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포열차사건 기억하시는지요...(제가 겪을뻔 했던사건)

헐떡이군.. 작성일 06.06.22 07:49: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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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알기로는 그당시 최악의사건으로 알고있는데여..

정확하게 기억은안나는데

그때 저는 초등학교에 다녔고..부산 북구덕천동에 구동주택이라는 단층아파트에살았죠

그날은 주택사람들끼리 일종에 야유회 비슷하게 5식구정도 같이 놀러 가는 날이었져..

그래서 기차를 타고 삼랑진이라는 곳을 갔습니다..자주같던 곳이라 재미는 없었지만

그냥 금강산도 식후경이다 할만하더군여. 그곳에서 5식구끼리 재미있게 놀고

고기도 구워먹고 즐거웠죠..그리고 일단 가기전에 표가 끊길수 가 있으닌까 옆집아저씨보고

아주머니들이 표를 끊어오라고 했어여. 저희는 한참 놀고 있는데 아저씨기 표를 끊어오더군여

4시반표를 끊어오더군여..

그랬더니 아주머니들이 막화내면서

집에도착하면 너무 늦다고 표를 바꿔오라고 하더군여..4시로.. 하지만 아저씨들이 머 쫌 늦

게가면 어떻냐고..이왕 표산거 다시 바꿔오기 그러니깐 그냥 가지고 하다가 아무튼

그 때문에 갈까말까 30분정도 실랑이를 벌였습니다. 저도 빨리 가고 싶다고 한몫했져..재미가

없어서리

그러다..결국 아주머니들이 이겨서 아버지가 4시표로 바꿧습니다..

아저씨들은 조금 투덜거리더군여 이왕표산거 그냥 가지 30분차인데 표바꾼다고여.

"30분이면 얼마나 늦는다고..에이씨~"

이러면서(남자들그런거 있잖아여 별거아닌일로 쪽팔리는거^^)

그래서 기차를 타고 무궁화호 6호차였나?아무튼 그걸타고 갔습니다. 그날따라 느낌이 이상하

더군여..갈때는 덜컹거리는 느낌도 별로 없었고 순탄했는데 올때 엄청나고 기차가 흔들리는는

것이었습니다..그래서 엄마한테 "엄마 기차가 너무 많이 흔들리는데..굴곡이 심해 엄청꿀렁거려

갈때랑 틀려.."

엄마:"그래 갈때랑 틀리구나 왜이리 기차가 흔들리나...."이러면서 이상하게 생각하더군여..

다른사람한텐 물어봤더니 모르더군여..ㅡ_ㅡ

이러면서 기차는 구표역에 도착하고 저희는 집으로 가다가 정육점에 들려서 저녁에 먹을 삼겹

살을사고 있는데 tv에서 갑자기 뉴스 속보가 뜨면서 구포에서 기차가 전복되었다면서 뉴스가

나오는거에여....

그때 어렸지만 소름이 막~~~돋더군여...만약에 그때 표를 바꾸지 않았다면.........

전 어떻게 되었을까 상상이 막되더군여...그리고 그 구표열차사건은 생각보다 참담했더군여..

기차는 완전구겨지고..사람은 날라가고......아무튼 천만다행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때 전 그생각이 들더군여....아~~난 아직 죽을 운명은 아니구나라구여...

아무튼 그때 이후로 비오는날이면 구포열차 사고가 난 주변에 다시 잘린 귀신하고 애기잃은

엄마귀신이 돌아다닌다고 한동안 떠들석 하게 했네여..학교에서도 맨날 그이야기만 했어여.

그리고 사고다음날 학교도 그 근천지라 하교후 가봤는데 섬뜩하더군여...

찟어진 기차에 주변에 피들 만약 그표를 안바꾸었으면 저기 있을사람은 나였다고..생각하니..

아무튼 그사건이후로는 별탈없이 잘 지내고 있습니다..

만약 운이 나빳더라면 제가 격을뻔핸네여....아무튼 운좋은넘은 멀해도 살아남나 봅니다.

하하.


밑에는 참고하세여~~

문민 정부 들어 처음으로 터진 대형 사고가 바로 1993년 3월 28일 오후 5시 30분쯤 구포역 북방 700m 지점에서 발생한 열차 전복 사고였다. 최종 집계에 따르면 이 사고로 78명이 숨지고 163명이 다친 것으로 나타났다. 이 사고는 55명의 사망자와 243명의 부상자를 낸 경산 열차 충돌 사고(1981년 5월 14일)에 이어 열차 사고사상 최악의 사고로 기록되고 있다.

이 날 사고는 서울을 떠나 부산을 향해 달리던 제117호 경부선 무궁화호 열차가 구포역을700m 앞둔 지점에서 지반 침하로 9량 가운데 기관차·발전차·객차 2량 등4량이 탈선, 전복되면서 일어났다. 사고 열차는 사고 지점을 지나는 순간 선로와 지반이 4∼5m 가량 내려앉자 급제동을 걸었으나, 기관차는 그대로 곤두박질 쳤다. 이어 뒤따르던 발전차와 객차 등이 순식간에 추돌, 탈선하면서 거꾸로 쓰러졌다. 사고 당시 600여 명의 승객을 태우고 시속80km로 달리던 이 열차가 4∼5m 땅 속으로 처박히자 열차 4량은 엿가락처럼 휘며 철로를 벗어났고, 승객들은 미처 비명도 지를 겨를 없이 차창 밖으로 튕겨 나오거나 고철 더미로 변한 열차 속에서 서로 뒤엉켜 주위는 온통 피바다로 변하였다.

사고 현장을 목격한 인근 주민들은 열차가 탈선하는 순간 천둥 소리와 같은 굉음이 들리더니, 순간 "사람 살려!" 하는 비명 소리가 전쟁터를 방불케 했다고 전했다. 주위를 지나던 화물차와 주민들은 아수라장이 된 현장에 뛰어들어 부상자들을 부근 병원으로 실어 나르기 시작했다. 그러나 사망자, 부상자들이 구겨진 쇳덩이 속에 서로 엉켜 있는데다 밤이 되어 어둠이 내려오면서 구조 작업에 어려움을 겪었다. 사고를 당한 사람 중에는 첫 외박을 다녀오던 김해 공병학교 초임 장교들을 비롯해 휴일 나들이를 다녀오던 승객들이 많았다. 그 중에는 어린이도 다수 끼어 있어 안타까움을 더했다.

사고조사에 나선 경찰은 사고 당시 현장 부근에서 한국전력측이 고압선 매립 공사를 위해 발파 공사를 한 것이 사고 원인이라고 밝혔다. 철도청은 "한전이 전선 매립 공사를 위한 굴착 공사를 하면서 철도청과 아무런 협의도 거치지 않았다"며, "선로 매립을 위한 발파 작업으로 지반이 약해져 열차의 무게를 견디지 못해 사고가 일어났을 가능성이 크다"고 밝혔다. 결국 정부는 이 공사를 맡아 작업을 시행한 삼성건설측에 법정 최고 기간인 영업 정지 6개월과 2,550만원의 과태료를 부과하였다. 당시 고병우 건설부장관은 "삼성종합건설은 철도 붕괴 사고로 78명의 인명 피해를 내는 등 공중에 큰 위해를 끼쳤기 때문에 법정 영업 정지 최고 기간의 적용이 불가피하다"며, "이런 조처는 정부가 앞으로 부실 시공업체에 대해 강력한 제재조치를 가하겠다는 의지의 표현"이라고 밝혔다. 이로써 삼성건설은 6개월간 자체 공사 및 해외 건설을 제외하고 국내에서 관급 공사를 비롯, 민간 도급 공사를 일체 할 수 없게 되었다.

한편 8월 30일 열린 결심 공판에서 이 사고와 관련해 구속 기소된 피고인 16명에 대해 징역 3년에서 금고 5∼3년이 구형되었다. 그러나 9월 13일 열린 선고 공판에서 삼성종합건설 대표 남정우 피고인(당시 52세) 등 2명에게 업무상과실에 대해선 무죄를 선고하고, 나머지 피고인 14명에 대해서는 유죄를 인정, 각각 집행유예 1년에서 금고4년을 선고했다. 그러나 재판부는 남정우 피고인에 대해서는 열차 사고와 별도로 뇌물공여죄를 적용, 징역 1년 6월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하고, 삼성종합건설에 대해서는 벌금 2천만 원을 선고했다. 이로써 78명의 목숨을 앗아간 이 사고의 관련자들은 사고 발생 6개월 만에 모두 풀려나고 말았다.

-네이버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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