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의 멸망에 대해서(군사적인 측면)

미연시다운족 작성일 06.12.29 15:10: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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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모은 자료인데.. 한번 보시고 도움이 되시길 빕니다.

고구려 멸망의 주요 원인으로 제기되는 것이 주로 연개소문의 독재권력에 의한 정치의 경직성, 남생과 남건,남생 형제들간의 내분, 잦은 전쟁으로 인한 국력의 약화 등을 들고 있습니다.
이제 이런 측면말고 순수한 군사적인 측면만을 놓고 말해보지요.
당나라가 고구려 공략에 실패했던 주된 원인은 고구려의 요동방어망을 뚫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645년 당나라는 요동성과 백암성을 함락시키는데 성공했음에도 불구하고, 천산산맥을 넘어 오골성으로 진격하지 못합니다.
그것은 주로 신성, 건안성, 안시성 등 고구려의 주요 성들이 함락되지 않고 도리어 당나라의 보급로를 차단함에 따라 당군은 진격하지도 못하고 그저 시간만을 낭비하다가 결국 고구려군에게 호되게 당하게 됩니다.

647,648년에 당군이 요동반도 남단을 공격한 것은 고구려 요동방어망을 우회하기 위한 작전의 일환입니다. 하지만 이 역시 성공적이지 못했지요.

661-662년에 벌어진 2차 고-당전쟁에서 당군은 엄청난 해군을 동원해 요동방어망을 피해서 곧장 평양을 직공하는 방식을 취합니다. 하지만, 요동에 집중된 고구려군이 돌아오는 바람에 662년 2월 중에 평양 인근에서 사수에서 옥저도행군이 전멸을 당하는 등의 대참패끝에 결국 철수하고 맙니다.

당나라는 엄청난 해상침투에도 패해했음을 알고 한때 전쟁포기의사를 밝힙니다. 그러다가 666년 5월에 연헌성의 투항, 신라의 전쟁 권유 등을 받으면서 다시 전열을 가다듬어서 다시 고구려를 공격합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겨울철에도 고구려를 공략한다는 사실입니다.
그것은 당군이 고구려와 650년대에 치열하게 경쟁했던 거란쟁탈전에서 승리를 했기 때문에 요서지역에서 보급로를 안전하게 확보했기 때문입니다.
당군은 이를 바탕으로 고구려의 중추성인 신성을 집중공략합니다. 당시 신성 주변인 현도성에 남생이 와있었습니다. 당군은 신성을 공략하기 위해 토산을 만드는 등의 전력투구를 하여 마침내 신성 내부 반란자인 사부구의 도움으로 성을 함락시키는데 성공합니다.
신성이 함락되었지만, 요동성과 안시성, 건안성 등 요동방어망의 중추성들은 여전히 남아있습니다. 이들 성들은 고구려가 멸망한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당나라와 전쟁을 하며 항복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당군은 여기서 요동성, 안시성 공략에 치우치지 않고, 멀리 북쪽의 부여성을 공략하여 함락시킵니다. 이로서 신성, 부여성 등을 확보한 당군은 곧장 압록강으로 내려옵니다. 이 가운데에 있는 남소성 등의 성들은 남생의 활동공간으로 쉽게 당군이 진격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고구려 남건은 안시성 등에 원군을 보내면서 요동방어망의 중남부는 방어하는데 성공하지만, 부여성을 구원하러 보낸 군대는 당군에게 패배합니다.
당군은 결국 압록강으로 직공하는데, 이때 선봉에 선 계필하력의 군대가 무려 50만이었습니다. 뒤를 이어 온 총사령관 이세적의 군대까지 합치면 당시 당군은 100만 정도입니다. 실로 최대의 군사력을 동원한 것입니다.
결국 요동방어망이 뚫림에 따라 고구려는 압록강에서도 얼마 버티지 못하고, 곧 평양일대가 포위되게 됩니다.

668년 당시 당나라 해군은 662년 참패의 영향으로 그리 활발한 활동을 못하지만, 육군의 공세는 대단했던 것이지요.
고구려는 결국 요동방어망 가운데 가장 중요한 신성이 뚫림에 따라 결국 도성이 포위됨에 따라 오래 버티기가 힘들었던 것입니다. 남쪽에서는 이미 연남생이 남부일대 성을 갖고서 신라에 투항했고, 신라군 20만이 협공해온 상태라 그 어떤 때보다 불리했지요.
고구려의 강력한 군사력은 요동에 남아있었지만, 그들이 평양으로 돌아오지 못한 이유는 당나라의 군사력이 이를 차단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662년에는 당군이 압록강 하구에서 계필하력의 요동도행군이 요동의 고구려군이 평양으로 돌아오는 것을 차단하려다가 실패했었지만, 668년 상황에서는 이것이 성공적으로 이루어졌던 것입니다.
따라서 전쟁 진행과정으로 볼 때 고구려가 당-신라 연합군에게 결국은 항복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었던 것입니다.
만약 남생이 배반이 없었다면, 물론 신성 함락이 없을 가능성이 크고, 또 신성에서 압록강에 이르는 길에서 당군이 쉽게 진격할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 보다 더 먼저의 일은 거란 쟁탈전에서 고구려가 패배했던 일입니다. 거란 쟁탈전의 패배는 실상 내몽고 초원의 유목세력이 당나라에 항복했던 것과도 연결됩니다.
결과적으로 보면 고구려는 대단히 선전했지만, 점차 고구려가 군사적으로 불리한 상황이 되었던 것은 사실입니다.
여기에 내분까지 생겼기 때문에 고구려는 망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지요.
사부구라는 한 개인이 사서에 기록된 것은 신성 함락이 당군에게도 엄청난 일이었기에 그 함락의 주역인 사부구의 이름을 기록하게 한 것입니다.
사부구 역시 아주 결정적인 고구려 멸망의 주역이 되었던 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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