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 군사강성의 요인

미연시다운족 작성일 06.12.29 21:5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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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모아둔 고구려군의 군사강성의 요인의 자료입니다.

1. 불리한 지정학적 환경 고구려는 건국초부터 주변의 다른 나라들과 싸우면서 성장한 나라입니다. 전쟁을 굳이 좋아한건 아니라 계속 전쟁을 하여 승리하지 않으면 국가의 존립이 위태로운 상황이었습니다. 주몽을 얕잡아 본 송양왕이 주몽더러 자기 신하가 되라고 으름장을 놓는가하면 주몽을 핍박하던 대소가 동부여의 왕위에 오르는등 고구려는 한시도 마음놓을 겨를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고조선이 망한후 그 아래에 있던 거수국들이 서로 쟁탈전을 벌이고 계속해서 동쪽으로 뻗어오는 서한과 흉노의 세력이 있는 상황에서 강력한 군사력을 유지하지 않으면 안되는 상황이었던 것입니다. 그 결과 고구려는 건국초기에 송양, 주나, 황룡등의 주변세력을 대충 정리할 수 있었습니다. 이 상황은 고구려의 사직이 탄탄해진 다음에도 그렇게 나아지지 않았습니다.

2. 전리품의 비중이 큰 경제 (좌식자: 전투귀족단) 초기의 고구려는 국토도 그리 넓지 못하고 농지의 비중이 큰 나라가 아니었습니다. 한 나라가 자체의 생산력으로 국가를 유지할 수 없을때의 몇 가지 대안중에 가장 손쉬운 것은 무역과 전쟁을 통한 전리품 획득인데, 고구려는 후자를 택하였습니다. 초기에는 태왕의 官軍이외에도 각 部의 우두머리들이 자체 병력을 거느리고 대외전쟁에 참가하였는데, 아직 王政이 공고하지 않은 상황에서 왕이 이들에게 전리품 획득을 보장하여주는 조건으로 군사적 협조를 얻었다는 가정이 얼마든지 가능합니다. 옛 사서에는 부여와 고구려에 다른 생업에 종사하지 않고 전쟁을 업으로 삼는 집단이 있다고 하였으며, 이들을 坐食者라고 불렀고, 이기백 선생은 <한국사신론>에서 고구려의 戰士들이 소, 말, 양등의 노획품에 비상한 관심을 보였다고 한바 있습니다. 이러한 식으로 경제를 유지하려면 상당한 군사력의 구축이 전제되어야 가능할 것입니다. 참고로, 호태왕비문에서도 鹽水가의 거란부족들을 칠 때 우마와 양의획득이 무수하였다고 적고 있습니다.

3. 국민들의 상무기풍 <梁史>와 <南史>의 기록에 의하면 고구려인들은 힘쓰기를 좋아하고 弓矢와 창검을 잘 다루며 집집마다 무기를 보관하고 잘 갈무리한다고 되어있습니다 (현대의 스위스처럼). 고구려는 또 활 잘쏘는 인물(주몽)이 초대 왕위에 오를만큼 騎射도 중시하였으며 그리고 평민의 자제들까지 경당에서 학문과 무예를 닦았고 큰 城市에서 수시로 벌어지는 석전과 수박희, 봄과 가을에 벌어지는 국중(수렵)대회등은 무예나 전투행위가 고구려인들 사이에서는 하나의 '스포츠'로 자리잡고 있었습니다. 만약 말타기가 몽고인에게 있어 일상생활의 일부분이었다면 고구려인도 <싸움>을 일상생활의 한 부분으로 삼고 있었던 것입니다.

4. 무예와 전투는 신분상승의 수단 물론 고구려도 여느 나라와 같이 귀족과 특권층이 있었으나 완전히 폐쇄적이지는 않았습니다. 뛰어난 재능을 인정받아 출세하는 길이 열려있었으며 (을파소) 가장 일반적인 방법이 무예와 軍功에 의한 신분상승이었습니다. 물론 다른나라와 시대에도 없었던 일은 아니나 전쟁같은 특수상황에서의 戰功이 아니고, 그것도 하급귀족도 아닌 평민이 단지 무예의 특출함을 인정받아 보다 높은 신분으로 오르는 일이 비일비재하였습니다. 그 유명한 온달도 사실은 거지가 아니었고 평범한 농부/나무꾼이였는데, 평강과 결혼하고 국중대회에서 무예실력을 인정받아 당당히 부마가 되었던 것입니다. 평민자제들이 경당에서 학문과 무예를 닦는 이유는 단지 교양이나 막연한 성심때문이 아니라 분명한 반대급부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5. 전투부대 구성원간의 갈등 최소화
이미 말씀드렸듯이 고구려는 경당이라는 기관을 통한
평민의 군직진출과 신분상승이 합법화 되어있었습니다.
이때문에 군 지휘관중에서도 평민출신(국중대회를 통하여 선발된)이 상당수였을뿐 아니라 차별도 심하지 않았습니다.
군공이 신분상승의 수단이었기 때문에 아무리 귀족이라도
제대로 대접을 받으려면 군복무와 전쟁참여여부가 중요하였습니다. (이스라엘에서 총리나 고위직은 군복부가 필수불가결인 것처럼). 아울러 기타 봉건사회에서는 군복무에 있어 신분에 따른 차별대우가 부대성원간 화합에 상당한 장애요인으로 작용하였는데 고구려에서는 신분을 막론하고 (신라의 경우에는 노비까지) 전쟁에 참가하였을뿐 아니라 태왕들 스스로도 빈번한 친정과 심지어는 혼전에 뛰어드는 것을 마다하지 않았습니다.(고구려태왕 28명중 친정을 한 군주는 12명이었고 6명은 태자로서 전쟁에 참여한 일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연개소문, 을지문덕, 명림답부, 太弟시절의 영류왕(고건무), 강이식, 양만춘등 황족/귀족들은 스스로 군진의 앞에 나서서 칼을 휘두르며 싸웠습니다.
이는 조선왕조의 軍制에서도 여실히 드러납니다.
예를 들어 왕실과 수도경비를 담당하는 정예병(장교/병 모두), 즉 甲士들은 모두 양반출신자들로 구성되었습니다. 그러나 웃기는 사실은 이 갑사들을 구성하는 부대중에 忠順衛라는 것이 있었는데, 무력이나 무술, 전투능력이 全無한 양반도령들로 구성되어있으면서 정작 정식군인들인 正兵들보다도 많은 봉급을 받았습니다. 이들이 전쟁시 아무 역할도 담당하지 않음은 당근입니다.
물론 유럽과 기사군을 들면서 반론을 펴실분도 계시겠지만
기사는 적어도 일반 농민이나 평민이 될 수 있는 것이 아니었음은 상식입니다. 대우나 기타 여러가지면에서 (군진에서의 식사같은 것도) 평민병사나 심지어는 기사의 보조병인 Squire과도 천지차이였습니다

흔히 고구려의 군사제도를 들때 '散武'라고하여 평소에는 생업에 종사하고 있었던 백성들이 나가싸웠다던지, 또는 農兵一致의 제도로 착각하시는 분들이 적잖은데, 그러면 안돼지

(6) 대규모 상비군의 육성
단재 선생은 그의 저서 <조선상고사>에서 고구려의 兵員(정규군)이 30만이었다고 적고 있으며 고혜수와 고연수가 당태종과 일전을 벌일때 말갈병 15만을 동원하였다고 기록되어 있고 이만열 교수도 <조선상고사>역편註에서 660년대의 高唐전역에서 전사한 고구려 군사의 수가 11만에 달한다고 적고 있다. 그리고 흔히 고구려/백제의 중국진출의 근거가 되고 있는 삼국사기 최치원전에도 幽燕齊魯吳越을 뒤흔든 '백만대군'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다.

혹자들은 구당서에 보이는 고구려 인구 69만호 (약 350만명)을 들고나와 고구려가 대규모 상비군을 유지하는 것은 불가능하였다고 하나 76만호는 전쟁직후의 혼란속에서 이루어진 통계라 그 정확성이 의심이 되고 고구려 수도였던 평양과 당의 직접적인 점령통치하에 있던 지역의 인구산정일 공산이 크다. 김용만 선생은 고구려의 지배하에 있던 변방(요하 상류+舊부여지역+삼강평원+우스리강유역+연해주)의 인구까지 합하면 고구려의 인구가 천만에 달하였을 것이라고 밝힌 바있다. 그리고 여담이지만 백제도 그들의 영향하에 있던 지역 (중국동해안 일부/왜열도)에서 토인용병들을 징병하였을 개연성이 크다. 아울러 황해/평안/요동반도지역의 농업생산력, 서요하 상류지역에서 생산되는 양질의 군마, 요동과 만주의 철자원으로 30만 대군을 유지하였을 것이다.

(7) 정예특수군단의 운용
고구려는 상비군을 보조하는 특수군단을 유지하였는데, 이에는 鎧甲騎手(철기)와 國仙이 있었다. 철기는 1차 세계대전중 독일의 stosstroopen과 비슷한 제도로 추정되는, 즉 최상의 훈련과정을 거치고 최고급장비를 지원받은 일종의 특수부대였다. 머리에서 말끝까지 갑주로 감싸고 말까지 갑옷을 걸친 이 부대는 적 후퇴시 섬멸전에 이용되거나 아군이 불리할때 적전열을 衝破하는 돌격부대역할도 담당하였다. 아울러 이들이 걸친 갑옷은 탄도무기에 대한 방호력이 뛰어난 찰갑(또는 鱗甲)이었다. 찰갑은 판갑(유럽식 갑옷)과는 달리 하나의 비늘이 아래의 비늘위에 걸치는 식으로 二重의 보호를 제공하였다. 비록 동천왕의 미숙한 운영으로 적의 매복진에 뛰어들어 패한 일도 있지만 서천왕時 曺魏군의 침략을 분쇄하는데 결정적인 공을 세웠으며 북방민족의 輕騎兵의 침략을 막는데도 효과적으로 이용이 되었다.

그리고 國仙은 흔히 조의라고 알려진, 신라의 화랑이나 오스만제국의 제니서리, 그리고 아슈르와 바빌론에 있었던 不死者(Immortals)들과 비슷한 종교적 전투집단이었다. 이들은 그들의 전생애를 전쟁과 국가에 대한 봉사로 일관하는 특수부대로서 공동으로 생활하고 전투훈련을 하였으며 평시에도 노역에 종사하는등 봉사와 전투밖에는 생의 의미가 없는 전사들이었다. 이 국선의 전통은 고려에까지 이어졌고 서긍은 머리를 깍고 공동생활하는 그들을 일러 '俗家和尙'이라 하였다. 물론 이들은 아내를 취하고 자식을 양육하는등 가정을 유지할 수 있었지만 전쟁시에는 우선적으로 나가싸웠으며 패배할시에는 극도의 모욕과 천대, 무시를 감내하였기 때문에 죽기살기로 싸웠다. 이들이 지닌 고도의 전투력은 후일 최영장군에 의하여 조명된 바있는데, 최영장군은 고구려가 3만 僧兵을 發하여 당태종의 30만군을 破하였다고 말하였다. 여기서의 승병이란 두말할 것도 없이 국선들이며, 물론 최영장군의 평가를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기는 힘들지만 국가에 대한 거의 맹목적인 충성심을 지니고 싸우는 이들은 패배보다는 차라리 죽는다는 태도로 전투에 임하였기 때문에 중국의 징집병들에 맞서 효과적으로 싸울수 있었던 것이다.

(8)양질의 군마확보

이번 대고구려편에서도 언급하였듯이 고구려는 경기병과 중기병부대의 운용을 위한 군마의 공급지를 확보하기 위하여 당시 북방세력 최강자였던 유연과 함께 대흥안령산맥 서부의 지두우를 분할지배한다.보통 전장에서의 戰馬소모량을 감안할때 기마병 일인당 두마리의 말 (치중대의 役馬제외)의 필요하다는 것은 상식이다. 이로서 고구려는 전쟁수행에 필요한 군마의 수요를 감당할 수 있게 되었고 또 南朝의 宋에 말 800필을 수출하였다는 기록이 보이듯이 말이 고구려의 중요한 교역품으로 등장했다.

그러나 지두우 점령여부와는 상관없이 목축은 고구려의 중요산업중 하나였고 養馬는 산업의 차원을 넘어 국가적인 차원에서 관리했다. 평강공주가 온달과 결혼한 후 훈련용 馬匹을 구하려 할때 남편에게 시중에서 판매하는 일반마대신 왕실馬場에서 버린 말을 구입하라 한 것은 왕실과 정부에서 직접적으로 公用馬의 양성에 개입했다는 하나의 반증이고 고구려의 군대를 동아시아 최강으로 만드는 하나의 원동력이 되었다.


(9) 축성기술과 방어망
고구려가 아무리 强軍을 보유하였다 하여도 동원할 수 있는 兵員의 수가 통일중국에 비하여 현저히 열세였기에 중국의 통일제국이 엄청난 수의 군병을 몰아 쳐들어올때에는 淸野入堡, 즉 적에게 노획될만한 양식이라던가 물품을 소각하고 군민이 근처의 요새(대개는 산성)로 집결하여 농성하며 경기병을 보내 적이 보급부대를 기습하는 작전으로 맞섰다. 손자병법에 의하면 적의 식량을 뺏는 것은 적을 주리게 함과 동시에 자국내 생산에 의존하지 않고 아군의 배를 채울수 있는, 말하자면 일석이조의 효과가 있다고 하였다.

그러나 청야입보도 대규모의 적앞에서 오래 버틸수있는 성이 없으면 무용지물이다. 고구려의 성은 모두가 관청소재지이기보다는 군사요새였고 군지휘관이 그 지역 행정관을 겸임하였기 때문에 유사시에 일사불란한 지휘체계를 구축할 수 있었다 (조선왕조-행정관의 지방군 지휘관 겸임-와는 정반대). 아울러 고구려의 성은 대개가 背山의 원칙으로 자연지형을 최대한 이용하여 아래를 내려다 볼 수 있는 山城의 형태로 지어졌으며 이는 현대전에서의 감제고지확보 원칙을 충실히 따른 것이라 하겠다. 아울러 건축학적으로 상당히 안정성이 있는 들여쌓기에다가 거의 모두가 튼튼하고 견고한 石城, 아니면 판축토성이었다. 또 치와 옹성같은 시설물을 지어 방어를 최대한 용이하게 하였고 10에서 15미터(조선의 성은 3-6m)에 달하는 성벽의 높이는 적에게 위압감을
주기에 충분하였다. 이에 수양제와 함께 고구려 정벌에 참가한 鄭天受는 후일 당태종과 고구려의 戰力에 대하여 의논할 때에 고구려는 '멀고 길은 험하며 산에 의지하여 성을 짓고 이를 잘 지키기때문에 함락하기가 쉽지않다'고 하였다.

마지막으로 특기할 점은 고구려의 성들은 종횡의 방어망을 형성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횡으로는 성들이 겹겹의 방어선을 형성하고 있었고 또 종으로는 중요한 길목마다 성이 자리하고 있었다. 현대군사적인 용어로 하자면 Defensive perimeter를 구축함과 동시에 공격의 축선 (Attack axis)에 성이 연이어 있었기 때문에 설사 성이 하나 함락된다하여도 방어선이 붕괴되지 않았기 때문에 아직 건재한 성들이 적 보급로에 지대한 위협요인으로 온존할 뿐만 아니라 그 축선에 또 다른 성들이 있었기 때문에 이를 모두 격파하지 않는 한 수도에 대한 直攻이 원천적으로 불가능하였다. 횡적인 연계에만 의존한 조선왕조의 제승방략책이 왜군의 速攻策에 속절없이 무력화되었던 것과 극명히 대비가 된다. 그러나 동천왕때에 魏將 관구검이 국내성을 직접 공략한 사실로 볼때 그 당시까지는 이러한 네트워크가 완성이 되지 않은듯 싶다. 아울러 멸망시에는
이러한 방어망을 관장하는 총책임자였던 연남생이 당에 투항하여 향도가 되는 바람에 견고한 수비네트워크가 쉽게 무너지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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