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으로서는 상상하기 어려운 권력을 손에 쥔 중국의 황제들은 블랙홀이라고나 불러야 할 심적 공허감을 어떻게든 메워 보려고 엄청난 물량을 쏟아부으며 현란한 사치에 빠져들었다. 황제의 후궁제도만 봐도 ‘예기’ 혼의에 기록된 바에 의하면 천자는 1인의 황후 이외에 3인의 부인, 9인의 빈, 27인의 세부, 81인의 어처로 순번대로 순위를 매긴 총 1백 20인의 후궁을 거느릴 수 있다는 규정이 있다. 명칭은 시대에 따라 조금씩 달라졌지만 이 규정이 후세에까지 후궁제도의 전형이 되었다. 요컨대 황후를 정점으로 하여 순위가 낮아질수록 수가 늘어나는 피라미드 형태이다. 물론 인원수는 꼭 규정을 따라야 하는 것이 아니라 경우에 따라 얼마든지 늘릴 수 있는 구조였다. 서진의 무제(재위 265년 - 290년)는 3국 중 마지막 남은 오나라를 무너뜨리자마자 음탕하기로 소문난 오나라 최후의 황제 손호의 아름다운 후궁 수천 명을 거두어 무제의 후궁은 일거에 1만 명 이상으로 늘어났고, 그는 수많은 미녀들에 빠져 순식간에 몸을 망쳐버렸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이런 사례는 중국왕조사 전반에 걸쳐 나타나고 있는 흔한 현상이었다.
1. 주지육림
총명한 악마 주왕 은 왕조(기원전 약 1700년 - 기원전 약 1100년)의 주왕은 사치, 방탕의 극을 보여준 중국 최초의 임금이다. 은나라는 현재까지 그 실재가 확인된 중국의 가장 오래된 왕조로서, 거북의 등껍질이나 짐승의 뼈를 불로 지지면 생겨나는 균열의 형태나 수를 보아 길흉을 점치고 중대사를 결정하는 주술적인 제정일치 국가였다. 그러나 세계 최고수준으로 일컬어지는 세공된 청동기에서도 엿볼 수 있듯이 문화적인 수준은 대단히 높았다. 주왕은 전설의 왕조인 하나라 최후의 천자 걸과 함께 걸주라 불리는 폭군의 대명사로, 하나라에 이은 고대왕조 은나라의 제 30대 임금이다. 주왕은 결코 무능한 천자는 아니었다. 오히려 타고난 천성이 총명하고 언변이 뛰어나며 행정수완도 보통을 뛰어넘는 인물이었다. 거기에 더해 맨손으로 맹수와 결투를 벌일 정도로 힘도 셌다고 하니 그야말로 호랑이에 날개 가 달린 격이었다. 그러나 주왕은 이 축복받은 자질을 오로지 나쁜 방향으로만 발휘했다. 그는 천성적으로 타고난 총명함을 무기로 충직한 신하를 꼼짝 못하게 만들었으며, 뛰어난 말솜씨로 자신의 잘못을 덮어 버리고 흰 것을 검은 것이라 우겨댔다. 무엇이든지 마음먹은 대로 할 수 있게 된 주왕은 승리의 쾌감에 취해 이 세상에 오직 자신만이 존재하는 것으로 착각하고 완전히 기고만장해져 버린다. 즉위 9년째, 주왕은 징벌한 유소씨로부터 절세미녀를 상납받았다. 바로 달기이다. 타고난 호색한 주왕은 한눈에 달기의 미모에 반해 맹목적인 사랑에 불탔으며, 그때부터 오로지 달기를 껴안고 한껏 사치를 부리며 향락으로 나날을 보냈다. 그는 우선 사슴각이라는 어전에다 엄청난 금은보화를 쌓아놓고, 거교라는 창고에 대량의 곡물을 저장해 놓았으며, 진기한 것이면 무엇이든 궁전 가득히 모아들였다. 게다가 별궁에는 사구(모래언덕)라는 정원을 만들어 놓았고, 건물을 대폭 확장해 자신을 위한 위락단지를 조성하여 각 지방에서 모아들인 들짐승이나 새를 놓아 기르게 하였다. 달기만으로는 양에 차지 않았는지 미녀또한 전국에서 모아들여 자신의 위락단지에 살게 했다. 여기에 들어가는 막대한 경비는 백성에게 명분없는 세금을 거둬들여 조달하였다.
주지육림의 늪 권력과 온갖 부를 거머쥔 주왕은 재산을 탕진하기 시작했다. 위락단지인 사구에 연못을 만들어 술을 가득 채워 놓고 나뭇가지에다 말린 고기(당시에는 최고의 요리였다)를 주렁주렁 매달아 육림을 조성하였다. 그리고는 벌거벗은 남녀가 술래잡기를 하도록 하고, 자신은 달기를 옆에 끼고 그 광경을 보면서 밤새도록 연회를 즐겼다. 이것이 세간에서 이야기하는 주지육림이다. 이런 유형의 사치는 오로지 먹고 마시는 데 마구잡이로 부를 탕진한 것이기 때문에 저급한 사치라고밖에 표현할 수 없다. 이러한 주왕의 사치향락 행태에 대해 어느 역사가는 주왕은 이른바 주지육림에서 단지 술을 마셨던 것으로, 당시의 사치는 무엇이든 분량을 중시했던 것이라고 정의하고 있다. (사치(奢侈)라는 문자의 뜻은 원래 奢는 큰 사람을, 侈는 많은 사람을 나타내는 것으로 모두 분량적 개념을 나타내고 있다) 정상 테두리를 벗어나는 욕망을 탕진하는 행위는 자칫 잔혹한 사디즘으로 이어진다. 주왕의 경우도 그런 잔학성을 나타내는 일화가 수없이 많다. 그는 재물을 탕진하는 방식에서는 물량적 범주를 벗어나지 못했던 반면, 잔혹함을 발휘하는 데는 매우 다양한 방식을 구사했다. 주왕 그 자신에게 반기를 든 제후는 포락형으로 처벌했다. 이것은 기름을 바른 구리 기둥위에 죄인을 눕히고 기둥 밑에서 불을 달구는 형벌로 죄인은 기름에 미끄러지면서 불 속으로 떨어져 곧 타 죽게 되는 것이다. 심지 굳은 중신들 대부분이 주왕을 떠나 국외로 탈출한 후에도, 오직 혼자 남아 주왕에게 충언을 다한 숙부 비간도 어김없이 주왕의 잔혹한 취미의 희생양이 되었다. 비간의 간언에 화가 난 주왕은 ‘성인의 가슴에는 일곱 개의 구멍이 나 있다고 하던데 정말 그러한가’ 라면서 산 채로 비간의 가슴을 절개해 심장을 꺼냈다고 한다. 이러한 잔학무도함이 언제까지나 지속될 수는 없었다. 끝없이 사치와 음란, 잔혹함을 즐기던 주왕은 주나라의 무왕이 이끄는 제후동맹군의 공격을 받아 사슴각의 보물전에 쫓겨 올라가 불 속에 몸을 던져 죽었으며 주왕의 총애를 받던 달기 역시 모든 악의 축(?)으로 지목되어 처형되고 말았다. 결국 은왕조는 이렇게 멸망했던 것이다.
2. 사후불멸을 꿈꾼 광기의 역사
기원전 221년 진왕 정(시황제)은 5백여 년 이어진 춘추전국의 분열국가 시대에 종지부를 찍고 중국 전역을 통일, 중국 역사상 최초의 대제국 진나라를 세웠다. 13세 약관에 나이에 부친 장양왕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지 26년 만에 중국 천하를 통일한 것이다.
철저한 기능주의자 진왕 정은 혈연의 고리를 단절하고 부친살해를 단행함으로써 자립할 수 있었다. 이 사건을 전환점으로 진왕 정은 권력 재패에 대한 불타는 의지로 천하통일의 발걸음을 착실하게 밟아 나갔다. 목표는 오로지 권력뿐. 목적을 위한 수단을 가리지 않는 비정한 야심가 진왕 정의 모습을 위료는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벌처럼 날카롭게 높은 코, 째진 듯 치켜 올라간 눈초리, 매나 독수리처럼 튀어나온 가슴, 승냥이 같은 목소리를 가지고 있다. 그의 이러한 풍모는 애정이 부족하고 인간적인 면이라곤 조금도 찾아볼 수 없는 오직 약육강식의 본능만이 번뜩이는 인간임을 나타내는 것이다. 위기에 처했을 때는 태연하게 남 앞에서 자기를 낮추지만 뜻을 이룬 후에는 예사로 남을 깔보고 죽여버린다. 나는 어떤 지위도 관직도 없는 사람이지만 (지금은 이용가치가 있다고 보고) 그는 늘 필요이상으로 나에게 자신을 낮추고 있다. 만일 진왕 정이 천하를 통일하게 되면 천하의 모든 사람들을 한 명도 빠짐없이 노예로 만들 것이다. 이런 인물 옆에서 오래 있을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위료가 간파한 대로 그 복잡한 출생 배경 때문인지 정서가 바싹 메마른 진왕 정은 인간을 무슨 기구의 부품 이상으로 보지 않는 경향이 있었다. 진왕 정은 인간에 대한 불신, 혐오가 밑바닥에 깔린 철저한 기능주의의 잣대로 인간을 보았다.
우주의 지배자 황제 천하통일을 이룩한 정이 제일 먼저 착수한 일은 최고권력자인 자신의 호칭을 정한 일이었다. 진나라에 앞선 통일왕조 주나라의 천자는 왕이라고 칭했지만 춘추전국의 난세를 거치면서 제후도 모두 왕이라고 불렀기 때문에, 진왕 정은 왕이라는 호칭을 달가워하지 않았다. 그래서 왕중의 왕이라는 뜻으로 황제라는 호칭을 채택하게 되었다. (황은 천제-우주의 지배자-라는 뜻이며, 제는 전설의 5인의 성왕 5제에서 따온 것이었다) 동시에 진왕 정은 시호(죽은 사람의 생전의 공적에 따라 붙이는 호칭)제도를 폐지하고, 스스로 시황제라고 이름지어 이후의 황제를 2세 황제, 3세 황제라고 칭하도록 신하에게 명하였다. 아들이 부친의 행실과 공적을 논하고, 신하가 임금의 행실과 공적을 논하여 시호를 붙이는 것이 불경스럽기 그지없다는 게 시호 폐지의 이유였다. 아울러 황제 스스로는 짐으로 호칭할 것임을 선언했다. 이러한 호칭이나 제도를 시행한 진왕 정의 목적은 물론 자신이 범인들과 확연하게 구분되는 높은 위치에 있음을 표시하려 한 것이었다. 명실공히 세계의 중심이 된 시황제는 시간을 허비하지 않고 천하통일의 실체를 구체화하기 위한 작업에 착수하였다. 우선 중국 전역을 36개군으로 나누고, 각 군에 황제가 임명한 관리를 파견하여 행정을 담당하게 해 권력의 중앙집중화를 꾀하였으며, 동시에 도량형, 화폐, 거궤(수레 양쪽 바퀴 사이의 폭), 문자를 통일하는 등 사회, 경제, 문화 제도까지 정비 통합하였다. 이렇듯 강력한 정책을 시행함에 따라 7국으로 병립해 있던 전국 시대의 분열에 종지부를 찍고 황제를 중심으로 하는 전면적 개편을 단행함으로써 중앙집권적 대제국을 탄생시킨 것이다. 아마 탁월한 합리주의자이자 기능주의자인 시황제가 아니었더라면 이런 대업적을 단기간에 이룩하는 것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아방궁, 지상과 천상을 대응시키다 누구도 도달해 본 적이 없는 지위에 오른 시황제는 어떤 일이든 방대하게 치르기를 좋아했는데 사치 또한 화려함의 극치를 달렸다. 다만 주지육림의 긴 밤의 연회로 에너지를 소진한 은나라 주왕과는 달리 시황제가 부린 사치에는 일종의 역동성이 흐리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시황제는 만리장성을 축조한 일에서도 알 수 있듯이 대단히 뛰어난 거대 건축광이었다. 이런 경향은 이미 황제가 되기 이전부터 두드러져 제후를 무너뜨릴 때마다 궁전을 모방한 어전을 진나라 수도 함양(협서성 함양시의 동북)에 세우고 전리품으로 획득한 미녀나 악기 등을 모아들인 것으로 전해진다. 일종의 정복기념관인 셈이다. 천하통일에 성공할 즈음 위수 북쪽에는 잇달아 세워진 궁전이 즐비하였고, 각 궁전 사이를 통로로 연결하여 장대한 궁전 단지를 조성하였다. 그러나 시황제는 이것으로 만족하지 못하고 황제가 된 이듬해인 기원전 220년 위수 남쪽에 대규모의 신궁을 세워 이것을 극묘라고 개칭하였다. 극묘의 극은 하늘의 중심 별자리인 북극성에서 따온 것으로 이것은 우주의 지배자, 즉 신이 되고자 한 시황제가 지상공간을 천상세계와 명확하게 대응시키려는 구상으로 새 궁전을 세웠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구상은 즉위 8년 후(기원전 212년) 역시 위수 남쪽에 장대하고 화려하기 이를 데 없는 아방궁의 궁전 단지를 세우면서 한층 활기를 띤다. 아방궁의 중심이 되는 아방전전은 동서 5백보(약 6백 75m), 남북 50장(약 1백 13m), 위에는 1만 명이 앉을 수 있는 어마어마하게 큰 규모였다. 이 아방궁은 2층 건물의 통로를 통하여 위수를 건너 북쪽 함양의 궁전 단지와 연결되어 있었다. 이같은 공간 배치 계획은 하늘의 별자리와 정확하게 대응했다. 아방궁은 천제가 거처한다고 전해지는 자미궁(북두칠성의 북동쪽에 있는 15개의 별로 구성되는 영역)에, 위수는 은하수에, 위수 북쪽의 함양에 있는 궁전 단지는 영실(페가수스 자리의 두 별. 천자의 궁이라고 전해진다. 군주의 대궐을 세울 때 기준이 되며, 이 별이 정남쪽으로 보이는 때가 건축의 호기라고 전해진다)에 각각 대응하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시황제가 자신의 본거지를 함양의 궁전에서 아방궁으로 옮겼다는 것은, 그가 인간적인 존재인 군주의 차원을 넘어 천제가 되고자 하였음을 의미한다. 시황제는 장대한 공간 배치 계획을 실행하면서 지상뿐 아니라 천상세계를 포함한 전 우주의 지배자가 되고자 거의 광신에 가까운 권력 추종 의지를 불태웠던 것이다.
저승까지 지배하고 싶은 소망 아방궁은 빙 둘러서 있는 중층의 긴 복도를 통하여 여산의 시황릉(여산릉)과도 연결되어 있었다. 여산릉은 기원전 247년, 시황제가 왕위에 오르자마자 건축하기 시작하여 천하통일 후 건축계획을 대폭 확장했는데 이 어릉은 70만 명의 죄인을 동원하여 완성되었으며 아방궁에 버금가는 규모를 갖춘 호화찬란한 지하궁전이다. (유명한 병마용이 발견된 곳이 바로 이 여산릉이다) 내부에는 실물과 꼭같은 크기의 관리, 병사, 말 등의 토우를 수만개나 빼곡히 세워 놓았고 지상의 궁전에서 보물을 옮겨와 가득 채웠다. 또한 인공으로 수은이 흐르는 강과 바다를 만들고 영원히 꺼지지 않도록 인어의 기름으로 등을 밝혔다. 그리고 수상한 자가 지하궁전의 입구에 접근하면 기계장치 화살이 자동적으로 발사되도록 하는 등 상당한 주의를 기울여 외부 침입에 대비했다. 아방궁의 위치와 구조가 우주의 지배자가 되려 한 시황제의 의지를 나타내는 것이라고 한다면 여산릉은 저승, 즉 명계를 지배하고자 하는 시황제의 소망을 드러내는 것이었다. 현실세계를 지하에 완벽하게 재현하여 사후에도 명계의 지배자로서 호사스러운 생활을 계속하는 것이 시황제의 궁극의 꿈이었던 것이다.
불사의 선약을 찾아서 아방궁, 여산릉 등 거대 건조물은 결국 인간으로서의 한계-죽음-를 초월하려는 시황제의 갈망이 만들어낸 것이었다. 시황제는 천하를 통일하고 중앙집권적 권력을 획득하여 현세에서는 더 이상 바랄 것 없는 위치에 오르자 천제나 명계의 황자를 흉내내어 인간의 한계를 돌파하고 영생을 얻고 싶었던 것이다. 시황제의 사후불멸에 대한 소망은 눈덩이처럼 불어나기만 했다. 이런 사정을 간파한 방사들의 어설픈 술수에 넘어가 거금을 쏟아부으며 불로장생의 선약이나 신선을 찾아 헤매는 일도 허다하였다. 기원전 219년 시황제는 천하순유 중 신선술의 본고장인 산동의 낭사에 들러 제나라 방사 서복에게 수천 명의 동남동녀를 태운 대선단을 지휘하게 하여 선인이 기거한다는 동해의 삼신산(봉래, 방장, 영주)이 있는지 찾아보게 하였다. 이 대대적인 신산 수색은 물론 실패로 끝났다. 그러나 도저히 단념할 수 없었던 시황제는 서시등 제나라 방사를 포기하고 새로이 연나라 방사 노생등에게 불사의 선약을 찾도록 집요하게 주문하였다. 기원전 212년 이 광적일 만치 집요한 선약 찾기가 어처구니 없는 사건을 일으키게 된다. 노생 등 연나라 방사들은 선약을 찾아내는 일이 불가능함을 알고 갖은 변명으로 발뺌을 해 왔는데 마침내 발뺌할 거리가 바닥나자 구름으로 몸을 가리고 도망가 버렸다. 이것을 안 시황제는 격노하여 노생 등과 관계가 있는 방사, 학자들을 마구 잡아들였고, 혹독하게 심문한 끝에 그 중 4백 60명 남짓한 사람을 생매장형에 처하고 말았다. (이것이 역사상 악명 높은 갱유 사건이다) 시황제는 거대건축물 축조, 불사약찾기 외에도 천하순유를 하며 그야말로 물 쓰듯 부를 탕진하였다. 천하순유의 경우를 예로 들자면 천하통일 이듬해 (기원전 220년)부터 죽음 (기원전 210년) 에 이르기까지 10년동안 빈번히 천하순유에 나섰는데 이를 위해 황제 전용 도로를 닦고 가는 곳마다 기념비를 세우는 등 지극히 대규모적인 사업을 벌였다. 천하순유는 표면적으로는 진제국의 권위를 과시하기 위한 행차였지만, 순유 때마다 신선사상과 관계가 깊은 산동의 지태산을 방문하는 것 등을 보면 실은 불로불사의 영약 찾기 작업의 일환임을 알 수 있다. (지태산은 신기루가 잘 생기는 토양으로 유명하며 여기서 볼 수 있는 신기루의 신비한 인상 때문에 삼신산 전설이 생겨났다고도 한다)
진시황은 일중독자 지배 욕망의 끝을 모르는 시황제는 모든 안건에 대해서도 직접 결재, 처리하였다. 시황제는 지칠 줄 모르고 각 건물마다 긴 통로로 연결된 광대한 궁전 단지를 옮겨다니면서도 공문서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종국에는 공문서가 늘어나 어찌할 도리가 없게 되자 하루 업무량을 정하기에 이르렀는데, 저울에 문서를 쌓아 올려 무게를 달아 하루에 한 석(1백 20근, 약 30킬로그램)씩 처리하기로 정하고, 목표량을 달성할 때까지는 한시도 쉬지 않고 부지런히 일했다고 한다. 당시 아직 종이가 발명되지 않은 때라 문서는 목간(나무를 얇게 저민 판)이나 죽간(대나무를 얇게 저민 판)을 이용하는 것이 보통이었는데 종이만큼은 아니겠지만 그래도 상당한 분량이었을 것이다. 거의 일중독자에 가까운 일처리의 면모를 보여준 것이다. 호사스러운 궁중 안에서 공문서 결재에 쫓기는 시황제의 모습에서 사치를 즐길 기미 따위는 조금도 엿볼 수 없다. 결국 시황제는 장대한 아방궁을 짓기는 했지만 거기서 풍요로운 생활을 즐기기보다는 그러한 거대건축의 설계 계획을 세우고 건조하는 일 자체가 목적이자 쾌락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여산릉의 건축 역시 마찬가지이다. 바꾸어 말하면 시황제는 욕망이 성취되는 과정만을 즐긴 것이다. 사서에서도 시황제가 음식물, 음악, 여성 등 현세적인 쾌락에 흥미를 보였다는 기록은 전혀 나타나 있지 않다. 물론 후궁에는 전국에서 불러 모은 수천 명의 미녀가 북적거리고 있었지만 그가 특정한 미녀를 총애했다는 기록은 없다. 시황제는 인간을 도구 이상으로 보지 않았으므로 타인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것이 불가능하였고 또한 어느 누구도 그런 시황제를 사랑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의 이러한 각성된 합리주의가 일찍이 역사에서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대제국을 만들어낸 원동력이 된 셈인데, 그러나 그의 최대 약점은 초인에 대한 갈망, 불멸에 대한 욕망이었다. 그에게는 극단적인 합리성과 극단적인 비합리성이 기묘한 형태로 어우러져 아주 꼼꼼하게 정무에 힘쓰는 반면 거대건축을 세우거나 선약 찾기에 막대한 재정을 쏟아부어 부질없이 낭비를 거듭하는 양극단을 오고가는 불균형이 생긴 것이다.
먼지가 되어버린 진시황의 꿈 끊임없이 영원할 삶을 찾아 헤매던 시황제는 기원전 210년 천하순유 도중 중태에 빠져 그대로 죽고 말았다. 그때 나이가 50세. 진나라 왕이 되고 나서 37년째, 황제가 되고 나서 11년째의 일이다. 이미 자멸상태에 빠져 있던 진왕조는 시황제의 사후 불과 3년도 못가 멸망해 버린다. 함양에 입성한 항우의 군대는 파괴와 약탈의 극을 달렸다. 아방궁을 비롯한 모든 궁전을 불태워 버렸는데 그때 궁실을 태운 불이 3개월 간이나 꺼지지 않았다고 한다. 여산릉 또한 철저한 약탈의 대상이 되었다. 먼지와 재로 돌아간 궁전, 마구 짓밟힌 묘릉. 막대한 돈을 들인 시황제의 못다 이룬 꿈은 이렇게 흔적도 없이 사라진 것이다.
3. 거대한 건축광
공처가 황제의 집안상황 2세기 말에 후한 왕조가 약해지자 중국 전역은 분열과 혼란의 상태로 접어든다. 4세기 이후에는 대체로 양주의 회수를 경계로 하여 한민족왕조가 남부를 지배하고, 이민족 왕조가 북부를 지배하는 상황이 벌어졌다. (이 시기를 일명 위진남북조 시대라고 부른다) 양견은 북조인 북주의 외척인데, 581년 북주를 무너뜨리고 수 왕조를 세웠으며 589년에는 남조의 진을 무너뜨리고 중국 전역을 통일, 4백 년에 이르는 위진남북조 분열상황의 막을 내렸다. 양견은 관리등용 시험인 과거제도를 창설하여 관료기구를 정비하고, 중앙집권체제의 강화를 꾀하는 등 탁월한 정치수완의 소유자였다. 그는 또한 실무강건을 제일로 삼는 진지한 인물이며, 언제나 정무에 힘써 쾌락과는 거리가 멀었다. 이렇게 황제가 나랏일에 충실하니 수의 국력은 비약적으로 강해지고 국고에는 엄청난 자산이 축적되었다. 문제 양견의 진지한 외곬에 박차를 가한 인물은 맹처인 독고 황후였다. 문제 양견은 선비족의 명문 독고 씨 출신인 부인에게 온통 사로잡혀 있었다. (태생과 관련하여 문제 자신은 후한의 양진을 시조로 하는 한민족 출신이라고 말했지만 사실 여부는 불분명하다) 문제 양견은 남녀관계에 엄격한 황후 때문에 측실도 들이지 않아 당시에는 드물게 일부일처제를 엄수하여 5남5녀 모두 황후의 친자를 둔 모범적인 남편이었다. 그러나 독고 황후의 결벽성에는 병적인 데가 있어 아들에서부터 친척이나 중신에 이르기까지 남녀관계가 문란한 사람에 대해서는 증오에 가까운 감정을 품었다. 황태자인 장남 양용도 난잡한 여성관계 때문에 모친에게 혐오를 산 사람 중 한명이었다.
폭군의 본성을 숨긴 수완가 양광 독고 황후는 양용에게 정나미가 떨어진 뒤, 일견 진실해 보이는 둘째 양광을 매우 사랑하게 되었다. 양광은 사태를 파악하는 눈치가 매우 빨랐으므로 본처 이외의 여성에게서 태어난 아들을 남몰래 깊이 숨기는 등 술책을 부려 품행이 방정함을 가장함으로써 모친의 기분을 맞추었다. 양광은 문제와 독고 황후가 자신의 집을 찾으면 미녀는 모두 별실에 숨기고 나이 든 여자와 추녀만을 밖으로 나오게 하여 독고 황후를 기쁘게 하는 한편, 향응을 멀리하며 생활하고 있음을 가장해 보이려고 일부러 악기의 현을 끊고 먼지투성이인 채 두어 아버지 문제를 매우 감격하게 했다. 양광의 수완은 보통이 넘어 인기를 위한 공작에도 심혈을 쏟았는데, 수렵에 나가 큰 비를 만나 주위 사람이 우비를 입으라고 권하면 ‘사졸이 모두 비를 맞고 있는데 나 혼자 입을 수 없다’는 식으로 말하여 자신에 대한 좋은 평판을 조성하였다. 양광은 이런 식으로 독고 황후의 총애를 무기 삼아 황태자 양용 밀어내기를 도모하였는데, 양광이 결정적으로 우위에 서게 된 것은 명목상이기는 해도 남조의 진을 공략하는 총사령관이 되어 대승을 거둔 일이었다. 여기에 양광과 결탁한 중신 양소가 부친 문제에게 황태자 양용이 딴 마음을 품고 있다고 모함을 해 마침내 양용은 쫓겨나고 결국 양광이 황태자에 오르게 된다.
피보다 진한 사치욕 양광이 과연 부친을 살해했는지에 대한 진상은 진나라 시황제의 친아버지가 여불위인지 아닌지와 마찬가지로 역사의 어둠에 묻혀 있을 뿐이다. 그러나 엄청난 사치로 이름을 날린 진의 시황제와 수양제 양광이 둘 다 부친 살해 용의자라는 것은 그들 의식의 밑바탕에 혈육중의 혈육인 아버지의 피를 뿌려서라도 호사를 부려보겠다는 피보다 진한 사치에 대한 욕망이 흘러 넘치고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양광은 무리없이 수의 2대 황제가 되었고 그 누구도 두려워하지 않고 욕망이 닿는 대로 사치에 빠져들었다. 근검절약형이었던 문제가 축적해 놓은 재산이 엄청났기 때문에 이제는 쓸 일만 남은 것이다.
200여 리에 달한 양제의 대선단 양제도 시황제와 마찬가지로 거대 건축광이었다. 양제가 벌인 최대의 토목공사는 뭐니뭐니 해도 대운하의 건설이었다. 605년 즉위와 동시에 공사를 시작했는데 그해 안에 회수 북부지대의 백만여 명에 달하는 백성을 동원하여 황하에서부터 회수 북부지대에 이르는 통제거를 개통시켰다. 이어 회수 남부지대의 십만여 명의 백성을 동원하여 회수에서부터 장강(양자강)에 이르는 한구를 개통했다. 이 대운하 개통에 따라 수도 장안에서부터 강남의 강도-지금의 양주까지 곧장 배로 왕래할 수 있게 되었으며 이에 따라 화북과 강남이 일직선으로 연결되어 남북 교통이 용이해지게 되었다. 그러나 양제가 대운하 건설 계획에 몰두한 것은 결코 그런 사회경제적 관점에 입각한 것은 아니었다. 그의 머리에는 오직 자기 자신만의 쾌락이 있었을 뿐이다. 대운하가 완성되자 양제는 수만 척의 배를 건조한 다음 즉시 동도(東都) 낙양에서 강도로 행차하였다. 양제가 탄 용주는 높이 45척(약 14m), 길이 2백장(약 600m)이고, 4층으로 되어 있으며, 맨 윗층은 황제가 쓰는 궁전과 개인용 방, 그 밑 2층에 후궁용 방이 1백 20개, 맨 아래층에는 환관용 방이 있었다. 황후가 타는 배도 황제의 것에 비해 소형이긴 했지만 설비는 거의 비슷하였다. 황제와 황후의 뒤를 이어 제왕, 공주, 관료, 승려, 비구니, 도사 등이 탄 수천 척의 배가 따르고 나아가 호위함 수천척이 연이어 뒤따랐는데, 이 화려하며 아름답게 꾸며진 대선단은 전체 길이가 2백여 리(약 80km)나 되었다고 한다. 운하의 중간에 물줄기가 정체하는 곳이 있거나 배가 물살을 거슬러 가야 하는 경우에는 운하의 양 끝에 조성된 어도라 불리는 도로에 인부를 배치해 배에 달려 있는 줄을 교대로 잡아당겨 인력으로 배를 움직이게 했는데, 양제의 대선단이 처음으로 행차에 나섰을 때 줄을 잡아당기기 위해 동원된 인부는 10만여명에 달했다고 한다. 그 후에도 양제의 운하 건설에 대한 정열은 식지 않아 북으로는 북경의 남서쪽 탁군에 이르는 영제거를 건설하고 남으로는 항주에 이르는 강남하도 개착하는 등 운하를 더 연장하였다. 이리하여 중국의 남북은 북의 탁군으로부터 남의 항주가지 4개의 운하로 끊기는 지점 없이 연결되었다.
자연의 변화조차 멈추게 한 황제 권력 양제는 대운하 개통과 병행하여 궁전과 대정원, 대규모의 식량저장고 등의 건설에도 대단한 노력을 기울였다. 즉위하자마자 2백만 명의 백성을 동원하여 낙양과 그리 멀지 않은 수안현에 착공한 별궁인 현인궁은 호화로움의 극치를 달렸다. 또한 낙양 서쪽에 조성된 황제용 위락단지인 별궁 서원은 은나라 주왕의 모래언덕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규모로 양제의 섬세하고 빈틈없는 취향에 맞추어 꿈결같은 분위기를 연출하였는데, 둘레가 2백 리인 서원 중앙에 커다란 연못을 파고 그 안에 동해의 삼신산인 봉래, 방장, 영주를 본뜬 축소 인공산을 조성하여 정상까지 빽빽하게 누각을 세웠다. 서원의 북쪽에서부터 연못까지는 수로를 파서 만들고 그 끝에는 열여섯 채의 건물을 늘어 세웠다. 그리고 각 건물에는 미녀들이 대기하여 양제의 방문을 기다렸다. 양제는 서원을 그대로 확대한 형태로 장안에서 강도에 이르는 대운하를 따라 40개의 별궁을 짓고 이르는 곳마다 미녀 후궁들과 유희를 즐겼다. 번잡한 것을 좋아하던 양제는 낙엽 지는 계절의 고적함을 싫어해 색색깔의 비단 옷감을 꽃이나 나뭇잎 꼴로 잘라서 줄기에 붙이고 색깔이 바래면 다시 새로운 것으로 바꾸어 다는 등 정원이 사시사철 화려한 색채를 띠도록 만들었다고 한다. 양제는 아낌없이 돈을 쓰면서 비록 인위적이지만 자연의 변화까지 멈추게 하고 싶었던 것이다. 이런 식으로 양제는 무엇이건 겉치레를 요란하게 꾸미도록 했는데 심지어 관료들의 옷과 장신구에까지 사치를 부리도록 하였다. 관료들이 쓰는 관에 빠짐없이 성대한 깃털 장식을 붙이게 해 이 때문에 중국 전역의 새라는 새는 모조리 잡아 털을 뽑았다는 이야기도 있다.
첨단장치의 서재 양제는 대운하와 서원의 건설에서부터 관료의 깃털장식에 이르기까지 자연을 인간의 힘으로 개조하여 인공적인 세계를 만들어내는 데에서 더할 수 없는 기쁨을 느낀 인물이었다. 당연한 일이지만 그렇게 인위적인 것을 좋아한 양제는 인공의 극치인 기계장치 제작을 대단히 좋아하였다. 일례로, 만리장성을 대대적으로 고쳐 쌓고 그 일대를 행차할 때는, 수백 명의 호위병과 함께 행전이라는 바퀴 달린 커다란 수레를 타고 이동하고 숙박할 때는 조립식 판자를 무수하게 연결시켜 행전 주위를 완전히 덮어 씌웠다. 이것은 행성이라고 불리는 장치인데 조립된 판자의 높이는 20여 장(약 60m)이나 되었다고 한다. 이렇게 외적의 습격에 대비했지만 그래도 안심할 수 없어서 행전에 자동발사 활을 장치하고 이 활에 줄을 연결하였다. 침입자가 줄을 건드리면 발사되도록 만들었다. 양제는 시황제와 달리 독서를 좋아하여 글에도 자신이 있었다고 한다. 문제 때부터 수집하여 장안의 궁중도서관에 보관되어 있던 37만 권에 달하는 장서를 정리하여 3만 7천여 권을 골라낸 다음 특히 귀중한 50부를 뽑아 필사본을 만들고 수도 장안과 동도 낙양에 분산하여 보관하도록 하였다. 이때 그가 낙양의 궁전에 만든 전용 서재인 관문전은 대단히 독특한 구조를 보여주었다. 서재 바깥에 비밀 누름장치가 있어 이것을 밟으면 문이 열리고 위에서 신선 인형이 슬며시 내려와 문 안의 장막을 걷어올리면서 양제를 안으로 인도한다. 독서를 마친 양제가 밖으로 나와서 다시 비밀장치를 밟으면 원래대로 장막이 쳐지고 문이 닫혔다. 이는 피해망상 기미가 있는 양제의 고육책이지만 그렇다 해도 기발하기 이를 데 없다.
피해망상으로 인한 불면증 더할 나위 없는 사치삼매경의 세월을 보내면서도 양제는 해가 갈수록 피해망상이 심해져 공포에 시달리게 되었다. 이런 증세는 즉위 8년째인 612년경부터 두드러지기 시작해 도둑이 들었다며 벌떡 일어나는 등 밤에는 전혀 숙면을 취하지 못해 몇 명의 궁녀들에게 몸을 맡기고 깜빡깜빡 졸곤 했는데 이런 상태가 몇 년이나 계속되었다. 양제는 화려한 궁전 안에서 물밀 듯이 엄습하는 파멸의 예감에 떨고 있었던 것이다. 616년, 전국 각지의 반란이 거세어지자 위험을 느낀 양제는 대운하를 통하여 강도의 별궁으로 피난하였다. 여기에서 1년 남짓 자포자기한 상태로 향락의 나날을 보내고 있는 동안, 수도 장안이 후일 당나라 왕조의 창설자인 고조 이연의 공격을 받아 함락되었다. 이 소식을 듣고 동요한 강도 별궁의 근위군이 반란을 일으켜 마침내 양제는 살해당하고 말았다. 618년 3월, 양제의 나이 50세, (기묘하게도 시황제가 죽은 나이와 똑같다) 수나라 왕조의 2대 황제가 되고 나서 14년째의 일이었다. 양제라는 호칭은 수나라 멸망 후 618년에 당나라 왕조가 서고 나서 붙인 시호인데 폭군임을 상징적으로 나타내는 칭호가 되었다. ‘양’이란 색을 좋아하여 도리를 등지고 백성을 괴롭힌 자에게 붙이는 시호라고 전해진다.
광적인 수집가들, 수양제와 당태종 황제중에는 유달리 수집에 열성을 보인 이들이 있는데 대표적으로 수양제와 당태종을 들 수 있다. 수양제는 애서광으로 널리 알려진 인물인데, 그의 책에 대한 애정은 매우 각별해 다음과 같은 믿지 못할 이야기도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양제 사후 4년째였던 무덕 4년(621년) 당나라 왕조는 양제가 낙양의 관문전에 비밀리에 보관했던 희귀서 8천여 권을 수도 장안으로 옮기게 하였다. 그 무렵, 후일 시인으로 이름을 떨치게 된 상관의는 이상한 꿈을 꾸었다. 양제가 그가 꿈을 꾸는 베갯머리에 서서 ‘어찌하여 내 책을 장안으로 옮기는 것이냐’ 하며 큰소리로 꾸짖었던 것이다. 얼마 지나지 않아 양제의 희귀서적을 실은 배가 장안으로 향했는데, 갑자기 몰아닥친 태풍이 배를 덮쳐 서적은 한 권도 남김없이 유실되어 버렸다. 그런 직후 상관의는 또 양제의 꿈을 꾸었는데, 이번에는 양제가 아주 기쁜 듯이 ‘내 책을 되찾았노라’고 말하였다고 한다.
당나라 제 2대 황제 태종(재위 627년-649년)은 스스로 ‘진서’라는 왕희지전을 쓸 만큼 왕희지의 옹호자였으며 왕희지 글 수집광으로 전해진다. 태종은 왕희지의 글을 남김없이 입수할 것을 명령하여, 2천 2백 90지, 13질, 백 28권에 달하는 방대한 양을 수집하였는데 유감스럽게도 양희지의 최고 걸작이라고 전해지는 난정시서만을 종적이 묘연하였다. 혈안이 된 태종은 난정시서를 수중에 넣으려는 일념만으로 8만 가지의 수단을 동원해 행방을 찾던 끝에 왕희지가 살았던 회계군 산음현 부근의 영흔사에 비밀리에 보관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그러나 영흔사 주지는 이런저런 핑계를 대며 난정시서를 바치려 하지 않았다. 이에 태종은 사람을 시켜 왕희지의 다른 글을 영흔사에 가져가도록 하여 주지를 방심하게 만들고 감쪽같이 속요 난정시서를 빼돌렸다. 숙원을 푼 태종은 이글을 그지없이 아끼다가 자신의 무덤에 묻도록 유언을 했다고 한다.
제 2장 귀족의 사치향락
귀족들의 사치는 황제들의 노골적인 권력 과시형 사치나 상인의 사치에서 보이는 번쩍거리는 화려함, 강렬한 상승욕구 경향을 촌스러움의 극치라고 배타시하였다. 그들은 섬세한 미적 세계를 추구하지만 어딘지 모르게 뿌리에서부터 깊이 병들어 있는 듯한 것이었다. 이것이 바로 세련미를 추구하는 귀족사치의 특성이었다.
궁중의 식사가 맛이 없다. 귀족의 사치가 두드러지게 되는 것은 귀족의 자제들이 역사의 무대에 등장하고 저항파 지식인이었던 선조들에 대한 기억도 흐려지던 서진 시대에 들어서부터이다. 서진왕조는 출발에서부터 전망도 없이 패색이 짙었는데 귀족들은 배금주의에 빠져 사치경쟁에 몰두하였다. 이러한 경향은 서진이 280년 마지막으로 남아있던 오를 멸망시키고 중국 전역을 통일한 뒤 더욱 심해졌다. 사마염(서진의 무제)는 당초 이러한 사치 풍조에 뭔가 제동장치를 마련하고자 했지만, 서진왕조의 창업 일등공신 중 한 사람인 하증까지 사치삼매로 세월을 보내는 모습을 보고 규제를 단념했다고 한다. 하증은 식도락으로 재물을 탕진했는데 구미가 당기는 음식에는 돈을 아끼지 않아 하루에 1만 전을 썼다는 이야기도 있다. 그는 입이 매우 고급스러워 궁중요리까지 맛이 없다며 젓가락도 대지 않을 정도였다. 일이 이 지경에 이르자 무제는 도저히 가망이 없다고 포기하고 오히려 자신도 사치에 몰입, 오나라 궁전에서 데려 온 강남의 미녀들에게 빠져 색을 밝히다가 애석하게도 단명하기에 이른다.
찐 쌀 말린 것을 연료로 사용하다 세상이 온통 사치 풍조의 회오리에 휩싸인 가운데 서진의 귀족들은 모든 방법을 동원해 기발한 사치행태를 연출하면서 세간의 이목을 집중시키는 데 온갖 정열을 쏟았다. 명문귀족들에게 있어 사치경쟁은 가문의 명예를 건 자존심대결이었던 것이다. 위진시대 귀족들의 일화모음집인 ‘세화신어’의 ‘태치편’은 이런 귀족들의 사치행태를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이중 왕개, 석승, 왕제 3인은 사치행각으로 가장 치열한 3파전을 벌인 인물들로 기록되어 있는데 왕개는 무제의 어머니 동생이며, 석승은 서진왕조의 창업공신 석포의 아들, 왕제는 오나라 토벌에 큰 공을 세운 왕혼의 아들로 무제의 사위였다. ‘왕개가 쌀을 쪄서 말린 것으로 밥을 짓자 석승은 양초로 밥을 짓고, 왕개가 푸른 능견으로 안감을 댄 보라색 비단으로 길이 40리(약 16km)가 되는 장막을 만들자, 석승은 50리(약 21km)나 되는 비단 장막으로 대응하였다. 석승이 산초나무를 벽에 칠하자, 왕개는 적석지를 벽에 칠하였다.’
사람 젖으로 키운 돼지 왕제의 다음 일화는 사치의 탐닉이 무엇인가를 여실히 드러내고 있다. ‘왕제는 무제 사마염이 살아 있을 적 자신의 집을 방문하자 그를 대접하는 데 모두 청보석(유리의 옛 이름으로서 당시에는 칠보 중 하나였다)그릇을 사용하고, 백여 명 남짓한 시녀는 전부 비단 바지와 웃옷을 입고 음식물을 손으로 바쳤다. 삶은 돼지고기가 맛과 빛깔이 아주 진하여 여느 맛과 달라 이를 이상하게 생각한 무제가 까닭을 물었다. 그러자 왕제는 사람 젖을 먹이고 있습니다 라고 대답하였다. 무제는 아주 불쾌한 표정으로 식사를 끝내지도 않고 나가 버렸다.’ 서진 귀족들은 이와 같이 값비싸고 진기한 재료를 눈에 띄지 않는 연료, 도료, 사료 등으로 사용하여 소비하는 것이야말로 사치의 진수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이렇게 얽히고 설킨 사치형태가 기묘함의 정도를 더하면서 사치에 물든 귀족들의 감각도 역시 세련에 세련을 거듭하여 이상한 데까지 예리하게 되어 갔다. 한 예로 당시 이름난 식도락가이자 미각의 예민함을 대표하는 인물로 순욱이란 이가 있었는데 어느 날 그는 무제의 연회석상에서 죽순을 먹고 밥을 청했다. 그는 같은 자리에 있던 사람들을 향해 이렇게 말했다. "이것은 오래 써서 낡은 나무를 장작으로 만들어 지은 것이다." 사람들은 믿지 못하고, 몰래 사람을 시켜 조리장에 가서 물어보게 하였는데 실제 오래된 마차의 각목을 사용하고 있었던 것이다.
중국 제일의 수전노 왕융 서진 시대의 귀족들 사이에는 석승 등으로 대표되는 상상을 초월하는 사치경쟁을 벌이는 부류가 있는 반면, 돈 모으기에 혈안이 되어 축재와 재산증식에 광분한 수전노 귀족이 또 하나의 부류를 형성하고 있었다. 당시 귀족사회에는 화려하게 재산을 날려버리는 자, 오로지 모으기만 하는 자, 어느 쪽이건 ‘돈이 있으면 날개가 없어도 날 수 있고 발이 없어도 달릴 수 있다’는 식으로 노골적인 배금주의 논리가 판치고 있었다. 이에 편승한 인물로 과거 죽림칠현의 한 사람인 왕융이 있었는데 ‘세화신어’ 검색편은 수전노 왕융의 모습을 선명하게 묘사하고 있다. ‘사도 왕융은 집과 대지, 소 치는 사람, 기름진 논, 수력제분기 같은 재산이 아주 많아 낙양에서 견줄 만한 자가 없었다. 증명서와 장부 정리에 쫓겨 언제나 부인과 함께 등불 밑에서 주판을 놓았다. 하지만 그는 매사에 인색하였다. 부리던 아랫사람이 결혼할 때 홑옷 한 장을 선물했는데 후에 새삼스럽게 그 대금을 청구할 정도였다. 왕융은 집뜰에 심어져 있는 오얏나무의 열매를 비싼 값에 팔곤 했는데, 다른 사람이 씨앗을 입수하면 장사는 끝이라고 생각하고 항상 오얏열매의 중심 부분에 송곳으로 구멍을 뚫어 팔았고, 딸이 시집 갈 때 사돈댁에 수만 전을 빌려주었는데 돈을 갚기 전까지는 친정 나들이 온 딸을 외면하였다.’
곡물이 없으면 고기죽을 먹으면 된다. 서진왕조는 성립 당초부터 불안정한 체제였는데 모든 사람들 눈에 그 기반의 취약함이 훤히 들여다 보였다. 귀족들은 위진 시대의 교체기에 받은 정신적 상처와 아무리 애를 써도 눈사태처럼 무너져 가는 시대의 흐름을 막아낼 수는 없다고 판단하여 현실도피 충동에 사로잡힌 채 추상적인 유희에 몰입하였다. 따지고 보면 재산증식이나 사치경쟁도 그 일각에 불과하였다. 무엇보다 무제의 뒤를 이은 장남 혜제의 우둔함은 최대의 악재였다. 혜제는 내란과 더불어 토지가 황폐해져 백성이 잇따른 굶주림으로 죽어가고 있다는 보고를 받자 이상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곡물이 없으면 어째서 고기죽을 먹지 않느냐’고 물었다는 일화가 있을 정도로 참으로 어이없는 인물이었다. 결국 서진은 내란이 수십년 간 계속되어 거의 괴멸상태에 이른 시점에서 북방 이민족의 침입을 받고 명맥을 다해 마침내 멸망하기에 이른다.
제 3장 상인의 사치향락
청대의 염상 염상은 명,청대의 관허 소금상인을 이르는 말로, 청나라 초기에 양주의 염상이 양회의 염해 지대에서 사들여 장사한 해염의 양은 매년 10억 근이나 되었다고 한다. 말할 필요도 없이 양주에 있는 염상 중에는 금은을 진흙과 모래처럼 하찮게 여기는 재산가가 많았다. 그들은 1천만 냥 이상의 재산을 가져야 비로소 부상이라 부르고 백만 냥 이하인 자는 논의대상에서 제외하고 모두 통틀어 소상이라고 일컬었던 것이다. 중국의 유명한 연애소설 금병매의 주인공인 서문경은 거부로 통했는데 그 재산이 10만냥 정도였다고 하니 그의 재산은 결국 이들 염상들에 비하면 소상 순위에도 들지 못할 정도였다. 부유한 염상의 사치 규모는 엄청나게 커서 눈이 휘둥그레질 만하다. 의식주에 돈을 쏟아부어 맘껏 사치를 부렸는데, 양주의 어느 식도락가인 염상은 식사 때마다 데리고 다니는 고용 요리사에게 열 몇 가지 종류의 코스 요리를 준비시키고, 테이블에 한 코스씩 죽 늘어놓게 하고는 마음에 들지 않으면 가볍게 머리를 흔든다. 그러면 즉시 그것이 거두어지고 다시 다음 열 몇 가지 코스가 죽 차려지는 식이었다고 한다.
황제도 놀란 강춘의 접대 물질적 사치 면에서 염상이 가진 부의 저력이 유력없이 발휘된 것은 뭐니뭐니 해도 황제를 대접할 때였다. 양주의 염상이 번영의 극에 달한 것은 18세기 청조 제 4대 황제인 강희제(재위 1661년-1722년) 후기부터 제 5대인 옹정제(재위 1722년-1735년)를 거쳐 제 6대 건륭제(재위 1736년-1796년)에 이르기까지의 기간이다. 그 존재 형태로 보아 조정 안의 상인이었기에 부유한 염상은 조정에 막대한 세금을 납부한 것 이외에도 거의 매년 토목공사, 군비 등의 명목으로 몇 만 냥, 몇 십만 냥, 화려한 경우에는 몇 백만 냥에 달하는 기부금을 조정에 헌납해왔다. 더욱이 빈번하게 수행된 황제의 남순(강남순유) 때에는 그 비용을 부담할 뿐 아니라 대대적으로 접대하는 데 쓰일 호화로운 정원까지 건조하여 오로지 황제가 좋은 인상을 받도록 하는데 집중되었던 것이다. 그 중에서 1753년 건륭제가 남순길에 올랐을 때 대염상 강춘이 접대는 전설적이었다. 이 때 강춘은 건륭제의 양주 체재비용 일체를 부담한 외에도 아낌없이 재물을 써서 건륭제를 놀라게 만들었다. 양주의 대흥원을 방문했을 때 건륭제는 어떤 장소에서 걸음 멈추고 측근을 돌아보며 "여기는 북경의 남해의 경도춘음과 아주 흡사한데 백탑(라마탑)이 빠져 있는 것이 애석하구나"하고 말했다. 이를 전해들은 강춘은 즉시 황제의 측근에게 몰래 일만 냥의 뇌물을 주어 백탑의 설계도를 입수, 대규모의 인부를 동원하여 벼락치기 공사를 강행, 하룻밤 사이에 백탑을 완성시켰다. 다음날 다시 대흥원을 찾은 건륭제는 이것을 보고 깜짝 놀라. 헛것을 보는 게 아닌가 하고 만져보다 진짜인 것을 알고 더욱 놀라며 "염상의 재력은 과연 대단하구나"하고 감탄했다는 것이다.
폐허가 된 염상의 꿈 그러나 그토록 호사스러움을 자랑한 양주 염상의 영화도 오래 지속되지는 못했다. 18세기를 정점으로 하여 이후 쇠퇴의 외길을 걷게 되는 것이다. 해마다 조정에 납부하지 않을 수 없었던 기부금이 서서히 염상의 경영기반을 붕괴시키고 있었던 데다 자칭 ‘문화예술의 후원자’로서 지나치게 재산을 소비하고 초호화판으로 생활했기 때문에 양주 염상의 영화도 종말을 고하게 된 것이다.
제 4장 사치향락의 블랙홀
1. 환관의 저주받은 사치
스스로 거세하는 사람들 환관이란 새삼 말할 필요도 없이 거세함으로써 남성 기능을 상실한 지극히 인공적인 존재이다. 중국 역사상 환관의 탄생은 3천 년 전인 은나라 왕조 시기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그 이후 20세기 초의 청나라 왕조가 멸망할 때까지 환관은 면면히 존속해오고 있었다. 당초 환관의 시초는 정복한 이민족 포로나 죄수를 거세하여 궁정 내부에서 사역한 데서 비롯되었는데 시대가 바뀌어 그 세력이 점차 강해지자 '자궁(스스로 거세하는 것)'하여 환관이 되기를 자처하는 자가 증가하였다. 남성 기능을 상실하고 있기 때문에 후궁의 거처에 출입할 수 있도록 허용된 환관은 황제의 혼란스러운 사생활의 공범자가 되어 어느덧 황제를 음으로 조종하는 어두운 권력을 손에 넣게 된다. 왕조가 아무리 교체되어도 절대권력자로서의 황제가 존재하고 후궁이 있는 한 어두운 권력자 환관도 역시 계속 존재한다는 구조이다.
무덤 만드는 취미 후한은 시종일관 외척과 환관의 헤게모니 싸움에 농락당한 왕조였다. 환관의 우위가 결정적이게 된 것은 후한 제 11대 황제 환제(재위 146년-167년) 때이다. 환제는 맹위를 떨치는 외척 양기 일족을 일소하기 위해 단초, 좌관, 서황, 구원, 당형 등 다섯 환관의 힘을 빌었다. 이 다섯 환관은 비밀리에 일을 꾸며 근위군단을 움직여 일사천리로 양가 일족을 일망타진하였다. 이렇게 되자 이제는 천하가 그들의 것이었다. 단초 등 다섯 명의 환관은 그 공적에 의해 제후에 봉해지고 오후라고 불렸다. 일족 가신을 수입이 좋은 지방관리직에 앉혀 권세를 휘둘러 뇌물도 잡히는 데로 받는 형국이었다. 이렇게 하여 제 욕심을 채운 끝에 다투어 호화로운 저택을 짓고 기르는 개나 지니고 있는 말까지 금은이나 새털로 장식하여 사치 삼매경에 빠졌던 것이다. 환제 시대에는 이 다섯 명 이외에도 후람이라는 환관도 또한 권세를 휘둘렀다. 그 수법은 다른 사람의 주택 3백 81채, 전답 1백 18경(약 5백 41헥타르)을 빼앗은 다음 궁전에 버금가는 호화장대한 대저택을 짓는 등 참으로 악랄한 것이었다. 그러나 이에 만족하지 않고 후람은 막대한 비용을 들여 당당한 규모를 가진 분묘를 건조하였다. 환관은 유산을 남길 자손을 만들 수 없기 때문에 온갖 재산을 동원하여 장지와 분묘를 꾸미는 데 열중하였다. 후람은 결국 탄핵받아 자살했지만 환관집단의 발호는 점점 극심해질 뿐이었다.
뇌물이 생명 환제를 이어 제위에 오른 영제는 즉위하자마자 환제가 남긴 재산이 너무나 적은 데 실망하고 즉시 궁궐 문에 표찰을 내걸어 관직을 팔게 하는 등 대대적인 매관매직 사업을 수행하여 열심히 축재에 매달렸다. 물론 그는 물론 놀기도 좋아했는데, 이 유희 방식도 특색이 있었다. 모의 점포를 죽 만들어 후궁에게 늘어서게 하고 궁녀들을 장사치로 세운 다음 자신도 상인으로 분장하여 놀았다고 한다. 이런 무능한 황제를 끼고 환관의 세력은 나날이 강성해졌는데 당시 세력을 쥔 환관은 조충, 장양, 하운, 단규, 송전 등 '십상시'라고 불리는 자들이었다. 영제는 그들을 친애하여 평상시에 "장상시(장양)은 나의 아버지, 조상시(조충)는 나의 어머니이다"라고 공언할 정도였다. 이런 형편이므로 십상시는 더욱더 기세등등해져 모두 궁전에 버금가는 대저택을 갖추었으며 그 사치스러움은 상상을 초월하였다. 한번은 영제가 궁중의 망루에 오르고 싶다고 하자, 당당하게 우뚝 솟은 자신들의 호화저택을 보는 것이 두려워진 환관은 "천자는 높은 곳에 올라서는 아니되옵니다"라고 구슬렸다고 한다. 이들 환관의 주된 재원은 말할 필요도 없이 뇌물이었다. 이 환관의 뇌물을 둘러싸고도 희비극이 벌어지곤 했다. 맹타라는 재산가가 벼슬길에 입문하고 싶어 십상시의 한 사람인 장양에게 환심을 사려고 연줄을 찾아 장양의 노비들에게 오랜 기간 동안 거액의 뇌물을 주었다. 그러나 맹타는 뜻을 이루지 못하고 결국 파산하고 말았다. 미안하게 생각한 노비들이 뭔가 은혜를 갚고 싶다는 의사를 표시하자 맹타는 "너희들은 머리 숙여 절만 하라"고 말했다. 당시 장양의 집 앞은 언제나 면회를 청하는 자들의 수레가 몇백 대나 줄을 지어 기다리고 있었으며 며칠을 기다려도 장양을 보지 못하는 자가 부지기수였다. 어느 날 맹타의 수레가 마지막으로 다가오자 장양의 노비들이 일제히 맹타에게 절을 하고 다른 수레를 제치고 즉시 맹타의 수레를 선도하여 한 대만 안으로 불러 들였다. 이 모양을 지켜본 수많은 면회자들은 깜짝 놀라 맹타가 장양과 특별히 친한 사이라고 생각하고 다투어 맹타에게 진귀한 물품들을 바치게 되었다. 맹타는 이 모든 것을 장양에게 바치니 크게 기뻐한 장양은 맹타를 양주 장관에 임명했다. (이 맹타의 아들이 후일 변신의 달인으로 불리는 삼국지의 맹달이다)
고역사가 있기에 안심하고 잘 수 있다 당나라 또한 환관이 맹위를 떨친 시대였다. 이 왕조에서 환관 전횡의 계기를 만든 것은 양 귀비와의 비련으로 유명한 제 6대 황제 현종(재위 712년-756년)의 총애를 한 몸에 받은 환관 고역사였다. 고역사는 원래 영남(광동성) 출신이며 698년경 영남의 소수민족 반란을 진압한 당나라 왕조의 장군에 의하여 측천무후(재위 690년-705년) 밑으로 보내진 것이 그 궁정생활의 출발이었다. 자세한 것은 알려져 있지 않지만 고역사는 궁정에 들어오기 전 소년 시절에 이미 거세되었던 듯하다. 총명한 고역사는 당황실 내부의 피비린내나는 권력투쟁시기동안 시종일관 현종에 협력하여 그를 황제로 옹립하는데 최대 공로자가 되었다. 현종도 고역사를 절대적으로 신뢰해 각지에서 조정에 도착하는 상소문도 우선 고역사가 훑어 보고 하찮은 것은 단독으로 처리하고 중요한 것만 현종의 결재를 받는 형국이었다. 현종은 평소에 "고역사가 수반이 되어 일을 처리해 오기 때문에 나는 안심하고 잘 수 있다"고 하여 그의 유능함에 크게 만족하고 있었다고 전해진다.
쓰면 쓸수록 재산이 늘어난다? 이토록 신임을 받고 있었기 때문에 고역사는 출세를 노리는 아첨가들의 절호의 표적이 된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양귀비의 오라비 양국충이나 반란을 일으킨 안록산 등도 처음에는 그에게 아첨하여 발판을 마련한 패거리였다. 고역사의 세력이 얼마나 강했는지를 보여주는 예는 셀 수 없을 만큼 많다. 고역사는 여현오라는 말단 관리의 미모의 딸을 아내로 맞아들였다. (환관이 아내를 갖는다는 것도 묘한 이야기이지만 후한 이래 환관이 아내를 갖는 것은 다반사로 일어나고 있던 일이다.) 이 덕택에 여부인의 아버지 여현오가 일약 자사(주의 장관)로 발탁된 것을 비롯하여 그 일족은 빠짐없이 고위관직을 얻었다. 또한 여부인이 사망한 때 장례식의 화려함은 전대미문으로 조정 안팎을 막론하고 고관들이 하나도 빠짐없이 참례하니 그 수레와 말의 행렬이 고역사 집 뜨락에서부터 묘지까지 이어질 정도였다고 한다. 고역사의 재산은 왕후를 능가할 정도여서 호화찬란한 ‘보수불사’라는 불교사원 및 ‘화봉도사관’이라는 도교 사원을 자력으로 건립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아무리 펑펑 써도 그의 재산은 조금도 줄어들지 않고 더욱더 늘어나는 구조가 되어 있었다. 예를 들면 보수사에 커다란 종을 설치하자 그 종을 개종하는 것을 축하하러 수많은 고관이 몰려들어 평상시에는 한 번 치고 축의금 10만 전을 내던 것이 관례가 되어 있었는데 스무 번이나 치는 자가 있었기 때문에 모두 지지 않으려고 계속 종을 울려 적게 친 사람도 열번을 쳤다고 한다. 거액의 축의금이 이렇게 하여 고역사의 품으로 굴러들어간 것이다. 게다가 그는 대규모 제분 공장을 경영하여 여기서도 막대한 이익을 거두고 있었다.
권력의 역전 40여 년에 걸친 현종의 재위기간 중에 고역사에 대한 현종의 총애는 사그라질 줄을 몰랐다. 그것은 고역사가 부귀영화의 극을 누리면서도 어디까지나 현종에 대해서는 충실함을 다하고 한도를 넘어서 결코 주제넘는 행위를 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현종과 고역사의 이인삼각은 결국 파국을 맞이하게 된다. 만년의 실정이 꼬투리가 되어 안록산의 반란이 일어나자 현종은 수도 장안을 탈출, 도피길에 올랐는데 이때 고역사는 황제를 성도까지 수행하고 이듬해인 756년 안록산의 난이 평정된 뒤 이미 퇴위하여 상황제가 된 현종과 함께 장안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769년 숙종(현종의 3남, 756년 현종에 이어 즉위하였다)의 환관으로서 세력을 키운 이보국의 조종으로 검중(귀주성)에 유배되기에 이른다. 763년 숙종이 죽은 후 고역사는 겨우 사면되었다. 그는 장안으로 돌아오는 도중에야 비로소 자신이 유배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현종이 사망했음을 알고 북쪽을 향하여 통곡하다가 피를 토하고 죽었다. 그의 나이 79세였다.
그림자 내각 원나라 말기 혼란을 수습하고 명 왕조를 설립하여 황제 독재체제를 확립한 주원장(재위 1368년-1398년)은 역대 왕조가 환관들로 인해 약체화한 것을 거울 삼아 환관이 정사에 관여하는 것을 엄금하였다. 그러나 그토록 환관을 경계한 주원장조차 환관을 완전히 배척한 것이 아니라 몇백 명은 남겼을 정도로 황제에게 환관은 필요악 같은 존재였다. 결국 주원장의 유훈은 흐지부지 사문화되고 만다. 주원장 사후에 2대 황제가 된 조카 건문제(재위 1398년-1402년)를 멸망시키고 3대 황제의 자리에 오른 영락제(재위 1402년-1424년)는 찬탈자라는 열등감으로 인해 관료를 신뢰하지 않고 환관을 중용하였다. 직접적으로는 이것이 명 왕조의 고질병이라고 할 만한 환관 전횡의 계기가 된 것이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환관의 세력은 날로 강력해져 제 5대 선덕제(재위 1425년-1435년) 때에는 '사례감'이라는 환관내각제도가 정비되어 완전히 제도화되었다. 그 이후 점차로 절대권력자인 황제와 밀착한 환관들의 그림자 내각이 고급관료로 구성된 표면의 내각보다 우세한 힘으로 정국을 좌우하게 되었다.
검은 부부의 음모 명나라 멸망이 임박한 시기인 제 16대 황제 천계제(재위 1620년-1627년)때 최악의 환관이출현한다. 바로 위충현(1568년-1627년)이다. 위충현은 젊었을 때 방탕무뢰하였는데 수시로 도박에 져 놀림감이 되자 화가 머리 끝까지 올라 충동적으로 거세하고 환관의 길을 걷기로 작심하였다. 만력 연간(1573년-1620년)에 선발되어 궁중에 들어가 마침내 황제의 장손인 주유교, 즉 뒷날 천계제의 생모인 왕부인의 전선(식사를 주관하는 직책)이 되었다. 성불능자인 환관은 성적 결함의 대체행위로서 식도락에 빠지는 경우가 많았는데 그 특기를 살려 궁중 요리를 담당하는 환관들이 꽤 있었다. 신분이 높은 환관은 요리 솜씨가 뛰어난 환관을 요리사로 고용해 쌀은 물론 기름, 설탕간장, 식초 등 조미료를 음미하여 풍성한 식생활을 즐기며, 그렇게 단련된 미각으로 황제용 요리를 담당했다고 전해진다.
사대부 콤플렉스 출세의 줄을 잡은 위충현은 배신과 모략속에서 결국 권세를 잡는데 성공했다. 두려운 사람이 없어진 위충현은 환관 내각의 헤게모니를 장악하고, 정보기관 동창을 자신의 지배아래 두어 전대미문의 공포정치를 단행하기에 이른다. 무뢰배 출신의 위충현은 문맹이었는데 이 약점을 보충하고도 남음이 있는 대단한 기억력의 소유자였다. 그래서 짬만 나면 자기에게 적대적인 태도를 보인 관리의 이름을 뇌리 속에서 되살려내어 증오심을 불태우고 가장 효과적인 보복 수단을 생각하고는 즐거워했다. 설사 그 대상이 이미 세상을 떠난 인물이라고 해도 일단 기억의 밑바닥에서 되살아 나오면 위충현은 그들의 자손에게 철저하게 복수하고 파산으로 내몰아갔다. 위충현은 나아가 자신에 대한 비판을 봉쇄하기 위해 전국적으로 펼쳐져 있던 동창의 정보망을 적극적으로 활용하였다. 관료는 물론이고 서민조차 떠도는 소문 속에서 조금이라도 위충현을 비판하면 첩자에게 붙잡혀 손이 뒤로 묶이고 가혹한 형벌에 처해지는데 몸의 가죽을 벗기거나 혀를 뽑아내곤 했다. 도읍 북경에서 멀리 떨어진 요양(요녕성)의 사창가에서 어떤 사내가 무심코 비판적인 말을 했다가 즉각 동창에 체포되었다는 예를 보아도 그 첩보망의 위력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악의 조직화라는 점에서 위충현은 두려워할 만한 재능의 소유자였던 것이다.
신이 된 환관 유모인 객씨의 치마폭에서 헤어나지 못했던 천계제는 매사에 유아성을 탈피하지 못했다. 그가 제일 즐긴 것은 목공예품을 만드는 것으로 일단 목공을 설계하기 시작하면 그 일에 열중하느라 그밖의 일에는 완전히 무관심해져 버렸다. 위충현은 항상 교묘하게 이 틈을 보아 임금에게 일을 아뢰었다. 그러면 황제는 귀찮다는 듯이 "알아서 하시오, 좋도록 하시오"라며 제대로 이야기를 들으려고도 하지 않았다. 황제가 정치에는 무관심한 채 태평스럽게 '아이들 장난'에 빠져 있을 동안에 위충현은 안팎의 대권을 한 손에 장악했다. 그는 자신을 호위하기 위해 3천명의 환관 군단을 조직하여 궁중에서 군사훈련을 실시, 위력을 과시하였다. 더구나 자신도 항상 완전무장하고 궁중내에서 말을 타고 다녔는데 심지어는 황제의 면전에서도 말에서 내리지 않았다고 한다. 멀리 외출할 때의 위풍당당하고 화려한 행렬은 황제와 견줄 정도이고, 그가 통과하는 곳에서는 관리들이 두 손을 땅에 짚고 머리를 숙여 절하고 제각기 '9천세'라고 환호하였다. (황제에게만 '만세'라 할 수 있기 때문에 자신은 천세만 줄인 것이다) 위충현에 대한 환호는 결국 '9천9백세'까지 격상되었다. 위충현에 대한 아첨은 그 끝이 없어 심지어는 살아있는 그를 모시는 '생사'를 세우는 풍조가 전국 각지에 퍼졌다. 아첨하는 사람들은 위충현의 그림과 조각앞에서 '9천9백세'라고 환호를 했다고 한다. 한통속인 객씨는 '지아비' 위충현의 눈부신 진출에 크게 공헌하였다. 그녀는 천계제의 총애가 다른 데로 옮아가는 것을 경계하여 황후에서부터 후궁 여성들에 이르기까지 황제의 아이를 임신하기만 하면 잇달아 연금시키거나 살해하여 그 싹을 도려냈다. 그래서 천계제는 결국 후손을 두지 못했다고 한다. 그들에게 궁중은 자기집과 매한가지였다. 서원의 연못에서 뱃놀이를 했을 때 위충현과 객씨가 호화로운 큰 배에 타고 느긋하게 연회를 연 것에 비해 천계제는 두 명의 젊은 환관을 대동했을 뿐이고 조심스럽게 작은 배에서 놀고 있었다. 돌풍이 불자 위충현의 큰 배는 꿈쩍도 하지 않았지만 나룻배 같은 황제의 작은 배는 맥없이 뒤집어져 환관 두 명은 모두 익사하고 황제도 겨우 목숨을 건졌다고 한다.
왕조의 멸망을 앞당긴 악인 그러나 환관은 환관, 어차피 황제에게 기생하는 존재에 불과했다. 위충현 부부가 자가약농지물(자기 집 약 상자 속에 든 약처럼 아무 때나 쓸 수 있는 사물)처럼 여기고 있던 천계제가 사망하고 그 아우인 숭정제(재위 1627년-1644년)가 즉위하자 위충현은 유형에 처해져 자살하고 객씨도 몽둥이로 죽이는 봉살형에 처해졌다. 위충현이 권력을 장악한 것은 결국 7년 남짓이었다. 그러나 이 악의 화신인 환관이 지배했던 광기의 시간은 이미 피폐의 도를 넘은 명 왕조를 순식간에 붕괴의 늪으로 끌고 갔다. 명나라 멸망 직전에 자금성에 있던 환관의 총 인원은 일설에 따르면 10만 명에 달했다고 한다. 명의 시조인 홍무제(주원장) 당시 수백 명이었던 것과 비교하면 약 2백 배가 되는 수치였다.
2. 늙은 부처 서태후
중국 최후의 왕조가 된 청(1644년-1911년)은 이민족 왕조로서 긴장감이 강하고, 황제 중에도 우수한 인물이 많았다. 이 때문에 역대 왕조의 어리석은 황제들처럼 물불을 가리지 않는 사치에 빠져 금세 무능력자가 되어 종말을 맞은 예는 보여지지 않는다. 그러나 어떤 왕조에서건 대를 거듭할 때마다 엔트로피가 괴어 마침내는 어처구니가 없는 도깨비 같은 존재를 배출하여 자멸하곤 하였다. 청 왕조의, 아니 유사 이래 이어진 왕조시대의 막을 내리게 하는 악역으로서 등장하는 것이 저 악명 높은 서태후(1835년-1908년)다. 만주 기인이라는 하급관리의 집안에서 태어난 서태후는 키가 1백 75센티의 야무진 미모의 소유자였다. 만주족이므로 물론 전족도 하지 않았다. 빼어난 미모에다 교양수준도 높아 16세 때에는 오경은 물론, 사실 여부는 불분명하지만, 역대의 정사인 이십사사까지 통독하고 있었다고 전해진다. 그녀는 1852년, 18세 때 후궁으로 선택되어 궁정으로 들어가 청조 제 9대 황제인 함풍제(재위 1850년-1861년)의 사랑을 받아 1856년, 황제의 장자인 재순(뒤에 동치제)를 낳는다. 이것이 그녀의 지위를 비약적으로 높였음은 말할 나위가 없다. 게다가 내우외환에 시달리다 점차로 현실도피적으로 변한 함풍제가 유능한 서태후에게 정무를 맡기게 되니, 이를 기화로 그녀는 강렬한 권력욕을 공공연히 드러내 정치의 중앙무대에 뛰어들었다.
사치의 국제화 중국 최후의 왕조 청나라와 운명을 함께 한 서태후는 결국 3천여 년 동안 이어져온 황제적 사치향락을 총결산한 인물이기도 하였다. 물론 그녀가 황제는 되지 못했지만 실질적으로는 황제와 마찬가지였던 것이다. 그녀는 궁중의 여자 관리나 환관에게 자신을 '노불야'(부처님이라는 뜻)라고 부르게 하고, 광서제에게는 '친파파(아버지)'라고 부르도록 했다는 점으로 볼 때, 원래 남자이고 싶어한 여성으로 볼 수 있다. 그러므로 그 사치 스타일도 과거의 어느 황제에게도 뒤지지 않는 장대한 것이었다. 중국 사치향락사의 핵심요소는 정원, 식사, 연극 등 세 가지로 이야기되는데 이 중 어느 면에서나 서태후는 최고의 수준을 자랑하였다. 1888년 북경 교외 만수산 기슭 곤명호 부근의 풍광 뛰어난 곳에 화려함을 집결시켜 놓은 듯한 별궁 이화원을 조경했는데, 여기에다 전기도 끌어들이는 등 과거 어느 황제의 정원보다도 훨씬 쾌적하게 조성했다. 이를 크게 흡족해 한 서태후는 엄동설한에 자금성으로 되돌아가는 이외에는 모두 이곳에서 지냈다고 한다. 이화원을 건조하는 데는 2천만 냥이라는 막대한 비용이 들었다. 이것은 1874년에 창설된 세 개의 해군용 군사비를 유용함으로써 충당되었다. 당시 열강과의 전쟁에서 계속 패한 것도 무리가 아니었던 것이다. 서태후의 식도락은 가히 전설적이었다. 이 방면에서 이름을 날린 건륭제도 얼굴을 붉힐 정도였다. 서태후 전용 부엌에는 항상 수백 명의 요리사들이 최고의 요리기술을 응축시켜 요 리를 만들었다. 그녀는 하루 네 번씩 식사를 했다고 하는데 그 중 두 번이 정찬이며 이 때는 1백 그릇의 요리가 차려졌다고 한다. 오정격 편저 '만족식속여청궁어선'(1988년 요녕과학기술출판사 간)에 인용된 자료에 의하면, 서태후의 식사를 위해 규정으로 다음과 같은 재료가 매일 준비되어 있었다. 반육 50근, 멧돼지 1마리, 양 1마리, 노황미 1되 5합, 강미 3되, 갱미면(멥쌀국수) 3근, 백면(흰 국수) 15근, 교맥면(메밀국수) 1근, 밀가루 1근, 완두 3합, 참깨 1합5작, 백당 2근 1냥 5전, 분당 8냥, 봉밀(벌꿀) 8냥, 호도열매 4냥, 송인(소나무 열매) 2냥, 계란 28개, 구기자 4냥, 이 밖에 연와(제비집), 어시(생선 지느러미살), 은이(목이버섯) 등이 적당량 준비된다. 물론 서태후가 이것을 모두 먹는 것이 아니라 그 중 서너가지에만 손을 댈 뿐 나머지는 쳐다보지도 않는다. 손을 대지 않은 채 물려나온 요리는 그대로 버려졌기 때문에 엄청난 낭비가 아닐 수 없다. 연극도락도 매우 뛰어나 민간 극단을 자주 불러 공연하도록 한 것을 물론이고 궁중에서 '남부성반'이라는 고용극단을 만들어 배우를 양성하는가 하면 경극을 몹시 좋아하여 수시로 그들에게 상연하게 하고 즐겼다. 이밖에도, 만주 귀족의 딸로서 단기간이지만 만년의 서태후를 받든 경험이 있는 덕령(1898년-1944년)의 회고록에 따르면, 희귀한 것을 좋아하는 서태후는 러시아 서커스단을 이화원으로 불러 구경한 적도 있었다고 한다. 시대가 시대인 만큼 사치에도 국제화 물결이 밀어닥쳤던 것이다. 덕령은 프랑스 공사로 부임한 아버지와 함께 4년 동안 파리에 주재한 적도 있어 영어와 프랑스어에 뛰어났다. 당시로서는 드물게 서구적인 교양을 갖춘 이 여성을 특별히 본 서태후는 그녀에게 영어를 배우려 한 적도 있지만 불과 두 달을 하다가 포기하고 말았다고 한다.
의식 비용이 국가수입의 6분의 1 만사에 화려함을 좋아한 서태후가 특별히 그 사치충동을 폭발시킨 것이 지금도 이야깃거리가 되고 있는 것은 1894년 11월 29일 그녀의 60세 생일잔치였다. 청일전쟁이 발발한 시기에 그녀는 의복, 장신구, 연회 등등을 위해 모두 1천만 냥 남짓한 비용을 썼다고 한다. 이 금액은 청나라 국가 세입의 6분의 1이나 차지할 정도로 막대한 것이었다. 그 60세 생일에는 온갖 취향을 총합한 향연을 벌였는데 그 중 극치는 서태후의 분신이라 할 만한 환관 이연영이 계획한 방생 의식이었다. 이것은 새장에서 새를 일제히 놓아주는 것으로, 서태후를 위해 음덕을 베풀고자 하는 시도였다. 당일 방생을 하자 새장에서 놓여난 새는 창공으로 날아갔는데 그 중 몇 마리인가가 되돌아 왔다. 의심스러워하는 서태후에게 이연영은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노불야의 은덕을 사모하여 새도 날아가지 않는 줄로 아옵니다." 자존심이 세워진 서태후가 크게 기뻐했음은 말할 필요도 없으리라. 여기에는 내막이 숨겨져 있었는데, 교활한 이연영은 미리 부하 환관에게 명하여 놓여나도 즉시 돌아오도록 비밀리에 새를 훈련시켜 두었던 것이다. 게다가 날아간 새도 서태후의 시야가 미치지 않는 언덕 뒤에 내려앉도록 훈련시켜 새가 내려오기를 기다리고 있다가 붙잡아 곧바로 팔아버릴 계획을 꾸미고 있었다. 서태후의 사치가 왕조 최후의 정수를 응결할 것이라고 한다면, 왕조의 부속물인 환관의 아첨 기술 및 이익 추구 기술도 더할 데 없이 정련돼 있었다고 해야 할 것이다. 서태후가 권력투쟁에 승리하는 데 훌륭한 동반자가 된 환관 이연영은 원래 멋부리기를 좋아했던 서태후의 '소두태감'(머리를 빗어주는 계통의 환관)이었다. 사내가 되고 싶어했던 서태후가 멋을 부렸다는 것도 좀 묘한 느낌을 주지만, 그녀는 매우 자의식 과잉이었기 때문에 의복, 액세서리에 집착하여 외양을 화려하게 꾸몄다고 한다. 그런데다 외제 화장품이나 향수를 너무 많이 쓰는 바람에 옆에 가면 머리가 아풀 지경이었다고 덕령은 술회하였다. 이런 상황이었기 때문에 젊었을 때부터 헤어스타일에 이상할 정도로 신경질적이어서 소두태감이 빗은 머리를 늘 마음에 들어하지 않았다. 출세의 야망에 불탄 이연영은 여기에 착안하여 북경 안의 유곽을 모조리 뒤져 기녀들간에 유행하고 있는 헤어스타일을 연구해 솜씨를 닦아 서태후의 머리를 빗어올렸다. 이를 계기로 서태후의 총애를 받게 된 이연영은 이후 서태후가 죽을 때까지 궁중에서 절대적인 권세를 누리게 되었다. 이와 관련하여 덕령은, 이연영이 너무나도 악질의 잔인한 사내였다고 증언하고 있다.
역사의 '저주받은 존재' 서태후는 역대 황제들이 역사의 어둠 저편으로 사라져 그 풍모조차 분명치 않은 것과는 달리 1백 매 이상의 사진을 남겼다. 그 대부분은 1903년 70세 생일을 앞두고 찍은 것인데 촬영한 사람은 덕령의 둘째 오빠이다. 자의식 과잉이던 서태후는 이 문명의 이기에 몹시 호기심을 보였다. 그녀는 촬영할 때 분장하는 것을 특히 좋아해 기묘하게도 스스로 '대자대비 관음보살'로 분하여 '위타천'(불법 수호신 중의 하나)으로 분장한 이연영 등을 대동하여 카메라 앞에 서기도 하였다. 이 사진들에서 보여지는 서태후는 오히려 비장함까지 엿보이는 험한 표정이 특징적이다. 국비를 쏟아부은 사치도 결국 권력욕에 사로잡힌 그녀의 마음을 결코 온화하게 하지는 못했음을 보여주는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