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고구려는 한강유역에 큰 성을 축조하지 않았을까?-2

미연시다운족 작성일 07.01.18 18:05: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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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시 마찬가지로 보관하고 있던 자료입니다.

백제의 활동으로 볼 때 고구려가 475년 한강이남 지역을 장악했다고 하더라도 오래 지속하지 못했을 것이라는 것이 우선적으로 내릴 수 있는 잠재적 결론이다.
그런데 고구려의 남진은 적어도 3차례 이상이라고 보아야 한다고 앞서 밝혔다.
그런데 지난번 글에서는 삼국사기 백제본기에 의거해서 글을 썼다. 그러다보니 왠지 허전함을 지울 수가 없다. 고구려의 입장에서는 본다면 어떠했을까를 살펴보아야 하지 않겠는가.
하지만 삼국사기 고구려본기를 읽는 순간 실망감은 커진다.
장수왕 63년에 백제왕을 죽이고, 남녀 8천명을 사로잡고 돌아왔다는 기록뿐이다.
그리고 64년 기록부터는 온통 중국 사서를 빼긴 흔적 뿐이다. 장수왕 79년까지 기록 가운데 국내 기록은 단 두개다. 하나는 66년에 백제의 연신이 투항해왔다는 기록이다. 또 하나는 77년(489년)에 군사를 파견하여 신라의 북변을 침략하여 고산성을 함락시켰다는 것 뿐이다.
그러므로 491년까지 장수왕 연간에 고구려의 상황을 알 수 있는 내용이란 극히 적을 수밖에 없다. 백제의 연신의 투항은 삼근왕 즉위 후 백제에서 해구와 연신이 반란을 일으켰다가 실패하여 해구는 죽고 연신이 죽었다는 백제본기 기록과 짝을 이루는 내용이다.
또 489년에도 고구려가 남진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특히 장수왕 72년(484년) 기록에는 당시 고구려의 국력이 강하여 북위에서 고구려의 강성함을 알고 여러 나라의 사신 가운데 남제와 버금가는 대우를 해주었다고 하고 있다. 이 무렵 고구려는 분명 매우 강성했다. 그렇다면 고구려가 남쪽에서 굳이 철수를 할 필요도 없는 것이 아닌가.
그런데, 여기서 그냥 지나쳐서는 안될 일이 있다.
바로 475년 바로 그 기록에서 고구려가 남녀 8천명을 사로잡고 돌아왔다(歸) 했다는 기록이다.
즉 고구려가 이때 영토를 더 넓혔다면, 기록에서 어떤 성을 함락시켰다는 내용이 있어야 할 텐데 그러지 못했다.
자. 여기서 주목할 것이 다시 백제본기 문주왕 원년 기록이다. 개로왕이 농성하여 굳게 지키면서 문주로 하여금 신라에 구원을 청하게 하였던바, 문주가 군사 1만을 얻어서 돌아왔는데, 이때에 고구려군사는 비록 물러갔으나, 성은 함락되고 왕은 죽었으므로(城破王死), 드디어 즉위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자. 이를 잘 살펴보면 고구려는 비록 백제의 수도를 함락시켰으나, 계속 점령할만한 군대를 주둔하지 않았음에 분명하다. 다만 문제는 성을 깨뜨렸고, 백제가 한성에 도읍을 정하지 못하고 남쪽으로 천도했다는 데에 있다. 즉 이것은 아신왕이 고구려에게 패배했을 때와는 또 다른 상황이다.
즉 고구려는 약화된 백제를 상대로, 한성과 같은 엄청난 보물단지를 그냥 놔두고 철군할 이유는 없을 것이다. 그렇다고 아래로 밀고 내려가기에는 힘이 부치는 상황이 아니었을까 한다.
왜 고구려가 남진을 하지 못했던가.

그것의 이유는 한 가지다. 바로 물길의 반란이다.
당시 물길이 반란 조짐은 위서 등에서 볼 수 있다.
물길은 북위에 사신을 보내 고구려를 협공하자는 제안을 한다. 장수왕이 도림스님을 보내 먼저 백제를 약화시킨 후, 백제를 급습했던 이유의 하나도, 따지고 보면 양쪽에서 전쟁을 동시에 수행하는데 어려움을 감안했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겠다.
물길이 475년과 478년 사신 을력지를 보내 자신들이 백제와 연합해서 고구려를 공격하려고 하니 도와달라는 메시지를 북위에 전한다. 이때 물길은 고구려의 농경지대를 크게 우회하여 고구려 몰래 거란 지역을 통과해 조양(위나라의 동북 전진기지)에 이르렀다. 이때 북위는 물길의 요청을 거부했다. 484년 기록을 보더라도 알 수 있듯이 당시 고구려가 엄청 강하다는 것을 북위는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물길은 외부의 지원을 얻기 위해 485, 493, 503년에 걸쳐 계속 북위에게 사신을 보낸다.
그런 만큼 고구려도 물길을 그냥 놔둘 수만은 없었을 것이다. 이때 주목할 일이 479년에 있었던 지두우 분할이다. 고구려가 지두우를 유연제국과 분열을 계획하고 실행한 것은 다분히 고구려 북쪽에 위치한 거란, 지두우, 실위, 물길, 해, 등 여러 종족들이 연합해서 고구려에 대항할 가능성을 사전에 차단하고, 물길이 북위에게 손을 뻗히지 못하게 차단하려는 목적, 그리고 좋은 말의 산지인 지두우를 장악하여 말 자원을 확보하려는 목적, 동맹국인 유연과의 보다 긴밀한 관계 유지 등의 목적에서 시행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런 상황인 만큼 고구려가 북쪽에 관심을 쏟을 수 밖에 없었기 때문에 남쪽 백제에 대해서는 왕만 죽이고 주력군을 철수시킨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몽촌토성 즉 한성의 일부에만 군대를 배치하고 나머지 지역에서는 성을 쌓을 겨를이 없었다고 보는 것이 맞겠다. 즉 고구려의 장수왕 남진 시점에서 고구려의 한강 유역 지배는 단지 한성의 함락이란 의미 외에는 광범위한 영역 개척이라고 보기는 어려울 듯하다.
자. 하지만 이러한 주변 상황의 이해를 통해서 볼 때에, 몽촌토성과 아차산 일대에 고구려가 군대를 주둔시킨 시점이 반드시 475-480년대 초반이라고 단정하기는 어렵다.
자. 그럼 또 다른 접급방법을 시도해보자. 바로 중원고구려비다.
최근 최장열은 <고대로부터의 통신. 책에 실린 글에서 문자명왕 4년인 495년에 왕이 남쪽으로 순수하여 바다에 제사지내고 돌아왔다는 <삼국사기> 기록에 의거하여 비문 건립시기를 495년 무렵이라고 추정하고 있다. 그리고 비문에 새겨진 사건, 즉 고구려와 신라간의 종속 관계를 설명한 사건은 449년 무렵으로 추정하였다. 최장열의 출신을 고려할 때, 한국고대사 학계의 주류를 이루는 서울대 학파의 입장에서 크게 벗어나지는 않았다고 보인다.
지금까지 중원고구려비의 연대에 대한 가장 일반적인 견해는 장수왕년간에 세워진 비라는 것이었다. 특히 475년 고구려가 남하하여 백제를 억압한 후, 481년경에 비가 세워졌다고 보는 것이 비교적 우세한 가운데, 아직 비문을 만든 연대에 대해서는 연구자들 사이에 어떤 결론적 합의에 이르지 못하고 있다.
그런데 중원고구려비의 내용을 곱씹어보면 의문이 생기는 지점이 있다. 비문 전체가 약 400여자에 이르렀을 추정되는 가운데 겨우 200자 남짓 확인되는 상황이어서 비문 연구에 한계가 분명 존재하기는 한다. 하지만 중원고구려비에는 고구려와 백제 관련 기록이 아직까지 확인되지 않고 있다. 오직 신라와의 관계만이 확인되고 있을 뿐이다.
다만 비문에 개로(盖盧)라는 말이 나오는데 이를 백제 개로왕이라고 본다면 비문의 건립연대가 455-475년 사이가 된다. 하지만 여러 연구자들이 이를 개로왕으로 보는 것에는 의문을 표시한다. 비문 내용상 개로가 고구려의 명을 받아서 신라 영토내의 주민을 모으는 일을 신라토대당주인 포노 등과 더불어 수행한 것으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450년대에 신라와 백제의 동맹관계 성립되는 것과도 일치하지 않고, 개로왕이 북위에 국서를 보내 고구려를 공격하자는 것과도 연결되지 않는다.
그렇다면 유일한 백제와의 연결고리인 개로가 개로왕이 아니라고 할 때에, 왜 중원고구려비에는 백제 이야기가 빠졌을까? 광개토태왕릉비에는 우리의 선입견을 넘어설 만큼 백제 이야기로 가득 차 있는데 말이다.
왜 백제에 대한 기록이 없는 것일까. 그냥 백제 관련 기록만이 판독이 안 되었을 뿐이라고 그냥 넘어가면 될 것인가?
지금 쓰고 작업하고 있는 한강유역 - 좀 더 광범위 하게 이야기해서 한반도 중남부 지역에서 왜 고구려가 큰 성을 축조하지 않았을까? 라는 의문의 범위는 처음 생각했던 것과 달리 굉장히 많은 연구논문도 있고, 자료도 매우 풍부하다. 따라서 한 두개의 글로 쓰여질 것이 아니다. 따라서 치밀하게 하나 하나 논증을 해야 하는데, 먼저 현재까지 남한지역에서 조사된 고구려 유적으로 가장 확실한 것을 우선 정리해보도록 하자. 다음 자료는 심광주, <남한지역의 고구려 유적>, [고구려연구] 12집, 2001년, 491-492 에 수록된 것이다.
이 자료를 보면 고구려의 대성이라고 할 만한 것이 없음을 쉽게 알 수가 있다.
가장 큰 성은 전곡리토성으로 1800미터다. 몽촌토성은 백제의 성에 고구려군이 거주한 것이 확실하므로 제외한다. 이는 황해도 신원군 장수산성의 10km, 황해도 해주시의 수양산성 8.2km, 배천군 치악산성 3.6km, 은율군 구월산성 5.2km 등의 석성과 비교할 때 너무 적다.
심광주는 고구려가 임진강 유역은 100년간 장악했다고 보지만, 한강 유역의 경우는 20년도 채 장악하지 못한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 이는 여러 측면에서 많이 검토되야 할 문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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