괴물 (2)

young12 작성일 05.05.21 18:4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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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 괴물 (2)

선호는 어렸을 때, 그러니까 초등학교에 입학하기 전이었던 7살 까지는 자신이 남들보다 특별하다는 생각은 한적이 없었다. 그런 생각은 처음 초등학교에 입학하고 나서도 얼마동안은 그러했다. 하지만 집단생활을 하다보면 필연적으로 자신이 원하지 않는 상황에 처하게 되는 경우가 종종있다. 그건 대다수의-어쩌면 모든-집단에게서 볼 수 있는 공통적인 습성이고, 선호가 자신이 남들과 다르다는 것을 깨닫게 된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그거 이리 줘."

"하하 싫은데?"

지금까지 아무리 진수가 놀리고 괴롭혀도 묵묵히 참아왔던 선호였다. 진수가 옷에 코딱지를 뭍혔을 때도, 츄리닝을 입고 온날 뒤에서 몰래 바지를 벗겼을 때도, 화장실에서 오줌을 누는데 발로 차서 바지가 다 젖었을 때도 그랬다. 그런데 지금은 아니었다. 선호의 가족사진이 진수녀석의 볼펜으로 철저히 유린당하는 순간만큼은 진수를 도저히 용서할 수 없었다. 난생처음으로 선호는 끔찍한 생각을 했다. 저 나쁜자식 머리통이 확 터져서 죽어버렸으면 좋겠다고. 그리고 그 순간 진수의 머리통이 믿기지 않을만큼 부풀어 오르더니 이내 '뻥'하고 터져버렸다. 가까이 있던 선호는 물론이고 다른 아이들까지 온몸에 진수의 뇌수를 흠뻑 뒤집어 쓰고 말았다.

"으아아아악."

겨우 초등학교 1학년이었던 아이들이 집단으로 실신하는 사태가 벌어졌고, 개중에 몇몇은 정신병원에서 오랫동안 치료를 받아야 했다. 선호는 그 이후로 두번다시 그런 생각을 하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그리고 6년이 흘렀다.

"어이 X발새끼."

"저, 저요...?"

"그래 너. 형들이랑 얘기 좀 하자."

중학교에 입학한 선호는 하교길에 너댓명의 껄렁한 아이들에게 이끌려 으슥한 골목길로 불려가게 되었다. 기선제압을 한답시고 선호의 뺨을 두차례 후려친 그들은 곧 능숙한 솜씨로 선호의 주머니와 가방을 뒤지기 시작했고, 이내 그의 학원비 20만원과 MP3플레이어를 꺼내들고는 희희낙락 거리며 기뻐했다. 그들은 생각보다 짭짤한 수확에 선호를 고이 보내주었는데 거기서 그쳤으면 좋았을 것을 마지막에 그만 하지 말았어야 할 말까지 하고 말았다.

"중학생도 삥뜯을 수 있다고 했지? 히히."

녀석의 말에 한 다섯발자국쯤 내딛었던 선호의 발걸음이 잠시 소강상태에 빠졌다. 그리고는 곧 발걸음을 돌려 히히덕 거리고 있는 초딩집단쪽으로 향했다. 도저히 초등학생으로는 보이지 않는 큰 키와 체구를 무기로 거만하게 자신을 쏘아보는 초딩을 향해 선호가 말했다. 그의 목소리는 흥분해서인지 조금 떨리고 있었다.

"너네 초등학생이었냐?"

"그렇다면? 별 좁밥같은 새끼가 지금 중학생이라고 유세떠냐?"

"그런건 아닌데. 어쨌든, 너네 좀 맞아야겠다."

가장 앞장서서 삥을 뜯던 커다란 초딩이 같잖다는 듯 피식 웃으며 선호에게 다짜고짜 주먹을 날렸다. 또래에 비해 작은키에 마르기까지 한 선호쯤이야 한주먹 거리도 안된다는 식이었다. 그리고 그의 주먹이 선호의 얼굴에 닿는순간 고통에 찬 비명소리가 으슥한 골목길안을 가득 메웠다.

"으아아악... 아악... 내 팔..."

주먹을 날리던 초딩의 팔이 기형적으로 꺾여있었다. 너무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라 아무도 어떻게 된 상황인지 파악하지 못했다. 고통스러워 하는 친구를 보며 당황한 초딩들이 집단으로 선호에게 달려들었다. 선호의 하얀 얼굴에 냉소가 어렸다. 4명의 초등학생들의 팔다리가 동시에 마치 꼭두각시 인형처럼 제멋대로 돌아가 버렸다.

"아아악, 아아... 어, 엄마..."

"아파... 아아아흐어어엉..."

"형이 오늘은 여기서 봐주는데 다음에 또 걸리면 그 땐 죽는다."

이제 고등학생이 된 선호는 어째서 자신에게 이런 능력이 생겼는지는 알지 못했지만 한가지는 분명했다. 그가 적어도 어디가서 맞고 다니지는 않으리라는 사실 말이다. 고등학생이 된 후로는 특별히 능력을 사용할 만한 일이 없었다. 꽤 명문고로 진학한 덕분에 다들 공부하기에 바빴던 터라 주먹다짐 같은건 한달에 한번 구경하기도 힘들었고, 그에게 특별히 시비를 걸어오는 사람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더구나 능력을 사용하고 나면 찾아오는 원인불명의 두통과 피로감은 심한경우 며칠동안이나 지속되었기 때문에 가급적이면 자제하려고 하는 편이었다.

쏴아아아

학교가 끝날 무렵이 되어서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처음엔 한두방울씩 약하게 내리던 것이 점점 거세지는가 싶더니 아예 소나기가 되어버렸다. 일기예보에 없던 비였는지라 우산을 가지고 오지 않은 선호는 집으로 전화를 걸었다. 신호음이 한참이나 울리고 나서야 아버지의 무뚝뚝한 목소리가 수화기 너머로 흘러나왔다.

"여보세요."

"아빠? 나야. 엄마는?"

"엄마는 지금 아프다. 나중에 걸어라."

"뭐? 아빠 말투가 왜 그래? 엄마는 또 어디가 아픈데..."

딸칵

선호는 자신의 말이 끝나가도 전에 전화가 끊기자 의아해 하며 다시 다이얼을 눌렀지만 이번에는 통화대기음만 지루하게 이어질 뿐 아무도 전화를 받지 않았다. 선호는 하는 수 없이 비를 쫄딱 맞으며 간신히 택시를 잡아 타고 집으로 향했다. 아버지의 개인적인 취향 덕분이 시내에서 꽤 떨어진 도시 외곽의 전원주택까지 가는데는 고등학생으로선 버거울 정도의 요금이 나왔다. 게다가 집까지 200미터는 차가 들어가지 못해 뛰어가야 했으니 선호로써는 그저 씁쓸할 따름이었다.

"이건..."

현관 앞에선 선호는 문앞에 흩뿌려진 핏자국을 보며 문득 불안감을 느꼈다. 지체없이 문을 열고 집안으로 들어서자 머리가 깨진 낯선 사내의 시체가 거실 바닥에 아무렇게나 나뒹굴고 있었다. 선호의 심장이 무섭게 뛰기 시작했다. 강도가 든건가? 그럼 이 남자는 뭐지? 혼란스러워 하는 선호의 뒤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아, 아빠..."

"선호로구나. 마침 잘 왔다. 네 녀석의 버릇을 어떻게 고쳐줄까 생각하던 참이었거든. 일단 아버지를 봤으면 인사부터 해야지. 이 호로새끼야."

벌거벗은 채, 게다가 한껏 발기한 채로 자신을 향해 달려드는 아버지에게 선호는 말 할 수 없는 전율을 느꼈다. 평소 얼마나 존경하던 아버지 였던가. 국내 최고의 명문대학 명예교수이자 영국의 과학잡지 네이쳐지에 몇번이나 소개될 정도로 훌륭한 업적을 남긴, 게다가 비록 받지는 못했지만 수차례나 노벨상 수상자로 지목될 정도로 뛰어난 생물학 박사인 아버지가 지금 이해할 수 없는 모습으로 광기에 가득 차 있는 것이었다.

"죽어라."

"으아아..."

간신히 아버지가 휘두르는 주먹을 피한 선호는 허공을 가르던 아버지의 주먹이 대리석 탁자를 부숴버리자 식은땀이 흘러내리는 것을 느꼈다. 저런걸 맞으면 빗맞아도 사망일거라 생각했다. 상상도 못한 아버지의 파괴력에 선호는 자신도 모르게 능력으로 아버지를 날려버렸다. 허리가 휘청 꺾이며 태풍에 휩쓸린 허수아비처럼 그는 붕 날아가 거실 바닥에 처박혔다. 실수였다고 생각하면서 선호는 재빨리 2층으로 올라갔다. 일단 어머니가 무사한지 봐야 안심을 할 것 같았다.

"이럴수가."

그러나 이미 싸늘한 주검이 되어버린 어머니의 시체를 바라보며 선호는 절망감에 휩쌓였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어느새 2층으로 따라온 아버지가 선호를 향해 고함을 질러대고 있었다. 어째서 이렇게 되어버렸는지 선호로써는 너무나 답답할 뿐이었다.

"이런 개같은 자식. 키워준 은혜도 모르고 아버지를 때려? 네 놈은 아무래도 벌을 받아야겠다. 이리 와."

"아버지 그만둬요... 엄마가 죽었다고요... 흐흐흑..."

"흐흐 맞아. 그딴년 내가 죽여버렸지. 너도 죽고 싶은게냐? 오호라. 그 걸레같은 년이 아들이라고 가만 뒀을리가 없지."

"당신 누구야..."

선호의 목소리는 차갑게 가라앉아 있었다. 여차하면 산산히 찢어발기리라 생각하며 선호는 아버지의 형상을 한 무언가를 노려보았다. 지독한 욕설을 지껄이며 천천히 2층으로 올라오던 그는 갑자기 걸음을 멈추고는 경련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온몸의 피부가 쩌적 소리를 내며 갈라지기 시작하더니 그 사이로 엄청난 암회색 근육이 부풀어 올랐다. 순식간에 5배 이상이나 거대해져 버린 그는 이제 아예 이성을 잃어버린듯 맹수의 포효 소리와 함께 선호를 향해 무지막지하게 달려들었다.

"말도안돼."

도저히 자신의 능력으론 감당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은 선호는 온 능력을 끌어모아 자신의 몸을 들어올렸다. 천장을 뚫고서도 그의 몸은 한없이 위로 솟구쳤다. 어느새 비는 그쳐있었다. 코피가 터지면서 심한 두통과 어지러움증이 밀려왔지만 그는 이를 악물었다. 지금 내려가면 죽는 것이다. 얼마나 지났을까. 갑자기 어디선가 한발의 총성이 들려왔고, 거의 본능적으로 괴물이 된 아버지는 소리를 쫒아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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