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부산이 고향이다. 서울에 자리를 잡고 산지 벌써 5년째. 처음 1, 2년은 나름의 사정도 있고 바쁘기도 해서 그 핑계로 명절때조차 부모님을 찾아뵙지 않았지만 죄송스러운 마음에 작년부터는 격주로 한 번씩 꼬박꼬박 부산을 내려간다. 물론, 명절은 말할 것도 없고.
왕복 거리 960km, 왕복기름값 150,000원, 톨비 약 36,000원, 소요시간 약 8시간 30분, 기타 부대비용, 장거리 운전의 피곤함 등등...은 아들이 찾아오는 기쁨을 무뚝뚝함으로 대신 표현하는 부모님을 뵙는 것만으로 씻은 듯이 날아가곤 했다. 진즉 자주 찾아뵐 것을..
그렇게 자주 다니다 보니 어디에 단속카메라가 있는지, 몇시쯤 도착할 예정인지, 어느 구간이 막히는지 과장 조금해서 눈감고도 다닐 정도로 익숙해졌다. 특별한 점은, 덕유산, 지리산을 둘러싸고 건설된 대전-통영간 고속도로에 있는 육십령 터널인데, 터널 이름도 이름이거니와, 좀 밟는다 싶게(계기판상 160km/h 이상) 지나가도 체감상 3-4분은 걸려야 출구에 도달할 만큼 긴 터널이다.
약간 초록색의 조명 덕에 눈도 덜 피곤하고, 내부가 -내가 보기엔- 깔끔하다. 원래 내려갈 때는 주로 밤에 운전을 하지만 올라올 때는 의도하지 않아도 비교적 차량이 많은 시간대가 꼭 걸린다. 물론, 이 고속도로에서 차량이 많아봤자 제한속도를 약간 웃도는 속도로 갈 수 있을 정도지만, 원체 이 구간에서 속도를 무지하게 내는 나로서는 약간 답답한 감을 느끼곤 한다.
더구나 화물차가 의외로 많아서 화물차가 나란히 1,2차로로 가고 있을라치면 속에서 불이 나기도 한다. 사건이 일어난 날은 다른 때보다 차량 소통이 엄청 많은 명절 귀경길 때였다. 연휴가 짧은 탓에 새벽 여섯시에 출발했음에도 불구하고 차량이 많았다.
남해고속도로에서 정체가 심해서 대략 두시간만에 대전-통영간 고속도로에 오를 수 있었는데 여기는 상황이 낫긴 하지만 평소보다 차량이 많은 건 여전했다. 물론 평균 90km/h 이상을 낼 수 있을 정도지만, 그 전날 밤운전으로 내려오고 피곤함이 채 가시기도 전에 올라가는지라 얼른 집에 도착하고픈 마음에 쏘다 줄이다를 반복하니 여간 짜증이 나는 게 아니었다.
육십령 터널을 대략 2km 쯤 남긴 지점, 대략 100m 앞에 나란히 거북이 운행을 하고 있는 트레일러 2대 발견. 속도를 줄이고 묵묵히 따라가다가 한참을 기다려도 계속 나란히 가길래, ㅅㅂ스러운 마음에 하이빔 몇번 때리고 클락션 몇번 울렸더니 겨우겨우 비켜주는데 육십령 터널 500m앞 표지판 발견.
앞은 차량이 하나도 없었고 이 때 속도 95km/h쯤. 속으론 쾌재를 부르며 3단으로 쉬프트다운, 울컥, 왜애앵 울어제끼면서 튀어나가는 차. 터널에 들어갈 때쯤 이미 시속 160을 넘기고 있었다. 평소보다 더 피곤한 탓에 그 당시는 위화감을 못 느꼈지만, 지금 생각하면 터널내-가시거리내에서-에는 차량이 하나도 없다는 것과 터널 조명이 약간 붉었던 것이 이상했다.
아무튼, 차량이 없고 앞으로 쭉 뻗은, 대략 3km가 넘는 '거의'직선 터널. 이 천혜의 환경을 놓칠 리가 있나. 터널 출구까지 작정하고 밟기 시작했다. 대략 220km/h에 도달할 무렵, 느닷없이 등장한 희뿌연 안개. 급하게 속도를 줄이고 의아한 마음에 안개등을 켜고 안개속을 들어가는데 가시거리 확보가 전혀 안 되는 것이었다. 식별되는 것은 위에서 내려오는 붉은 조명뿐.
미등과 헤드라이트를 다 켜고 거의 거북이 수준으로 지나가고 있었는데 대략 느낌상으로 5분 이상 지났는데도 터널을 빠져나간 것 같지 않고 안개도 걷히는 느낌이 없었다. 다행스러운 것은 -지금에 와선 정말 이상한 일이지만- 앞에 차들이 없는 것 같다는 것이었다.
5분 더 지났을까, 안개가 확 걷히면서 갑자기 뒤에서 들리는 급한 클락션 소리. 의아한 마음에 룸미러를 보니 대략 120km/h로 달려오는 소나타가 보였다. 이때 내 속도는 50 미만. 놀래서, 그러나 2차선에는 차량 없음을 확인하고 변경하려는 찰나, 다시 한 번 울리는 클락션.
그리고 아슬아슬하게 2차선에서 스쳐지나가는 소나타. 다시 1차선으로 변경하더니 -내가 보기엔- 세워서 뭐라고 할까 고민하는 듯하더니 이내 제 갈길로 가버렸다. 어리둥절한 마음에 대충 120km/h로 올리고 가다보니 대전-통영 고속도로는 편도2차선인데 여기는 4차선이었다. 더 의아한 것은 곧 이어 보이는 표지판이었는데
'송내' 안개 속을 10여분 달리고 나서 내가 나온 곳은 서울 외곽순환고속도로였던 것이었다. 내가 꿈을 꾸는 건가, 아님 -말도 안되지만- 졸면서 여기까지 왔나 싶어서 시계를 보니 오전 아홉시. 내가 출발한 건 오전 여섯시. 대략 세시간만에 부산에서 부천까지 오게 된 것이다.
물론 고성능 스포츠카로 평균시속 200 이상 밟으면 세시간만에 도달할런지는 모른다. 하지만, 내 차는 고성능도 아닐뿐더러 명절의 귀경길이며, 더구나 서부산 톨게이트에서 뽑은 고속도로 통행증은 그 자리에 그대로 있었다. 무서운 마음, 일찍 와서 좋은 마음 등 온갖 감정들이 미묘하게 섞여있는 와중에. 내 피곤함을 아시고 하나님께서 -난 기독교인이다.- 공간워프를 시켜주신 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