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이족에 대한 글들이 많아서 제가 모은 동이족에 대한 자료입니다^^ 작은 자료입니다만.. 작은 도움이나마 되시길...
동이(東夷)족
이夷를 풀이하면 대궁大弓이 되어 '큰 활을 쓰는 사람들'이라는 뜻이 되지만, 갑골문으로 살펴보면 관 속에 사람을 웅크리게 해서 묻은 매장 방식을 나타내는 한자라고 합니다(한자 백가지 이야기에서) 동이東夷는 화하족이 '자기네 동쪽에 사는 이夷라는 겨레'의 뜻으로 부른 말입니다. 이 말은 화하족이 동이라는 종족과 분명 구분된다는 뜻이겠지요. 재밌는 것은 구려의 치우는 물론, 태호 복희나 소호 금천 같은 사람들도 동이족이라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도 아닌 중국인들 스스로가 쓴 최근 역사책에는 모두 그렇게 되어 있음) 태호 복희는 삼황三皇 가운데 한 명으로 꼭 손꼽히는 사람이므로, 이 말을 뒤집으면 화하족이 어느 시점에선가 동이족으로부터 갈라져 나왔다는 의미도 됩니다. 즉 화하족이 따로 생겨나기 전에는 동이라는 말도 없었다는 뜻이겠죠. 우선 삼황부터 시작해서 오제까지 맥을 짚어보면, 동이와 화하가 어느 정도 구분되는것 같습니다. 태호 복희의 성은 풍風입니다(그래서 구이九夷 가운데 풍이風夷가 있습니다) 태호는 진陳에서 나라를 다스리다가 신농에게 자리를 물려 줍니다. 신농의 성은 강姜입니다. 강수姜水(오늘날 섬서성 기산 동쪽의 기수)에서 태어났기 때문입니다. 신농은 태호의 뒤를 이어 진에서 나라를 다스리다가 곡부(오늘날 산동성 곡부현)로 옮겨 갑니다. 중요한 것은 태호의 진이나 신농의 곡부 모두가 중국 동부라는 것이죠. 즉 동이족의 영역으로 알려진 곳입니다 동이와 화하가 갈리게 된 것은 아마도 황제黃帝때문인것 같습니다. 황제는 희수姬水에서 태어났으므로 성이 희姬입니다. 희수 헌원軒轅의 언덕(오늘날 하남성 신정현)에서 자랐으므로 헌원씨라고도 합니다. 황제는 신농의 뒤를 잇기 위해 전쟁을 일으킵니다. 태호 복희나 신농이 크나큰 덕德이 있어 임금이 되었다는 것과는 사뭇 다릅니다. 그래서 황皇이 아니라 제帝겠지요. 황제는 먼저 신농과 전쟁을 벌여 판천(오늘날 하북성 탁록현)에서 신농을 쳐부숩니다. 신농은 황제를 피해 남쪽으로 달아납니다. 그리고 이쯤에서 그 유명한 치우가 나타나게 됩니다. 치우는 황제를 내쫓기 위해 신농과 손을 잡으려 하지만 신농은 무엇때문인지 머뭇거립니다. 이 틈을 놓치지 않고 황제는 재빨리 신농과 손을 잡으려 합니다. 신농은 황제 때문에 임금 자리에서 쫓겨났음에도 오히려 치우 대신 황제와 손을 잡습니다. 신농과 힘을 합친 황제는 탁록에서 가까스로 치우를 물리칩니다(어떤 전설에서는 치우가 신농을 공격했기 때문에 황제가 신농을 도와 치우를 물리치고, 다시 신농과도 싸워 내쫓았다고도 합니다. 하지만 여러 가지 다른 전설들과 살펴 볼 때 틀린 듯 합니다). 황제는 함께 치우를 내쫓은 신농을 대접해서 남쪽의 제帝란 뜻으로 염제라고 부릅니다(삼황 가운데 하나인 신농이 오제에도 끼게 되는 까닭이 이것인 듯). 그래서 염황 부족(염제의 부족과 황제를 따랐던 부족들이 연합했으므로)이라는 종족이 생겨납니다. 중국인들이 굳이 황제를 꼽아 한족의 시조라고 부르는 까닭이 여기에 있겠죠. 염황 부족은 전통적으로 화華족이라고 불리는 듯 합니다. 그리고 이때부터 화족과 동이족의 구분이 생겨납니다. 치우와 싸울 때 황제와 함께 했던 부족들은 화족, 치우 쪽에 붙거나 또는 어느 쪽도 들지 않고 얌전히 있었던 부족들은........ 화족의 동쪽에 사는 부족들이란 뜻에서 동이족. 그렇지만 화족과 동이족을 구분짓는 가장 큰 요인은 문화적인것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황제는 벼슬아치들의 이름에 운雲자를 붙였다고 합니다. 그래서 황제는 진운씨라고도 불립니다. 하지만 동이족들은 벼슬아치 이름에 조鳥를 붙였다고 합니다(태호의 맥을 이어 받았다 해서 소호라고 불리는 금천의 경우에서. 즉 금천은 본래의 전통을 지켰다는 의미이므로 동이족이라는 뜻이겠죠. 소호 금천의 부족은 화족과 독립해서 따로 엄(오늘날 산동성 곡부)에 모여 살았다고 합니다. 그래서 소호 금천의 나라를 소호지국이라는 이름으로 따로 구분지어 불렀다네요. 소호 금천이 오제 가운데 한 명으로 반드시 끼지 못하는 이유가 이것인 듯) 게다가 황제는 거의 모든 고대 한족 문화를 집대성한 사람으로 손꼽히는데 이것은 어떤 전면적 문화 변혁때문이겠죠. 아마도 황제는 전통이나 구습을 타파하고 새로운 사상이나 이념을 전파한 오늘날로 치면 개혁가나 변혁가가 아니었나 합니다. 그 뒤로도 끝끝내 화족에 동화되지 않은 부족들이 중국 역사서에서 말하는 동이일테고요(한자에서 이夷가 매장 방식의 특성으로 만들어진 까닭이 이것인 듯. 즉 화족과는 장례 문화가 달랐다는 의미겠죠. 장례 문화는 죽음을 대하는 방식이고, 이것은 사후관념, 한걸음 더 나가면 종교적 차이까지 나타내기 때문에 고대 문화 중에서 매우 중요한 특성 가운데 하나입니다) 이처럼 동이는 화족에 동화되지 않고서 본래의 전통과 풍속대로 남아 있던 부족들(당연히 화족의 동쪽에 살고 있는)을 가리킨 것이므로 우리들도 당연히 동이가 되겠네요(조선 왕조 때 우리도 마침내 소중화가 되었죠) 그리고 묘족은 치우를 자기네들의 시조로 여기는 것으로 보아 아마도 탁록의 전쟁 때 치우를 적극적으로 따랐던 부족인 듯 합니다. 그래서 묘족은 오제들에 의해 엄청난 핍박을 받았습니다.
제 얘기를 정리하자면
동이족이란 본래 화하족이 중원 지역에서 자신들의 문화로 동화되지 않은 특정 원시 종족을 일컫던 말이었는데, 나중에 화하족이 중국 대륙을 온전히 장악하고 나서는 중국 대륙 동쪽에 살고 있는 다른 부족들 특히 그 옛날 특정 원시 종족들과 문화적으로 같은 종족들까지 지칭하게 되었다는 거네요.
동이족2
1. 동이족에 대하여 동이족은 크게 구분하면 산동지역의 동이족과 요하지역의 동이족으로 구분할 수 있다. 1) 산동지역의 동이족 - 상고시대 산동지역을 중심으로 대문구, 용산문화 주역등 은나라 일파 2) 요하지역의 동이족 - 고조선 및 한민족 고대국가, 읍루, 왜등
2. 일반적인 동이족의 구분 동쪽의 이족으로 황하를 중심으로 하여 태행산맥 이동지역에서 거주한 은나라 일파를 동이족이라고 불렀다가 주나라에게 은나라가 멸국 되고 동이제족의 반란은 지속되기는 했지만 진나라가 중원을 통일한 후 동이제족은 중토 속에 완전히 녹아들어 갔기 때문에 산동유역의 족속들은 중원인이 되었고 중원의 영토가 확장되자 중원의 동쪽은 요하 유역이 되었다. 그래서 그 이후부터는 요하유역 이동 지역의 족속을 동이족으로 부르게 되었다. 이러한 역사적인 배경이 있기 때문에 산동유역의 동이족과 요하유역의 동이족은 별도의 족속이다.
3. 산동유역의 동이족과 요하유역 동이족의 관련성 산동유역과 요하유역의 동이족은 일정 정도의 문화 교류로 인한 인접 문명간의 유사성은 인정하고 있으나 두 족속간의 동계 여부는 많은 견해가 제기 되고 있는데 이러한 견해의 차이는 조상의 발자취를 바르게 추적하고자 하는 고뇌의 결과이라기보다는 각기의 목적을 위한 연구 성과 껍데기 입히기 결과일 수도 있다. 중원의 사가들은 동북공정의 일환으로 은나라 일파의 멸국 이후 산동의 동이 족속이 요하 유역으로 이주하여 한민족의 고대 국가를 형성하였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러한 과정중에 기자도 등장하고 고이족, 고죽국등을 고구려와 부여등으로 연결시키고 있다. 한편 환상적인 한민족 고대사를 주장하는 분들은 서요하 유역의 홍산 문화, 하가점 문화의 주체를 한민족으로 설정하고 또한 산동 동이 문명도 홍산문화의 후인으로 설정하여 한민족과 동류의 족속들이 중토문명을 일으킨 것으로 주장하고 있다. 두 부류의 주장은 전적으로 무시할 만큼 가벼운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사실을 입증하기 위한 탄탄한 기초 토대의 증명 자료를 갖춘 것도 아니다.
1) 홍산문화의 후인이 산동의 동이 문명을 일으킨 것인가? 홍산문화의 후인이 북적인인가 요하유역의 동이족인가에 대한 견해는 아래로 미루기로 하고 과연 산동의 동이문명은 홍산문화에서 태동한 문명일까에 대한 고민부터 해 보자. 일단 인접지역별 문화영역을 설정해 보면 태행산맥 이서지역의 앙소문명이 있었고 산동의 동이 문명과 서요하 유역의 홍산, 하가점 문명이 있었고 발해만 지역의 지역주민과 대흥안령 이서직역의 문명등이 있었을 것이다. 산동의 동이문명은 자생한 문명이 아니면 이주문명일 것인데 앙소문화와 대흥안령 이서지역의 문명이 유입되었다는 견해는 그다지 제기되지 않고 있다. 만약 산동의 동이문명이 이주문명이라면 서요하 유역의 홍산문화와 발해만유역의 지역주민일 가능성이 높을 것이다. 홍산문화와 산동 동이 문명이 동류의 문명이라고 주장하는 분들은 두 문명간의 문화유산의 유사성을 증거 자료로 제시하고, 이질의 문명이라고 주장하는 분들은 두 문명간의 문화 이질성을 자료로 제시하기도 한다. 전문가가 아닌 일반인들은 누구의 주장이 옳은지 아니면 논리적 뒷받침이 탄탄한지 알 수가 없다. 그저 목소리가 큰 사람의 주장에 한번 귀를 기울여 볼 뿐이다. 일부의 중원사가들은 은나라의 선 문명을 발해만 유역의 박지역에서 존재하였다고 보고 있다. 그래서 은나라의 주류 족속을 박족속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또한 은나라 멸국 후 주나라의 북쪽 강역은 연, 박, 숙신지역이었는데 연의 시봉지를 북경 유리하 부근으로 설정한 현재의 일반적인 인식을 인정할 경우 연, 박, 숙신지역은 발해만 일대가 될 것이며 은나라 유이민이 주축이 되었다는 고죽국도 난하 하류 일대의 근거설이 유력하므로 산동의 동이문명과 관련하여 발해만 지역의 문명도 주목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일반적으로 박지역은 여러 곳으로 추정하는데 하나는 황허 유역의 은나라 수도중의 한 곳으로 산동성과 인접한 하남성 정도로 파악하고 부사년등은 하북성, 발해만 일원으로 파악하고 있고 혹자는 산동성 연안지역으로 추정하기도 하고 산서나 섬서성 정도에서 있었다고 추정하기도 한다. 오래전의 역사이기 때문에 다양한 견해가 제기될 수 있음은 당연하겠지만, 어찌보면 박지역이 한 곳이 아니라 여러 곳이었을 가능성도 있어 보인다. 은나라의 주류족속이 박족속이었고 은나라 주류족속의 이주지가 곧 박지역으로 불리게 되었을 수도 있을 것이다. 섬서성 유역 정도의 박지역은 은나라 멸국후 동이제족의 반란이 진압되면서 은나라 주류족속의 이주에 의해 형성된 것으로 보고 있고 진나라에 의해 박지역의 박왕이 최종적으로 멸국 된 것으로 사기에 기록되어 있다. 박지역을 한 곳으로 비정할 경우 만약, 박지역을 산동이나 하남성 유역에만 존재했다고 한다면 주나라의 북쪽 강역의 경계에 해당하는 연, 박, 숙신지역을 산동이나 하남 유역으로 바라볼 수 밖에 없을 것이니 연나라의 시봉지도 이들 인근지역에서 찾아야만 할 것이다. 만약, 연, 박, 숙신의 박지역을 하북성, 발해만 일대로 추정하고 은나라 선 주류 족속의 근거지역에 의해 지명화 된 것이 사실이라면 홍산문화의 후인이 중원 동이 문명을 일으켰을 가능성이 높아 질 것이다. 이러한 사실 때문에 발해만 유역에서 박지역을 찾고 싶지 않을 수도 있을 것이다. 따라서, 홍산문화의 후인이 중원 동이 문명을 일으켰다고 주목하고 연구하는 분들은 중첩지역인 발해만 일대의 문명관계를 고증하고자 하는 노력이 필요할 것이다. 은나라 선왕들이 번(蕃)지역, 박(亳)지역에서 살았다고 하고 번지역 보다 박지역이 선시대에 등장하므로 박은 번의 전사라고 하며 동북지구에 터를 잡은 번족을 발(發)족이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발조선, 번조선등 발, 번등은 고조선의 인접지역이거나 관련 족속으로 고조선과 일정 관련성이 있어 보이기도 한다. 산동의 동이 문명이 홍산문화의 후인이라고 쉽게 단정을 내릴 수는 없지만 전혀 아니라고 쉽게 단정 내릴 수 없음도 마찬가지 일 것이다.
2) 산동 동이 유이민이 요하 동이국가를 건국 한 것인가? 1)항에 대한 견해는 중원사가들이 의도적으로 회피하는 듯 하고 2)항에 대한 견해는 우리가 의도적으로 회피하는 듯 하다. 지나가 버린, 변할 수 없는 과거사는 있는 그대로 받아 들여야 할 것이다. 처해진 현실 상황을 전적으로 무시할 수는 없을 것이나 과거사는 있었던 그대로의 과거사로 복원하여야 하지 않을까 싶다. 은나라가 멸국 되고 은나라 유이민 일파가 이주를 하였다면 요하 동이 지역과 접목된 구간이 가장 가능성이 높은 지역이지 않을까 싶다. 그리하여 요하 유역의 문명이 은나라 유이민을 흡수할 만한 세력이었다면 요하의 동이족이 풍족하게 되었을 것이고 은나라 유이민의 세력이 더 막강하였다면 새로운 족속의 형성이 시도되었을 가능성이 있었지 않았나 싶다. 이와 관련하여 기자와 고죽국등이 있다. 기자와 고죽국등은 일정 정도 관련성이 있다. 은나라 멸국 시점인 기원전 10세기 직전에 등장하였고 기원전 8세기경에 요하의 동이 유역과 관련지역에서 사라져 버렸다는 유사성이 있다. 기자는 은나라 멸국 후 고조선 지역으로 도주하여 조선의 왕이 되었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기원전 10세 이전에 고조선이 존재 했거나, 전국시대나 진,한시대의 중원사가들은 기원전 10세기 이전부터 고조선이 존재했었다고 믿었던 것이거나 존재한다고 언급해도 될 만한 사연이 있었던 것 같다. 기자는 조선에 와서 법률도 제정하고 우민을 교화시키기도 했다. 그러한 기자의 왕국은 위만에게 왕위를 찬탈당하기 직전까지 천년왕국을 다스렸다. 그런데 법률도 제정하고 우민을 교화한 기자의 흔적은 찾을 길이 없다. 기원전 8세기경에 대능하 일대에서 기후관련 유물이 발견되었다는 것이 전부이다. 앞으로 더 발굴을 하다보면 다른 것들을 찾을 수 있을지는 몰라도, 전혀 찾을 수 없다고 할지라도 기자의 천년왕국에도 불구하고 한민족속에는 갑골문이 스며들지 못했다. 이것 하나만으로도 아이러니한 사건이 아닐까 싶다. 요서남부 지역의 기자관련 유물이 발견되었다고 하니 기자와 관련된 은나라 유이민의 이주는 사실의 역사로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이나 기원전 8세기경 이후로는 지속된 흔적을 찾아 볼 수 없고 한민족 속에 갑골문의 유적이 전혀 스며들지 않았기 때문에 이주는 했으나 교화를 시킨 것이 아니라 교화를 당했던 것이 아니었나를 살펴 보아야 할 것 같다. 고죽국은 정말 머리 아픈 나라이다. 그렇지만 한민족의 고대사를 정확하게 파악 할려면 고죽국의 역사를 반드시 풀어야 한다. 삼국유사에서는 배구전을 인용하여 고죽국을 고구려의 원씨 국가라고 언급하고 있다. 고죽국의 위치도 말이 많지만 한나라 시대에 중원사가들은 춘추시대 이전에 존재하였던 고죽국의 위치를 난하 하류 일대로 추정하고 있다. 난하 하류 일대의 고죽국이 고구려의 원씨 족속이 되었음도 믿기 어려운 부분이고 난하 하류 일대에 은나라의 제후국이 존재하고 있었음도 믿기 어려운 부분이다. 고죽국이 은나라의 제후국이 확실하다면 은나라의 제후국이 난하 하류일대에 존재하였을 수는 없을 것이니 은나라 멸국 후 주나라에 예속되기를 거부했던 은나라 일파가 북상하여 난하 하류일대에서 고죽국을 형성하였을 가능성이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고죽국의 후인들이 고구려를 건국한 것일까? 사실 여부를 떠나서 기원전 8세기경에 난하 일대에서 사라진 고죽국의 후인이 기원직전에 고구려를 건국하였다는 것 을 어떻게 알았는지 그 사실이 더 궁굼해 진다. 그렇지만 기록된 바를 무작정 헛소리로 치부만 할 수는 없을 것이다. 고구려의 주류 족속이라고 하는 맥족은 전국시대 이전에 요서나 발해만 일대에서 활동하였을 가능성이 높기 때문에 맥족의 시원이 고죽국과 전적으로 무관한 것인지를 먼저 살펴 보아야 할 것이다.
4. 요하의 동이족 역사 요하의 동이국가는 고조선, 부여, 고구려, 읍루, 왜, 한등이다. 그런데 이들을 동이족으로 분류할 당대에는 동이족이라고 부르기 보다는 예맥족으로 불렀다. 예맥, 숙신, 왜 등으로 구분하였을 때 이들을 합쳐서 동이족이라고 사서에 기록하였다. 중토의 동이족이 사라진 직후부터 요하 이동 유역의 족속들을 동이족이라고 불렀다는데 전혀 관련이 없었다면 이렇게 부를 수 있을지 의문스런 점도 있기는 있다. 일단 중원 사가들이 기술한 동이의 역사를 살펴 보기전에 요하유역 족속들의 줄기가 어떻게 되는지 한번 고민해 보자. 크게 동호, 숙신, 예맥 문명으로 구분할 수 있을 것인데 홍산, 하가점 문명과 관련해서는 숙신(후기)은 그다지 큰 비중을 차지 하지 않기 때문에 동호와 예맥 문명에 대해서 고민해 보자. 하가점 문화의 중심지역은 서요하 유역이고 유사성을 고려한 세력 범위를 설정한다면 서북지역으로는 대흥안령 이동지역이 될 것이고 서남지역으로는 발해만, 난하 일대가 될 것이고 동북지역으로는 길림지역이 될 수 있을 것이고 동남지역으로는 한반도 유역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동호는 전국시대에 활동한 족속이고 하가점 상층문화와 관련해서는 춘추시대 이전의 역사로 거슬러 올라가야 하기 때문에 춘추시대 활동하였던 동호의 선조라고 하는 산융을 하가점 상층 문명과 비교할 수 있을 것이다. 산융은 중원 북방의 족속이기 때문에 융족이라고 기록하는 것 보다 적족이라고 기록하여야 할 것인데 산융이라고 기록하였다. 왜 이렇게 기록하였는지는 알 수 없다. 산융은 북융이라고도 하는데 확실한지 알 수 없다. 북융은 산서성과 인접한 하북성 북류 지역에서 주나라 제후국과 대치한 세력이었고 산융은 연나라 북쪽에서 연나라, 제나라등의 연합 세력과 대치한 세력이었는데 북융과 산융이 같은 세력이었다면 상당한 공간을 점유한 세력이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산융은 기원전 8세기경 춘추패자 제환공의 연합세력에 의해 멸국되고 역사무대에서 사라졌다가 전국시대 동호라는 족속으로 다시 역사무대에 등장한다. 한나라 시대에 인식하였던 춘추시대의 산융 정벌 루터는 제환공의 연합세력이 난하 중 상류 유역의 산융을 초토화 시키고 잔류 세력을 와해시키기 위해 난하 하류의 고죽, 영지등을 정벌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산융일파는 난하 유역에서 무너졌다. 그리고 역사무대에서 사라졌다. 그런데 하가점 문화의 중심지는 난하유역이 아닌 서요하 유역이다. 산융의 중심지가 서요하 유역이었다면 난하 유역의 세력이 무너졌다고 하여 산융의 일파가 역사무대 뒤로 사라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도 서요하 유역 문명의 주인은 산융이라고 한다. 하가점 상층 문화의 중심지는 서요하 유역이고, 산융일파는 난하 이서지역에서 역사무대에 기록되고 있다. 기원전 8세기경의 상황을 살펴 보면 북경유역의 북쪽인 난하 중, 상류 유역에 산융, 무종이 있었고 난하 하류 유역에 고죽영지가 있었고 대능하 유역에서 기후 관련 세력이 있었다. 서요하 유역인 노합하 일대에서 하가점 상층문명이 형성되었던 시대의 주변 세력들의 관계이다. 그리고 기원전 7세기 경부터 고조선이 문헌상에 등장하는데 문헌상에 고조선이 등장하였을 초기시대의 고조선 중심지는 요서 남부 지역이 될 것이다. 산융,무종,고죽,영지, 하가점 상층 문화와 고조선은 일정 부분 중첩이 되고 있다. 이러한 유사성 때문에 산융의 일파를 고조선 일파로 바라보는 견해가 제기되기도 한다. 춘추시대의 산융이나 전국시대의 동호를 고조선의 일파라고 한다면 요하유역의 동이족의 족속문제는 간단히 해결할 수 있지만 일반적으로는 산융, 동호와 고조선은 별도의 족속으로 북적의 문명으로 바라보고 있다. 그런데 족속명에는 서융과 관련된 융족명이 들어가므로 융적세력이라고 구분하고 있다. 하지만 춘추전국시대에는 맥족이 융적 세력속에 포함되어 있었거나 연맹의 형태로 중원문명과 대치한 것으로 바라보고 있고 연나라가 와 흉노가 강성해져서 동호가 역사무대 뒤로 사라지게 되자 동반하여 맥족이 동천하여 예맥을 형성하여 한민족의 고대국가를 형성한 것으로 바라보고 있다. 동호가 역사무대 뒤로 사라지고 난 후 선비, 오환, 부여등이 등장하는데 부여는 기원전 2세기경에 장성의 북쪽, 연지역의 북쪽에서 등장하고 있는데 여기서 말하는 연지역은 전국시대 연나라가 아닌 한나라의 연국이므로 북경 유역으로 바라 볼 수 있다. 그래서 부여는 기원전 2세기 경에 난하나 서요하 유역에 머물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이렇게 바라 본다면 부여의 한 축을 이루었던 초기 주류족속은 동호에서 찾을 수밖에 없다. 동호와 연맹세력이었다고 하는 맥족의 동천에 의해 예맥이 형성되었을 가능성이 높고 부여 또한 동호이었을 가능성이 아주 높다. 이러한 점을 고려한다면 동호가 고조선의 일파이었던 아니던 간에 한민족의 선계통과는 무관하다고 할 수 없을 것이다. 따라서 하가점 상층문화의 주류가 고조선이 아니었다고 할지라도 한민족과 하가점 상층문화는 무관하지는 않을 것이다.
5. 문헌상의 동이족의 역사 동이에 대한 산발적인 기록들이 아닌 체계적인 글은 후한서가 처음인 것 같다. 후한서의 동이전의 전체적인 뼈대를 몇 줄 언급하고자 한다. 1) 동이족이 중토를 자리잡는 과정과 은나라의 멸국 과정이 기록되어 있다. 2) 은을 멸한 주무왕 사후에 동이제족의 1차 반란이 산동 유역을 중심으로 회수 일대에서 일어났다. 3) 주나라 개국공신인 3공에 의해 동이제족의 1차 반란은 진압되었다. 4) 회수 유역에서 서언왕을 중심으로 동이제족의 2차 반란이 일어 났다. 5) 초나라의 세력확장에 따라서 동이제족의 2차 반란이 진압되었다. 6) 서융의 1차,2차 반란으로 주황실이 무너지고 공화정이 선포되는등 춘추전국시대로 돌입하게 되었다. 7) 진시황이 전국시대를 통일하자 동이제족의 반란이 더 이상 일어 나지 않았다. 8) 위만이 조선의 왕이 되었고, 이후 부여,고구려,한,읍루,왜등의 역사기 시작되었다. 후한서 동이전의 전체적인 줄기는 참으로 이상스럽다. 한민족의 역사인지 산동동이의 역사인지 서융의 역사인지 모를 일이다. 짬봉이다. 역사의 맥이 이어져서 같이 기록한 것인지 기록자가 분류를 편리하게 하다 보니 이렇게 기록된 것인지 모르겠다. 동이족의 역사 속에 서융의 역사가 왜 나오는지 모르겠다. 서언왕은 회수 유역에서 동이제족을 규합하였으니 회이족속일 가능성이 높은데 서언왕은 서이족이라고 한다. 서이족은 서융족속이라고 한다. 서융족속이 회수 유역에는 왜 나타나는지..서언왕의 성은 영성이다. 영성은 진나라의 성씨이기도 하며 서융족속의 왕족집안이다. 진시황의 진나라 족속은 서융족속이 맞고 진나라 왕들의 선조는 서융왕족이 분명하다. 진나라는 서융족속의 지역에서 일어난 나라이니 진나라를 서융족속으로 바라 보는데는 그다지 고민할 필요가 없는데 서언왕은 회수유역에서 세력을 떨쳤는데 어찌하여 서이족, 서융족이라고 할 수 있고 영성의 후예라고 할 수 있을까? 단순히 신화상의 역사를 짜맞추다 보니 일어난 오류일까? 진나라는 성장하는 과정에서 인접지역의 박족의 왕을 사로 잡고 박국을 멸국시킨다. 박족은 서융이라고 했는데 박족은 은나라 주류족속이다. 동이제족의 반란이 진압되어서 주나라 내지에 끌려 갔다가 차츰 세력을 회복하여 박지역의 왕이 되었던 것인데 은나라 유이민이라 하지 않고 서융이라고 한다. 혹시나, 서융인이 은나라 일파의 이주집단에 의해 주나라 내지에서 새롭게 형성된 세력은 아니었을까? 어처구니 없는 비약같지만, 그래도 역사기록의 전개는 서융인의 형성이 은나라 유이민에 의해 형성된 것 처럼 기록되어져 있다. 그리하여 서언왕의 동이제족 2차 반란이 진압되자 서융의 1차 반란이 시작되었고 그 기록이 동이전에 기록되었던 것은 아닐런지.. 서언왕의 동이제족 2차 반란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초나라가 상당히 강성해진 듯 보인다. 초나라가 동이제족의 상당 부분을 흡수하였는데 묘족의 선조들도 이 속에 포함되지는 않았을까 생각해 본다. 이렇게 동이제족의 반란이 진압된 이후에는 중원의 동쪽 지역에서는 큰 반란이 없었고 대신 서쪽 지역에서 반란이 시작된다. 진나라는 분명 서융인이지만 그래서 서이족이라고도 하지만 서융인의 반란을 진압하고 그 과정에서 진나라가 성장하게 된다. 진나라는 서융의 왕족가문으로 서융의 주류 족속이었지만 독자적인 역사를 이어가지 않고 주나라의 제후로 자처하여 중원의 역사를 이어갔고 서융족속은 이렇게 내분되어 갈라져 갔다. 서융족속은 서융의 주류인 진나라에 의해 차츰 와해 되어 갔고 그들의 근거지도 북쪽으로 이주하였다. 어디까지 이주해 갔는지는 고증할 수는 없지만 산서성의 당진과 대치된 관계를 형성하기도 하였으니 산서성 북류지역까지는 의주해간 듯 보인다. 과연 서융족속이 동북쪽으로 이주하여 북융, 산융을 형성하였을까? 만약 이주하여 북융을 형성하지 않았다면 북융은 재미삼아 붙인 명칭일까? 서융의 동쪽으로는 적족속이 있었다. 조금 후대이기는 하지만 백적, 북적등의 중산국이 있었는데 이들을 넘어서 북융의 독자세력을 형성하였을 가능성이 희박해 보이기는 하지만 전혀 불가능하지는 않을 것이다. 하가점 상층문화를 하층문화와 구별하는 주요 요인 중에 하나가 토기의 재질과 청동검의 형태인데 토기의 재질이야 기후조건의 변화에 따라서 토질이 변했기 때문에 토기의 재질도 변했다고 볼 수 있지만 청동검의 형태는 기분에 따라서 인접지역과 유사해지는 그런 성격의 유물은 아닐 것이다. 하가점 상층문화 유역에는 비파형 동검 문화유역과 중첩되는 지역이 포함되기도 하지만 오로도스 청동검의 형태가 보존된 유물이 전해지고 있다고 한다. 오도로스 청동검의 문명이 하가점 문명속으로 전해져 왔다면 서융족속의 이주도 고려해 보아야 하지 않을까 싶다. 산융, 무종은 대륙 문명이고 고죽, 영지등은 내륙문명이다. 두 세력간에는 치열한 다툼이 생겨도 시원찮을 판에 연맹을 형성하여 주나라 제후국과 대치하였다. 어떠한 문화적 공통성이 없었다면 아이러니한 연맹이다.
산동의 동이 문명과 요하의 동이 문명은 별도의 태동을 거친 문명일 수도 있다. 하지만 동계 문명이 아니라고 쉽게 단정 지을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고교 국사 교과서의 동이족과 고조선 영역지도를 살펴 보면 발해만의 박지역에 비파형 청동문명이 존재하였음을 표시해 두고 있다
동이족3 한민족이 북방에서 오기 전에 이 동북아시아 지역에는 아메리카 인디언과 같은 혈통의 민족이 살았다고 합니다 이들을 고아시아인 혹은 고몽골로이드라고 하는데 이들은 알타이족이 북쪽에서 서부시베리아 어느 지역에서 내려오기 시작했고 이들은 아메리카로 건너갔다고 하는데 이들을 대신한 알타이민족을(형질적으로 현재 북중국인들 포함) 신아시아인 혹은 신몽골로이드라고 합니다 근데 신몽골로이드가 고몽골로이드를 무력으로 몰아냈는지 아니면 고몽골로이드가 자발적으로 아메리카로 갔는지는 확실하지는 않지만 우리의 유전형질에 고몽골로이드 유전형질이 남아있지 않은 것을 보면 대량 인종 말살을 하거나 아니면 그들이 자발적으로 아메리카 대륙으로 갔을 수도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일반 인디언(고몽골로이드)가 황인종이고(홍인종으로 분류해야 한다는 설도 있음) 우리랑 같다 그리고 어느 분들께서는 이들이 같은 민족이라고 주장을 하시는데 각 민족의 유전자 거리를 표시한 유전자 지도에서(인류 게체군 유전자 변이 120개의 대립형질로 판별) 아메리카의 인디언(고몽골로이드)와 우리 현 북아시아(몽골로이드)는 그 거리가 아주 멀고 차이가 많습니다 우리 옹골로이드와 가장 가까운 인종은 코카소이드(백인으로)고(인도 유럽어족,고서지중해어족(멸족).바스코족,샘-햄어족포함)이고 가장 먼 인종은 남태평양의 폴리네시아인입니다 고몽골로이드와 우리와의 차이는 백인보다 더 많이 차이가 나고 있습니다 아무튼 신석기 어느 시기에 우리가 이들을 대신하여 북동아시아의 주인이 된 것은 확실합니다. 근데 여기서 또 흥미로운 것은 우리민족과 북방민족과의 관계,동이족과의 관계 중국 원류 한족(화하족)과의 관계입니다 우리와 북방민족(크게 세개의 분류로 나누어진 몽골족 투르크족 퉁구스계통(여진))에서 여진족과의 유전자 형질적인 면은 거의 같습니다 근데 몽골족과는 차이가 많이 납니다 오히려 티베트인이 우리에게 더 가깝고 투르크계통의 카자흐족이 몽고족보다 우리에게 더 유전적으로는 가깝습니다, 다음은 투르크계통의 민족들인데 이들 민족은 서쪽에 위치에 있고 역사적으로 백인과 썪여 부족과 민족마다 자신들 사이에서도 차이가 큽니다 그래서 이들은 유전적으로 민족을 따지기보다 이들의 언어와 풍습, 역사적경험,이슬람교라는 종교적 일치로 자신들끼리 투르크라는 동질감을 가지고 있고 우리랑 카자흐족처럼 가까운 민족도 있고 우즈벡인이나 터키인(거의 백인이다 지중해인종(그리스인이 대표적)과 같다)처럼 우리랑 차이가 나는 민족도 있습니다 특히 이상하게 이들과 몽골과 투르크와 가른 점은 언어가 매우 다르다는 점이라고 합니다 알다싶이 우리민족을(일본도 포함) 알타이어족이라고 확실하게 국제적으로 확증된 것은 아닙니다 논란이 많다고 합니다 오히려 남방계적 특히 고대 인도민족인 드라비다인의 언어 단어와 같은 것이 더 많다는 것입니다 물론 어순이나 이런 것은 같지만 두음법칙이 저들에게 없다는 점과 매우 다르다고 합니다(이것은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이게 저의 개인적인 생각은 원래 남방계적인 특징이 아니라 한국인이 일찍 이들 북방 세분류(몽,투,퉁)에 일치 분리하여 독특하게 발전하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유전적으로는 일치하고 언어적으로 좀 차이가 있고
다음은 동이족과의 관계인데요 동이족은 원래 산동지방이 근거지라고 합니다 이들이 고대 중국의 전설적인 제왕인 황제와 맞선 치우라는 인물의 전설이 있는 곳이죠 순임금도 동이족이라고 합니다 이들이 은을 세우고 중국을 한때 정복했다고도 하는데 결국 주에게 밀리고 주의 제후국이자 초창기 동방지역의 화하족과의 식민성격이 강한 제나라(선조 강태망은 산서성에 살던 강족출신이죠)에게 결국 다 망하고 산동에서의 동이족의 끝나죠 근데 문제는 이 동이족과 우리민족간의 관계입니다 이것은 홍산문화와 대문구문화의 유사성과 인종적 유사성이 전재되어야 하는데 알다싶이 우리랑 유전적일치가 같은 중국 동북삼성의 주민의 본적은 산동성이 90%입니다 이 문제는 연구대상이지만 일단 우리는 동이의 계통으로 산동의 여러 동이족과 우리의 직접 선조인 요서 요동 한반도 북서 남만주에 살던 예맥족,여진족의 선조 숙신 이렇게 크게 나누어 지고 이들은 옛날 유럽의 게르만족중에 프랑크족이나 반달족 부르군트족처럼 밀접한 관계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여기서 한반도 남쪽의 한(韓)족은 예맥족이 남하하여 지역적으로 부려진 족속명일 뿐이고 기본적으로 모두 그 범위에다 넣은 것입니다 그리고 이들은 청동기시대 중반까지 서로 밀접하게 연결하여 동아시아의 패권을 가지다 중국한족에게 패했고 또한 흉노같은 북방 알타이족에게 주도권을 잃고 결국 고 조선이라는 나라가 멸망하자 이들의 번영은 사라지고 동이족계열인 선비족의 발흥과 고구려의 융성으로 오래시간 기다리다가 고구려가 동방문화의 마지막 독립성을 완성하다고 중국문화에 종속적으로 가는 그런 구도로 저는 생각하고 있습니다
중국한족과의 관계인데요 중국한족은 완전 잡종입니다 제가 말하는 것은 고대 한족(화하족)이구요 이들은 유전적 체질은 현대 남중국인들과 유사하다고 합니다 남중국인과 북방 몽골로이드와 유전적 거리는 놀랍게도 코카소이드(백인)보다 더 멀다고 합니다 이들은 고대 앙소문화를 이루웠고 동쪽으로는 동이족과 서쪽으로는 주족이나 강족 현 파 촉 지역의 민족 북쪽으로는 귀방(몽골계통으로 생각) 남쪽으로는 오월초인들과 싸워나가면서 하나라는 나라를 세웠지만 은나라 동이계통,주나라 서쪽의 민족에게 정복당하면서 이들을 동화 확대된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렇게 해서 주때 우리 직계랑 접촉하면서 연나라같은 나라와 싸워 투쟁했던 관계라고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