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신이 찍힌 테잎(2)

금돼지79 작성일 07.04.11 14:36: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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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 현장은 경찰서에서도 1시간이상 떨어져 있었다. 목촌리 321번지에서 332번지까지가 사건 현장 부근이었고 332번지가 바로 그 흉가라 불리는 기와집이었다. 번지수로 보면 총 13가구가 살고 있어야 하지만 그 곳에 실제로 사람이 거주하는 가구는 단 세가구 뿐이었다. 이미 사건현장에서 그들을 모두 보긴 했지만 그녀가 직접 얘기를 나눠볼 기회는 없었다. 그들에 대한 조사는 구반장이 했었다. 그녀는 이미 그 세가구에 사는 주민들의 인적사항들을 파악하고 있었다. 어느 산골에서나 그렇듯이 그들 중 오십대 이하의 젊은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었다. 그녀가 주민들을 탐문 수사해야 겠다고 생각한 이유는 한가지였다.

사망자들의 시신이나 정황으로 미루어 상당한 반항의 흔적이 보이는데도 불구하고 불과 500여미터 떨어진 마을에서 목격자나 이상한 소리조차 들은 사람이 전혀 없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사건 현장은 강원도에서도 찾아 보기 힘들만큼 산골이었기 때문에 한번 걸음이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대낮이라 해도 사람 구경조차 할 수 없는 울창한 숲을 30여분을 들어가야 마을에 닿을 수 있었다. 그녀가 만약 이곳 출신이 아니었다면 결코 엄두조차 못 낼 일이었다. 그녀가 마을에 도착한 것은 오후 4시를 조금 넘겨서였다. 마을이라곤 하지만 사람이 살지 않는 보기 흉한 폐가가 대부분이었다. 마을 어느 구석에도 사람이 산다고 믿겨질만한 생기같은 것은 전혀 느낄 수 없었다. 죽은 마을. 그 곳에 가장 잘 어울리는 이름이라고 그녀는 생각했다.

321번지. 김명신(남자, 57세). 그녀는 자신이 적어 온 자료를 다시 읽고서 집으로 들어 섰지만 아무도 없었다. 주민 모두가 약초를 캐서 생계를 유 지하기 때문에 낮엔 집에 없는 것이 당연한 일일지도 몰랐다.

325번지. 321번지와는 약 50여미터 떨어져 있었다. 한만수(남자, 65세), 한정우(남자, 72세). 그들은 형제였다. 역시 그들도 집에 없었다. 남은 한 집은 329번지였다.

사건 현장과 가장 가까이 위치한 집이었다. 권향미(여자, 92세), 김운기(남자, 69세). 그들은 모자였다. 집의 뒷쪽으론 고개가 있었다. 그 고개만 넘으면 기와집이 있는 사건 현장이었다. 마당에는 각종 약초를 다듬은 듯 한 흔적과 뗄 나무들이 한켠에 쌓여 있 었다. 그녀는 마당으로 들어섰다.

"실례합니다. 계세요? 아무도 안 계세요?"

마지막 집마저 아무도 없다면 어려운 걸음을 헛탕칠 것 같아 내심 초조하던 혜경이었다. 대답이 없어 그녀가 조심스럽게 방문 앞으로 다가가 방문 손잡이를 잡으려는 찰나 방문이 왈칵 열렸다. 그녀는 얼떨결에 두어걸음 물러섰다. 방에서 고개를 내민 노인이 권향미라는 것을 그녀는 금새 짐작할 수 있었다. 팔다리가 꼬챙이처럼 앙상한 뼈만 남은 노인. 눈밑에는 이미 죽음의 그림자가 완연한 노인이 쿨럭거리며 그녀를 노려보고 있었다.

"죄송합니다. 할머니. 아무도 안 계신줄 알고..... 저 아시죠? 몇 일전 고개넘어 기와집에서 보셨잖아요. 전 횡성에서 온 경찰이예요"

그러나 노인은 아무런 대꾸도 없이 무서운 눈으로 그녀를 노려볼 뿐이었다. 그녀는 혹시 할머니가 귀가 들리지 않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그녀가 두어 발자욱 다가가서 좀 더 큰소리로 소리치려할 때였다. 갑자기 노인이 믿기지 않을 정도의 벽력같은 소리를 질렀다.

"어딜 다가와!"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다시 두어 발자욱 물러났다. 노인은 더욱 적대적인 눈길로 그녀를 노려 보았다.

"할머니, 뭔가 오해를 하셨나본데 전 수상한 사람이 아니라 이번 살인사 건 조사차 나온 경찰이예요.제 말 잘 들리세요?"

"그럼, 내가 귀머거린줄 알았어?"

"그런 뜻이 아니구요. 그럼, 제가 그냥 여기 서서 몇가지만 물어 볼께요. 아시는대로 대답을 좀 해주세요"

"난 아무것도 몰라, 아무것도 모른다구!"

"할머니 그러지 마시고 협조를 좀....."

그때였다. 전혀 예측하지 못한 일이 벌어진건. 갑자기 노인이 소리를 지르면서 방안의 물건들을 닥치는대로 집어 던지기 시작한 것이었다.

"모른다고 했잖아, 어서 꺼져버려, 망할 것! 괜히 이 근처에서 얼쩡거리다간 너도 무서운 일을 당할 줄 알아. 어서 꺼져!"

말을 마친 노인은 쾅 소리가 나도록 문을 닫아 버렸다. 혜경으로선 여간 난감한 일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노인을 상대로 더이상 뭔가를 물어 본다는 것은 불가능해 보였다. 그녀는 이왕 온 김에 현장을 한번 더 둘러 봐야 겠다고 마음 먹었다. 그녀는 천천히 집 뒷쪽으로 난 고갯길을 오르기 시작했다. 양 옆으로 수 백년은 된 듯한 소나무들이 빽빽히 들어서 있었고 가끔씩 들려오는 산새 소리들은 평화롭게만 여겨졌다. 그녀가 고개 정상에 닿았을 때 아래로 기와집이 눈에 들어왔다.

332번지. 그 집의 소유는 김학봉(59세, 남자)이라는 사람의 소유로 되어 있었다. 집을 비운지가 얼마나 되었는진 알 수 없었지만 최소한 수십년 이상을 비워둔 것처럼 집은 앙상한 뼈대만 흉물스럽게 남아 있었다. 마을에서 현장까지 그녀가 재어본 시간으로는 느린 걸음으로도 6, 7분이면 충분이 닿을만한 거리였다. 집앞 마당엔 무수한 이름모를 들꽃과 잡초들이 무성하게 자라 있었다. 몇일이 지나긴 했지만 아직도 시체가 놓여 있던 자리엔 핏빛이 남아 있어 당시의 참혹하던 광경이 되살아 나는 듯 해서 그녀는 약간의 섬뜩함을 느꼈다.

그녀는 천천히 집 주위를 돌면서 사망자들의 시신이 놓여 있던 곳을 둘러보았다. 국과수에서 보내온 피해자들의 사망 추정 시간은 새벽 5시경. 그녀는 다시 집의 앞마당으로 돌아와 집앞에 주저앉듯 앉았다. 그리곤 집을 올려 다 보았다. 아니, 더 정확히 말하면 바로 그 집이 그녀를 내려다 보고 있었다. 바람소리 하나 들리지 않는 정적. 순간 그녀는 등골이 서늘해지는 냉기를 느꼈다. 집은 이미 모든 것을 다 알고 있다는 듯 그녀를 노려 보고 있었다. 왼편 부엌의 반쯤 떨어져 나간 문짝이 이따금씩 기분나쁜 소리를 내고 있었다. 도대체 그날밤 이곳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던 것일까?

그녀가 눈을 감자 참혹하게 죽은 시신들의 끔직한 모습들이 떠올랐다. 그 공포에 질린 눈동자들. 그들이 질러대던 끔찍한 비명소리가 금방이라도 들려올 것 같았다. 살려 달라는 그들의 찢어지는듯한 비명소리가. 그때 누군가가 그녀의 어깨를 꽉 잡았다. 그녀는 무의식적으로 '악'하는 비명을 지르며 손을 뿌리쳤다. 그녀가 눈을 뜨고 올려다 본 곳엔 어디선가 본 듯한 한 사내가 서 있었다. 왼쪽 뺨엔 칼자욱이 선명하고 눈자위는 움푹하게 들어가 마치 유령을 보는 듯한 느낌. 한만수. 325번지에 사는 형제중 동생되는 자였다. 그는 어깨에 망을 메고 있었고 그 망 사이로 삐죽 삐죽 약초처럼 보이는 풀뿌리들이 삐져 나와 있었다. 그의 입에서 쇳소리가 나왔다.

"여기서 뭐하는 거야?"

그리고 그의 눈동자는 시종 불안한듯 좌우로 굴러 다녔다.

"한만수씨, 맞죠?"

그녀는 아직도 떨리는 가슴을 가까스로 진정시키며 간신히 물었다. 그는 대꾸없이 여전히 주위를 두리번 거리며 경계를 늦추지 않았다.

"저 알아 보시겠죠? 이번 살인사건 때문에 수사차 나왔습니다. 댁에 들렸는데 안 계시더군요"

자신의 집에 들렸다는 혜경의 말에 사내는 다소 놀라는 기색이었다.

"그 날밤 아무런 소리도 듣지 못하셨다고 했는데 사실인가요?"

"그 일이라면 난 더이상 할 말이 없어. 여긴 너같은 계집이 올 데가 못 돼. 쓸데없는 짓 말고 어서 돌아가!"

사내는 마치 그녀를 동네 여자애 다루듯 거칠게 말했다.

"이봐요, 한만수씨! 전 지금 공무를 수행하는 형삽니다. 당신은 제게 협조를 해야 할 의무가 있어요"

"의무? 난 그런거 모르니까 잡아가던지 말던지 마음대로 해! 그리고 경고 하지만 이곳에 함부로 오지 않는게 좋을거야"

사내는 마치 위협하듯 재빠르게 말하곤 무엇에 쫓기듯 동을 돌려 고개를 올라가기 시작했다.

"이봐요, 한만수씨!"

그녀가 소리쳐 불러 보았지만 그는 더이상 뒤돌아 보지 않았다. 사내의 표정은 뭔가에 잔뜩 겁을 먹고 있는듯한 모습이었다. 아까 그녀가 만났던 권향미 할머니, 그리고 이번엔 한만수라는 사내. 그녀는 그들이 분명 뭔가를 알고 있을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그리고 이 쥐죽은듯 고요한 산골에서 그 끔찍한 비명소리를 한 사람도 듣지 못했다는 것은 그녀로선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이기도 했다. 그리고 또 한가지, 그녀가 만난 두사람 모두에게서 그녀는 죽음의 냄새를 맡았다. 두사람과 얘기하는 동안 그녀의 뇌리에는 이상하게도 줄곧 죽음 이라는 단어가 맴돌고 있었던 것이다. 아니, 그들만이 아니었다. 그녀가 죽음의 냄새를 맡은 것은 이 기와집을 비롯한 마을 전체로 부터 였다. 그녀는 다시 한번 서늘한 냉기에 몸을 떨어야만 했다.

2. 귀신이 찍힌 테잎(3)

비디오 테잎을 보고난후 김익재 촬영감독과 조연출 안영우는 몹시 놀란 표정이 역력했다. 먼저 입을 연 것은 김익재 촬영 감독이었다.

"그.... 그러니까 저것들이 정말 귀신이다, 이거야?"

"한국대학 손남의 박사 얘기니까 상당히 신빙성이 있어요"

그러자 김감독이 갑자기 자신의 소매를 걷어 걷고선 안영우에게 말했다.

"야, 영우야, 내 팔 좀 만져봐라. 소름 돋은거 보이지?"

김감독의 말에 이영우도 양팔을 어루만지며 맞장구를 쳤다.

"저도 웬지 오싹 오싹해지는게 기분이 이상한데요?"

김감독 또한 테잎을 보며 카메라 이상이 아니라는 것에는 동의했다.

"그래서..... 정PD 얘기는 프로그램을 다시 만들자 이거요?"

"아닙니다. 전체를 모두 다시 만들잔 얘기는 아니고 후반부만 다시 만들어서 결론을 바꾸자 이거죠. 우리가 과연 저곳에 가서 똑같이 귀신을 찍을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설사 못 찍어도 저 테잎이 있으니까 후반부는 수정할 수 있다는 거죠"

김감독이 다시 화면을 한번 바라보곤 이영우에게 말했다.

"야, 미치겠네! 올해는 완전히 귀신 붙은 해라더니, 그 점쟁이 얘기가 꼭 맞네, 꼭 맞아! 영우야, 담배 있으면 한대만 주라!"

"또요? 오늘 벌서 몇 개핀줄 알아요? 좀 사서 피세요. 사서!"

이영우가 마지못해 주머니를 뒤적거려 담배 한개피를 건네자 김감독이 또 다시 너스레를 떨었다.

"임마, 내가 뭐 담배 살 돈이 아까워서 그러냐? 담배 좀 줄여 보겠다는 내 마지막 몸부림을 넌 그렇게 이해 못하겠냐? 내가 담배 사 봐라. 하루에 두갑은 필거다. 근데 너한테 맨날 이런 구박 받으며 빌려 피니까 하루에 열개피는 안 넘잖냐? 그리고 얼마후면 어느 귀신한테 잡혀갈지 모르는 판국에 동지끼리 너무 그렇게 야박하게 굴지마라"

"아이구, 됐어요, 됐어!"

둘은 언제나 앙숙이었다. 촬영장에 가서도 토닥거리긴 마찬가지였다. 촬영 때는 술 한잔 안 걸치면 작품이 안 나온다며 틈만 나면 술 먹자는 김감독과 절대 음주촬영은 묵과할 수 없다며 술이라면 입에도 못대는 이영우. 그들은 정민수와 벌써 2년째 같이 작품을 하는 호흡이 잘 맞는 스텝들이었다. 정민수와 함께 그들은 올 가을 내내 귀신만을 찾아 다녔다. 나중에
는 스텝들이 모두 악몽에 시달린다며 비명을 지르곤 할 정도였다. 그러나 이제야말로 정말 귀신을 만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그들은 내심 흥분되기 시작했다. 촬영일은 4일후로 잡았다. 대략적인 스텝회의를 마치고 해일이 자신의 아파트로 돌아온 것은 새벽 1시경이었다.

그가 아파트를 들어서기가 무섭게 전화벨이 울렸다. 심야에 걸려오는 전화는 두가지중 하나였다. 몹시 급한 일이거나 불길한 일이거나. 들고 있던 서류뭉치를 던지듯 쇼파에 내려놓고 수화기를 들었다.

"여보세요?"

"..........."

"여보세요?"

"해.... 해일이냐? 나.... 한수야, 김한수!"

"어? 웬일이냐, 이 야심한 시간에? 어디야, 편집실?"

"아.... 아니, 집!"

"집? 제수씨가 좋아 하겠군, 근데 무슨 일로?"

"뭐.... 특별히 일이 있어서가 아니고, 그냥....."

"이 자식이.... 지금 노총각 약 올리는거야, 뭐야? 집에 들어 갔으면 제수씨 껴안고 얌전히 잠이나 잘 것이지, 웬 전화질이야. 왜, 오랜만에 집에 들어 가니까 남의 집 온거 같아 잠이 안와?"

"그게.... 아니고..... 너..... 그 흉가 촬영 하기로 했냐?"

"그래, 덕분에, 잘 하면 한방 터뜨릴지도 모르겠다. 일 잘 되면 내가 한 잔 살께"

"그.... 그래, 그랬구나"

"근데 너 목소리가 좀 이상하다. 어디 아프냐?"

그제서야 해일은 김한수의 목소리가 평소와는 조금 다르다는 느낌을 받았다. 수화기를 통해 들려오는 그의 목소리는 어딘지 모르게 불안하고 초조해 보였으며 어찌 들으면 떨고 있는 것처럼 들리기도 했다.

"아... 아니야, 감기 기운이 좀 있는 것 같애. 근데, 저기 말이야...."

"그래, 얘기해"

"아.... 아니야, 됐어"

"임마, 너 답지 않게 왜 그래? 나한테 무슨 할 말 있어?"

"아니야, 그냥 술 생각 나서 전화 했는데 그만 두는게 좋겠어"

"짜식 싱겁긴, 그래, 괜히 감기 걸려서 술 먹었다가 더 고생하지 말고 일찍 자라. 제수씨 걱정 하겠다"

"그래.... 너도 몸조심 하고.... 이만 끊을께"

전화는 거기서 끊겼다. 해일이 다소 싱거운 그의 전화에 한번 피식 웃곤 막 웃옷을 벗으려고 할 때였다. 갑자기 그의 뇌리에 그의 마지막 말 한마디가 낯설게 다가섰다. 그래, 너도 몸조심 하고. 뭔가 어울리지 않는 어색한 인삿말이 아닐 수 없
었다. 그리곤 잠시 후 그는 피식 웃으며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짜식, 감기에 걸리더니 정신까지 오락 가락하나?"

* * *

전화를 끊은 김한수는 거실 쇼파에 넋나간 사람처럼 그대로 앉아 있었다. 어두운 정적속에서 불규칙한 숨소리가 규칙적인 시계초침 소리에 묻혀 가늘게 들려오고 있었다. 한참을 꼼짝 않고 앉아 있던 김한수가 갑자기 일어섰다. 그리곤 발작적으
로 거실의 불을 있는대로 밝히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어둠이 조각나고 거실은 대낮처럼 밝아졌다. 그러나 불빛에 드러난 김한수의 모습은 더이상 예전의 그가 아니었다. 얼굴엔 식은 땀이 번질거렸고 몇 일째 잠을 못 잔 사람마냥 두 눈엔 핏발이 서 있었다. 그는 밝은 빛이 가득한 거실을 좌우로 서성이기 시작했고 그의 입에선 알 수 없는 얘기가 흘러 나왔다.

"빌어먹을 그럴리 없어, 현실이 아냐. 절대로"

한참을 그렇게 서성이던그가 이번엔 갑자기 주방으로 다가가 장식장을 열곤 위스키를 꺼내 들었다. 그리곤 거칠게 병마개를 따서 컵에 술을 가득 부었다. 술을 따르는 그의 손이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그는 단숨에 술을 들이켰다. 그는 또다시 컵에 술을 채웠다. 역시 이번에도 순식간에 술잔을 비웠다. 그러나 여전히 그의 손은 안정감을 잃은 채 떨리고 있었다. 그가 탁자에 팔꿈치를 괴고 머리를 감쌀 때 였다.

"여보!"

낯선 소리에 그가 흠칫 놀라며 고개를 들었다. 아내 지윤이었다. 그는 얼른 다시 고개를 돌렸다.

"거실 불을 뭐 하러 있는대로 켰어요?"

지윤이 막 거실불들을 끄려고 할 때였다. 갑자기 김한수가 날카롭게 소리쳤다.

"끄지마!"

그의 뜻하지 않은 행동에 지윤이 흠칫 놀라며 얼어붙듯 그 자리에 섰다.

"여.... 여보!"

"거실 불.... 끄지 말라구!"

한동안 남편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그녀가 조심스럽게 다가오며 말했다.

"당신 왜 그래요?"

그러나 그는 대답이 없었다.

"당신, 어디.... 아파요?"

최대한 부드러운 목소리와 함께 남편의 고개를 들어 올리던 그녀의 표정이 일순 하얗게 변했다.

핏발 선 두 눈. 신경질적이고 창백한 얼굴. 섬뜩한 광기. 지윤은 지금까지 한번도 남편의 그런 모습을 본 적이 없었다. 남편은 언제나 정력적이고 의지가 강한 사람이었다.

"여보... 당신?"

그러자 김한수가 그녀의 손을 훽 뿌리치며 거칠게 고개를 돌렸다. 그리곤 절망적으로 소리쳤다.

"날 보지마!"

그녀는 떨리는 손으로 고개 돌린 김한수의 머리를 감싸 안았다. 그의 머리와 얼굴은 온통 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다.

"여보, 도대체 무슨 일이예요, 왜 그래요?"

그녀의 목소리도 떨리고 있었다. 그녀의 가슴에 고개를 묻은채 김한수는 말이 없었다. 그러자 조금씩 흐느낌이 새어 나왔고 남편의 어깨가 약간씩 들썩이기 시작했다. 그녀는 남편의 옆에 주저앉아 남편의 고개를 들어 올렸다. 남편의 얼굴을
본 그녀는 아무런 말도 할 수가 없었다. 가엾게도 남편은 울고 있었다. 그녀는 너무 놀라 울먹이듯 말했다.

"당신 왜 그래요? 무슨 일인지 말을 해봐요. 제발, 여보!"

남편이 두려운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남편의 입에서 나온 다음 얘기는 그녀로선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얘기였다.

"여.... 여보, 나.... 너무.... 무서워"

"네? 당신, 지금 뭐라고 했어요?"

"제기랄! 여보. 나... 무서워 죽겠어!"

마침내 남편이 그녀의 가슴에 얼굴을 묻으며 울음을 터뜨렸다. 그리곤 애원하듯 소리쳤다.

"잠을.... 잠을 잘 수가 없어. 너무 무서워서 잠을 잘 수가 없어, 여보!"

그녀의 가슴에 얼굴을 묻은 남편의 온 몸은 그녀가 부둥켜 안기에도 벅찰 만큼 심하게 떨리기 시작했다.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무섭다니. 아득한 현기증이 그녀에게 찾아 들었다. 그녀는 입술을 깨물며 불이 환히 밝혀진 거실을 둘러 보았다. 거실은 조금도 달라 진 것이 없었다. 자꾸만 눈물이 나려고 했다. 그러나 그녀는 안간힘을 쓰면서 눈물을 삼켰다. 그리곤 스스로에게 맹세했다. 남편에게 무슨 일이 있더라도 그를 지키겠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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