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라의 운명을 결정지은 이순신의 명량대첩

용스11 작성일 05.07.08 07:1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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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의 운명을 결정지은 이순신의 명량대첩



명량대첩(鳴梁大捷)


우리는 지금부터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해군 제독 이순신이 이전의 신화를 뛰어넘어 더욱 위대한 신화를 이루는 과정을 보게 된다. 불과 12척의 패잔선으로 일본의 정예 함대 200여 척과 10만 대군을 격멸시키는 믿겨지지 않는 신화인 것이다.


이 명량해전이야말로 그 동안 사가(史家)들이 손꼽아 온 임진왜란 3대 대첩(大捷)을 수백 배 뛰어넘는 진정 위대한 대첩으로, 이순신 제독의 절묘한 용병술을 확연히 살펴볼 수 있는 해전이다.

이순신은 선조의 명을 어겼다는 이유로 서울에 압송된 후 죄인으로서 혹심한 고문을 받았다. 판부사 정탁의 목숨을 건 구명 운동으로 간신히 사형만은 면하고, 1597년 4월 1일 감옥에서 석방되었다. 이리하여 이순신은 도원수 권율 밑에서 백의종군하게 되었다. 7월 18일, 그러니까 원균의 함대가 전멸당하고 이틀이 지난 뒤 새벽에 원수부의 군관 이덕필과 변홍달이 찾아와 조선 수군의 전멸 소식을 이순신에게 전하였다. 곧이어 도원수 권율이 원수부의 참모들을 대동하고 사병 신세인 이순신을 찾아왔다. 해군의 전멸 소식을 듣고, 말단 부하로 백의종군하는 이순신 앞에 나타난 권율은 마치 그 자신이 죄인이라도 된 듯 머리를 숙이고 있었다.

대영웅을 죄인으로 몰아 백의종군시키고 있음을 사과하고 있는 것이며, 한편으로는 이 난국을 타개해 줄 사람은 이순신 밖에 없다는 뜻이기도 했다. 이리하여 우국충정에 불타는 이순신은 과거 통제사 시절 그의 밑에서 종사했으면서, 지금은 원수부에 속해 있는 9명의 군관을 차출하여 대책반을 편성한 후, 남은 전선이 정박해 있는 하동(河東)의 노량진(鷺梁津)을 향하여 달려갔다.

전선으로 달려가는 이순신에게는 아무것도 없었다. 맨손으로 조선 해군을 다시 재건하여 10만 왜병들의 서해 진출을 막아야 했다. 그는 길거리에서 지푸라기 하나라도 건져 해군 재건에 활용해야 할 만큼의 악조건에서 전장으로 달려가고 있는 것이다. 억수같이 쏟아지는 장마비를 맞으며 말을 달려 진주에 도착, 진주 부사와 논의를 한 후 4일 만에 다시 142km를 달려 7월 21일, 목적지인 노량진에 도착했다.

경상 우수사 배설은 원균 함대가 전멸하던 날 밤, 미리 겁을 먹고 12척의 전선을 이끌고 함대를 이탈하여 이 곳 하동 노량진으로 도망쳐 왔었다. 이 12척의 패잔선을 점검해 보니 신속한 수리가 필요했다. 그러나 아무런 실권이 없었던 이순신은 그저 보고 들은 상황을 정리하여 다음과 같은 보고서를 원수부에 올렸다.

1. 경상 우수사 배설은 전의를 상실하고 전쟁 공포증에 걸려 있음.
2. 군함 1척당 190명이 필요한데 현재 겨우 90명 이하로 격감되어 있음.
3. 군량미가 부족하여 12척의 함대 장병들이 기아 상태에 있음.
4. 전선 함포용 화약, 피사체 등이 절대 부족한 상태임.

한편, 선조의 명령으로 이번 해전에 처음부터 끝까지 종군한 선전관 김식은 기적적으로 살아남아 서울로 돌아갔다. 그는 원균 함대의 괴멸 과정을 소상히 선조에게 보고하였다. 이때가 7월 22일이었으니, 원균이 패전한 날로부터 6일째 되는 날이었다. 왕은 급히 대신들을 소집하여 사후 대책을 의논해 보았으나, 이미 조선 수군이 전멸한 상태에서 무슨 뾰족한 수가 있을 리 없었다.

구국의 영웅을 죄인으로 몰았던 선조는 뻔뻔하게도 다시 이순신을 삼도 수군통제사로 임명하여 요술이라도 부려 자신의 왕조를 구해 주기를 기대하였다. 이로서 1597년 7월 23일자로 된 삼도수군통제사 임명장이 8월 3일 이른 아침 이순신에게 도착하였다.

이때부터 이순신의 움직임은 대단히 기민해졌다. 상대는 수백 척의 대형 전함을 보유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순신 제독에게는 12척의 함선이 있을 뿐이었다. 제독은 이 12척의 전함(판옥선)의 전투력을 증강시키기 위하여 전 함선을 거북선과의 절충형으로 개조하였다.

즉 갑판의 벽을 높여 병사들이 적의 조총탄에 노출되는 것을 방지하도록 하였다. 왜인들은 이 배도 거북선이라 불렀다.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부족했다. 우선 배를 움직일 병사와 전투병들이 필요했다. 이 때는 이미 배에 딸린 병사들의 태반이 종적을 감춘 뒤였다. 또 군량미도 구해야 했고, 탄약과 피사체도 모두 부족하였다. 선조는 이순신에게 의무만 지워줬을 뿐 쌀 한 톨 지원하지 않았다. 따라서 이순신은 9명의 군관을 이끌고 이 모든 보급품을 스스로 해결하기 위해 이곳저곳을 헤매고 다녀야 했다.

이렇게 출발한 이순신 일행은 8월 5일, 곡성읍에 도착하여 고산 현감 최진강으로부터 신병들을 인수받았다. 8월 6일, 옥과에 접어들어서니 구례가 왜병들에게 점령당했다는 소문에 피난민들이 줄을 잇고 있었다. 이순신은 여기서 옛 부하 이기남(거북선 돌격대장), 정사준 형제, 군관 조응복, 양동립 등을 만나 일행에 가담시켰다.

8월 7일, 아침 일찍 옥과를 출발하여 순천으로 향하던 중 부대가 해산되어 할 수 없이 고향으로 돌아가던 전라 병사 이복남의 부하들을 만나 이들을 모두 수군으로 편입시켰고, 또 이들로부터 많은 군마와 병기들도 확보할 수 있었다.

8월 8일, 광양 현감 구덕령,나주 판관 원종의, 옥구 군수 김희온 등을 얻고 해질 무렵 순천에 도착했다. 순천에 도착하니 모두 피난을 가버리고 성 안은 텅 비어 있었는데, 무능한 관리들이 도망가기에 바빠 적군에게 큰 도움이 될 군기 창고를 파괴하지 않은 채 그대로 방치한 것을 발견했다. 그러나 이러한 관리들의 실책으로 이순신은 많은 병장기와 장편전 등의 피사체를 얻을 수 있었다.
8월 9일, 순천을 떠나 낙안으로 가니, 그곳에 먼저 와 있던 순천 부사 우치적과 김제 군수 고봉상등이 가담하여 왔다. 그들은 곧 국창(國倉)이 있는 보성 조양창으로 향하였다. 초저녁에 도착하여보니 그곳에도 지키는 사람 하나 없이 창고가 봉인된 채 있었다. 이리하여 이순신은 조선 군관들의 무책임한 행동으로 인해 많은 보급품을 확보할 수 있었다. 이로써 빈손으로 시작한 이순신의 조선 해군 재건은 최소한의 군병과 병기 그리고 군량미를 확보할 수 있게 되었다. 참으로 궁색한 모습이었지만 적의 공격을 앉아서 당하지만은 않게 된 것이다.

이 때 이순신은 구례.곡성.옥과.순천.낙안.보성 등 330km를 돌며 신병 1천 명과 군량미 1개월 분, 그리고 많은 전투용 병기들을 거두어들여 최소한 한차례의 해전을 치를 수 있게 되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눈여겨보아 두어야 할 점은, 이 많은 병참품들을 왜군보다 불과 하루 정도 앞질러 이순신이 먼저 거두었다는 것이다. 만약 이순신이 아니었더라면 이 모든 것들이 모조리 왜병들 손에 넘어가 버릴 뻔했던 것이다. 이 점만 보아도 선비의 나라 조선이 얼마나 병법에 무지했는지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8월 20일, 드디어 이순신은 갑판 개조를 끝낸 12척의 군함으로 함대를 구성하고 직접 지휘하여 이진(梨津)으로 이동하였다. 8월 26일, 기다리고 있던 일본 해군의 척후선 8척이 이진의 60리 거리까지 접근하여 왔다. 원균의 패전 이후 이리저리 도망만 친 12척의 함대였다. 따라서 이순신의 지휘하에 거두는 첫 승리는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갖게 되는 것이다. 왜선의 추격을 발견한 이순신은 슬그머니 함대를 어란진(於蘭津)으로 옮겨갔다.

한편, 조선 수군의 패잔선 무리가 이진에 있다는 정보에 따라 일본의 척후선단이 추격해 와 보니, 조선의 패잔선단은 겁에 질려 어란진으로 도망쳐 버렸다. 3도 연합 함대를 격파한 일본의 용맹한 군함들을 보고 도망치는 꼴이 가엾을 정도였다. 이 때까지 일본군들은 도망치는 12척의 선단을 이순신이 지휘하고 있다는 것을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8월 28일 오전 6시, 왜선들은 조선의 패잔선들을 잡기 위해 기세 좋게 달려들었다. 그러나 이것은 바로 이순신 제독이 파놓은 함정이었다. 조선 해군의 승선원 태반이 해전 경험이 전혀 없는 육군들이었고, 그 중에는 물을 무서워하는 자들도 많이 있었다. 따라서 초전에서 승리를 거두어 이미 떨어질 대로 떨어진 장병들의 사기도 올려줘야 했고, 또 실전을 통하여 전투 경험도 쌓게 해주어야 했는데, 마침 일본 척후선들이 불과 8척만으로 공격해 온 것이다.

적선들의 출현에 조선의 병사들이 당황하고 있는 사이, 이순신이 기함을 앞세워 적선들을 가로막고 일제히 함포를 발사하였다. 이에 의기양양하게 달려들던 왜선들이 갑자기 허둥지둥거리며 혼란에 빠졌다. 이순신의 기함에서 깃발이 올라 전함대에 총공격을 명하자, 왜선들은 급히 방향을 돌려 도망치기 시작하였다. 이순신은 전 함대를 몰아 추격전을 펼쳤다. 왜선들이 뒤도 돌아보지 않고 도망치자 이를 쫓는 조선 수군의 사기는 하늘을 찌를 듯 하였다.
‘역시 이순신 장군 밑에서 싸우면 백전백승할 수밖에 없다.’ 모든 장병들은 그 동안의 신화가 현실로 나타나자 자신감으로 재무장하게 되었다. 이순신 함대는 갈두(葛頭)까지 추격하다가 회군하였고, 장도(獐島)에 옮겨갔다가 야음을 틈타 벽파진으로 옮겨 진을 쳤다. 척후선단이 혜성같이 나타난 조선 함대의 역습을 받고 쫓겨오자, 일본 수뇌부에서는 동요가 일어났다. 이는 일본군의 수륙 병진책에 최대 걸림돌이 될 것으로 그냥 지나칠 문제가 아니었던 것이다.

이리하여 조선의 12척 함대를 잡기 위해 55척의 대함대를 구성하여 조선의 유령 함대를 추격하기 시작했다. 왜의 함대는 조선의 함대가 정박하고 있다는 어란진으로 달려갔으나 조선 함대는 이미 그 자리에 없었다. 왜의 함대는 척후함대가 무언가 착각한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12척의 별동 함대를 구성해 그 주변의 섬들을 샅샅이 수색해 보도록 하였다.

일본의 별동 함대는 유령 함대를 찾아 벽파진으로 다가갔고 이들의 움직임은 거미줄같이 쳐 놓은 이순신의 감시망에 낱낱이 탐지되고 있었다. 이때까지도 일본의 함대는 이순신이 다시 돌아와 유령 함대를 지휘하고 있다는 것을 전혀 눈치 채지 못하고 있었다. 오후 4시경 이순신은 드디어 일본의 별동 함대를 격멸하라는 명령을 내리고 그 자신이 선두에 서서 일본 함대를 향해 돌진하였다.

느닷없이 튀어나온 유령 함대가 함포를 일제히 발사하며 달려들자, 크게 놀란 일본의 별동 선단 12척은 황급히 배를 돌려 도망가 버렸다. 어찌 된 영문인지는 몰라도 아무튼 조선의 유령 함대를 이끄는 장수는 확실히 뛰어난 인물임에 틀림없어 보였다. 일본 함대는 적어도 조선 함대의 두 배인 25척의 함대로 일시에 몰아쳐 조선 해군을 제압해야 할 것으로 생각하였다.

그날 밤 이순신 제독은 일본군의 야습이 있을 것으로 예상하고 군작전 회의를 엄중하게 진행하였다. 적의 야습에 대비하여 일사불란하게 행동하고 제독의 명령에 절대 복종할 것을 지시한 것이다. 적은 군세로 큰 군세를 공략하려면 사소한 실수라도 있어선 안되겠기 때문이었다. 이리하여 12척의 군함들은 강력한 지자총통으로 무장하고 바위 곁의 어두운 곳에 함선을 감추고 포진하였다. 한편, 적의 눈에 잘 띄는 곳에 작은 협선들을 묶어 놓고 그 위에 불을 밝혀 적의 표적이 되게 하였다.

9월 7일 오후 10시, 과연 20여 척의 일본 특공 함대가 소리도 없이 벽파진 안으로 미끄러지듯 접근하여 왔다. 제독의 예측대로 일본군의 야습이 시작되고 있었다. 일본 함대는 유인을 위한 협선들을 발견하고 야습에 성공하였다고 기세 좋게 달려들었다. 그러나 미리 바위 뒤에 숨어 있던 조선 함대가 불시에 튀어나오며 함포를 발사하자 순간 당황하기 시작했다. 일본 함대는 필사적으로 탈출을 시도했으나 이순신 제독의 포위망은 여간해서는 잘 뚫리지 않았다. 이로서 선봉에 섰던 일본 함대는 모조리 격침되었고, 일부 탈출한 함선들도 참혹한 피해를 입었다. 이 전투를 통해 신참 병사들은 역전의 용사들로 거듭 태어나고 있었다.

벽파진 야습에 실패하고 돌아온 함대를 보고 일본 해군의 수뇌부는 아연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괴멸된 줄 알았던 조선 수군이 아직 건재해 있었던 것이다. 비록 12척 뿐인 것으로 파악되었지만 그 위세는 일본군을 긴장시키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그런데 그 12척 조선 함대의 지휘관이 이순신일지도 모른다는 소문이 일본군 내에 퍼지기 시작했다. 일본군에 있어서 이순신은 공포의 대상이 되어 있었다. 수적 차이는 아랑곳없이 단 한번도 이겨보지 못했을 뿐 아니라, 이순신을 만나는 것만으로 죽음에 이른 병사의 수가 헤아릴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에 왜의 수뇌부는 크게 당황하였다. 만약 정말 이순신이라면 일본군의 사기에 미치는 영향이 엄청날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왜군은 아무리 이순신이라 하더라도 단 12척의 패잔선으로 수백 척에 달하는 일본 해군을 당해낼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따라서 최신의 대형 전투함들을 대거 투입해 조선 유령 함대를 일거에 격멸시키고자 하였다. 이에 일본 해군의 신형 전투함들을 모두 벽파진에서 70리 떨어진 어란진에 집결하도록 명령을 하달했다.





일본 해군의 조선 함대 격멸전은 일본의 최신예 전함 200여 척과 한강 마포에 상륙을 준비하던 일본군 10만이 어란진으로 모여드는 것으로부터 시작되었다. 이러한 일본 해군의 움직임은 이순신 제독에게 낱낱이 파악되고 있었다.

9월 9일, 기다리던 일본군 척후선 2척이 나타나 벽파진에 있는 이순신 함대의 동태를 면밀히 정탐하고 돌아갔다. 조선군의 함대가 작은 협선을 제외하면 실제로 전함이라곤 12척 뿐임을 최종 확인한 것이다. 이에 따라 일본 해군은 벽파진을 목표로 하여 작전을 전개할 것이다.

일본의 정탐선들이 벽파진의 지형과 수로 그리고 이순신 함대의 동태 등을 관측하고 돌아갔다는 보고를 받고서도 이순신 제독은 아무런 대책도 세우지 않고 그저 무방비 상태로 관망만 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일본군의 공격 목표를 벽파진으로 유도하려는 속임수였다.

9월 14일, 드디어 삼호원 나루터에서 봉화가 올랐다. 어란진을 감시하던 척후 군관 임준영이 정탐 임무를 끝내고 돌아온 것이다. 이순신은 제장들을 모아놓고 앞으로 있을 전투에 대해 엄중하고도 비장한 지시를 내리게 된다. 왜군의 수는 전함 200여 척에 거함만 55척인 초대형의 함대이다. 또 그 병사의 수효는 10만에 이른다. 그러나 조선의 함대는 단 12척 뿐이다. 그러나 조선의 함대에게는 자연의 조화와 천험(天險)의 지형이라는 동맹군이 있음을 갈파하고 일본 해군 섬멸 작전에 대해 상세히 설명했다. 그 작전은 우수영에 있는 명량 해협을 이용하는 것이었다.

명량 해협은 평균 1500(약 500m)자의 폭으로 진도와 화원반도 사이의 수로이다. 이 해협의 좁은 곳은 900(약 300m)자 정도밖에 되지 않으며 그 양쪽으로 암초가 널려 있어 배가 이용할 수 있는 곳은 그나마 400자(약 130m) 정도뿐이다. 또 수로의 물살이 빨라 물살의 방향만 잘 이용하면 적을 능히 격멸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순신은 작전을 상세히 설명하며 불안에 떠는 부하들을 진정시키고자 하였다. 그러나 원균 함대의 전멸을 경험했던 장교들은 불안한 마음을 쉽사리 떨쳐 버릴 수 없었다. 그 다음날인 9월 15일, 일본군의 공격이 있을 것으로 예상한 이순신 제독은 해가 떨어지기를 기다렸다가 순류를 타고 전 함대를 몰아 명량 해협을 통과하여 우수영으로 이동했다.

9월 16일, 일본군 연합 함대는 어란진을 발진하여 벽란진으로 총출격하였다. 그러나 이순신의 유령함대는 또 사라지고 없었다. 벽란진에서 다른 곳으로 갈 수 있는 수로는 일본군이 장악하고 있는 남쪽과 조선의 수군 사령부가 있는 북쪽의 우수영 방면뿐이었다. 따라서 일본군은 대함대의 출격에 겁을 먹고 우수영으로 달아났다고 판단, 즉각 추격하기 시작했다.

일본 해군의 연합함대는 구루시마 미치후사를 선봉으로 하여 도도 다카토라와 가토 요시아키 등이 합세하고 있었다. 특히 구루시마 미치후사는 1592년 6월 5일 벌어진 당항포 해전에서 전사한 형님에 대한 복수심에 불타 선봉을 자원하고 나선 자였다. 그는 무려 133척의 정예 함대를 이끌고 명량 해협으로 접근하였고, 70여 척의 제 2 함대들이 그 뒤를 따랐다. 일본 함대가 명량 해협의 남쪽 입구에 도착한 것은 12시경이었다. 마침 바다의 물결이 잔잔하여 하늘이 일본 함대를 돕는 듯 하였고 항해는 순조로웠다. 그런데 미치후사 함대가 명량 해협 중 가장 폭이 좁은 울돌목에 접근하니, 도망갔다고 판단했던 유령 함대가 기함을 선봉으로 하여 미리 포진해 있었다.

미치후사가 눈여겨 살펴보니 유령 함대의 기함에 오른 장기(將旗)는 분명 삼도 수군통제사 이순신으로 되어 있었다. 비로소 그 동안 소문으로만 떠돌던 이순신이 실제로 유령 함대를 지휘하고 있음이 확인된 것이다. 기함이 선봉에 서서 일본 함대를 기다리고 있었고, 그 뒤로 11척의 전함들이 포진하여 결사 항전의 의지를 불태우고 있었다. 그 뒤에도 멀리 한 무리의 선박이 있었으나 큰 전선으로 보이지는 않았다.

미치후사는 당대의 영웅이라 불릴만한 이순신과 한판 붙어보는 것에 야릇한 흥분을 느끼면서 단 12척의 적선을 133척의 최신예 전함으로 이기지 못한다면 배를 갈라 죽느니만 못하다는 생각을 하며 공격을 명령했다.

그러나 해협의 폭이 좁아 함대는 종대로 전진해야 했다. 이 당시의 해전은 전세계 어디에서나 적선에 접근하여 병사들이 배를 기어올라 선상에서의 난전(亂戰)을 통해 승부를 결정짓는 방식이었다. 따라서 수척의 일본 돌격선들은 조선의 기함을 사방에서 포위하고자 양쪽으로 날개를 벌리며 우회하려 하였다. 그런데 바깥쪽으로 돌던 왜선들이 돌연 물 속에 숨어 있던 암초에 걸리면서 기동 불능에 빠지고 말았다.

이때서야 왜 함대는 기함을 포위하려던 작전을 바꾸어 중앙으로 재집결하게 되었다. 그런데 이런 왜선들을 보고 있으면서도 기함은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고 그저 바라만 보고 있었다.

그러나 중앙으로 집결된 왜선들이 앞으로 전진하여 해협을 빠져나오는 순간, 좁은 물길을 가로막고 우뚝 서 있던 조선 함대의 기함이 서서히 옆으로 돌더니, 종대로 덤벼드는 일본 함대를 향해 지자포와 현자포 등, 함재포들을 일제히 발사하기 시작하였다. 동시에 갑판 위에 있던 병사들도 일제히 활과 총을 쏘아 대기 시작하니, 선봉에서 달려들던 일본 전함이 단번에 불길에 휩싸여 버렸다.

조선 함대는 우선 현자총통과 지자총통 등을 발사하여 일본 군함의 기동력을 마비시킨 후, 곧이어 조란환이라 불리는 새알 크기만한 쇳덩어리를 한 번에 100-200개씩 산탄으로 발사하였다. 이순신의 기함 한쪽에서 한 번에 발사되는 조란환은 모두 약 2척 개나 되어 갑판 위에 노출된 왜병들은 순식간에 몰살당하고 말았다. 이 전법을 이순신 제독은 합력사살(合力射殺)이라 하였다.

앞장선 전함이 순식간에 불길에 휩싸여 처참한 지경이 되자, 후열의 전함들은 조선 군함의 가공할 함포 사격에 소름이 끼쳤다. 그러나 그들은 뒤를 따르는 동료 함선들 때문에 뒤로 물러서고 싶어도 물러설 수가 없었다. 더군다나 물살이 그들을 조선 함대 쪽으로 밀어주고 있어서 후퇴하기가 물리적으로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전진해도 죽고 물러서도 죽게 되었으니 선발 돌격선들은 결사적으로 달려들기 시작했다.

그런데 조선의 함선들은 기함의 위기를 쳐다보고만 있을 뿐 도무지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았다. 조선 삼도 수군통제사 이순신 제독의 기함이 홀로 적을 맞아 약 1시간 동안 결사전을 전개하며 왜 선단을 차례로 격침시키고 있을 뿐이었다.

일본 수군이 육박전을 겨냥하여 조총을 주로 사용한 데 비하여 조선 해군은 대포를 주무기로 한 현대적인 함포전으로 일관하여 처음부터 상이한 전투 양상을 보이고 있었다. 불과 1시간여의 싸움으로 일본 군함 20여 척이 깨어졌으며 승선 인원 대부분이 몰살당했다.


그러나 뒤로 돌아설 수도 없는 일본 수병들은 악귀같이 달려들었고, 조선 함포를 피한 몇몇 돌격선들이 접근에 성공하여 배 위로 왜병들이 기어오르기 시작했다. 이 때서야 비로소 이순신 제독은 중군기(中軍旗)와 초요기(招搖旗)를 세워 중군장 김응함에게 자신의 기함을 엄호하도록 지시하였다. 기함의 명령을 받은 중군장과 거제 현령 안위가 즉각 그들의 함선을 몰아 일본 함대 속으로 돌격해 들어갔다.

그 동안 일본군의 공격에 수비로만 일관하던 조선 수군이 마침내 공세를 취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나 아직도 소극적인 전법으로 공방전을 벌이며 시간을 끌고 있었다. 나머지 9척의 전함들은 여전히 기함의 명령을 주시하며 대기하고 있었다. 전면에 나섰던 20여 척의 선봉 전함들이 모조리 격파되자 드디어 적의 대장선이 노출되었다. 기록에 따르면 이 배에는 깃대 꼭대기에 새의 날개가 꽂혀 있었고 붉은 기가 매달려 있었으며, 누각 주위는 푸른 장막으로 둘러쳐져 있었다고 한다. 적장은 다락방 위에서 선봉 돌격 함대를 지휘하였던 것이다.

이순신 제독이 그의 기함을 빠르게 몰아 접근한 후 집중 함포 사격을 퍼부으니 일본의 대장선은 순식간에 화염에 휩싸였고 적의 대장은 바다에 떨어지고 말았다. 기함의 병사 김을손이 적장을 끌어올려 보니, 그는 붉은 문양이 그려져 있는 화려한 비단 옷을 입고 있던 구루시마 미치후사였다.

미치후사의 목은 즉각 기함의 돛대 꼭대기에 매달렸고, 멀리서 이를 본 일본 병사들은 사기가 크게 떨어졌다. 상대적으로 조선 수군의 사기는 하늘을 지를 듯 충천하였다. 12시경에 시작된 해전은 어느새 3시간 정도 계속되었고, 북쪽으로 흐르던 물살도 서서히 바뀌어 남쪽으로 방향을 바꾸더니 차츰 빨라지기 시작했다. 앞으로 전진하려는 일본 군함들이 배의 균형을 유지하기 위하여 안간힘을 써 노 젓는데 노력을 집중하는 반면, 조선 함대는 물길을 따라 흐르면서 마음껏 적선을 공략하는데만 열중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바로 이순신이 기다리던 공격 시간이 다가온 것이다.

마침내 이순신 제독의 기함에 전 함대의 총공격을 알리는 깃발이 올랐다. 기함을 주시하며 휴식을 취하던 9척의 전함들은 일제히 함포를 발사하며 달려들었다. 이순신의 기함 한 척에 진땀을 흘리며 3시간을 소모한 일본 함대는 혼비백산하여 뱃머리를 돌려 도망가려 하였다. 그러나 그것은 너무나 큰 실수였다. 전투 지원을 위해 후방에서 좁은 해협을 따라 올라오던 함선들과 탈출하려는 함선들이 서로 충돌하게 되었고, 이를 피하려다 양 옆의 암초에 걸려 침몰하는 등 일본 함대는 막심한 피해를 입게 되었던 것이다.

적을 단번에 격멸시키기 위하여 물의 흐름이 가장 빠른 신시(申時)까지 전투를 질질 끌며 기다려 왔던 것이다. 또 전투경험이 적은 조선 수군에게 단 1~2척의 함선으로 수백척에 맞서는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자신감과 결전의 의지를 갖게 하는 것과, 그 반대의 효과를 왜군에게 주는 고도의 심리전 전술이었던 것이다.

이순신 제독의 절묘한 전술이 극치를 이루며 세계 해전 사상 전무후무한 대기록이 이어지고 있었다. 일본 함대는 서로 먼저 빠져나가려는 다툼으로 인하여 연쇄적으로 좌충우돌하였고 또 해협의 양측 암초에 부딪쳐 처절하게 파선되어 갔다. 무사히 빠져나간 듯 싶었던 함선들도 시속 11노트라는 가공할 속도로 흐르는 물살을 타고 마치 나는 듯 추격해 온 조선 함대의 함포에 맞아 침몰되어 갔다. 이 수라장 속에서 무려 100여 척 이상의 일본 군함들이 격침되었고 멀리서 대기하던 90여 척만이 도망갈 수 있었으나 그들도 거의 치명적인 피해를 입은 상태였다.

전투는 끝났다. 200여 척으로 구성된 최정예 함대에 10만 대병을 싣고 서울로 상륙하려던 일본군의 작전은 완전히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다. 일본은 불과 12척의 이순신 함대에 의하여 200여 척의 대함대 중 무려 133척을 잃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일본은 이순신이라는 조선의 호랑이가 버티고 있는 한 서해를 돌아 진격하려던 작전에 근본적인 수정을 가해야만 하였다.

명량 해협은 일본군의 패잔선과 시체들로 뒤덮였고 이를 바라보는 대제독의 눈에서는 소리 없이 눈물이 흘러내렸다. 이로써 이순신은 그에게 주어진 구국의 임무를 완벽하게 수행해 내었다. 조국을 침략한 왜적들은 이제 곧 물러가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병참의 지원 없는 북진은 불가능한 것이다. 그것은 이미 평양 철수를 통해 고니시 유키나가가 경험했던 일이다.

명량대첩! 이것은 확실히 인류 역사상 일찍이 없었던 대첩 중의 대첩이었다. 이 대첩을 통해 조선군은 수세에서 공세로 전환할 수 있었고, 반면에 그 동안 승승장구하던 왜군들은 스스로 남쪽으로 철수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혹자는 조.일 7년 전쟁의 3대 대첩으로 여러 전투를 꼽고 있지만, 그 어떤 대첩도 한 나라의 운명을 결정지은 이 명량대첩과 비교될 수가 없다.

나는 조선 해군의 역사를 그리면서 명량 해전을 끝으로 장식하였다.
사실 조.일 7년 전쟁 중 명량 해전 이후 진정한 해전은 없었다. 명량 해전에서의 패전으로 인하여 일본군의 수륙 병진책은 무너졌고, 서울 침공을 눈앞에 두고 있던 일본군은 명량 해전 4-5일 후, 서울에서 불과 200리 떨어진 직산과 보은 지방에서 남해안으로 총퇴각하였다(1597년 9월 20일경).

더욱이 불가사의한 것은 이 대해전에서 이순신 함대의 손실이 단 한 척도 없었다는 점이다. 일본측이 수만 명의 사상자를 낸 데 비하여 우리측 희생자는 불과 34명이었다. 물론 이 해전 이후에도 전쟁은 계속되었지만, 그것은 모두 명량 해전에서의 참패 쇼크로 인하여 일본의 대추장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죽고, 이미 조선에 들어와 있던 왜군들이 다시 제 나라로 되돌아가기 위한 몸부림이었으므로 결국 독안에 든 쥐를 잡기 위한 소탕전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때때로 왜군의 발악적인 저항이 여기저기서 산발적으로 있었고, 또 비열한 왕 이연이 구걸하여 끌어들인 무능한 명군(明軍)들이 거드름 피우며 건방지게 전쟁의 초점을 흐리게 만들었으나, 그 모든 것도 역시 명량 해전 이후 조선 정복의 야욕을 포기하고 퇴각하려는 일본군의 탈출 기도와 그들을 일망타진하려는 조선군의 노력에 지나지 않는다.

혹자는 노량 해전에서 이순신 제독이 전사했다고도 하고 전사를 가장한 자살이라고도 하며, 또는 죽지 않고 살아 있었다고도 하여 혼란을 일으키고 있다. 그러나 이순신 제독의 생사 여부는 그의 신비스러운 제독으로서의 역량을 살피는 데 아무런 의미가 없다. 명량 해전을 통해 이순신은 제독으로서의 역량을 훌륭히 발휘하였고, 또 조국을 절체절명의 위기에서 구해 내었다. 그 이후에 일어났던 사건들은 모두 명량 해전의 영향일 뿐이다. 나는 노량 해전 역시 진정한 의미에서의 해전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노량 해전 역시 조선을 탈출하려는 왜군들에 대한 소탕전이었지, 결코 적을 격파하고 승리를 쟁취하겠다는 해전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어떤 이는 트라팔가 해전의 영웅 넬슨을 이순신에 비교하기도 하나, 이 따위 망발은 진정한 제독 이순신을 모욕하는 행위일 뿐이다. 왜냐하면 그 어떤 제독도 스스로 배와 무기를 제조하고, 군병들을 모아 훈련시키고, 나아가 손수 농사를 지어 군량미까지 조달하면서 싸워 한 나라 국왕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은 대함대를 전멸시킨 예는 없었기 때문이다.




이순신!

그는 인류역사상 전무후무한 기록을 가진 조선해군의 대제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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