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고구려는 한강유역에 큰 성을 축조하지 않았을까?

미연시다운족 작성일 07.01.18 18:04: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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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서 보관하고있던 자료입니다. 한번 역사적인 도움이 되시길..빕니다.

우리나라에는 세계문화유산이 될 만한 것들이 많이 있다.
그런데 얼마전 중국과 북한에서 고구려 유적과 유물을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하는데 성공하자,
우리나라에서도 아차산에 있는 고구려 군사유적지들을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하자는 논의가 나왔다. 전문 연구자들 조차 아직 15개소 정도의 고구려 보루 가운데 제대로 발굴된 것은 시루봉과 아차산 4보루, 그리고 현재 발굴진행중인 홍련봉 1보루 정도인데, 무슨 세계문화유산 등록이냐고 되묻기도 할 정도이니, 세계문화유산 등록은 먼 훗날의 일이다.
지차제의 지나친 소망과 언론을 등에 업고 인기 발언을 일삼는 인간들 탓에 이와 같은 일들이 벌어진 셈일 뿐이다. 솔직하게 인정할 것은 인정하자. 남한 지역내에 고구려 유적은 중원고구려비, 호루고루를 비롯한 임진강 유역의 군사유적지, 그리고 아차산 유적지 등을 제외하면 내세울만한 것이 없다.
고구려 고고학자인 심광주 토지박물관 연구실장의 경우는 엄격한 잣대를 들이댄다. 남한 내에 고구려 유적지이라고 주장되어 왔던 포천 반월산성이나, 광주 이성산성의 경우에도 고구려의 흔적이라고 할 만한 것이 없다며, 고구려 유적에서 제외시킨다. 포천 반월산성에서 출토된 토기도 고구려 토기라는 주장도 간단하게 통박한다. 그의 견해는 고구려를 냉정히 바라보게 만든다.
또 중원고구려비에 등장하는 국원성(명칭을 풀어보면 고구려 남부의 중요한 중심도시 정도로도 볼 수 있다)의 위치도 온달산성, 장미산성 등 여러 이야기가 나오기는 했지만, 사실 남한강 유역의 어느 성도 고구려인이 쌓았다고 자신있게 주장될 만한 것이 없다.
그렇다면 삼국사기에 고구려가 엄청나게 남진을 하여 당진에서 대전을 거쳐 경상북도 포항에 이르는 광역을 차지했음을 알려주는 자료는 무엇이고, 동국여지승람이나 세종실록지리지 등에도 이들 지역의 옛 지명을 고구려에서 찾는 것은 대체 어찌된 일인가.

396년 광개토태왕의 남진으로 백제가 항복을 하였지만, 백제는 여전히 한성에 머물고 있었다. 따라서 광개토태왕이 백제 58개성을 빼앗았지만, 이것이 곧 고구려가 한강 유역을 완전히 장악한 것으로 볼 수는 없다. 그래서 58개성을 고구려가 빼앗았지만, 나중에 돌려준 것이 아닐까 하는 추측도 가능하다.

하지만 475년 장수왕의 백제 공격은 백제에게 심각한 타격을 주어, 백제를 금강 유역의 웅진으로 급히 퇴각하게 한 사건은 좀 다르다. 한 동안 이 사건을 계기로 고구려가 475년부터 552년 신라에게 한강유역을 빼앗길 때까지 고구려가 지금의 경기도와 강원도, 그리고 충청북도와 경상북도의 3/5 이상을 차지했을 것이라고 생각되어지기도 했다.
물론 이 가운데 경상북도 지역을 고구려가 차지한 것은 논란이 되기도 했지만, 일순간이나마 고구려가 차지했던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호우총의 호우, 순흥 둔내리 고분벽화 등 경북지역에 고구려인의 흔적이 남아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영역 지배가 제대로 이루어졌을 것으로 보는 연구자는 거의 없다.
문제는 한강 하류와 강원도 지역이다. 최근 한강 남쪽 지역은 백제가 장수왕에게 쫓겨간 후에도 이 지역에서 활동한 사례가 있으므로, 도리어 안장왕 시대인 529년 고구려가 총 공세를 펼친 직후에 당진만에서 대전 일대에 이르는 지역까지 고구려가 남진한 것으로 보려는 북한학계의 견해가 소개되고, 이에 우리 학계 일부에서도 동의하는 경향이 나타나기도 한다.
고구려가 언제 어떻게 한강 유역을 지배했던 것일까?
왜 한강 이북지역, 즉 양주, 포천, 파주를 비롯한 광할한 넓은 평야지대에도 고구려가 폭넓게 유적과 유물을 남기지 못했던 것일까?
이 지역도 고구려가 제대로 차지하지 못했던 것인가?
또 강원도 지역에는 왜 고구려의 성들이 뚜렷하게 없는가?.
그리고 황해도 일대에는 장수산성을 비롯해서 둘레 2km가 넘는 성들이 즐비한데, 왜 경기도 일대의 고구려 성들은 둘레가 겨우 400미터도 안되는 보루성들만이 있는가?
고구려사의 문제 가운데 남부지역의 지배 문제는 많은 논란을 일으키기에 충분하다.
아직 우리나라 학계에서도 이에 대한 충분한 견해가 도출되지 않은 상태라고 하겠다.
그럼 이 문제에 대해서 나자신의 몇가지 생각의 단서들을(아직 견해라고 말하기는 이르고)
조금 적어보기로 하겠다.
우선, 강원도 일대에 고구려가 성을 쌓지 않는 것은, 지리적 조건 상 굳이 성이 필요가 없는 지역이기 때문이라고 본다. 성이라는 것의 특성상 방어적 목적, 농성적 목적, 공격을 위한 기지로서의 목적, 도시로서의 목적 등에 의해 쌓아지기 마련이다.
그런데 강원도 일대는 과거 동예 등이 부락단위로 존재하기는 했지만, 지리적으로 높게 위치해 있기에 적을 방어하는데는 그 자체가 천혜의 조건을 갖추고 있다. 따라서 대규모 성곽이 필요없으며, 있더라도 차단성이나, 보루 정도의 작은 것이어도 충분하다.
또 도시로서의 목적이란 측면에서 본다고 해도, 강릉 등의 해안가에 성을 쌓고 지키기에는 그 지역의 인구가 과거에는 그리 많았다고 볼 수 없기 때문에 굳이 성이 축조되지 않았다고 보아야 하겠다. 즉 도시가 발달하지 않았으므로, 성도 없는 것이다. 아울러 공격을 위한 전진기지의 성격을 갖는 것이나, 방어적 목적에서 성을 쌓는 것은 영월의 왕검성 등에서 찾아볼 수 있는데, 이 경우에도 고구려가 새로 축조를 하기 보다는, 그 이전에 성을 쌓은 것을 그저 보수없이 지키기만 해도 충분한 방어적 능력을 지닌 지형 때문에 그냥 놔두었다고 볼 수도 있겠다. 따라서 왕검성의 경우 고구려인들이 거주는 하였지만, 굳이 고구려식 성벽을 축조하지 않다도 될 정도가 아닌가 한다.

그런데 포천, 양주 등의 경기도 일대는 좀 다르다.
강원도는 그렇다고 치더라도, 포천, 양주 등 경기도 북부 지역에는 비교적 넓은 평야가 있다.
특히 현재의 서울 지역은 넉넉한 평야를 제공해준다. 그런데도 왜 고구려는 큰 성을 축조하지 않은 것일까.

우선 첫번째 가능성은 백제의 옛 성을 그대로 사용했을 가능성이다.
이때 거론될 수 있는 것이 하남시에 위치한 이성산성이다. 이성산성은 백제 하남 위례성과 가까운 곳에 위치해 있으며, 2000년 유태용 등이 발굴한 제 8차 발굴에서는 고구려 성이라는 주장이 나오기도 했다. 이때 고구려척이 나와 큰 논란이 되기도 했다. (그런데, 심광주는 이것 역시 백제 토기와 고구려 토기로 분류의 잘못으로 돌리며, 신라 한산주의 읍치로 추정하고 있다. 즉 심광주는 자신이 91년 3차 발굴할 때의 결과를 토대로 2000년 발굴을 반대하고 있는 셈이다.)
고구려가 이성산성을 사용했을 지 여부는 현재 고고학계에서는 논란이 되고 있다.
여기서 어떤 설이 맞다고 고고학에 문외한이 내 입장에서 거론할 것은 아니다.
하지만 만약 유태용의 주장이 옳다면 고구려는 백제의 성을 그냥 사용하고, 약간의 보축 정도를 한 것이 될 것이고, 심광주의 주장의 옳다면, 고구려는 한강 이남을 제대로 장악하지 못한 것이 된다. 현재까지 망이산성, 당성 등 한강 이남의 경기도 지역에 성 가운데 고구려 성으로 추정되었던 성들 가운데, 어떤 성이든 간에 고구려의 유물이 확연하게 나온 것은 없다. 심지어 충주의 장미산성 역시 가장 고구려성에 가깝다고 거론되지만, 고구려 성이라고 단정할 수 없는 실정이다.
온달산성도 최근에 치가 발견되어 복원을 해두었지만, 이것은 온달산성을 고구려성으로 복원하려는 의도에서 너무도 쉽게 치를 복원한 것이 아닌가 라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다. 또 치가 있다고 해서, 그것이 반드시 고구려성만의 특징이라고 단정하기도 어렵다. 고구려의 축성기법을 신라에세 배워서 사용했을 가능성도 많기 때문이다.
유독 한강 이남에서 대대적인 고구려 유물이 출토된 것은 몽촌토성 뿐이다. 특히 거대한 광구장경사이호는 남한에서 발견된 가장 대표적인 고구려 토기로 유명하다. 이곳에서는 고구려 오돌건물이 나왔고, 백제 토기에 약 12% 정도에 해당되는 329개체분의 고구려 토기가 나왔다.
이곳은 분명 고구려군이 상당기간 머물렀음을 보여준다. 고구려가 백제의 수도를 점령하고(북성인 풍납토성과 남성이 몽촌토성을 차례로 점령했다고 보고) 이곳에 대군을 주둔시켜, 백제인을 굴복시킬 만큼 어느 정도의 작업을 했음을 보여준다.
그렇다면 한강 이북에서라도 고구려 성이 나와주어야 한다. 특히 반월산성이 경우는 서영일이 이를 고구려 낭비성으로 비정하기도 했고, 포천 고모리성도 고구려군 남진의 전초기지로 축성한 것으로 추정되었으나, 이 모두 백제 유물 위주로 출토되어 이 여기 고구려 성이라고 단정하기는 어렵다.
문헌상 가장 확실하게 고구려가 장악했던 것으로 보이는 관미성으로 추정되는 오두산성의 경우에도, 이곳에서 신라 유물만이 출토되었다. 즉 유물로 볼 때 관미성은 오두산성이 아닐 가능성이 많다. 그렇지 않다면 신라가 전대의 유물을 한번 손을 대었다는 결론뿐이다.
고구려가 백제의 성을 그대로 활용한 몽촌토성의 경우를 제외하면 고구려의 남쪽 지배는 너무나 불철저해보인다.
그런데 그 속에서 바로 고구려의 통치제도를 엿볼 수 있는 단서가 있다.
몽촌토성에 고구려 남부군 주둔군의 주력이 머물렀다고 볼 수 있을까?
충분히 가능한 일로 구체적인 시점은 475년 이후가 될 것이다.
삼국사기 개로왕 21년 기록을 보면 고구려군이 먼저 북성을 쳐서 7일만에 함락시키고, 옮겨서 남성을 치니 성중이 흉흉하였다는 기록이 보인다. 이때 개로왕이 도망해 나갔는데, 고구려군이 이를 잡아서, 아단성 밑으로 결박한 체 보내어 살해했다고 했다.
이 기록을 보면 당시 백제의 수도는 북성인 풍납토성이었고, 이어서 남성인 몽촌토성으로 옮겨갔다가, 고구려군에 의해 개로왕이 잡혀서 한강 건너편의 아차산성 아래에서 죽은 것으로 볼 수가 있다. (물론 여기서 백제의 수도를 하남시 춘궁동 유적으로 볼 경우에는 북성이 이성산성, 남성이 춘궁동토성 쯤이 되겠다. 그런데 기록으로 볼 때는 풍납토성설이 더 유력하다. 나는 이 백제 수도문제에 있어서 현재는 8:2 정도로 풍납에 무게를 둔다.)
그런데 문제는 고구려군이 백제 개로왕을 굳이 아단성 으로 결박하여 보낸 이유가 무엇일까.
아무래도 백제의 저항이 강한 상태에서 북성이나, 남성에서 왕을 죽일 경우 백제인의 강력한 저항을 우려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한강 이북의 아단선에서 죽였다고 하겠다.
고구려군은 분명 한강 이북의 아차산 일대에 주둔했다. 그것도 10여개 이상 보루와 홍련봉 일대에 기와집에 연화문와당까지 한 멋진 건물을 두고 장기간 최소한 1500명 정도의 군대가 주둔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몽촌토성에 주둔한 고구려군은 일시 백제 수도를 장악하여, 그곳을 고구려 영토로 만들기 위한 목적으로 주둔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온돌과 대형 토기는 장기간 고구려군이 머문 흔적으로 볼 수가 있다.
또 이성산성에도 고구려군이 분명 진주했었고, 분명 머물렀다고 추정할 수 있다. 그곳에서 나온 35.6cm 자의 경우가 이를 설명한다.
하지만 이성산성이나, 몽촌토성에서 고구려 성벽의 흔적이 찾기 어렵다는 것은 다음 3가지 가능성으로 나누어 볼 수가 있다.

첫째 주둔시기가 짧았다.
둘째 기존의 성벽을 이용할 뿐, 새롭게 축조할 필요성이 없었다. 즉 왕이 죽었고, 태자인 문주가 남으로 내려가 웅진으로 도읍을 옮겼기 때문에 백제군의 저항이 그리 강할 수가 없었고, 백제군은 적어도 제 2 전선을 한강 주변이 아닌, 수원이나 평택 심지어는 차령산맥 정도로 내려가서 고구려군의 공세에 맞설 수 밖에 없었다고 보기 때문이다.
셋째 새로 성벽을 보축할 필요성이 분명있었지만, 현지 사정상 기존의 백제 기술자와 백제인을 활용했기 때문에, 고구려식 축성법이 나올 수가 없었다.
자. 여기서 문제는 첫번째 주둔시기의 문제다.
지난번에 김태식 기자도 이 문제를 언급했고, 아차산을 발굴하는 최종택 교수도 이 문제에 대해서 여러가지 언급을 한 바 있고, 김영관, 심광주 등등 여러 사람이 고구려군의 남진의 시점에 대해서 많은 언급이 있었다.
그런데 우선 검토해야 할 것이 475년 이후의 백제의 상황이다. 적어도 475년 이전에 백제가 한성에 도읍을 정하고 있었던 것은 인정되는 만큼, 광개토태왕의 남진과 한강 남쪽의 고구려성 축성과는 무관하다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한강 이북은 광개토태왕과 관련이 있는 만큼 이는 다시 언급해 보기로 하겠다.
우선 남쪽으로 도읍을 옮긴 문주왕. 그는 재위한 다음해에 대두산성을 수리하고, 한강 이북의 민호를 이주시켰다. 한북(漢北)의 백성을 이주했다는 말은 한강 이남을 백제가 지배하고 있었을 가능성을 떠오르게 한다. 하지만, 새롭게 대두산성(위치는 모른다)을 쌓은 목적으로 볼 때 기존의 북성과 남성(풍납과 몽촌)은 도저히 백제로서는 사람을 거주시킬 수 없을 만큼 파괴되었거나, 아니면 고구려의 장악하게 있었다는 반증으로 사용될 수 있다.
또 그해(476년)에 송나라에 사신을 보낼 때에 고구려가 길을 막아서 못갔다는 것으로 볼 때, 당시 고구려군이 관미성 등 과거 백제의 주요 항구를 장악할 만큼 서해상에 강한 해상통제력을 장악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곧 고구려가 한강이남을 차지하고 있었을 것이라는 것에 대한 강한 방증자료가 될 수 있다. 게다가 문주왕은 재위 4년에 해구라는 자에게 시해를 당한다.
또 문주왕의 다음왕인 삼근왕은 나이가 어렸고, 좌평 해구와 은솔 연신이 대두성(한북에서 내려온 사람들이 머문)에서 반란을 일으키다가 해구는 죽고, 연신은 고구려로 도주하는 사건이 생겼다. 또한 삼근왕 3년에는 대두성을 두곡(위치 모른다)으로 옮겼다고 하는데, 이는 한북에서 내려온 세력이 웅진(공주) 지역의 사람들과 융화를 못해서 계속 백제의 불만세력으로 남아있었음을 의미한다. 이렇게 백제의 정치가 혼란한 상태에서 삼근왕은 그해 11월(479년)에 죽는다.
불과 4년만에 두 명의 왕이 죽은 것이다.
따라서 혼란한 백제가 고구려군을 한강 이북으로 몰아낼 수는 없었을 것이다.

다음에 왕위에 오른 동성왕은 활을 잘 쏘는 무력이 뛰어난 임금이었다.
그런데 그으 재위 4년 9월(482년)에 말갈이 한산성을 습파하고 3백여호를 노획하여 돌아간 일이 있었다. 그리고 다음해 왕이 사냥으로 한산성에 이르러서 군민을 위문하고 10일에 돌아왔다고 하였다.
자, 여기서 한산성을 과연 현재의 몽촌과 풍납으로 볼 수 있을까.
만약 이때 한산성이 그곳이라고 볼 수 있다면, 첫번째 제기했던 가능성. 즉 고구려군이 몽촌토성에 주둔했던 시기가 짧았다는 말이 실제였다고 볼 수 있다. 즉 고구려군은 475년에 몽촌토성을 장악한 후, 적어도 480년경에 철군했고, 백제가 이를 되찾고 백성들을 3백여호 이상 머물게 했다고 볼 수 있다. 삼국사기를 역주한 이병도는 당시 고구려와 백제의 국경이 적어도 죽령 조령계선까지 내려갔으므로 이때 백제가 한성을 장악했다는 것은 믿을 수 없다고 했다.
당시 말갈이 고구려의 명을 듣는 세력인 만큼, 고구려가 한성 지역에서 철군한 후, 말갈로 하여금 백제가 이 지역을 다시 장악하여 관리하지 못하게 습격하게 시킨 것으로 본다면 어떨까.
그런데 동성왕 6년(484년)에도 고구려는 백제가 남제에 보낸 사신 약사가 서행중에 이르렀을 때, 이를 저지시킬 만큼 강력한 해상통제력을 장악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고구려가 한강 유역을 쉽게 포기하였다고 보기는 어렵다.
그러나, 동성왕 10년 (488년)에 백제는 북위의 군사를 쳐부수는 위업을 달성한다.
그리고 동성왕 15년(493년)에는 신라와 혼인동맹을 맺고, 다음해(494년)에는 고구려가 신라와 살수원에 싸우다가 신라가 패해 견아성으로 도망가서 고구려군에게 포위당하고 있었을 때에, 동성왕은 3천의 군사를 보내 구원하기도 한다.
즉 동성왕 15년쯤에는 이미 백제는 고구려와 적대할 만큼 힘을 충분히 키운 셈이다.
그렇기 때문에 495년에 남제에 사신을 보내서 북위를 격파한 공을 자랑하기도 했던 것이다. 이해에 고구려는 백제 치양성을 포위한다. 문주왕은 신라에게 도움을 청해 고구려군을 물러가게 한다. 이때 치양성에 대해서는 황해도 일대의 치양성이라는 주장도 나올 수 있지만, 정확한 위치는 알수가 없고, 황해도 지역이라고 주장하기에는 당시 정황상 어렵지 않는가 싶다.

동성왕 20년에는 탐라를 위협하여 이들로 부터 사죄를 받을 만큼 백제는 힘이 있었다.
그런데 동성왕 21년(499년)에는 한산(漢山)인이 고구려로 도망가는 자가 2천이나 되었다는 기록이 등장한다. 그리고 동성왕 23년(501년)에 좌평 백가의 반란으로 죽는다.
이는 또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당시 한산은 백제의 땅이고, 그 한산은 어디란 말인가. 이것도 현재의 몽촌과 풍납이 아니라고 할 수 있을까?
좀 더 뒤 시대를 살펴보자. 무녕왕 원년(502년)에 백제는 군사 5천으로 고구려 수곡성을 친다. 이 수공성은 황해도 신계 지방이라고 비정하기도 한다. 백제가 5천으로 고구려 남부의 주요성을 공격했다는 그 사실만으로는 의미는 크다. 이는 곧 이무렵 백제가 분명 힘을 강한 힘을 갖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이런 백제에게 말갈이 수시로 쳐들어온다. 무녕왕 3년(504년)에 말갈군이 공격해오고, 무녕왕 6년(507년)에는 고구려 장수 고로가 말갈과 공모하여 한성을 공격하다가, 백제군에게 패배한 사건 등으로 볼 때, 이때 백제는 분명코 한성을 장악하고 있음이 분명하다.
또 무녕왕 12년(513년)에 백제는 위천가에서 고구려군을 격파하기도 한다.
결국 무녕왕 21년(514년) 무녕왕은 양나라에 사신을 보내서, 백제가 앞서 고구려에 패한 바가 되어 여러해 동안 쇠약해 있더니, 이제는 고구려를 여러 차례 격파하겨 다시 강국이 되었다고 말했다.
이상과 같이 백제는 동성왕과 무녕왕 두 임금에 의해 고구려로 부터 받은 충격을 벗어버리고 있음이 분명하다. 하지만, 문주왕과 삼근왕 시기에 고구려를 몰아내기란 어려웠다고 보인다. 그렇지만 480년경에 한강 이남에서 철수하고, 이후에는 한강 이북에만 머물렀다고 보인다.

다시 고구려가 3차 남진(광개토대왕, 장수왕, 다음의 남진)하던 시점과, 475년 시점에서 고구려가 어디까지 남하했는지는 다시 살펴보기로 하겠다.
이렇게 볼 때 첫번째 문제, 즉 고구려가 한강 이남에 주둔하던 시점이 짧았다는 것은 어느 정도 이해가 될 수 있다. 즉 한강 이남에 1차로 머물렀던 시점은 불과 475년에서 480년대 초까지 5년 남짓한 시기이므로, 새롭게 축성할 수 있는 시기는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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