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래 글에 대하여 반박하려는게 쉽지는 않군요 !!

한기둥 작성일 07.07.19 17:52:41
댓글 8조회 900추천 0

[사기(史記) 하(夏) 본기의 [태강지리지]의 주석에는

"낙랑 수성현에는 갈석산이 있으며, (만리)장성의 기점이다."

 

주류사학의 기초를 이기백과 함께 닦아놓은 이병도는

[한국고대사연구] '낙랑군고(樂浪郡考)'에서 낙랑군 수성현에 대해

"지금 황해도 북단에 있는 수안(遂安)에 비정하고 싶다"라고

썼습니다.

낙랑 수성현의 遂(수)와 황해도 수안의 수(遂)가 같다는 이유 때문입니다.

 

이런 이유로 이병도는 중국 만리장성을 한반도에까지 그렸으며

그리고 낙랑군과 가까운 바다라는 창해(昌海)는 한반도 동해(東海)로 비정했습니다.

그리고 대방군 진번군 임둔군 은 한반도에 모조리 비정해두었습니다.

 

중국의 역사서 <<통전(通典)>>

갈석산은 한나라 낙랑군 수성현에 있는데, 진나라가 쌓은 만리장성이 동쪽으로 요수를 끊고 이 산에서 일어났다.

 

조조가 황해도를 방문했다?

 

삼국지의 영웅 조조 맹덕은 중신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오환을

정벌하고 친히 갈석산에 올라 갈석산에서 창해를 바라보며 시를 써서

읇었습니다.

 

늙은 준마는 마판(마구간에 깐 널판지)에 엎드려 있어도
 뜻은 천리에 있고
 열사는 말년에도
 웅대한 마음을 버리지 않는다네
 

 이 시의 제목은 <보출하문행(步出夏門行)>으로, 일명 <갈석편>이라고도 불립니다.

이 시의 연작 제1수의 '동쪽 갈석에 이르러 창해(滄海)를 본다' 라는 구절 가운데, '갈석' 이라는 이름을 따서 그렇게 부르기도 하는 것입니다.

 

중국역사서에는 진시황 암살사건이라고 나오는데.

창해역사 여흥성이 장량과 함께 진시황 암살 모의를 하여 진시황의 마차가 지나갈 때

철퇴를 던져 암살하려다 실패한 사건입니다.

여흥성은 '창해(昌海)'의 역사 즉 엄청 힘이 센 사나이라는 말입니다.

 

이병도 씨의 말대로 창해가 한반도 동해 라면 중국과 아무런 관련도 없는

강원도에 사는 사람이 진시황을 암살할려고 중국까지 간다는말인지?

 

게다가 조조는 갈석산에 올라 창해를 보았다고 했지만, 황해도 수안은 내륙 지방에 위치해 있어 주변에 창해라고 부를 만한 바다가 없습니다.

 

게다가 조조가 황해도에까지 왔다는건 황당합니다.

 

지금도 만리장성이 발해(북해) 부근에서 끝나는 지점에는

갈석산이 우뚝 서있습니다. 지금도 갈석산에는 조조가 썼다는 시가

돌에 새겨져있죠.

 

 

수양제의 침공로가 증언하는 낙랑군의 위치

 

그리고 수양제의 침공로 역시 낙랑군  이 한반도엔 없음을 명확히 말해줍니다.

 

수양제는 고구려를 침공하기 위해 612년 북경 북부 탁군의 임삭궁에서

112만 대군을 좌군 12군과 우군 12군으로 나누어 길을 정해주며

'평양성'으로 모이게 하는데.

 

그 진격로에 한사군의 이름이 대부분 나옵니다.

 

[수서(隋書)] [양제본기]에 따르면,

좌군의 제7군은 요동도(遼東道)를 거쳐, 제 8군은 현도도,

제9군은 부여도(夫餘道), 제10군은 조선도朝鮮道 ,

제12군은 낙랑도(樂浪道), 평양으로 집결하라고 명령하고있습니다.

 

또한 우군 제4군은 임둔도, 제11군은 대방도를 거쳐 평양으로 총집결하라고

명령하고 있습니다.

 

수양제가 정해준 각군의 진격로에 현도.낙랑,임둔이 등장하는것입니다.

 

평양에서 한나라 시대의 유물이 발견되었으니 평양이 낙랑군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의 말에 따르면

좌군 제12군은 낙랑(평양)을 거쳐 평양 으로 집결한다는 건데.

 

낙랑이 대동강 유역의 평양이라면 이 명령은 모순일수밖에 없습니다.

 

탁군에서 낙랑(평양)을 거쳐 다시 평양으로 집결하라는 명이기 때문입니다.

(탁군이라면 북경 부근이고 북경 부근에서 낙랑을 거치는게 아니라

북경에서 남쪽으로 내려가 래주(산동반도)에서 배타고 낙랑으로 가야되는게아닌가요?)

 

탁군에서 현도,임둔,대방 등을 거쳐 평양으로 집결해야하는 명령들도

모순일수밖에 없습니다.

 

임둔,대방은 이병도의 말대로라면 한반도 에 있고 대방은 황해도에있고

임둔은 함경남도라면 탁군에서 출발하지말고 래주(來州) 즉 산동반도에서

출발해야 되지않겠습니까?

 

참고로 2004년 국민훈장 무궁화장을 추서받은

故 이기백 교수는 자신의 [한국사신론]에서

한사군의 위치를 "낙랑 = 대동강 , 진번 = 자비령 이남_ 한강 이북 ,

임둔=함남 , 현도=압록강 중류 동가강"이라고 비정하였습니다.

 

애초부터 만리장성은 동호(東胡:동쪽 오랑캐)를 막기위해 진시황이

쌓은 장성입니다.

그런데 중국의 국경도 아닌 동쪽 오랑캐의 영역인 한반도에까지 장성을 쌓는데.

고조선이 그걸 가만히보고있다는게 유머요 코믹입니다.

 

엄연히 현재의 만리장성 끝에도 갈석산이 있는데도 이걸

억지로 황해도로 끌어들이려하니 우스울 뿐입니다.

그 당시에 스타크래프트 테란 의 건물 하늘로 떠서 옮기기가

있었습니까?

 

중국군현 낙랑군을 침공한 간 큰 초기백제

 

"13년 가을 8월에 위(魏)나라 유주 자사 관구검이 낙랑 태수 유무와 삭방

태수 왕준과 더불어 고구려를 치니, 왕은 그 틈을 타서 좌장 진충을

보내어 낙랑의 변방 백성을 습격하여 빼앗았다. 유무가 듣고 노하니

왕은 침범할까 두려워하여 그 백성을 돌려보냈다."

 

삼국사기 백제 본기 고이왕 조 기록 중

 

위나라 의 유주 자사 관구검이 낙랑태수와 삭방태수와 함께

고구려를 쳐서 동천왕과 전쟁을 일으킵니다.

 그 때 백제의 고이왕은 좌장 진충을 보내어서 낙랑을 공격합니다.

진(眞)은 백제의 8대 성씨 중 하나로서 진(眞)씨는

백제의 장군으로서 많이 활약했습니다. 아신왕 때에도 진충의 대를 이은

진무(眞武)는 광개토태왕과 전선에서 많이 싸웠죠.

진충을 보냈다는 것은 그만큼 낙랑공격에 왕이 각별한 신경을 쓴

백제의 대중국전쟁이었습니다.

 

그리고 낙랑군은 공격당하고 중국인들은 패해 포로로 되어 끌려갑니다.

(낙랑 태수 유무가 노하기만 하고 백성을 돌려받기만 하고 아무런 군사공격도

취하지못했다는 걸로 보아서 관구검이 고구려를 일방적으로 밀어버린게 아니라

관구검과 낙랑,삭방의 군사들은 고구려에서 고전을 면치못했다는것입니다.

그래서 유무는 백성을 돌려보내달라고만 한겁니다.)

 

아무튼 백제는 이미 중국 대륙의 군현인 낙랑군 을 칠 정도로

대륙에 있었던 것입니다.

 

삼국사기 백제 본기는 이미 온조왕 조부터 낙랑에 사신을 보내어 수교하고

낙랑군 태수 가 백제왕에게 사신까지 보냈다고 나옵니다.

그리고 백제는 낙랑군과 '국경'을 접했다고 나옵니다.

 

"4년 가을 8월에 사신을 낙랑에 보내어 수호하였다."

삼국사기 백제 본기 온조왕 조

"8년 가을 7월에 마수성을 쌓고 병산책을 세웠다. 낙랑 태수가 사람을

보내어 말하기를 "지난 날에 빙문과 우호를 맺어 한 집안까지 여겼는데.

지금 우리 땅 가까이에 성(城),책(柵)을 세우니 혹시 잠식할 모의가

있는 것이 아니오. 만약 구호(舊好)를 변치 않아 성을 헐고 책을 부수어 버린다면

의심을 할 바 없으나 그렇지 않다면 한 번 싸워 승부를 결정합시다."

(..중략.) 이로 인하여 낙랑과 더불어 화평을 잃게 되었다."

삼국사기 백제 본기 온조왕 조

(:'태수'란 표현으로 보아 낙랑군현의 태수를 지칭하는게 분명합니다.)

 

"17년 봄에 낙랑이 침범해와서 위례성을 불태웠다."

삼국사기 백제 본기 온조왕 조

 

백제가 낙랑군을공격했다는건 중국에서 일어난 일이라는 것인데.

왜 아직도 대륙백제가 근초고왕때에야가능하다는 헛소리가나올까요?

근초고왕 에서 훨씬 이전인 고이왕 때에 낙랑군과 백제의 전쟁관련기사가 나오는데도?

 

아울러서 낙랑태수와 국경을 접하고 싸우고 낙랑이 백제 수도 위례성까지

군사를 보내었다는 삼국사기 기록을 봐도 엄연히 백제 수도 위례성은 중국대륙에 있었습니다.

 

-내용 인용은 디씨겔에서 하였습니다-

이미 아래글은 디씨에서 나온 글들의 반박을 못하였습니다.

그리고 유물에 관해서는 다음글로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

한기둥의 최근 게시물

무서운글터 인기 게시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