 있었고,
그들로써는 그 얘기를 반박할만한 마땅한 명분이 없었습니다.
누가 감히 교회의 잘못을 얘기 할 수 있었겠습니까.

교회에서조차 소외되었던 사람들에게 그런 예수님의 말씀은 농부가 기다리던
단비와 같이 몹시도 갈망하던 것이었습니다.
그분 주위에 조금씩 몰려들던 사람들은 점점 수가 많아져 교회의 커다란 위협으로
다가왔습니다.
그런 과정 중에 소경도 만나게 되고, 문둥병 환자도 만나게 됩니다.
창녀도 그분을 따르게 되고, 주로 천한 신분의 사람들은 그분을 따르게 됩니다.
그들에게 기적을 베푼 것은 불행한 이들을 불쌍히 여기는 그분의 본심이
드러난 것이지, 교회에서 말하는 것처럼 당신을 드러내기 위한 목적성 이벤트는
아니었다는 생각이 됩니다.

당시의 시대 상황을 살펴봅시다.
당시는 로마제국에서 파견한 총독이 이스라엘을 다스리고 있었고,
총독은 동조하는 유대인들과 협력하여야 별 무리 없이 통치할 수 있었습니다.
그와 같은 양상은 어느 나라에서나 적용되는 방식이었고,
그렇게 하는 것이 가장 적절한 식민지 통치 방법이었습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우리의 일제 점령기의 역사를 보면 역시 비슷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민족의 지배를 받는다는 것은 더 할 수 없는 치욕으로 느끼기 때문에
잘살고 못살고를 떠나 독립투쟁을 할 수밖에 없는 것이 사람들의 본성입니다.

지배 정치가들은 이런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식민지의 귀족들과 교육자,
종교지도자들을 잘 이용하였고,
그러기 위해서는 그런 세력과의 친밀한 유대 관계를 가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예수의 언행은 교회를 위협하는 파격적인 것이었지만,
교회의 실력으로써는 감히 대적 할 수 없었습니다.
그분의 말씀은 지극히 옳은 것이었고, 그들에게는 예수님과 같은 기적을 발생 시킬 수 있는 능력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의 언행을 정치화 시켜 제거하려고 합니다.
당시의 총독은 딜레마에 빠지게 됩니다.
우선, 예수님의 언행에서 정치적인 선동을 찾을 수 없었습니다.
정치적인 위협을 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현실에서의 행복 추구보다는 죽은 다음의 세상- 즉 내세를 위한 길을 닦으라고
가르쳤으니 정치적으로는 오히려 다행이었습니다.
국민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서민들에게 인내와 사랑을 가르치고 있었으니
정치적인 위협이 될 수 없었지요.

이러한 예수님의 기독교적인 사상은 후에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기독교를 국교로
받아들이는 계기가 됩니다.
그 어떤 종교보다 다스리기 용이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교회지도들의 끈질긴 요구에 총독도 어쩔 방법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결국 예수를 감금하게 하였고, 풀어줄 명분을 찾지 못하고 끌었었으나
교회의 사주를 받은 유대인들의 요구로 십자가에 매달고 맙니다.

이 과정 중에서 그들은 예수님의 기적을 보고 싶어 합니다.
그러나 그분은 어떤 변명도 하지 않았고, 어떤 기적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모조리 다 뒤집어버리지... 많은 교인들이 그렇게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들이 요구하는 대로 기적을 보였다면,
예수님은 혹세무민하는 마술사로 낙인 찍혀 역시 수난을 당했을 것입니다.
또, 그분이 엄청난 기적을 일으켜 지배세력을 붕괴시키고 제왕으로 군림하였다면,
그분은 하느님의 아들이 아니라 현실을 중요시하는, 욕심 많은 정치가로
전락하고 말았을 것입니다.

그분이 아무런 저항 없이 순순히 오라를 받고,
맥없이 십자가에 매달리게 된 것은 당신의 가르침이 틀림없다는 것을 증거하는
당연한 행동이었지요.

그분의 그런 기적을 이해 할 수 있다면,
그분이 왜 기적을 거부하였는지 그 이유를 이해 할 수 있다면,
그분이 왜 기적을 보고 따르는 사람들에게 경고 하였는지 알 수 있게 됩니다.

요즈음의 교회를 봅시다.
요즈음의 교인들을 봅시다.

모두들 기적을 원하고 있고, 기적에 환호하고, 기적을 보기위해서 몰려다니고,
기적을 일으키는 사람을 맹종하고 있습니다.

여의도의 모 교회, 또 유명한 D 교회. 아주 대표적인 기적을 잘 이용하는 교회지요.
어리석은 사람들은 기적을 보고 따르고, 많은 재물을 바치고 하지만,
실상을 알고 보면, 사람들의 장난이 대부분입니다.

가끔은 이해 할 수 없는 일이 발생하기도 합니다.
그럴 때 그들은 그것은 하느님의 역사라고 말합니다.
성령의 도우심이라고 말합니다.
과연 그 힘이 성령의 힘일까요?

교인이건 아니건 우리들은 너무 기적을 좋아합니다.
약간의 잔재주를 보이기만 하면 사람들은 구름 떼처럼 몰려듭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이비들이 창궐하고 있습니다.

태풍의 진로를 바꾸었다는 조모씨 같은 사람이 생겨 날수 있고,
생명수를 미끼로 재산을 갈취하고, 사람을 죽이기도 합니다.

약간의 잔재주로 도사 행세하는 사람들이 계속 생겨나는 것은
사람들이 기적을 갈망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언행을 이해 할 수 있어야
기적에 환호하는 자신이 얼마나 어리석은지 알 수 있게 됩니다.

선도에 입문하여 수행도중에 약간의 능력을 얻을 수도 있습니다.
이때, 목적이 올바르지 못하면 사이비로 전락하기 십상이지요.
그렇게 샛길로 빠진 사람들을 여럿 보았습니다.

제가 늘 목적을 강조하는 이유가 거기에 있습니다.
스스로 자신의 목적을 계속해서 일깨우지 않으면,
자신이 어디로 흘러가고 있는지 인식조차 하지 못하고 변해갑니다.

사람들은 부족하기 짝이 없는 저에게서도 기적을 바랍니다.
척 보면 다 알고, 다 알기를 바라고, 문제를 척척 해결해주기를 바랍니다.
저는 아무 능력이 없습니다.
염력으로 숟가락 하나 구부릴 줄도 모릅니다.
처음부터 그런 능력을 갖기 원하지 않았고,
그런 능력은 나 자신을 망치게 되는 것이라고 판단되어
철저하게 배제하였기 때문입니다.

저의 이 모든 판단과 목적만이 반드시 옳은 길이라고 말하지는 못합니다.
그만큼 이 세상, 이 우주의 질서를 다 알지 못하고 있고,
그 안에서 제가 만든 저만의 법칙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똑 같은 일을 해도 각자가 느끼는 가치는 다릅니다.
똑 같은 과오를 저질러도 어떤 사람은 양심의 가책을 받고,
어떤 사람은 전혀 가책을 받지 않고 오히려 당당합니다.

어떤 사람은 약간의 잘못을 저질러 가면서도 수월하게 인생을 살아갑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그보다 작은 잘못을 저지를 수 없습니다.
그의 인생에서는 그런 것이 허용되지 않습니다.
왜 그럴까요?
세상이 불공평해서 일까요?
세상의 법칙이 그렇게 되먹은 것일까요?

오랜 세월 고뇌 하면서 겨우 그 답을 찾았습니다.
그것은 똑 같은 조건인 이 우주의 법칙 안에서 자기만의 법칙을 만들어 가기 때문입니다.
그 법칙이 나를 다른 사람과 비교하지 못하게 만듭니다.
다른 사람의 과오는 용서해도 나의 과오는 쉽게 용서되지 않습니다.
그것은 지금까지 수많은 생을 거듭하면서 쌓아온 것이 모두 다르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지금까지 쌓아온 것이 무너지지 않게 하려는 큰 법칙의 배려입니다.
수호령의 도움이라고 생각해도 무방합니다.
현실의 고통에서 고민하는 여러분들은 이런 오묘한 법칙을 알게 되기 바랍니다.

유난히 현실을 살아가는데 어려움을 느끼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아주 작은 일에도 양심의 가책을 느끼게 되는 경우입니다.
남들은 쉽게 합리화 하는데, 자신은 그게 되지 않는 분들입니다.

그런 분들은 평범하게 살아가기 어렵습니다.
남들같이 적당히 합리화 하고, 적당하게 편법을 사용하고,
적당히 속여가면서 살아가기 어렵습니다.

아직 공부하는 학생들이 많습니다.
정말 열심히 공부하여 어떤 분야에서건 전문가가 되기를 바랍니다.
엔지니어도 좋고, 요리사도 괜찮습니다.
독보적인 능력을 갖추지 않으면, 양심을 지켜가면서 살아가는데 상당한 어려움을
겪게 될 것입니다.

이미 그렇게 되었지만, 문명이 발달 할수록, 우리사회가 선진화 될수록
이런 현상은 심화되어 갑니다.

영의 등급이 낮은 사람은 살아가기 쉽습니다.
장사를 해도 적당히 속여가면서 할 수 있지만,
자신을 속이기 어려운 사람은 그게 되지 않습니다.

자신을 돌아보십시오.
왜 남들은 다 적당하게 합리화 시켜가면서 살아갈 수 있는데,
자신은 왜 그것이 자꾸 걸리는가.

남의 돈도 슬쩍 주머니에 넣고 시침을 데는 사람도 있는데,
왜 나는 거스름돈에 백 원만 더 돌아와도 기어이 돌아가서 돌려주게 되는지.

감독관이 없으면 커닝하는데 모두 동조하게 되지만,
자신은 누가 보거나 말거나 그렇게 하기 싫은가.

이렇게 사소한 것이 마음에 걸리는 사람은 남들과 같이 평범한 수준으로
살아가기 어렵습니다.
나이가 들면 들수록, 그 어려움은 더 커져 갈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사람은 실력을 기르십시오.
독보적인 전문지식을 쌓지 않으면 곳곳에서 장애를 만나게 될 것입니다.

기적을 바라지 마십시오.
우리의 인생에서 결코 기적이란 없습니다.
횡재를 바라지도 마세요.
횡재가 오더라도 그 횡재 속에는 그보다 더 큰 불행이 악마 같은 입을 벌리고
기다립니다.
당신을 타락으로 인도하는 악마의 손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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