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92년(선조 25)부터 1598년까지 지리멸렬 하게 벌여졌던 임진왜란은 이순신과 왜의 전쟁이었다. 조선의 관군과 명군은 거의 한일이 없다고 봐야 한다. 결정적으로 왜가 퇴각을 한 것은 이순신, 이 단 한사람에 의해서이다.
정말로 조선은 왜의 침략을 사전에 몰랐을까?
당시 조선의 조정은 동인과 서인으로 나뉘어 왜의 조선침략에 서로 다른 의견을 내게 된다. 그래서 당쟁의 분열로 일본의 침략을 대비하지 못하게 되었다고 우리는 배웠지만 이것은 제대로 된 역사의 실상이 아니다. 대마도 도주나 여러 루트를 통해서 조선의 조정은 왜 침략 정보를 끊임없이 귀찮게 받게된다. 그래서 조선의 조정도 바보가 아닌 이상 서둘러 왜 침략에 대비해 준비를 하게 된다. 틀림없이 왜의 침략은 없다고 주장을 한, 동인의 수장인 류성룡이 임진왜란을 방비하게 한 것이다. 부산성전투나, 동래성 전투, 우리가 알고 있는 이 전투에서의 이 성들은 류성룡의 지시로 임진왜란을 대비해서 축성된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알고 있는 동래성, 부산성전투가 남아있는 것이다. 이성들은 그 이전에는 없던 새로 축조한 성들이었던 것이다. 이것에서 우리는 식민사학의 폐해를 볼 수 있다. 지긋지긋한 당쟁 때문에 조선이 망했고 그리고 또 임진왜란도 어이없이 당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이가 주장한 10만양병을 준비 못 했을까?
당시 이이가 10만양병설을 주창한다. 그렇다면 임진왜란 당시 조선은 이이가 말한 10만을 준비 못해서 임진왜란에 어이없이 연전연패했을까? 그 답은 아니다. 당시 조선은 10만이상의 병력을 대비하고 있었다. 그 예가 용인전투이다. 용인전투는 너무나 치욕적인 전투이었기에 이 전투를 입에 담는 다는 것은 생각도 해볼 수 없고, 다만 불문율에 붙이고 있다.
그 용인 전투는 무엇인가? 조선은 경상, 충청, 전라의 삼도의 관군을 집결시켜 용인에 주둔시킨다. 그런데 용인에 모인 조선군의 숫자는 6만에서 10만까지 이르렀다. 10만을 대비하지 못해서 왜에게 허망하게 당했다라는 상식은 잘못된 역사의 상식이다.
이 전투에서 조선의 10만대군은 와키자카의 천명에 의해 무참히 대패를 당한다. 와키자카가 천명을 거느리고 기습을 감행한다. 왜군의 조총에 놀란 조선군은 도망가기에 바빴다. 1000명이 10만 대군을 쫓는 웃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 벌어진 것이다. 조선군은 조총에 맞아죽은 사람보다 조선군에 의해 밟혀 죽은 사람이 더 많았다.
이로인해 와키자카는 조선군을 허수아비로 생각한다. 왜군이 나타났다고 하면 무조건 도망가 버리는 겁쟁이로 인식한 것이다. 후에 와키자카는 이순신의 수군을 제압하라는 특명을 받고 바다로 나간다. 후에 바다에서 와키자카는 이순신 또한 오합지졸 조선의 장수로 생각한다. 왜놈만 보면 도망가기 바쁜 그런 한심한 조선의 장수로 생각한 것이다. 그의 이러한 생각은 한산해전에서 이순신 장군의 유인술에 걸려 참패를 당하는 꼴을 만들어 버린다. 조선수군이 거짓으로 도망가는 척을 하니까 와키자카는 그러면 그렇지 하면서 돌격을 하다가 이순신 장군의 학인진에 걸려 대패를 당하게 된다.
정말로 조선은 임진왜란을 대비하지 못 했을까?
류성룡은 나름대로 임진왜란을 소리 소문 없이 조용히 준비하였다. 당시의 선조는 병권을 가진, 누가 혹시라도 자신의 왕권을 침탈하지 않을까 하는 병적인 왕권 집착증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혹여 신하가 왜의 조선 침략이나 그로인한 병권 확립등의 간언을 하면 역적으로 몰아 파면를 하는 병적인 상황을 공공연히 벌이곤 하였다.
당시 조정은 대마도 도주의 보고등으로 왜의 조선침략은 기정사실임을 알게 된다. 그러나 병권확립의 최대 걸림돌은 선조였다. 그리하여 류성룡은 선조의 비위를 건드리지 않으면서 임진왜란을 준비한다. 이순신을 전라좌수사로 발령하고 남해지방에 성들을 축성케하고 나름대로 임진왜란을 준비한 것이다.
당시 이순신의 장군의 전라좌수영의 군세는 보잘 것 없었다. 함선은 25척 군사는 4000명에 지나지 않았고, 우리가 알고 있는 함포나 거북선, 판옥선은 없었다. 전부 이순신 스스로 만든 것이다.
이순신 장군은 왜의 침략은 대비하기 위해, 화포를 만들고, 개량하고, 함선을 건조하기 시작한다. 거북선과 판옥선, 그리고 함포, 화약등은 기존의 조선군의 이상의 것이었다. 이순신 장군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다. 이순신 장군은 농사를 지어서 군량미도 확보해야 했다. 이순신은 장수를 넘어서 지도자수준의 경영의식을 가진 위인으로 보아야 한다.
이순신은 최초로 함대함전의 함포 전술을 고안해 낸다. 이제까지 함대함전이란 배를 맞대고 백병전을 치루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순신은 이것을 뛰어넘어 미래의 함포전을 예상하고 그에 알맞는 전술과 함포 사격 훈련 및 진법을 구상해 내었다.
평양에서 이순신 장군이 왜군을 무찌르다?
왜군은 조선의 동래성 부산성, 탄금대 전투이후 조선 함락은 시간 문제로 생각하고 장기전의 생각은 하지 않는다. 왜군의 전투방식은 도성을 함락시키고 상대방의 최고 지휘관을 처치하는 것이다. 그러니 왜군은 한양을 함락시키고 조선왕을 처치하면 전쟁이 끝나는 줄 알았다. 왜군은 기동전을 펼쳐, 단지 부산성을 함락한지 약 보름만에 한성을 점령하게 된다. 왜군은 기동전과 단기전에 필요한 의복, 군량, 화약등의 보급품만을 소지하고 있었기에, 그들은 한성에서 평양으로 도주한 조선왕을 쫓지 않고 16일 가량을 머무르게 된다. 보급을 기다린 것이다.
그들은 생각지도 않은 장기전에 휘말리게 된다. 일개국왕이 도성을 버리고 도망간다는 것은 왜군의 상식에는 없었기 때문이다. 왜국에서의 전투란 도성을 빼앗으면 그걸로 끝이다. 장수는 명예를 위해 도성과 함께 장렬히 최후를 맞이하는데 조선의 왕은 명예같은 건 없었던 것이다.
전쟁에서 보급은 전쟁의 승패를 판가름 짓는다. 과거에 나폴레옹이 러시아의 초토화 작전에 휘말리고 보급이 제대로 이루어 않아 러시아 원정에서 실패한다. 나폴레옹도 똑 같이 일주일 가량의 보급품만 유지한채 진격을 감행하였기 때문이다. 히틀러도 스탈린의 초토화 작전에 휘말리고 보급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아, 2차대전에서 패망하는 결과를 맛보게 된다.
왜군은 육로로 그들의 10만군대에게 보급을 한다는 것은 애당초 무리가 있기 때문에 그들이 가장 자신있어 하는 해상으로 보급을 추진하게 된다. 그러나 그들의 보급품은 이순의 장군의 옥포해전에 의해서 2000톤이나 되는 그들의 보급품과 보급선단이 그대로 바다로 수장하게 된다. 그들은 꼼짝없이 굶어죽게 된 것이다. 그러나 하늘이 도운 것일까? 정말로 현명한? 선조가 자기 몸만 빠져나오고, 고스란히 왜군에게 군량미 10만석을 넘겨주게 된다. 굶어 죽게 될 왜군을 조선 선조가 먹여살린 것이다. 아사직전의 왜군을 선조가 살려준 것이다. 그러나 10만석도 10만명에겐 궁여지책이다
왜군은 평양까지 진격하고 평양에서 더 이상 진격을 못한다. 이유는 간단하다. 식량과 화약등의 보급이 절대로 부족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동쪽방면으로는 함경도까지 다다른다. 동쪽 방면의 왜군은 거칠 것이 없었다. 그것은 동쪽 해상의 보급은 제대로 이루어 졌기 때문이었다. 그만큼 보급이 전투에 절대적인 영향을 미친다.
평양의 왜군을 명나라가 패퇴시켰다는 것은 정말 잘못된 역사의 상식이다. 명군은 조선군보다도 형편없는 전투력에, 전쟁수행 능력도 보잘 것 없는, 한 마디로 거지 집단이었다. 그들의 나라사정도 말이 아니었기에 그들의 보급에 필요한 식량과 군수품을 대줄 형편이 안되었다. 그래서 후에 명나라는 겨우 5만을 조선에 보내놓고 나라가 휘청 휘청거리다가, 결국은 패망하게 된다. 명나라 군대는 이렇다할 전투를 한 적이 없다. 제대로 치른 전투는 평양성 전투가 처음이자 마지막이다. 명군은 조선의 충고를 듣지도 않고 왜군을 얕잡아 본채 평양성을 공격하다가 참패를 당하게 된다. 평양성 전투이후 명군은 왜군을 보곤 겁을 먹고 이렇다할 전투는 벌이지 못하고 군량미만 축낸다. 조선왕을 괴롭히는 일개 거지 집단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평양에서 왜군이 후퇴를 하게 되는데 그들을 물리친 것은 명군도 아니고 선조의 조선육군도 아니었다. 바로 동장군과 이순신 장군의 활약에 의한 보급로 봉쇄였다. 왜인들은 조선 평안도의 겨울을 경험해본적도 없었고, 그리고 겨울옷이란 것은 애초에 있지도 않았다. 그 때의 상황에 대해 왜병 요시노 진고자에몬은 후에 그의 일기를 통하여 생생하게 증언하고 있다. “이 날 밤은 북풍이 몹시 불었다. 추위는 살을 에는 듯하였고, 인간의 지각을 모두 앗아가는 듯하였다. 동상에 걸린 병사들은 지팡이 대신 활을 잡지도 못할 정도였고, 막대기가 다 된 다리를 그저 몽유병자처럼 질질 끌고 갈 뿐이었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동사(凍死)나 아사(餓死)라는 죽음만이 길가에서 커다란 아가리를 벌리고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왜군은 한성으로 철군도중 무려 1400명이 죽고 살아남은 자가 6600명에 지나지 않았다.
이순신 장군 행주산성에서 권율을 도와 승리로 이끌다? 권율의 행주대첩도 왜군이 만약 보급이 제대로 이루어지고 계절이 여름이었다면 있을 수 없었던 것이다.
왜군은 동장군을 피하고 먹을 것을 찾기 위해 남으로 남으로 후퇴하고 성을 쌓고 성안에서 무려 4년을 기다린다.
이때 왜군이 후퇴할 당시 명군은 왜군과 정치적 교섭을 하여 그들의 안전한 퇴로를 약속해준다. 조선의 선조 또한 왕자등의 인질문제로 안전한 퇴로를 보장한다. 왜군이 성안에 틀여박혀 수세에 몰릴때 명군과 조선의 육군은 공성전을 벌인다던가, 성을 짓는 것을 방해하는 일도 하지 않는다. 왜군이 성을 다 짓고 나서도 4년동안 가만 놔둔다.
이순신을 죽이려 했던 것은 왜군이 아닌 선조였다!
왜군은 4년후 정유년에 그들의 패전의 원인을 철저히 인식하고 이순신을 제거하는 것에 온갖 방법을 강구한다.
전투로는 이순신을 제거하지 못하니, 선조의 병적인 쿠테타 망상증을 이용한다.
왜장 유키나가가 권율에게 이제 바다를 통해 쳐들어 간다고 선전포고를 한다. 이에 권율이 조정에 그대로 보고를 한다. (권율을 냉철하게 다시 역사적 재평가를 해보아야 한다.) 선조는 권율을 통해 바로 이순신에게 출전명령을 내리고 유키나가를 바다에서 잡을 것을 명령한다. 정말 한심하기 그지 없다. 내가 쳐들어 간다고 적에게 미리 알리는 착한 적도 없거니와, 적의 말을 믿고, 아군의 말을 믿지 못하는 한심한 왕도 없을 것이다.
이순신은 적의 계략에 놀아나지 않고 자리를 지킨다. 왜군은 정유재란을 준비하면서 이순신 수군의 판옥선에 대응하는 대형함선을 건조한다. 대형함선등을 합쳐 약 2000척의 함선을 준비한다.
이순신의 수군과 왜군은 견내량을 사이에 두고 팽팽한 대치상황을 벌이고 있었다. 이 대치상황에서 먼저 나서는 자가 지는 것은 자명한 사실이었고, 더욱이나 조선의 함선은 250척에 지나지 않았기에 먼저 공격해 들어간다는 것은 더욱 무리였다.
후에 원균도 이러한 상황을 알고 있었기에 쳐들어 가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데 같은 사령관의 지위임에도 불구하고 권율이 원균을 불려들어 곤장을 치고 압박을 가한다. 이에 원균은 마지못해 출진을 하게 되고 참담한 패배를 당한다. 권율은 용인전투에서도 10만의 대군을 잃었고, 여기에서도 250척의 판옥선과 거북선을 모두 잃는다. 권율을 조선을 구한 구국의 영웅으로 보는 것은 타당하지 않다. 그는 조선의 선조 비위나 맞추는 일개 평범한 조선의 장수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적의 계략임이 밝혀진 이후에도 선조는 왕명을 거역한 죄로, 이순신을 사형까지 집행하려 한다. 유능한 장수와 한 나라에 같이 있다는 것은 자신의 왕권을 위협하고 언젠가는 왕위를 찬탈할 것이라는 망상에 늘 젖어 있었기 때문이다. 선조는 이를 기회를 삼아 제거를 꾀한 것이다. 그러나 대소신려들의 만류로 사형집행만은 이루어지지 않고 백의 종군하게 된다
이순신을 손쉽게 피한방울 흘리지 않고 제거한 왜군은 파죽지세로 전라도를 점령하고 서해를 통해 북상하기 시작한다. 그러나 백의종군한 이순신은 불과 12척의 함선으로 왜의 200척을 쳐부수는 명랑대첩의 신화를 이룬다.
명랑대첩이후 왜군은 전의를 상실하고 퇴각을 서두르게 된다.
이순신 장군 왕명을 거역하고 왜군을 공격하다!
노량에서 왜군은 일본으로 철수를 하려하지만 이순신이 뒤에서 해상을 봉쇄하고 있어서 철수를 하지 못하고 또 다시 동장군과 굶주림을 떠올리며 경악하게 된다. 그러나 이 해상봉쇄를 풀어 왜군의 안전한 퇴각을 명군과 선조는 보장하려 한다. 또 다시 선조는 적을 안전하게 돌려보내라는 웃지 못할 왕명을 내리고, 또 다시 이순신은 왕명을 거역하고 적에게 달려들어 마지막 왜란의 전투를 치른다. 이것이 노량해전이다.
이전투 이후 이순신에게 남은 것은 선조의 사형집행 명령 뿐이었다. 이순신에게 남은 것은 세장의 카드가 있었다. 자신이 사형을 당하던가! 새로운 왕조를 열어나가던가! 적에게 죽던가! 이순신은 충의의 장군이었다! 왕권을 찬탈하는 것은 생각도 할 수 없었고, 다만 적에게 죽는 것을 택할 수밖에 없었다.
만약 이순신이 일말의 다른 생각을 품었다면 역사는 달라졌을 것이다. 권율휘하의 조선 육군은 5000명에 불과 하였으나 이순신 휘하의 수군은 3만명에 이르렀다. 이순신의 수군은 자체적으로 개량한 각종 화기와 조총을 구비하고 있었고, 조선의 백성과 수군은 이순신에 대한 존경심과 충성심으로 불타오르고 있었다.
이순신 장군을 트라팔가 해전의 넬슨과 비교하는 것은 망발이다. 이순신 장군은 함선도 무기도 스스로 만들고 농사를 지으면서 군량비도 스스로 자급해야 했다. 이순신은 일개 넬슨같은 제독이 아니라, 리더쉽과 자질을 갖춘 비운의 지도자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