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펌] 고대 삼국이 한반도에 없었다

한기둥 작성일 07.07.19 09:58: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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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사는 광복되었는가? 언젠가 문천님이 자비왕비가 파호라는 사실이 고대사의 핵폭탄이 될 것이라고 했던 일이 생각난다. 그것이 비록 작은 일은 아니지만 다음의 것에 비해선 새발의 피에 불과하다. 그것은 무엇인가? 언젠가 내가 얘기했던 일본삼서 - 일본서기, 고사기, 신찬성씨록 - 다. 거기에 우리고대사의 7~9할이 들어있다. 진정한 핵폭탄은 그것이다. 그동안 성찰한 성과를 일부나마 공개한다. 과정은 거의 없고 답만 제시할 것이다. 왜 그런 답이 나왔는지 여러분 스스로에게 물어보라. 무시해도 좋고 비아냥대도 좋다. 그러나 그것이 언젠가 그러는 자들의 가슴에 비수로 꽂힐 것이다. 귀 있는 자 듣고 눈 있는 자 보아라. 가슴을 열고 머리를 비워라. 지난 나의 글들을 반추하여 새로운 사실을 응시하라.

이른바 주류학계라는 이병도 이기백류의 반동 식민사관이 아직도 이 나라 고대 역사학계를 지배하고 있다. 하지만 눈부시게 발전한 고고학과 삼국사기 기록의 타당성이 계속해서 밝혀지면서 이미 주류의 기반은 무너지고 있다. 그런데도 이 싸이트에서 자칭타칭 논객이라고 하는 몇몇 허섭스레기를 비롯한 많은 역사학자란 자들이 역사를 우스개 거리로 만들고 있다. 윤내현, 이덕일, 이형구, 김종서 등이 연구성과를 내놓고 새로운 견해를 제시해도, 이도학, 이종욱 등이 주류에서도 새로운 의견을 내고, 정형진, 구자일 등이 제도권 밖에서 의미심장한 소리를 내도, 박영미 등이 주변학문에서 놀랄만한 연구를 제공해도, 그 철밥통은 요지부동이다. 이른바 송호정을 비롯한 몇몇 반골들은 더 심한 반동 논리를 내놓고 있다. 그들 주장한 것들은 아무 근거도 없는 억지임에도 불구하고.

물론 위 사람들이 맞는다는 말은 아니다. 그래도 새로운 내일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 그들이 결정적으로 모르는 것은 일본삼서다. 그 진실을 모르기 때문에 더 이상 나아갈 수 없는 것이다. 그야말로 이 싸이트의 대표적인 주류신봉자 무명의 글을 보자. 1) 윤내현을 비판한 진개의 침입논리 - 고조선이 대동강이라고 강변한다. 2) 왜와 백제의 논리 - 백제가 왜의 속국이었을 뿐이라고 빈정댄다. 3) 박창범 인식에 대한 비판 - 신라의 일식기록이 모두 지나사서에 있다고 한다. 4) 낙랑군의 논리 - 대동강이 낙랑군이라고 생떼를 쓴다. 5) 백제의 논리 - 호남지역은 백제도 아니었다고 한다. 6) 부여의 논리 - 어쩌다 옳은 소리 한 번 했다.

자세한 것은 이 글을 읽다 보면 자연히 드러날 것이고 나중에 종합해서 살피기로 한다. 그 논리가 과연 맞는가? 하나같이 자기모순일 뿐이다. 그가 제도권 안의 인사임이 틀림없는 데 숨어서 아닌 척 하는가? 이들이 바로 식민사학의 나팔수요, 동북공정의 앞잡이다. 그들의 논리가 맞다면 수많은 사람들이 목청 높여 역사가 잘못되었다고 떠들지 않을 것이다. 역설적으로 한국과 일본에서 고대사에 대한 관심이 유난히 높고 백화만발의 학설이 떠도는 것도 그만큼 잘못된 역사를 배우고 있다는 반증인 것이다. 제대로 된 성찰도 없는 것이 무슨 역사학인가? 역사학도 실제학이 되어야 한다.

그런데 우리 역사학은 담론 위주다. 고구려가 어디서 어떻게 건국되고 몇 년 몇 년에 무슨 일이 있었으며, 광개토왕 58성이 어디 일대고, 백제가 어디서 건국되고 시조가 누구이며, 위례성과 한성은 어디인지, 삼국사기 초기기록 하나하나 모두 맞는지, 가야시조가 수로인지, 신라김씨의 계통은 어떻게 되는지, 부여씨의 계통은 어떻게 되는지 등의 실체를 밝히는 것이 중요하지, 무슨 백제의 의의, 고구려의 역할, 삼국통일의 의의 등이 중요한가? 신라가 통일했다는 논리는 맞는가? 다시 말하지만 이제 식민사학의 논리를 쳐부수고 주류를 하루아침에 무너뜨려야한다. 그 공격무기는 있는가? 있다. 바로 일본삼서다.

역사를 바꾸는 것은 언제나 아웃사이더다. 결코 주류가 이뤄내지 못한다. 지나간 모든 역사가 그러했다. 징기스칸도 알렉산도도 나폴레옹도 모두 아웃사이더였다. 사마천도, 세익스피어도, 이태백도 그렇다. 갈릴레이도 아인슈타인도 패러데이도 플레밍도 코페르니쿠스도 모두 아웃사이더였다. 어지러운 한, 일 고대사도 결국은 아웃사이더의 손에서 결정 날 것이다. 이미 수많은 아웃사이더들이 그 철옹성을 부수고 있다.

고대사의 핵폭탄이란 제호로 23편을 연재한다. 끝까지 두세 번 읽고 진지하게 생각해보라. 자기의 논리, 생각과 맞지 않는다고 격하게 내깔려 질문하지 마라. 질문은 1편당 개인별로 1건씩만 해 달라. 진지하게 생각하고 다시 한 번 사서를 보고, 왜 저 사람이 이런 생각을 가졌는지 생각해 달라. 말로 안 되는 개소리 잡소리는 상대도 않겠다. 시간을 내서 얼마 뒤에 한꺼번에 질문에 응하겠다. 여러분 스스로에게 묻고 각자 의견을 내서 토론도 해보라. - 말이 경어체가 아니지만 여러 사람을 대상으로 한 문서 작성상 그런 것이고 뜻이 그런 것은 아니니 이해해 주시기 바란다.

2

우리역사의 비밀이란 싸이트를 운영하는 송준희, 오재성의 논리는 맞는가? 한마디로 아니올시다이다. 한마디로 엉뚱한 도그마에 빠져 있다. 뜨거운 가슴만 있고 차가운 머리는 없는 이들이다. 그런데도 왜 그곳을 들락거리는가? 죽어버린 식민사학의 억지논리보다는 낫기 때문이다. 최소한의 소중한 자료들은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각설하고 어째서 일본삼서가 왜 핵폭탄인가? 바로 백제의 기록이기 때문이다. 그것이 터지지 않고 알아채지 못한 것은 무엇 때문인가? 바로 뇌관이 없었기 때문이다.

여기서 잠깐, 낙랑군이 대동강 일대라고 주장하는 허황된 주류 이론을 보자. 상식으로 보아 그게 맞는가? 그 일대는 왕릉급 무덤과 유물로 가득하다. 낙랑군은 한나라 때 유주의 일부에 불과하다. 그게 과연 낙랑군일 수 있는가? 그 당시 지나사 어디에 군소재지 중에서 낙랑군만한 유적이 있는가? 수도인 낙양과 장안 일대를 빼고는 없다. 심지어 유주의 치소인 계(북경 서남부)에도 그만한 유적은 없다. 상식으로 보아 그곳은 절대 낙랑군이 될 수 없다. 그곳이 낙랑군이 아니라는 것은 <한서, 후한서, 진서, 삼국지>에 지천으로 널려있다. 여기서 그걸 다 거론하진 않겠다.

그럼 낙랑국인가? 그것도 논리에 맞지 않는다. 단 한번 기록에 나온 실체가 그렇게 대단한가? 그곳이 낙랑국이고 고리가 점령했다면 무엇이 부족해서 고리가 통일을 못하고 신라에 망했단 말인가? 자세한 것은 19편에서 논한다.

바로 그곳은 마한의 수도인 위례성이요, 달지국이요, 통합백제의 수도인 한성인 것이다. 그 정도는 되어야 고리와 맞짱을 뜰 수가 있다. 한강유역에 무슨 고분다운 고분이 얼마나 있는가? 고작 적석총 몇 기일 뿐이다. 과연 적석총이 백제의 양식인가? 오히려 대가야나 금관가야보다도 못하고 신라에 비해서도 훨씬 떨어진다. 그 정도 영역과 문화로 어떻게 고리를 상대로 싸우는가? 어림없는 소리다. 백제는 무엇이고 통합백제는 무엇인가? 근거는 있는가? 있다. 일본삼서다. 화랑세기 상장돈장이다. 그곳에서 나온 수많은 한씨관련 유물은 충분히 증거가 되고도 남는다.

화랑세기, 상장돈장? 그렇다. 바로 그것이 핵폭탄의 뇌관이다. 그것이 없었기 때문에 일본삼서라는 핵폭탄이 터지지 않은 것이다. 그것이 박창화가 지어낸 것이라고? 웃기지 마라! 그것이 박창화가 지어냈다고 하는 소린 유아원 애들보고 우주생성의 원리라는 초끈이론을 이해한다고 하는 편과 같다. 무엇보다 박창화가 그것을 지어낼 이유가 없다. 지어낼 능력도 없다. 박창화의 다른 저작을 종이비행기로 본다면 돈장과 세기는 최첨단 우주왕복선이다. 그것이 위서라면 동양사서(삼국사기, 유사, 일본서기, 고사기, 성씨록, 사기, 한서, 삼국지, 진서, 후한서 등)는 모조리 위서가 된다. 왜? 진실을 담고 전하고 있으니까? 박창화는 그 진정한 가치를 절대 알지 못했다. 그것을 알았다면 그는 상장돈장을 더욱 정성들여 필사했을 것이다.

무엇이 진실이고 무엇을 담고 있는가? 고대의 사관은 정직했다. 한, 중, 일 어느 나라를 통틀어서 말이다. 비록 그들이 권력자의 억압으로 왜곡된 역사를 썼어도 반드시 그 증거를 남겨놓았다. 어느 시대 어느 사서건 마찬가지다. 그리고 반드시 허점이 있기 마련이다. 그것을 찾으면 된다. 일본서기는 어떻게 왜곡되었는가? 한마디로 기년조작이다. 물론 일부 계통조작이 가해지긴 했어도 근본적인 틀은 기년이다. 알아낼 수 있는가? 있다. 삼국사기가 있기 때문이다. 알아냈는가? 대충 그렇다. 가장 중요한 신무부터 웅략까지 일목요연하게 뽑아낼 수 있다. 여기서 공개할 수는 없다.

삼국사기는 정확한가? 아니다. 심하게 왜곡되었다. 다만 타당할 뿐이다. 그 실체를 벗겨낼 수 있는가? 있다. 일본삼서가 있기 때문이다. 그 조작의 틀은 한마디로 계통조작이다. 그 계통을 밝히는 것은 일본삼서가 없으면 안 된다. 무엇이 그런 것을 가능케 했는가? 바로 화랑세기와 상장돈장이다. 왜? 김씨들이 조작하고 날조한 역사가 낱낱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일본서기도 삼국사기도 다 김씨들이 썼기 때문이다. - 김씨들이 조작한 역사, 그 천인공노할 범죄를 캐내기 위해 여행을 떠나자.

3

언젠가 내가 고대사 최대 비밀은 부여씨와 김씨의 동시 등장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

그것은 타당한가? 타당하다.

바로 김씨와 부여씨의 계통과 연대기를 밝히면 신라와 백제 가야의 역사가 드러나고 왜, 부여, 마한의 역사가 캐내어지며 고리 역사의 실체가 밝혀지고 북부여, 고조선의 역사가 빛을 내게 된다.

이후의 후신라와 발해의 역사 전개를 비롯한 여러 이론에서 부족하고 비밀에 쌓인 수백 수천 가지의 의문이 한꺼번에 풀어진다.

그것이 바로 일본삼서의 위력이요 그 일본삼서를 깨우는 세기와 돈장의 위력인 것이다.

산책과 안사, 탐정 등이 일본서기를 비롯한 일본삼서에 대해 여러 의견을 내 놓고 있으나 한마디로 인식부족이다.

조작설과 분식론의 산책설, 비류백제론의 김성호, 삼한백제론의 안사, 칠지도에 근거한 왜국 건국론의 탐정, 무녕왕에서 시작된 홍원기와 홍원탁의 대화왜론 등은 허점투성이다.

왜? 그들은 일본서기 자체가 백제의 기록임을 깨닫지 못하기 때문이다.

특히 신무부터 응신에 이르는 일본서기 핵심의 기록을 잘못 알기 때문이다.

그것은 초기백제와 부활한 부여의 실상을 고스란히 전하고 있다.

특히, 신무에서 응신까지가 제일 중요하다.

- 그 실상은 누가 지웠는가? 바로 신라다.

신라김씨다. 왜? 백제의 부용국이었기 때문에.

지나사서에서 거짓말 하는 것 같은가?

아니다. 그들은 정확히 적고 있다.

그러면 신라는 언제부터 백제의 부용국이 되었을까?

그렇다가 어떻게 동등해졌을까?

그들은 또한 응신부터 계체에 이르는 백제와 왜의 헤게모니 장악투쟁을 모르고 있다. 왜?

신라김씨들이 조작한 역사를 모르기 때문에.

돈장에는 나와 있는가?

그렇다.

그 조작의 논리가 낱낱이 드러나 있다.

신무, 응신, 신공, 숭신이 누구인지 송두리째 드러난다.

고대사의 신대로 포장된 인물들이 누구인지 한꺼번에 드러나고 일본서기와 어떻게 연결되는지, 과연 어디까지가 중첩인지 무섭도록 밝혀진다.

각설하고 일본에선 어쩌면 화랑세기와 상장돈장을 분석하여 그 위력을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

이미 그 계통을 파악하여 두려워 발표하지 않고 있을지도 모른다.

아니라도 좋다.

일본이 백제의 주류로 밝혀지는 그 순간은 모든 게 허물어진다.

가히 혁명이 된다. 천하가 뒤집어진다.

그야말로 모든 역사를 새롭게 써야 하기 때문이다.

역사만 새로 써지는 게 아니다.

모든 인문학을 허물고 다시 세워야 하기 때문이다.

역사가 바뀌면 인식이 바뀌고, 인식이 바뀌면 가치관이 바뀐다.

가치관이 바뀌면 의지가 바뀌고, 의지가 바뀌면 다시 역사가 바뀐다.

이것이 바로 진정한 역사학의 가치인 것이다.

그 가치는 바로 박창화가 의도하지 않았지만 그의 붓끝에서 시작되었다.

박창화의 <우리나라 강역고>란 책이 전에 나온 적이 있다.

나도 소장하고 있지만 그것을 읽으면 실소를 금할 수 없다.

그 정도 역사인식과 지리 인식을 가진 분이 세기와 돈장을 지었다고?

차라리 유아원 애들보고 시뢰딩거의 파동방정식을 풀라고 하는 것이 낫다.

<강역고>가 움막이라면 돈장과 세기는 타지마할이다.

움막이나 지을 정도인 시골농부가 타지마할을 혼자 설계해서 지었다는 얘기나 마찬가지다.

다시 말하지만 세기와 돈장은 절대 위서가 아니다.

그것이 위서라면 고대 동양사서가 모두 위서가 된다.

광개토비와 문무왕비가 모조리 거짓이 된다.

진골정통과 대원신통이 색공을 바치는 집단이라고? 코미디 하는가?

겉으로만 보면 그렇다. 하지만 속내를 들여다보라 그게 무엇인지.

진골은 김씨고 대원은 박씨라고? 신라가 모계라고?

2부 체제의 대표로 왕과 갈문왕이 있었다고?

그런데 어째서 왕은 이사금 마립간 등으로 불리는가?

갈문왕도 갈문이사금 갈문마립간이 되어야 하지 않는가?

역사가 무슨 장난거리인가?

어째서 화랑세기에 대원신통 소개하면서 진골정통인 선혜가 대원신통을 잇나?

대원은 박씨라는 이론대로라면 선혜는 김씨이자 박씨겠네!!

그리고 남해왕이 왜 나오는가?

바로 대원의 시작이기 때문이다.

대원? 대원이 무엇이기에? 상장돈장을 보라! 대원신통의 계보가 일목요연하게 나온다. 그런데 어째서 선혜가 대원신통을 이었을까?

박씨의 시조가 누구인지도 모르면서.

혁거세라고? 웃기지 마시라. 혁거세는 김씨다.

김씨의 시조다.

신라김씨의 시조다. 알지가 아니었더냐?

알지는 신라김씨의 또 다른 시조일 가능성이 있을 뿐이다.

왜 문무왕비와 후대의 기록이 차이가 나는지 신라김씨들의 음모가 낱낱이 드러난다. 김씨들은 기분 나쁠 필요도 없다.

그대들 대부분이 진정 김씨인지도 의심스럽기 때문에...

4

‘삼국통일 이룩한 화랑의 옛 정신을....’

맞는가? 통일이란 무엇인가?

역사학적으로 통일이란 무엇인가?

갈라진 문화를 가진 민족이나 나라를 다시 합치는 것이 아닌가?

진시황의 지나 통일,

비스마르크의 독일 통일,

베트남의 통일 등이 다 그러하다.

그런데 우리나라 주류의 역사학자란 것들과 거기에 넘어간 국민들이 짖어대는 논리가 있다.

신라가 외족을 끌어들여 반역사적인 통일을 했다고 하면 고리와 백제는 외국이었을 뿐이라고 말한다.

웃긴다.

외국을 망하게 한 것이 통일인가?

침략이 아닌가? 점령이 아닌가?

지나에서 고리가 자기 역사라고 주장하고 그 선대인 부여와 고조선도 자연히 자기 것이니 내놓으라면 대응논리는 있는가?

스스로 외국이라 해놓고. 백제의 주류가 일본이라고 밝혀지고 일본이 백제를 다시 찾겠다고 하면 다 내주겠는가?

기가 막힐 뿐이다. 대한민국이 아닌 경상민국 또는 경북민국이 될 것인가?

삼국이 어떤 관계였는지,

부여의 역사가 어떻게 전개되었길래 고리와 백제로 갈라졌는지,

부여는 조선을 어떻게 대체하였는지,

부여씨와 김씨는 어떤 고리로 역사를 이어왔는지,

왜국은 어떻게 건국되었는지,

일본서기가 직시한 일본열도 왜국의 건국시조는 과연 누구인지,

과연 일본서기의 백제와 삼국사기의 백제가 동일한 지칭인지,

동명은 누구이고 주몽은 누구이며 어떤 관계였고,

온조는 누구인지 비류는 구대는 누구인지,

성한은 누구이고 혁거세는 누구인지,

그런 것들을 밝힐 생각은 않고 희한한 통일논리로 역사를 더럽히고 역사 앞에 죄를 짓고 있다.

주로 주장하는 자들이 대부분 신라주의자 영남패권주의자들이다.

수구반동집단이다.

그들은 역사를 분탕질해놓고도 다시 이 나라를 조각내고 있다.

바로 지역감정이란 논리로.

어찌 지역감정인가?

그야말로 특정지역의 지역패권주의를 교묘하게 얼버무리고 있다.

각설하고 신라는 결코 통일하지도 통일할 의지도 없었다.

그들 김씨들은 단지 자기들의 권력유지에만 급급했을 뿐이다.

역사의식 민본의식은 애초에 없었다.

우리는 단군조선이 갈라진 이래 한 번도 통일되지 못한 불행한 민족이다.

그것은 거의 김씨의 죄다.

이제 그 죄를 낱낱이 밝혀나갈 것이다.

왜? 제대로 된 역사, 올바른 역사를 쓰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것이 후대에 얼마나 악영향을 끼쳤는지 가슴을 치게 되리라.

5

고리가 산적집단인가?

- 산꼭대기에 나라를 세웠다고?

오녀산성이 고리의 졸본이라고?

지하의 주몽이 웃는다.

요즘 한창 고리 드라마 열풍이다. 주몽, 연개소문, 대조영

- 나는 하나도 보지 않는다.

그야말로 식민사학의 나팔수 동북공정의 앞잡이들이 자기들의 논리를 충실히 반영하는 것이다.

그들의 선전장이기 때문이다.

멋대로 놀아나는 지식인 방송인 국민들이 안타까울 뿐이다.

관구검기공비는 그것을 증명한다.

삼국지는 분명히 기록했다.

그것은 환도를 쳐부수고 고구려왕을 몇 차례 추격하여 옥저의 끝자락에 암석을 새겨 공을 기록했다고

- 그곳은 고리의 중심이 아니었으며 변경이었을 뿐이다.

삼국지 오서 오주전(손권전)을 보라!

고구려에 대해 뭐라고 써 놨는지?

통설대로라면 바다도 없던 고리가 오나라와 배로 통교하는가?

고리는 어디에서 세워졌는가? 바로 요서다.

졸본은 서요하와 노합하가 만나는 일대이고 국내성은 그 약간 남쪽에,

다시 남쪽에 평양성(안시성)이다.

이것은 6편에서 논한다.

그러기에 모본왕 때 지나의 북부인 태원 등을 공격했던 것이 가능한 것이다.

저 멀리 압록강 중류에 쳐박혀 있던 고리라면 가능하겠는가?

고리는 새로 건국되었는가?

아니다. 해모수의 부여를 동명의 부여가 이어받고 다시 주몽이 이어받은 것뿐이다.

정확히 말하면 부여의 계승일 뿐이다.

언제 고씨라 칭하였는가? 바로 6대 태조대왕 때부터다.

그러기에 태조란 칭호를 얻은 것이다.

왜 고씨라 성을 바꾸었는가?

바로 부여가 부활했기 때문이다.

부여를 버리고 새로운 역사를 세우기 위해서다.

부여가 부활했다고? 그렇다. 부여는 분명히 대무신왕 때 멸망당했다.

그런 부여가 부활한 것이다.

어디서 어떻게 누구에 의해서 어떤 계기로?

각설하고 부여의 부활은 역사를 바꾸었다.

그것은 어떤 의미로 한민족의 불행의 서막이었다.

아니 행운이 될 수도 있었다.

김씨만 아니었다면 광개토대왕만 아니었다면(?) 이것은 9편에서 논한다.

첨언하자면 태조란 호칭은 동양사에서 바로 고리의 태조대왕이 처음이다. 이래도 시호법이 오직 지나에서 시작되었는가? 우리가 바로 황제의 나라 천자의 나라가 아니던가? 어찌 지나사에 태조대왕보다 앞선 태조란 칭호가 있었던가?

6

옥저는 어디에 있었는가? 요서에 있었다.

요동만 바다를 끼고 있었다.

그래서 북옥저 정벌기사가 주몽왕 때 나오고 남옥저의 구파해 망명기사가 온조왕 때 나온 것이다.

북옥저가 어디고 남옥저가 어디인가? 그리고 동옥저는 무엇인가?

삼국지는 거기에 대해 답을 주고 있다.

후대인들이 삼국지를 잘못 이해하고 있을 뿐이다.

정확히 말하면 낙랑을 대동강에 비정하느라 온갖 억측과 곡해를 하고 있을 뿐이다.

허접들! 바로 (본)옥저와 동옥저를 착각하고 있는 것이다.

본옥저는 어떻게 되었는가?

바로 고리의 소유가 된 것이다.

그것이 잠깐 위나라의 세력권이 되기도 했다.

그러다가 진나라로 이어졌다.

그 잠깐이 역사를 갈랐다.

바로 새로운 백제를 탄생시킨 것이다.

그만큼 관구검의 고리 침공은 커다란 역사의 회오리를 몰고 왔다.

애초에 그곳은 한나라 현도군과 임둔, 진번군이 설치되었다.

곧바로 임둔 진번이 폐지되고 현도군은 쫓겨 갔다.

쫓겨 간 곳은 난하와 대릉하 노합하가 삼각으로 만나는 지점이었다.

군이라기보다는 명목상의 군에 불과했다.

바로 그 위에 부여가 있었다.

그러기에 부여의 낙랑침공이 가능했던 것이다.

바로 후한서의 기록이 정확하다는 것이다.

낙랑군을 대동강에 비정해 놓고 후한서기록이 잘못되었다고?

주류라고 뻐기는 자들이 과연 역사학자냐?

<후한서지리지>에 있다.

낙양에서 동북쪽 한단까지 1100리라고.

지도 놓고 비율로 따져봐라! 죽었다 깨어나도 같은 동북방향 5000리인 낙랑군은 오늘날 요하를 넘어오지 못한다.

공손씨가 요동에서 황해도까지 다스렸다고?

무슨 오지랖 떠시나!!

그런 공손씨가 아무리 사마의가 뛰어나다지만 일거에 요동 양평성 무너졌다고 황해도까지 한꺼번에 무너지나?

그대들 주류 이론대로라면 핵심지역이 그 정도 밖에 안 되었던 고리도 수나라 대군과 당나라대군을 수없이 물리쳤다.

그 정도 세력이라면 촉나라와 버금가는 세력이다.

공손씨는 겨우 천진일대에서 대릉하에 이르는 정도였다.

공손씨가 동이를 통제했다고? 맞는 말이다.

통제의 의미를 모르는 식민사관의 나팔수들이 있을 뿐이다.

연안항로를 이용하던 그 시절에 만주와 한반도, 일본열도의 모든 세력은 반드시 그 지역을 거쳐야 중원으로 갈 수 있었다.

그래서 훗날 대방군이 중요해진 것이다.

그러기에 통제한다는 표현을 쓴 것이다.

그것을 공손씨가 마치 동이를 지배한 것처럼 오도하고 있는 것이다.

부여가 현도군 또는 요동군에 속한다는 말도 마찬가지다.

바로 현도나 요동군을 통해 지나 조정과 접촉하는 것을 표현한 것이다.

그것을 속국이라고 하는 사람들이 많다.

역사는커녕 책도 읽을 줄 모른다.

다시 평양성이 고리의 수도가 되었다.

바로 한나라의 안평현이다.

그래서 옮겨간 현도군에 서안평현이 생긴 것이다.

안평은 바로 <괄지지>에 말한 왕검성이다.

원래 예맥의 땅이다. - 역사에는 한결같이 말갈로 나온다. -

그것은 훗날 안시성이 된다.

바로 고리가 수도를 요동 장안성으로 옮기고 난 다음부터다

장안성이 평양성으로 불리자 기존 평양이 안시성이 된 것이다.

그 남쪽의 옥저 치소 동이현은 비사성이 된다.

바로 요나라의 해주다.

발해의 남경남해부다.

남해부가 북청이라고? 요사가 엉터리라고? 착각하지 마라.

요사는 약간의 착오가 있을 뿐이다.

왜 착오가 생겼을까? 바로 김씨 때문이다.

그래서 안시성을 치던 당나라 병사들이 비사성의 군대를 부른다고 표현한 것이다.

비사성이 요동반도 끝이라고?

<삼국지>와 <삼국사기>가 다르다고? 그렇지 않다.

삼국지와 삼국사기는 똑같다. 똑같은 말을 다르게 썼을 뿐이다.

삼국지가 부분적으로 자세하고 삼국사기가 체계가 있을 뿐이다.

주류학계가 그것을 알 리가 없다.

머리를 열지 않고 가슴을 묶어두기 때문이다

7

언젠가 무명의 왜=일본열도를 한참 나무란 적이 있다.

그가 늘 하는 말로 왜는 해상능력이 있었고 군사력이 뛰어났단다.

무슨 근거로? 삼국지를 보라!

큐슈만 해도 수많은 소국들로 갈라진 섬나라가 무슨 수로 숭신천황대에 가야와 신라의 싸움에 간섭하고(성씨록 참조) 신라왕을 두 번씩이나 죽이고 바꾸며 한결같이 삼국사기에 왜로 쓰여졌는가?(왜 여왕 비미호만 예외다.)

- 어째서 예외였는지 이 글에서 밝히지는 않겠다. -

현대의 고고학을 비롯한 여러 연구도 결코 야마대 정권이 6~7c 전에는 열도를 통일하지 못했음을 밝히고 있다.

무명이나 일부의 말마따나 천 번을 양보해서 삼국지의 비미호의 왜가 혼슈섬 야마대 왜라고 쳐도 저희들 열도도 제대로 통일 못한 자들이 무슨 수로 몇 천리 바다 건너 신라를 대규모로 친단 말인가? 웃기지 마라.

일에는 순서가 있는 법이다.

지나사도 세계사 어디를 봐도 내부통일이 먼저고 밖으로 뻗어가는 것이다.

한나라 수나라 당나라, 비스마르크의 독일, 징기스칸의 몽골, 알렉산더의 그리스 등 모두 마찬가지다.

더구나 섬에서 자기 주변도 통일도 못한 주제에 무슨 힘이 남아돌고 무슨 이득이 얼마나 있었기에 밖으로 싸돈단 말인가?

결코 왜는 열도가 아니다.

일본서기를 쓴 세력은 바로 부여요 백제인 것이다.

속시원히 밝힐 수 있는가? 있다.

삼국사기가 있고 삼국지가 있고 돈장과 세기가 있다.

거리낄 것이 없다. 아니 일본서기 스스로 백제요 부여임을 말하고 있다.

- 나는 부여요, 백제이니라! 후대의 인간들아, 들어라! -

눈을 부릅뜨고 찾아보라. 내가 거짓말하고 있는지.

<문제에 답이 있다.>는 격언이 있다. 마찬가지다.

삼국사기의 비밀은 바로 삼국사기안에 답이 있고 일본서기의 비밀은 바로 일본서기 안에 답이 있다.

고대의 사관은 문제를 내고 답을 모조리 제시해 놓았다.

그것을 알아차리지 못한 후인들이 바보일 뿐이다.

마찬가지다.

한강 유역에 있던(주류학설대로라면) 별로 크지도 않던 백제가 무슨 주변도 통일하지 못하고 산동으로 진출하고 중국 동해안으로 북경지방으로 진출한다는 이론을 펼치는가?

그것은 적어도 백제가 한반도 전체와 남만주 일대를 영유하고 있어야 가능한 얘기다. 열본열도 경영도 마찬가지다.

지금의 이론은 허점투성이다.

고고학으로 이미 호남지방 정도는 6c까지도 백제의 영역이 아닌 것으로 밝혀지고 있다.

기껏 한강유역 뿐이 백제가 무슨 역량이 있어서 백제가 고리와 맞짱을 뜨고(주류이론) 열도를 경영하고 해외로 나간단 말인가?(재야 및 비주류 이론대로라면)

- 그러기에 주류는 일본서기에 나오는 백제의 실체를 끝없이 부정하고 진보역사이론은 백제를 치켜세우면서도 주류학설 따라 백제가 한강유역이라고 한다. - 바보들!

역으로 요동과 한반도를 전부 백제의 영향권이라고 한다면 위 얘기는 가능한 것이 된다.

즉 백제는 열도를 경영하고 해상능력을 바탕으로 뻗어나갈 수 있게 된다.

충남과 호남으로 갇힌 백제가 고리와 계속 충돌하고 신라를 그토록 밀어붙일 수 있는가?

더구나 한강유역은 신라가 차지하여 고리와는 국경이 단절되었는데도 여전히 충돌하고 있다.

주류의 이론대로 하면 그야말로 모순이 아닌가? 이 무슨 도깨비장난인가?

그 작은 땅에 76만호 5도독부가 들어갈 땅이 어디 있단 말인가?

- 마한과 백제의 수도는 평양이다. 100% 확신해도 좋다. -

빼도 박도 못할 증거는 수없이 널려있다. 여기서 일일이 밝히지는 않겠다.

8

초고왕, 귀수왕, 진사왕, 아화왕, 직지왕, 곤지, 무녕왕, 동성왕, 성명왕, 의자왕 모든 백제 왕들의 시호를 정확히 적었다.

그런데, 도모왕=동명왕? 도모가 동명이라고? 웃긴다.

일본서기를 쓴 세력이 도모가 동명임을 몰라서 도모라고 적었는가? 아니다.

그들은 알고 있었다. 정확히 도모가 맞는 것이다.

도모는 누군가? 바로 부여왕이다.

어떤 부여왕인가? 바로 대무신왕에게 망하고 연나부에 안치되었다가 독립한 새로운 부여의 창시자다.

그가 바로 천조대신의 칭호를 얻은 것이다. 동명은 절대로 100% 도모가 아니다.

<속일본기>에 도모왕은 백제의 시조이자 원조로 나온다.

그럼 천조대신은 백제의 시조이자 일본서기 세력의 시조와 원조가 된다.

즉 백제=일본서기의 세력이다.

이것으로 고대사는 한마디로 게임 끝이다.

부여 도모왕이 천조대신인데 무슨 얘기가 필요한가?

그야말로 고대사는 게임 끝인 것이다.

도모의 계열을 밝힐 수 있는가? 있다.

해부루-금와-대소로 이어지는 후예다.

갈사왕 도두와도 관련이 된다.

어제 즉위해서 언제 돌아갔는가? 알 수 있는가? 알 수 있다.

과연 지상에 강림한 천조대신의 손자는 누구인가? 알 수 있다.

그럼 고사기의 신들은 누구인가? 간단하다. 모두 한국 고대사의 제왕들이다.

지나사서에 부여시조는 동명으로 되어있다.

어찌된 것인가? 맞다. 바로 북부여의 시조일 뿐이다.

그러나 틀리기도 하다.

해부루의 동부여를 그들이 알 리 없었다.

그들이 접한 것은 원래 북부여와 새로 부활한 동부여이기 때문이다.

원부여는 고리가 되었고 새로 부활한 동부여가 고리의 서북쪽에서 이어지다가 일파가 몰려가 백제를 이룬 것이다.

그들이 그 과정을 기록하지 못한 것은 외국의 일이기도 하거니와 하필 그 때가 중원이 대혼란기였기 때문이다.

나중에 때로 부여는 백제로 불리기도 한다. 언제?

신찬성씨록에 도모의 10대손으로 귀수왕이 나온다.

물론 이는 백제 귀수왕이 아닌 근귀수왕이다.

왜 그런지는 여기서 설명하지 않겠다.

바로 신찬성씨록이 거의 정확한 기록이다.

내가 하필 일본삼서중에서도 성씨록을 제일로 치는 이유다.

<삼국지 부여전>

<삼국지 관구검전>

<후한서 부여전>

<진서 부여전>

<성씨록>

<삼국사기> <일본서기> 다 동원하여 근귀수왕이 10대손임을 증명해보라!

여러분이 그것을 찾아내야지만 정말로 역사를 할 자격이 있는 것이다.

천조대신이 근초고왕이라고? 아서라! 지하에 계신 도모왕이 놀라신다.

9

그러다가 부여는 모용씨의 침입을 받는다.

때마침 관구검 전쟁으로 위나라 영향권에 들어있던(당시는 위를 대체하여 사마씨의 진이 들어섰다.) 옥저로 대대적으로 피난 간다.

그것이 역사를 갈랐다.

그 세력의 일부는 다시 부여로 돌아왔지만 대부분은 백제를 접수하고 왜를 점령하고 변진한을 점령하며 신라를 먹어치우고 최종적으로는 마한을 점령한다.

그리고 마침내는 열도(규슈와 혼슈 서부)마저 정복해 버린다.

그것은 순식간에 이루어졌다.

마치 근세사에서 일본이 대동아공영권을 부르짖고 순식간에 아시아태평양일대를 먹어치운 것과 비슷하다.

한반도와 열도 남만주가 백제의 영향력 아래에 놓인 것이다.

그것은 불완전한 통일이기도 했다.

그런 백제는 요서의 부여와 합작으로 원수지간인 고리와 숙명의 한 판 대결을 펼친다. 바야흐로 동족상잔의 비극이 시작된 것이다.

이것이 바로 고리와 백제가 충돌한 근본적인 원인이다.

어째서 백제가 북중국을 제치고 남중국의 동진과 먼저 교류했는지 그 이유가 드러난다.

bc 18년에 건국된 백제가 아무런 충돌 없이 고리와 잘 지내다가 근초고왕 때 마한을 정벌하고 북진하다가 고리와 충돌했다고? 무슨 블랙코미디인가?

350여년을 평화롭게 지내던 사이가 어느 날 갑자기 철천지원수가 되나?

주류 이론대로라면 남쪽도 제대로 간수하지 못한 백제가 무슨 수로 고리와 충돌하나?

현대 고고학으로 호남지방은 백제의 영향권도 아니었는데 겨우 한강유역만한 조그만 땅덩이를 가지고 고리와 맞짱 뜨나?

고리와 싸우면서 한편으로 남쪽에서 마한을 정벌하나?(고리 고국원왕과 최초로 충돌한 것은 369년, 그런데 주류들이 일본서기에서 따온 마한 정벌론은 369년이다.)

무슨 백제의 힘이 그리 남아도나?

근초고왕이 친 평양은 바로 요서의 평양이었다. - 100% 확신해도 좋다. -

바로 훗날의 안시성이요 조선의 원래 왕검성이다.

백제는 언제나 부여의 후신임을 자처했다.

삼국사기의 기록대로 고리에서 갈라져 나왔다면 고리와 철천지원수가 되어 싸웠을 것 같은가?

바로 온조왕으로 포장된(?) 세력은 마한이었다.

그대로 한씨 마한만 해씨 마한으로 대체했지 마한이란 이름을 바꾼 것은 아니었다.

백제라고 한 것은 신라김씨다.

왜? 훗날 그것이 백제가 되었기 때문이다.

이는 신라본기에도 그대로 통용된다. 왜에도 그대로 통용된다.

그러기에 고리 태조왕기에 마한이 등장한 것이다.

바로 해씨의 마한인 것이다.

김부식이 눈이 둥그레졌다.

마한이 망했는데 나왔다고.

하지만 <삼국지>를 보라.

한씨를 대체한 그들도 계속 마한이었다.

바로 신라김씨의 농간을 김부식 그가 알 리 없었다.

그러기에 마한과 고구려는 몇 백 년을 사이좋게 지냈던 것이다.

각설하고 해씨는 훗날 백제의 8대성이 된다.

어느 날 갑자기 부여씨에게 정복당했지만 그들도 역시 부여의 핏줄이었다.

그리고 한동안 동명의 제사도 계속된다.

바로 부여씨의 포용정책이다.

마한이 소국으로 이루어진 부족국가였다고?

<삼국지>를 봐라! 분명히 진왕이 다 통제한다고 되어있지 않은가?

주나라가 분봉한 제, 진, 노, 허, 정 등의 나라가 다 독립국이었나?

간단히 말하면 행정구역 아닌가?

일본서기에 나오는 출운국, 축자국, 근강국, 대화국 등이 다 독립국이었나?

바로 마한의 행정구역이 국인 것이다.

오늘날, 도, 군 등과 같은 것이다.

왜 문헌을 저희들 편의대로 해석하는가?

어떻게든 한국고대사를 우매하게 만들기 위한 작태다.

상식적으로 따져봐라. 바로 옆에 중원은 그리 강대한데 바로 옆의 모든 기후조건이나 문화조건도 비슷한 동이국가들은 언제나 비실비실한가?

하지만 백제는 겉으론 강했지만 안으론 허약했다.

급작스럽게 정복된 지역들은 아직 절대적 통합이 이루어지지 않았고 많은 국력이 열도를 비롯한 점령지역을 정비하느라 소비되고 있었다.

결정적으로 근귀수왕의 급서와 진사왕의 쿠데타가 일어난다.

그리고 백제가 둘로 찢어진다.

진사왕은 누구인가? 바로 김씨다.

이 틈을 타고 고리는 극적으로 한숨을 돌리고 위대한 대왕 광개토의 등장을 맞는다.

순식간에 힘은 역전된다. 백제는 엄청난 영토를 잃는다.

이 모든 것을 순식간에 이룬 자가 누구인가? 바로 비류왕이다.

정확히는 비류왕의 어머니와 함께 하였다.

바로 일본서기에서 신공으로 등재된 여인이다.

즉 신공은 이중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하나는 비류왕의 어미요, 하나는 응신천황의 어미다.

그녀와 비류왕은 한국사에 있어서 가장 위대한 정복자였다.

광개토왕은 거기에 비하면 한참 떨어진다.

그녀가 정말로 백제본기에 나오는 소서노일 가망성이 많다.

- 아직 거기까지에는 단언하지 못한다. -

비류왕은 누구인가? 바로 일본무존=야마토다케루다.

그러기에 천황으로 등재되지 못한 것이다. 왜? 왜왕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당시 왜왕은 누구였는가? 계왕 즉 경행천황이다.

훗날 잠깐 백제왕이 된다. 계왕이다.

어째서 경행기가 일본무존으로 가득한지 아시는가?

바로 백제왕이기 때문이다.

아무렇게나 무존이란 칭호를 올리는가?

바로 정복왕이기 때문이다. 계왕은 왜왕에 불과했다.

그런데 어째서 백제왕이 되었는가?

거기에 바로 근초고왕과 근귀수왕의 시호에 대한 비밀이 있다.

일본서기 신공기에 그 답이 나온다.

삼국사기에 그 답이 나온다.

다음 왜왕은 누구인가 성무다. 성무는 누구인가? 바로 무내숙녜다.

그럼 응신은? 바로 침류왕이다.

그가 침류왕이란 것은 일본서기에 자세하게 나와 있다.

바로 기년조작의 위력이다.

기년조작의 방법론만 밝히면 침류임을 감춘 것이 침류라는 위력으로 다시 태어난다. 진사왕의 쿠데타로 밀려난 그가 한반도 남부에서 세력을 키우고 열도 서부에서 힘을 키워 동부 근기일대 지역을 점령한다.

그리고 백제로 건너가 진사를 죽이고 아화를 세운다.

이제 대륙과 열도의 세력이 역전된 것이다.

전지의 인질기사는 바로 여기에서 나온 것이다.

마치 백제가 왜의 속국처럼 보인다.

이것을 무명은 마치 백제가 왜의 속국이라고 단정한다.

일면식 접촉도 없던 백제와 왜가 어느 날 갑자기 주종관계가 되나? 왜?

바로 신라의 농간과 조작을 모르기 때문이다.

백제를 버린 왜의 김씨세력을 모르기 때문이다. 바로 신라김씨의 죄악 때문이다.

10

위에서 얘기한 신공 49년 - 주류들이 369년이라고 엉뚱하게 둘러대는 - 에 대해 살펴보자.

그것은 결코 369년이 아니다.

북쪽에서 고리와 싸우면서 한편으로 남쪽에서 친히 마한정벌(주류들의 코미디 이론이다. 본문엔 분명히 신라정벌이다.)을 하는가? 정답만 제시한다. 347년이다.

눈을 크게 뜨고 백제본기를 보라 그 해가 언제인지? 근초고왕 2년이다.

바로 일본서기식으로 따지면 근초고왕 원년이다.

어째서 근초고왕기의 초반부가 공백인지 짐작 가는가?

바로 신라의 의도적인 삭제다.

거꾸로 신공원년을 계산해보라. 299년이다. 그 전해는 298년이다.

신라본기를 눈을 크게 뜨고 보라! 과연 무슨 일이 있었는지.

여담이지만 신라본기는 지금까지 내 연구로는 백제본기나 일본서기와 정확히 1년 차이가 난다.

어디서부터 어떻게 차이 나는지 모르지만 각종 자료를 대비하면 신라본기가 잘못되었음을 알 수 있다.

297년 유례이사금조에 이서고국이 신라를 침범한다.

그리고 무슨 이상한 미추왕의 댓잎군사 등이 나타난다. 과연 그 의미가 무엇인가?

물론 위에서 말했듯이 신공기는 중첩이다.

바로 백제를 세운 비류왕의 어머니(소서노?)와 일본의 전신인 야마대왕조를 세운 침류왕 응신의 어머니(아이부인)를 기리는 이야기다.

그러기에 신공이란 칭호를 올린 것이다. 결코 아무렇게나 올린 칭호가 아니다.

기년에서 주(主)가 비류왕모이고 부(副)가 아이부인이다.

기사에선 반대다. 따라서 이 부분은 기년과 기사가 중첩되어 있다.

어째서? 일본서기 기년의 기준이 바로 응신천황이기 때문이다.

바로 일본의 실질적인 건국자임이 드러나는 대목이다.

이렇게 물을 수도 있을 것 같아서 미리 해둔다.

신공 49년 전에도 근초고왕이 나오는데요?

신공 55년에 근초고왕이 붕어했으니 기년이 맞지 않는데요?

내가 그것도 모르고 이렇게 단언하는 줄 아시는가?

그렇게 간단하다면 일본서기의 체면이 깎이지요!!

신공기와 응신기는 바로 일본서기의 핵심중의 핵심이다.

그 비밀의 답만 공개하겠다. 그가 침류왕임을 보여주는 하나의 증거다.

41-19=22, 1+19+2=22, 390-(69+22)=298, 298+69+41-5=403, 298+69+22=389이다.

389가 무엇인가? 바로 왜국 건국 전년이다.

백제에서 물러나 일본으로 건너간 응신이 정식으로 왜 건국을 선포한 것은 390년이다.

말했듯이 응신이 침류왕임은 이외에도 많은 증거가 수두룩하다.

바로 일본서기의 기년의 중심은 응신이기 때문이다.

바로 일본서기의 작자들은 응신(침류)을 일본 왜국의 건국시조로 여겼기 때문이다.

과연 403은 무엇인가? 22는 무엇이며 19는 무엇이고 또 5는 무엇이란 말인가?

무엇을 뜻하는지는 스스로 머리를 비우고 가슴을 열고 생각하고 찾아보시라!

바로 고대의 사관은 정직하게 역사를 쓴 것이다.

비록 권력에 눌려 감추었지만 그들은 후세에 분명히 진실을 알리려 애를 썼다.

억지 논리로 가득 찬 주류학계,

부체제나 들먹거리며 역사의 발전단계를 거꾸로 돌리는 한심한 이들,

삼국초기 기년조정이나 한다고 하는 작자들,

임나일본부는 두둔하면서 백제는 똥으로 보는 비아냥꾼들,

- 이 모든 식민사학의 나팔수 동북공정의 앞잡이 - 들에게는 결코 보이지도 않고 생각해도 모를 것이다.

왜? 가슴을 열지 않고 머리를 비우지 않기 때문이다.

바로 신공황후의 신라정벌은 사실을 얘기하고 있다.

엄청난 고대사의 비밀을 여러분은 지금 접하고 있다.

그러기에 신라가 백제의 부용국이 된 것이다.

지나사에 잠깐 스치는 그 기사가 왜 진실인지 낱낱이 드러난다.

왜 신라김씨가 철저히 백제를 말살하려 했는지 그 비밀이 송두리째 드러난다.

응신원년이 백제본기와 2갑자 차이나기 때문에 2갑자 인상한다고?

그러면서 하는 말이 일본서기를 쓰는 저자들이 착오해서 그랬다고? 아주 웃기는 말이다.

그들이 몰라서 인덕 87년 등의 황당한 일을 했겠나? 바로 120년의 수치는 다음과 같다. 27+57+5+28+2+1=120이다. 무엇을 뜻하는지는 일본서기를 보시라!

각설하고 대륙의 군사력을 가지고 열도로 밀려간 응신에게 무내는 당해낼 수가 없었다. 그래서 왜왕을 양보한다.

그러다가 응신 사후에 무내의 아들과 응신의 후계자 사이에 권력투쟁이 벌어진다.

그 결과 무내의 아들인 인덕이 즉위한다.

무내가 누구기에? 바로 목(木)씨다.

백제 8대성의 하나인 것이다.

바로 백제의 원래 왕성이었던 것이다.

그 인덕의 후손이 바로 목만치다.

그가 소아씨로 바꾼다.

또 이렇게 물을지도 모른다.

목라근자의 아들이 목만치라면 여러모로 맞지 않는데요?

대답해 준다. 성씨록을 보시오!

목씨는 원래 왜의 왕족이었다.

신라본기의 호공은 바로 목씨다.

그가 목씨이기 때문에 신라 박(朴)씨가 된 것이다.

- 이제 박씨의 뿌리도 그 실체가 밝혀진다. -

성씨록에서 신무천황의 혈연이 신라의 시조가 되었다고 한 것이 정확한 것이다.

즉 신라의 시조는 혁거세가 아닌 호공인 것이다.

그가 바로 박씨의 시조인 것이다.

박혁거세가 박씨의 시조라는 박씨들의 족보는 최상급 코미디다.

신라 김씨가 쓴 각본에 놀아난 것이다.

오늘날 박씨의 많은 부분은 바로 왜 목씨의 후손이다.

그런데도 왜놈이라고 경멸할 것인가?

여러분 조상에게 침 뱉고 형제에게 욕하는 꼴이다.

11

실성왕기에 왕은 알지의 후예라고 한다.

아니, 현재 이론대로라면 김씨치고 알지의 후예가 아닌 사람이 누가 있던가?

왜 굳이 알지의 후예라고 했는가?

바로 실성은 성한왕 계열이 아니기 때문이다.

누구기에? 바로 알지의 계열로 가야김씨이거나 혹은 박씨다.

가야김씨는 수로가 아니던가?

시조가 수로라고? 웃긴다.

이것은 18편에서 논한다.

알지가 박씨라고? 그렇다. 현재로는 그럴 확률이 많다.

성한왕이 알지라고? 세한이라고? 웃기지 마라! 성한은 성한일 뿐이다.

이것은 16편에서 논한다.

바로 역사를 개작한 주역이 누구인지 드러나는 대목이다.

바로 김씨 중에서도 가야김씨다.

가야김씨가 주역이고(김유신 일당) 신라김씨가 조연이다.(김춘추 일당)

탈해는 누구인가? 왕이던가? 아니다. 쫓겨났을 뿐이다.

그러기에 후세에 왕으로 등재된 것이다.

왜? 가야의 출자를 속이기 위하여(?) 신라를 감추기 위해, 말 그 대로 탈(脫) 해(解) 즉 해씨에게서 벗어난 것이다.

해씨가 누구였던가?

부여의 왕족이 아니었던가?

각설하고 탈해는 <왜국 동북천리> 용성국에서 왔다고 했다.

동북 천리라고? 그렇다. 그것이 탈해설화의 핵심이다.

그것 하나로도 고대사는 끝장이 난다.

왜 문무왕 때 꿈에 나타났는가? 바로 역사 개작의 시기를 알려준다.

12

거칠부는 대승하여 10개 군을 공취하였다.’

그런데 조령에서부터 강원도 한강유역 임진강에서 멀리 개마고원 일대까지 점령했다. 어느 날 갑자기 신라가 커진 것이다.

그런데 고리와의 충돌은 별로 없다. 몇 번 툭탁거릴 뿐이다.

더구나 전략상으로 고리 수도인 평양을 훨씬 뛰어넘어 북쪽으로 100km 이상 전진한 신라는 언제든지 배후에서 고리 수도를 위협할 수 있는 것이다.

이는 그야말로 고리와 신라의 대전쟁을 의미한다.

그런데도 그런 기미가 전혀 없다.

오히려 한강유역을 뺏겼다지만 왕이 죽은 백제와는 죽어라 싸운다.

이 무슨 코미디 같은 얘긴가?

한마디로 고리 수도가 평양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는 상식이다.

역사는 결코 상식을 뛰어넘지 않는다.

그런데도 고리 수도가 대동강 평양이라고 버젓이 거짓을 가르친다.

고고학을 전혀 엉뚱하게 해석하고 있는 것이다.

황초령비와 마운령비는 평양이 고리의 수도가 아니라는 명백한 고고학적 증거다.

지나는 길에 한마디 한다면 위덕왕 원년에 고리가 대병을 동원하여 웅천을 친 기록이 있다.

이를 두고 이도학은 중부권에 고구려의 유적을 들먹이면서 그의 저서인 <한국고대사, 그 의문과 진실>에서 고구려의 병력이 백제 수도(웅천성)를 공격했다고 논한 적이 있다.

코미디가 아닐 수 없다.

당시 주류 이론대로라면 신라가 이미 한강유역을 차지하고 멀리 개마고원까지 진격했던 때다.

그래서 내세운 이론이 고구려군이 춘천- 음성의 루트를 따라 백제를 공격했다고 한다. 이 무슨 블랙코미디인가?

군사전문가에게 물어보기 전에 상식을 가진 사람에게 물어보라.

그것이 가능한 얘긴가.

그러면 먼저 신라를 돌파해야하는데 고구려가 무슨 대단한 이익이 있다고, 혹은 백제와 무슨 철천지원수라고 그리하나?

그리고 북쪽 국경 놔두고 신라와 고리가 청주일대(낭비성)에서 싸우는가? 절대 아니다.

바로 주류들의 생각에 대고구려의 환상이 늘 어른거린다는 것이다.

이도학은 내가 존경하는 몇 안 되는 주류학자다.

바로 이도학의 잘못이 아니라 한국 주류사학계의 잘못된 현실이다.

그럼 웅천이 어디냐? 바로 또 다른 백제다.

즉 당시 충청 호남 외에 또 다른 백제다.

그러기에 수나라 당나라의 고리 침공 때 백제와 고리가 대립한 기록이 존재하는 것이다. 그러기에 백제 5도독부가 나온 것이다.

광개토왕의 58성은 어디로 사라졌는가?

전에 논했지만 식민사학은 이 58성을 몽땅 임진강에서 한강 사이에 몰아넣었다.

거기에 무슨 58성이 들어갈 자리가 있던가?

아니, 한강유역을 잃은 상태에서 백제의 수도 한성은 풍납토성에서 잘만 버티는구나! 그걸 역사라고 가르치고 있다. 쯧쯧!

신라의 10군은 조령에서 개마고원까지 뻗어가면서 광개토의 58성은 코딱지만한 땅이라고 한다.

그때는 삼국이 본격적으로 전쟁하던 시기도 아니어서 성도 별로 없었다.

통상적으로 성은 군이나 현을 지칭한다.

그런데도 58성(58군현)은 그리 작고 10성은 그리 크더냐?

그 정도 차지했다고 광개토의 칭호를 얻나? 광개토란 호칭이 부끄럽다!

주류학계와 식민사학의 주장으론 광개토는커녕 코딱지토도 못된다.

그러면서 위대한 광개토왕이라고 입이 마르게 칭찬한다.

저희들 이론으로 깔아뭉개고도.

그럼 58성은 얼마인가?

백제가 망할 때 200성이라고 했다.

무려 1/3이다.

더구나 백제는 5도독부다.

고리가 안동도호부 하나 신라가 계림도독부 하나다.

왜 그런지는 이미 설명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오늘날 남한 땅 만큼의 넓이다.

백제는 그 많은 땅을 잃은 것이다. 어디서? 어떻게?

그런 신라가 대동강~원산만의 땅으로 통일했다고?

웃겨도 아주 웃긴다.

자기 영역보다 작은 구역으로 통일하는 것도 있나?

도대체 패강이 어딘지도 모르는 작자들이다.

역사상 최고의 쪼다는 누구인가?

고리 장수왕이다.

살기만 오래 살았지 뭐 하나 제대로 해 놓은 게 없다.

그는 당연히 신라를 없애버리고 백제를 삼켜야 했다.

당시 고리의 능력은 충분히 그럴 수 있었다.

그러나 내부 정비와 권력강화에만 몰두했다.

바로 고리 멸망의 단초를 제공한 것은 장수왕이었다.

통일의 초석을 닦은 비류왕과 근초고왕의 백제가 스러지고 다시 주도권이 고리로 왔을 때 일거에 밀어붙여야 했다.

그랬으면 훗날의 역사는 바뀌었을 것이다. 비록 일부는 열도에서 독립했을망정 ...

13

언젠가 어떤 자가 무예도보통지 들먹이면서 잘못에 한마디 사과도 없이 무슨 실존인물에 관한 각종설화 들먹이면서 위 얘기를 설화라 우긴 적이 있다.

설화인가? 아니다.

이첨이 자기가 본 것을 적고 그것이 관창일 것이라고 논한 것이다.

실존인물이 본 사실이 설화인가?

하지만 이첨도 몰랐다. 아니 알 리가 없었다.

김씨들의 농간을.

죽은 백제왕은 바로 분서왕이다. 백제의 분서왕이 아니다. 마한의 분서왕이다.

어째서 백제왕이라고 했는가?

바로 마한을 백제로 둔갑시켰기 때문이다.

마한이 훗날 백제의 주류가 되었기 때문이다.

백제는 어디로 갔는가? 바로 열도로 갔다. 왜왕이 되어서.

그렇다면 백제본기는? 그렇다 마한본기+백제본기다.

분서왕은 낙랑태수에게 죽은 것으로 되어 있는데?

정확한 표현이다.(마한의 입장에서) 그러나 감춘 표현이다.(신라의 입장에서)

왜 근초고왕이 남조의 정권으로부터 영낙랑태수를 제수 받고 후대의 신라왕들이 낙랑공 혹은 낙랑왕을 제수 받았는지 식민사학의 나팔수와 동북공정의 앞잡이들은 죽었다 깨어나도 모를 것이다.

대동강유역에서 낙랑의 유물이 왜 많이 나오는지 죽어도 모를 것이다.

백제가 낙랑군과 싸웠다고? 웃기지 마시라!

지나사 어디에 낙랑군이 백제와 충돌했다고 나와 있더냐?

백제왕을 죽인 큰 사건이 낙랑군과 관계되었다면 과연 지나사에 누락되었을 것 같은가? 백제본기의 낙랑은 거의 모두 신라다.

식민사학의 나팔수 동북공정의 앞잡이들은 이것을 천 년 만 년 지나도 알 길이 없다.

하늘이 과연 아직도 이 민족 이 역사를 저버리지 않았다는 생각이 든다.

이런 기사가 동국여지승람에 남아 있는 것은 그야말로 천운이다.

역사는 다시 한 번 뒤틀어진다.

그 주동자가 누군가? 바로 비류왕이다. 김씨는 하수인일 뿐이다.

뒤에서 얘기하겠지만 신공 5년은 303년이자 389년이기도 하다.

신라의 인질기록이 정확하다는 것을 일본서기는 보이고 있다.

303년에 인질탈출이란 치욕을 당한 백제가 가만있었겠는가?

신라를 닦달했을 것이다.

그런 신라는 살아남기 위해 뭔가를 보여줘야 했다.

거기서 선택된 것이 황창랑의 마한왕 암살특명이다.

그리고 304년에 그 일이 벌어진다.

각설하고 이 소년의 암살행동은 신라김씨에게 커다란 행운이 된다.

그것은 역사에서 사라질 뻔했던 신라김씨가 부활하는 계기가 된다.

당연히 신라김씨들은 그 소년을 음악으로 기려서 추앙한 것이다.

고대에 음악은 아무나 할 수 있었던 것이 아니다.

예악(禮樂)이라고 해서 그것은 특별한 계층에만 허용되었던 것이다.

그것이 고려를 지나 조선초까지 전해왔던 것이다.

분서왕의 죽음으로 마한왕조는 끝이 난다.

이제 새로운 백제가 열린 것이다.

근초고왕이 남쪽을 정벌했으니 마한을 정벌했다고? 무슨 코미디하냐?

일본서기 어디에 마한 정벌이 나오느냐?

신라를 정벌했다고 하지 않았느냐?

왜 역사를 너희들 멋대로 장난치느냐?

통합백제의 시조는 바로 비류왕인 것이다.

이는 어쩌면 비류설화의 원형일 수 있다.

오늘날 한반도 남부지역 곳곳에서 발견되는 북방계 유물은 바로 백제 정벌의 흔적인 것이다.

그러기에 가야지방을 비롯한 한반도 중남부의 유물이 일본열도보다 빠른 것이다.

그것을 마치 가야가 일본을 세웠다고 잘못 이해하고 있는 것이다.

바로 고고학의 무서운 허점이다.

무슨 허점? 문헌을 우선하지 않으면 잘못 이해될 수도 있는 허점이다.

14

백제가 가장 화려했던 비류왕부터 근구수왕까지 아이러니하게 백제사는 공백이다.

특히 비류왕 중간부터 근초고왕 중반까지는 거의 비어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왜? 신라의 조작 때문이다.

그래야 자신들의 실체를 감출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삭제한 것이다. 모조리 잘라낸 것이다.

아울러 같은 시기 고리의 기록도 덩달아 모조리 잘려나갔다.

왜? 백제와 고리에 신라김씨를 두고 무슨 일이 있었기에?

파사가 왜 일본서기에 등장하는가?

바로 백제가 세운 신라왕이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파사는 신라의 시조가 된다.

그럼 호공은 무엇이고 성한이 시조라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신라본기의 시조요, 신라김씨의 시조일 뿐이다.

신라라는 이름으로서의 나라의 시조는 파사왕이다.

어제 세웠고 누가 세웠는가?

백제 비류왕의 어머니(소서노?)가 세우고 300년경에 세웠다.

그러기에 인질이 필요했던 것이다.

실성이 인질을 보냈다고? 조작이다.

아니, 고대의 사관이 조작의 흔적을 남긴 것이다.

어째서? 미사흔은 인질이었지만 실성이 보낸 인질은 아니었던 것이다.

바로 내물이 응신천황인 침류왕에게 보낸 인질이다.

그런 비리비리하던 신라를 키운 것이 누구던가? 고리다.

광개토왕이 백제와 왜의 사이를 비집고 그들에게서 빼앗은 한반도의 영토를 거의 신라에게 주었다.

공짜로 주었는가? 아니다. 왜?

그 대답은 실성과 복호가 쥐고 있다. 제상이 쥐고 있다.

실성이 인질이라고? 복호가 인질이라고? 인질일 수도 있다.

그러나 근본적으로 인질이 아니다. 복잡한 무언가가 있다.

그 무언가가 무엇인가? 바로 중원고리비에 그 답이 있다.

특히 실성은 절대 인질이 아니었다.

실성은 과연 무엇이었는가? 그는 고리와 신라 사이에 어떤 존재였는가?

눌지왕기에 그 답이 있다.

건흥 4년이 언제던가? 광개토비에 답이 있다.

건흥 4년은 눌지왕대를 벗어날 수가 없다.

바로 장수왕의 즉위 연호다. 중원고리비의 건립연호다.

왜 고리가 신라를 키웠는가? 수수께끼가 아닐 수 없지 않는가!!

프리미엄이 있었다.

무슨 프리미엄? 바로 신라의 프리미엄이다.

그것이 왜 고리가 신라를 살려주었는지 어째서 신라, 백제, 왜가 그렇게 관련되는지 싸잡아 드러난다.

그리고 눌지왕대에 신라 국경은 임진강에서 원산만이었다.

이때 신라는 이미 거기까지 차지하고 있었다.

이는 신라본기로도 충분히 증명된다.

현대 고고학으로도 증명된다.

다만 엉뚱하게 고고학을 해석하고 있을 뿐이다.

다 고리 강성대국주의 때문이다.

왜? 고리가 위대했다고 해야 논문장사가 되니까! 이게 주류학계의 썩은 현실이다.

그 점은 소위 재야사학계도 마찬가지다.

오직 고리를 위해서 역사를 조작하고 있다.

그런 신라가 조령 이남에 진흥왕 이전까지 묶여 있다가 거칠부의 10군 공취로 개마고원까지 치고 올라가나?

한심한 사람들! 남쪽의 적석고분은 모조리 고리 것이었다고?

그런 신라가 갑자기 친백제를 표방한다.

왜? 윤공천황 때문이다. 윤공이 누구기에?

15

역사는 다시 한 번 요동친다.

박제상 아니, 김제상이 일본천황이었다니!

삼국사기와 유사에 신라의 충신으로 왜국에서 순절한 박제상이 왜왕이었다니!

일본서기를 보면 윤공은 굉장히 친신라적이다.

의사가 신라에서 오고 승하하자 신라사신이 대대적으로 다녀간다.

그리고 통곡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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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역사는 다시 한 번 요동친다.

박제상 아니, 김제상이 일본천황이었다니!

삼국사기와 유사에 신라의 충신으로 왜국에서 순절한 박제상이 왜왕이었다니!

일본서기를 보면 윤공은 굉장히 친신라적이다.

의사가 신라에서 오고 승하하자 신라사신이 대대적으로 다녀간다.

그리고 통곡한다.

나는 화랑세기를 보면서 황아가 치술의 원을 풀기 위해 벌지와 덕지 두 아들에게 무예에 힘쓰고 보기에게는 의술에 힘쓰라는 것을 보면서 윤공이 제상이란 것을 직감했다.

돈장엔 제상은 파사-거리-흠실-아도-물품-제상으로 파사왕의 5대손이다.

즉 삼국사기 본기보다 열전의 기록이 맞다

조작한 자들이 열전에서 틈을 보인 것이다.

어쩌면 정직한 사관이 훗날의 진실규명을 위해 남겨놓은 키포인트일지도 모른다.

당연히 제상은 김씨다.

영해박씨가 박제상의 후손이라고? 이런~ 먼 선대에서 누군가 조작했구나!

그런 족보는 버려라.

어째서 박제상이라고 착각하게 되었나?

멍청한 김부식 때문이다. 아니 그도 몰랐다.

신라 왕통이 조작된 것을.

신라왕통이 조작되었다고? 그렇다.

지금의 삼국사기 기년으로 미추가 내물과 실성의 장인이란 것이 어디 말이 되는가?

일부 사람들은 말한다. 그래서 삼국사기 기년을 조정해야 한다고.

그럼 고리기년 백제기년 모조리 조정해야 하겠네!

그럼 고리 기년과 차이가 없는 지나사 기년도 모조리 수정해야 하겠네!!

유사와 사기의 다른 점에서 미사흔과 복호의 인질기록이 굉장히 차이가 난다.

유사에선 미사흔이 내물왕 때 인질로 갔지만 사기에선 실성이 보낸 것으로 되어 있다. 단연코 유사가 맞다.

거기에서 왜왕의 사신이 ‘백제의 죄를 어쩌고저쩌고 하면서...’ 인질을 요구한다.

그 왜왕은 바로 침류왕 응신이요, 백제의 죄는 진사왕의 쿠데타다.

바로 김씨의 쿠데타다.

그러기에 신라는 인질을 보낼 수밖에 없었다.

왜? 왜의 손아귀에 있었으므로.

실성 때는 고리가 이미 백제를 몰아내고 신라를 접수했거늘 무슨 인질을 보낼 필요가 있단 말인가?

다분히 정통김씨계열이 아닌 실성을 깎아내리고 계통을 조작하기 위한 수법이다.

일본서기에서 박제상의 기록이 5c에 들어가야 되는데 잘못 삽입되었다고? 웃기는 소리다.

일본서기가 정확하다. 왜? 당시의 강자인 백제의 기록이기 때문이다.

미질허질지 외 2명의 사신이 불타 죽은 것은 4c초다(303년?).

결코 박제상, 아니 김제상이 아니다.

한마디 덧붙이자면 진사왕은 어쩌면 제상의 아버지인 물품일지도 모른다.

현재 이건 어디까지나 <삼국지>를 통한 추측일 뿐이다.

그럴 가능성은 충분히 있고도 남는다. 여기서 일일이 따질 시간은 없다.

앞서 신공의 기년이 중첩이라고 말했다.

그럼 신공 5년의 인질기사는 몇 년인가?

소서노의 기년으로 하면 303년이요, 아이부인의 기년으로는 389년이다. 389년?

무슨 냄새가 나지 않는가?

바로 삼국유사를 보라! 390년에 미사흔 인질기록이다.

과연 그러면 또 다른 인질사건이 303년 이었단 말인가?

그랬을 가능성 거의 100%다.

위의 분서왕 기사에서 살펴본 대로다.

정말로 우연이지만 일본서기가 얼마나 정교하게 조작된 진실을 담고 있는지 실감이 난다. 바로 윤공의 기년을 풀면 그가 제상임이 백일하에 드러난다.

왜 윤공이 42년인가? 답을 제시하면 윤공몰년은 453년이다. 453-42=412이다.

눈을 크게 뜨고 신라본기를 보라! 그 때 무슨 기사가 적혀 있는지?

사기나 유사의 기록을 보자.

제상이 복호를 구하고 고리를 탈출한다.

각본은 코미디요, 능력은 슈퍼맨이다.

그런 얘기가 가능하다고 보는가? 미사흔을 구하는 과정을 보자.

그 먼 오사카만에서 신라까지 탈출시키는 것이 가능한가? 절대 불가능하다.

왜가 무슨 해적 집단인가?

한낱 신라사신의 말을 믿고 대마도에 병력을 보내고 그것도 모자라 인질과 사신까지 딸려 보내는가?

코미디도 그런 코미디가 없다.

모조리 날조된 것이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파사왕대에 있었던 인질사건을 김제상에게 덧붙인 것이다.

화랑세기는 그것이 조작임을 한 눈에 보여주고 있다.

바로 왜국의 공주인 보미다.

왜국의 공주를 데려온 자가 인질에서 탈출했다고? 하늘이 노하신다.

바로 왜왕인 인덕천황이 보미를 딸려서 신라로 보내주었다.

그것도 유사의 기록이 맞다.

사기처럼 418년이 아니라 유사처럼 425년이다.

일본서기엔 426년이다.

여기서도 신라기록과 1년 착오가 있다.

지나 사서엔 뭐가 나오는가?

바로 왜 5왕의 하나인 제(濟)다. 바로 김제상의 이름이다.

제상이라고 조작한 이유는 바로 상(上) -임금- 이기 때문이다.

제상은 일본에 앞서 신라와 백제에서도 왕 혹은 왕에 버금가는 인물이었다. 그렇다.

삼국사기처럼 일개 내마의 벼슬을 가진 자가 어떻게 왕의 공주에게 장가를 드나?

신분제가 극명한 고대사회(신라나 백제를 막론하고)에서 절대로 가능한 일이 아니다. 결코 아니다.

그러기에 제상이 일본으로 가고 난 뒤에 치술은 눌지의 후궁이 된 것이다. 그런 치술은 제상에게 원망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어째서 제상이 왜왕이 될 수 있었을까?

바로 신공황후인 아이부인의 친척이기 때문이다. 고사기에 분명히 밝히고 있다.

신공은 신라의 핏줄이라고.

바로 신라본기에 나온 이찬 급리의 딸이 왜왕의 아들에게 가서 낳은 여아이다.

그 여인이 훗날 백제 근귀수왕의 황후가 된다.

바로 아이부인이다.

아이부인이 낳은 아들이 바로 침류왕 응신이다.

바로 야마대왕조를 개창한 실질적인 일본의 건국시조다.

이제 신공의 신라정벌의 의미를 알겠는가?

한편으로는 비류왕모에 의한 정벌의 진실이요, 한편으론 신라에게 나라를 잃은 백제인들이 붓끝에 의한 복수를 한 것이다.

신라의 핏줄인 신공황후(여기서는 아이부인)에게 신라를 욕보이게 한 것이다.

그런 신공이 비미호라고? 열도에서 임신한 몸으로 신라를 점령했다고?

웃기지 마시라! 백제는 당시에 신라를 아예 없애버리지 않은 조상에 대한 한을 이렇게 표현한 것이다.

비미호는 왕이었다.

당연히 일본서기의 세력이 열도라면 천황으로 등재되어야 한다.

그들은 거짓말하지 않았다.

비록 기년을 조작했을망정 신공은 분명히 황후임을 밝혔다.

비류왕모(소서노?)도 아이부인도 다 황후였다.

16

이제 충격 백배, 비밀의 문 한가운데로 여러분은 이미 들어섰다.

1대가 거서간 2대가 차차웅 그리고 쭉 이사금? 탈해가 왜 하필 호공의 집을 빼앗는가? 불과 14살짜리 애가 대보(大輔)가 되나? 허루에게 이찬보다 상급의 벼슬을 주겠다.

그래서 주다란 벼슬을 주었다? 주다가 후일 각간이 되었다?

일성이 덕이 없어 동생인 파사를 왕으로 앉혔다.

그런데 그보다 훨씬 뒤에 일성이 왕으로 앉는다? 아달라가 후손이 없었다.

그런데 후기신라에 아달라 후손이 버젓이 왕으로 등극한다?

골정과 이매가 죽고 이매의 아들인 내해가 등극했는데 골정의 아들이며 자기의 사위인 조분이 등극한다?

태자인 우로가 왕이 되지도 못한다.

첨해가 아버지 골정을 추봉하면서 세신갈문왕으로 한다? 우로가 여러 번 서불한을 역임했다고?

서불한보다 더한 직급이 있던가? 한 번 오르면 그만 아닌가?

그런데 별 볼 일없던 첨해는 버젓이 왕이 된다?

13대 미추의 딸이 먼 훗날 내물과 실성의 왕비가 된다? 유리하고 유례하고 헷갈리기도 한다? 신하들에게 이 아이는 우리 집안을 일으킬 아이라고 말하여 흘해가 왕이 된다?

그 정도 말할 정도는 왕이어야 되지 않겠는가?

그런 흘해는 참으로 늙은 나이에 올라 오래도록 왕위를 유지한다?

내물과 실성이 서로의 왕비를 공유한다(상장돈장에서) 그런데 내물은 무척 긴 기간을 왕위에 있었다?

마누라는 꼬부랑 할머니가 되었을 것인데 어찌 실성의 애를 낳나?

무슨 일급 코미디 영화각본 같지 않는가?

1호공(박) - 2남해(해) - 3유리(해) - 4허루(허) - 5?(허) - 6?(허) - 7일성(박) - 8아달라(박) - 9성한(김) - 10벌휴(석) - 11나해(석) -12 ?(김) - 13우로(석) - 14첨해(석) - 15세리지(김) - 16기림(석) - 17흘해(석) - 18파사(김) - 19?(김) - 20미추(김) - 21내물-22실성-23눌지-24자비-25소지-26지증-27법흥-28진흥-29진지-30진평

?는 몰라서가 아니고 일부러 제시하지 않았다. 지금까지 역사를 한다는 학자 중에 과연 누가 진평이 30대임을 밝힌 적이 있는가?

밝혀보려고 노력이나 했는가? 잘 보라! 1대 호공, 9대 성한, 13대 우로, 18대 파사, 30대 진평이다.

‘대대로 왕위를 전해 30대 김진평에 이르러.... 운운’이 이래도 잘못인가?

고대의 기록이 정확한 것이다.

김진평은 신라 30대 왕이었던 것이다.

파사왕이 근초고왕 언저리에 있는 일본서기의 기록이 맞는가?

멀리 옛날인 삼국사기의 기록이 맞는가?

단연코 일본서기가 맞다.

미추가 13대인데 백여 년도 더 뒤에 내물과 실성이 사위가 된다.

그게 제대로 된 기록인가?

삼국사기(정확히 구 삼국사)는 철저히 조작된 기록이다.

특히 신라와 백제본기가 그렇다.

백제와 신라가 모두 잘못 쓴 역사에 대해 책임이 있지만 신라가 다 뒤집어써야 한다. 왜? 최종 승자이기 때문이다.

혁거세는 없다.

우로는 왕이었다.

혁거세는 과연 누구인가?

바로 9대 성한왕이다.

신라사에서 한결같이 시조 혹은 태조로 나오는 인물이다.

그럴 리가 ~~ ?? 사실이다. 확신해도 좋다.

그러기에 유사에서 아달라조에 연오랑 세오녀의 기사가 나온 것이다.

그것이 결코 우연히 아니다.

바로 왜와 신라의 엄청난 비밀을 내포하고 있는 것이다.

일본서기에 그 무렵의 기록이 나온다.

신대에도 있고 역사에도 있다. 과연 무엇이라고 했는지 가슴을 훤히 열고 눈을 크게 뜨고 뒤져 보라! 왜 눌지부터 마립간이라 불렀는지 이해가 간다.

그것이 무엇이던간에. <삼국사기>는 조작되었지만 정곡을 찌르고 있다.

한마디만 더한다면 위의 왕호와 씨성은 잘못 되어 수정할 수는 있다.

그러나 현재로는 거의 정확하다고 믿는다.

어라 조분이 안 보이네? 탈해도 안 보이네?

18대 파사왕의 인질 기록이 옮겨 갔다.

바로 삼국사기 18대 실성으로 옮겨 갔다.

고대의 사관은 인질의 기록과 불타 죽은 사신의 기록이 바로 18대 파사왕대에 있었던 점을 알려주고 있다.

혜안을 가진 자가 그것을 알아채기 바란 것이다.

성한부터 파사까지 김씨와 석씨가 교대로 왕위를 주고받고 있다.

그런데 김씨는 후세에 건재하건만 석씨는 씻은 듯 사라졌다.

왜? 과연 무엇 때문에? 무슨 일이 있었기에? 왜? 중기신라가 내물에서부터 시작되는지 한 눈에 알 수가 있다.

바로 그때부터 조작이 없기 때문이다. 조작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삼국사기나 유사에 파사의 부인은 사성부인 김씨라고 한다.

사기처럼 파사가 1c의 왕이라면 그 당시 김씨가 무슨 세력이 강하기에 김씨 황후가 탄생하나? 더구나 유사는 사요왕의 딸이라고 했다.

유사가 잘못되었다고? 천만에.

유사는 바로 김씨들이 조작하다 흘린 고대사의 편린을 보여주고 있다.

사요는 김씨왕이었다.

그런데 왜 신라본기에 없는가? 바로 백제왕이었다.

놀라운 일이 아닌가?

어째서 백제가 파사를 신라왕으로 세웠는지 이해가 가시는가?

바로 백제의 사위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백제본기에도 사요왕은 없지 않은가?

당연하지. 김씨들이 파사를 조작한 주제에 사요를 떡하니 백제왕으로 올리겠는가?

허황후의 뿌리가 어디에서 출자했는지도 극명하다. 바로 신라다.

인도에서 장강을 거쳐서 왔다고? 무슨 소설이 그렇게 재미있더냐?

바로 허씨 왕족의 후예인 것이다.

김씨들이 감춘 것이다. 수로가 가야를 세웠다고? 일면 맞고 일면 틀리다.

바로 가야에서 금관국을 세웠다.

허황후가 신라허씨임이 밝혀질까 두려워 감춘 것이다.

왜? 부여 백제와 신라 왜 가야의 5차 연립방정식이 풀어지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문무왕의 15대조는 성한이 맞는가? 맞다.

법흥이 모용씨라고? 미추가 위나라에 속한 선비족 후예라고?

개가 웃을 일이다.

신라김씨가 동해안 루트를 타고 남하했다고? 말놀음일 뿐이다.

성한-차웅-세리지 -파사-지마-조분?-내물-복호-습보-지증-입종-진흥-진지-용춘-춘추 15 - 14 - 13 - 12 - 11 - 10 - 9 - 8 - 7 - 6 - 5 - 4 - 3 - 2 - 1

자, 계산하면 성한은 180~220년대여야 맞다.

결코 알지가 될 수 없다.

더구나 세한은 아니다.

알지-세한-아도-수류-욱보-구도-미추는 더더구나 아니다.

미추는 절대로 구도의 아들이 될 수 없다.

구도와는 아무런 관련도 없다. 단지, 신라김씨들의 조작일 뿐이다.

미추를 13대 왕으로 끼워 넣어 삼국사기를 조작한 신라김씨들의 수작일 뿐이다.

바로 세한을 성한으로 조작하기 위한 술수다. 아래와 같이.

세한-아도-수류-욱보-구도-말구-내물-복호-습보-지증-입종-진흥-진지-용춘-춘추-문무 15 - 14 - 13 - 12 - 11 - 10 - 9 - 8 - 7 - 6 - 5 - 4 - 3 - 2 - 1 - 0

하지만 정직한 고대의 사관은 그 흔적을 남겨 놓았다.

삼국사기에 들어있다. 무수히 들어있다.

고고학이 그것을 증명한다.

무슨 고고학? 바로 황남대총이다.

난 이미 운모-옥모-홍모-아이혜-광명-내류-아로-조생-선혜에서 그 실마리의 일단을 보았다.

무슨 실마리? 왜 오릉의 전설이 생겼다고 생각하는가? 알정이 과연 신라사 초기의 우물인가? 계림이란 숲이 정말로 알지가 매달린 숲인가? 지하에서 성한이 웃는다. 자세한 것은 21편에서 논한다.

김대성이란 분이 <금문의 비밀>이란 책에서 문무왕비의 위력이 동양삼국을 들끓게 할 날이 올 것이라고 했다.

그렇다. 문무왕비의 진실이 드러나는 순간 동양삼국은 뒤집어진다.

물론 그 책에서 나온 김씨들의 세계는 <한서> 김일제전과 약간 다르다.

저자가 잘못 인용했다.

그나저나 일제의 후손인 김성金星을 성한왕이라고 이 분은 주장하는데 어디에서 김성이 나오나요? 난 아무리 찾아봐도 안 나오던데.

17

이제 이 싸이트의 대표적인 주류신봉자 무명에 대해서 종합하여 비판해 보자.

물론 뛰어난 점도 있고 날카로운 면도 있다.

현대사와 사회를 보는 눈은 존경할 만한 점도 있다.

하지만 역사학의 큰 얼개에서 그는 대표적인 식민사학의 나팔수, 동북공정의 앞잡이일 뿐이다.

그것이 그가 원했든 원하지 않았든. 그의 글에 띄어쓰기와 오타로 인해 엉망인 글이 많아 바로 잡아 그대로 올리고 비판한다.

지금까지 나온 것을 종합한 것이다.

1) 윤내현을 비판한 진개의 침입논리 - 고조선이 대동강이라고 강변한다.

고조선의 위치를 가장 광범위하게 잡고 있기에 인기 있는 교수 윤내현. 그의 주장에서 다시 이해하기 힘든 부분 두 번째를 살펴보겠습니다.

<燕乃遣將秦開攻其西方,取地二千餘里,至滿番汗為界,朝鮮遂弱 - 위략> (연이 이에 장군 진개를 보내 그 서방을 공격해 2천리 땅을 취하고 만번한을 그 경계로 하였다. 그랬더니 조선은 마침내 약해졌다.)

윤내현은 위략에 나오는 滿番汗과 浿水의 위치를 난하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위략에 나오는 패수는 지금의 난하 또는 그 지류였음을 알게 되고 만 번한은 난하와 그 지류인 汗水 유역에 있었음이 확인된다.-윤내현의 한국고대사신론

고조선은 서방 2천리를 연나라에 빼앗기고도 그 경계가 현재의 난하라는 이야기합니다. 그렇다면 서방 2천리를 빼앗기기 이전의 고조선의 서쪽 한계는 어디일까요? 연나라의 수도인 계나 연하도뿐 아니라 오르도스지역까지 고조선이 다스리고 있었어야 가능합니다. 윤내현의 주장에 따르면 연나라는 갈 곳이 없는 문제가 생깁니다.

문제는 이것이 아닙니다. 이해 할 수 없는 이런 주장을 윤내현이 하고 있는 주 근거는 바로 汗水입니다. 조금 이야기가 복잡해집니다만 汗水는 한서지리지에 대한 주석에서 응소가 언급한 강 이름입니다.

한서지리지에 요동군에 문 번한현이 있고 番汗현조에 浿水出塞外西南入海 구절이 있습니다. 이 浿水에 대해 응소가 汗水出塞外西南入海라는 주석을 붙였습니다. 그러자 수경주에서 난하 상류의 한 지류로 나오는 汗水가 바로 문제의 패수라고 윤내현은 결론짓습니다. 이를 바탕으로 만,번한도 난하유역 일 수 밖에 없다. 라고 합니다.

과연 그럴까요? 당장 응소의 주석의 汗水가 난하 상류의 그 강이 맞다고 치더라도 그 다음 구절인 西南入海를 만족시킬 수 없습니다. 윤내현 자신이 수경본문을 인용해 <패수는 임패현을 지나 동으로 바다에 들어간다>는 구절을 두고 난하를 이 조건에 맞는 강으로 지정해놓고는 이제 汗水한수문제가 나오니까 汗水한수가 서남입해한다는 조건이 있음에도 汗水한수가 패수라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한번은 강이 동쪽으로 흘러 바다에 간다고 난하를 패수라고 해놓고 그 다음은 서남으로 바다로 들어가는 정반대 방향의 강, 汗水가 패수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편리할 때 마다 편리한 구절만 가져와 논리를 전개하다보니 자가당착적인 모순에 빠진 겁니다.

이런 이상한 논리로 패수와 만번한을 난하유역에 가져다 놓는 이 기괴한 논리를 받아들이라는 건가요? 참 제정신으로는 받아들이기 힘들 것 같습니다. 당장 윤내현의 논리로 나가면 연나라가 오갈 데 없고 연하도의 엄청난 성 흔적도 고조선의 흔적이 되는 문제가 발생하게 됩니다.. 제가 잘못 보고 있는 건가요?

---> 물론 윤내현이 다 맞는다는 것은 아니다. 그도 내가 보기엔 오류투성이다. 하지만 무명은 스스로의 글에서 무식함을 드러내고 있다. 바로 <燕乃遣將秦開攻其西方,取地二千餘里,至滿番汗為界,朝鮮遂弱 - 위략> 이다. 왜 그런가? 바로 이 글의 핵심글자는 바로 서방(西方)이기 때문이다. 고조선이 대동강이라면 가능한 얘긴가? 고조선이 요동이라면 가능한 얘긴가? 바로 고조선이 요서이어야만 가능한 얘기다. 내말이 틀렸는지 지도를 놓고 보시오!

그리고 그 후에도 고조선은 요서였다. 즉 연의 침입이 있은 후에도 중심지는 요서였다는 것이다. 어째서? 역시 그대가 말한 <위략>의 이 부분 다음에 삼국지에 주석으로 딸린 <위략>을 보라! 분명 우거를 설득하던 상 역계경의 세력이 동쪽의 진국으로 간 것이다. 여기서도 핵심은 바로 <동쪽>이다. 요동에서 동쪽에 무슨 진국이란 세력이 있었던가? 대동강 유역이 조선이라면 그 동쪽은 동해바다가 아닌가? 이 글을 만족하는 지리적 위치는 요서밖에 없다. 그러기에 훗날 수양제가 고리를 침공할 때 무슨 낙랑도니, 현도도니, 부여도니 하는 말들이 나오는 것이다. 바로 요하(난하)를 건너 요서를 지나기 때문이다. 물론 이 때 고리의 수도는 요서 평양(안시성-왕검성)을 떠나 장안성(새로운 평양성인 오늘날 요동)에 있었다. 오히려 사료를 취사선택하는 것은 무명이 아닌가?

사실 <위략>의 이 글도 문제는 있다.

땅은 선이 아닌 면적이기 때문이다.

사기와 한서 흉노열전엔 동호(명백히 조선을 말한다. -자세한 것은 생략하겠다)가 천 여리를 물러났다고 되어 있다.

무슨 뜻인가? 중심지, 바로 수도를 1000리 혹은 2000리 물러나 옮겼다는 뜻이다.

이는 후대의 역사를 보아 정확한 표현이다.

그렇다면 애초 고조선의 수도는 바로 오늘날 난하나 북경서북일대라는 얘기가 된다. 이는 후대에 조선의 도읍이 북평일대라는 기록이 결코 거짓이 아니라는 증거다.

오늘날 요서의 찬란한 고대유물이 과연 누구의 것이었냐는 답이 나온다.

송호정처럼 그것이 동호였다고 동호가 무슨 나라였더냐?

그리고 동호는 바로 조선이 아니었던가?

그리고 지나의 기록이나 주장이라면 무조건 신뢰하는 그 버릇은 여전하시구먼.

연이 역수에서 요동에 걸친 나라였다면 제와 조를 능가하는 강국이었을 것이다.

그런데도 사기나 전국책 등에서 연은 항상 최약체로 그려지는 것은 무슨 아이러니인가?

그리고 그렇듯 위대한 진개의 기록이 막상 사기나 전국책에 나오지 않는 것은 또 무슨 이유인가?

진정 모두가 조작되었거나 후대에 다른 기록을 참조했다고 봐야 된다.

다른 기록? 그렇다. 오히려 지나에서 조선의 기록을 참조했을 수도 있다.

그러면 그 조선이 과연 고조선인가?

절대 아니다. 바로 변한조선이다.

후대의 기자조선이라 불리는 존재다.

바로 기자의 후손이 변한이 되었기 때문이다.

즉 연이 친 조선은 변한조선이요, 위만이 침탈한 나라는 기자조선이요, 한나라가 친 것은 위만조선이다.

즉, 무명의 수많은 머릿속의 이론은 근본부터 삐뚤어져 있다.

2) 왜와 백제의 논리 - 백제가 왜의 속국이라고 빈정댄다.

신찬성씨록 大原眞人 <出自謚敏達孫百濟王也> 대원진인은 민달천황의 손자인 백제왕의 후손이다. 이를 보고 봐라 민달의 손자가 백제왕이니 민달이 백제인 아니냐? 야호~ 라고 쾌재를 부르는 사람이 많다.

이는 어찌 보면 참 재수 없는 소리다. 민달이의 손자가 백제왕? 왜놈이 자기 왕족을 백제왕으로 파견했나?

그럼 백제는 일본의 완전 속국이네.

완전 백제를 왜국의 속국으로 보는 재수 없는 케이스.

그런데 이 구절을 왜 그리 좋아들 하는지...

그런데 백제왕의 후손이 왜 일본에서 계속 사나? 그런데 하나 참고할 것은 백제왕족을 백제왕이라 표현한 부분이 신찬성씨록에는 보인다. 하여튼 백제, 중국에서 문화를 수입해다가 일본에 전해줬는지 갔다 바쳤는지 불확실하고, 군사력은 띨띨해 일본의 군사원조를 툭하면 바라는 띨띨한 국가를 뭐 그리 대단하다고 자꾸 그러는지..내참. 하여튼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곤지와 무령왕의 케이스는 매우 복잡합니다.

삼국사기와 일본서기에서 인용한 백제기록들이 서로 틀립니다.

그런데 대체로 일본서기의 기록이 더 정확합니다.

일본서기를 토대로 보면

곤지는 461년(웅략5년, 개로왕7년)에 일본으로 간다.

간 사유는 웅략을 섬기던 백제여자池津媛이 간통하는 바람에 웅략이 불에 태워 죽인다.

그런 사건 때문에 개로왕이 자기 동생곤지를 일본으로 보내게 되는데(인질성격이 강함) 동생 곤지는 약간 열을 받아서 형인 개로에게 당신 마누라를 달라고 한다(아마 세컨드겠지) 그런데 그 여자는 이미 임신 중. 사월에 떠났는데 6월에 이끼섬 부근의 각라도에서 이 여자가 아이를 낳자 할 수 없이 아이와 여자를 백제로 돌려보낸다. (그 아이는 무령왕이 된다. 그래서 무령왕은 461년생.) 그리고 곤지는 일본으로 간다. (그래서 일본현지에 곤지신사가 있게 된다.) 곤지는 그 후 어떻게 되었는지 일본서기에는 더 이상 나오지 않는다. (삼국사기에는 477년에 백제의 내신좌평이 되고 그 해 죽는다고 나온다. 아마 백제로 돌아온 모양.)

일본서기는 479년에 기사에서 곤지 아들 이야기가 나온다.

그 사이에 아들이 다섯 명으로 늘어났는데, 백제의 문근왕(아마 삼근왕)이 죽자 웅략천황은 곤지의 둘째 아들이 총명해 웅략하다는 이유로 백제의 왕으로 삼으면서 축자국 군사500명을 주어 백제로 돌려보냈다고 한다.(백제왕을 일본천황이 선택? )

그래서 그가 동성왕으로 즉위하게 된다. (물론 삼국사기는 동성왕이 어디서 왔는지 기록하지는 않고 있다.)

(그런데 여기서 돌아오지 않은 곤지의 아들이 성씨를 이루고 사는데 그들이 바로 飛鳥戶造라고 신찬성씨록은 기록하고 있다.)

그리고 무령왕은 동성왕 다음으로 즉위하게 되는데 왕5년인 505년에 자기 아들(斯我君)을 다시 일본으로 천황을 섬기라고 보낸다(인질성격). 이 사아군의 아들이 법사군이고 왜군의 선조다. 라고 일본서기는 기록하고 있고,.

도대체 어떻게 이럴 수가 있을까?

이 사실을 모두 거짓이라고 말해야 하지만 저는 그럴 자신이 없습니다.

이 시기의 일본서기의 백제관련 사료가 생각보다 상당히 정확하다는 것이 이미 상당히 밝혀져 있어서 그렇습니다. 시기야 약간 다르지만 일본의 지원으로 왕이 즉위하는 경우까지 삼국사기에도 나오니 말이죠. 전지왕이 일본에 인질로 가 있었다는 것은 삼국사기에 나오고 그리고 즉위하는데 왜 일본병사가 호위를 하고 왔다라고 구체적으로 언급이 되는데... 사실 전지왕은 아신왕의 맏아들 태자였습니다.

둘째왕자도 아니고 일국의 태자가 일본으로 인질로 가야할 만큼 당시의 백제는 허약했거나 일본의 지원이 절실했겠죠. 그런데 전지왕은 일본천황에게 울면서 귀국을 청했다고 합니다. 전지왕은 즉위과정에서부터 일본에 상당히 예속된 상태임을 부정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王薨 王仲弟訓解攝政 以待太子還國 季弟禮殺訓解 自立爲王 전支在倭聞訃 哭泣請歸 倭王以兵士百人衛送 - 삼국사기

위험하지만 이 전지왕의 즉위와 동성왕의 즉위가 유사하지 않는가라는 의문을 가집니다.

이런저런 이유로 백제를 소재로 하여 대왜 민족적 자긍심을 고양시키려는 시도는 실패할 확률이 높다는 생각입니다. 우리 역사에 자랑스러운 일이 얼마나 많은데 굳이 백제와 왜의 정치군사적 관계를 가지고 긍지를 느끼려 하는지...

군사력으로 긍지를 느끼려면 중국의 통일정권과 정면승부를 몇 차례나 치루면서 몇 차례 승리를 거두고 중국 통일왕조 하나를 멸망시킨 고구려의 사례를 드시든지, 아니면 국제적 역학관계에 대한 현실적이고 정확한 이해를 바탕으로 삼국을 차례로 무너뜨리고 한반도 통일왕조 수립에 성공한 신라의 현실적인 노력을 거명하면서 국제화의 중요성을 재인식하는 계기로 삼으시던지, 그도 저도 아니라면 백제의 문화전파를 일본서기를 통해서 입증해 진정한 힘인 문화의 힘을 강조하시든지 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하거든요.,.

---> 악의에 찬 반 백제 이론이다.

왜놈이라 경멸하고 있다.

그들이 역사적으로 형제간임을 안다면 그랬을까?

스스로 조상을 욕한다고 느낀다면 그러겠는가? 영남인이라 그런가?

신라주의자라 그런가?

아화 전지, 구이신, 동성, 무녕, 무왕. 즉 열도에서 백제 왕권에 관계된 왕만 6명이다. 백제와 한 집안이 아니라면 가능한 얘긴가?

경행, 성무, 침류, 이중, 웅략, 서명 등 백제에서 왜 왕권에 간여한 것만 6건이다.

한 집안이 아니라면 가능한 얘긴가? 곤지가 인질이라고? 성씨록을 보라!

어떻게 웅략이 곤지가 되는지. 일본서기 기년을 보라!

어떻게 곤지가 웅략이 되는지! 물론 껍데기만 보니 무엇을 알 것인가!

무엇보다도 그는 왜가 무엇인지 모른다.

내가 지금까지 한 이야기의 핵심은 바로 왜(倭)다.

왜가 바로 왜(why)가 되었기에 고대사가 미궁에 쌓여 있고 엉망진창이 된 것이다.

바로 신라와 백제의 이야기는 바로 왜다. 그것이 바로 고대사의 핵심인 것이다.

나는 분명히 밝힌다. 왜는 백제라고.

여기서 그것을 모조리 내놓지 못하는 점이 미안할 뿐이다.

그러나 찾아보라. 일본서기, 고사기, 신찬성씨록에 그들이 백제였음을 누누이 밝히고 있다.

특히 성씨록은 아예 노골적으로 밝히고 있다.

바로 무명처럼 색안경을 쓴 자들에게 보이지 않을 뿐이다.

내친 김에 한마디만 더하자.

화랑세기에 진흥왕이 말년에 풍질이 걸려서 황후, 미실, 보명, 월화, 옥리 등 다섯 여인과 즐거움에 탐닉했다고 한다.

그 때 나는 상장돈장이 있었는지도 몰랐다.

그런데 혹시 옥리가 백제 성왕의 딸이 아닐까 생각했다.

나중에 상장돈장을 보니 그 추측이 맞았다.

즉 옥리가 낳은 딸이 진평왕과 관계하여 선화를 낳았다.

그 선화가 바로 무왕과 결혼하였다.

즉 삼국유사의 기록은 사실인 것이다.

선화는 신라의 핏줄이기도 하거니와 백제의 핏줄이기도 한 것이다.

그렇다면 무왕은 누구인가? 바로 민달의 손자다.

괜히 백제왕이라고 한 것이 아니다.

<성씨록은 바로 사실을 전하고 있다.> 무왕은 결코 법왕의 아들이 아니다.

바로 민달의 손자이며 백제왕인 것이다.

삼국유사에 왜 무왕의 설화가 전해지는지 명백해진다.

삼국사기는 정사지만 세세한 고대사의 비밀은 오히려 삼국유사가 더 깊이 전하고 있다. 앞에서 말한 미사흔의 기록도 그렇다.

각설하고 무왕은 나중에 서명천황이 된다.

그러기에 일본서기에서 왜국이 백제대사를 짓고 백제궁을 짓고 백제옷을 입고 조회를 하는 것이다.

그들이 백제가 아니라면 어림도 없는 것이다.

스스로 백제임을 그 보다 더 표현할 수는 없다.

단순히 왜 왕권에 백제계가 많이 포진해서 그렇다고? 껌 씹는 소리들 말아라!

백제본기 무왕기의 마지막 부분은 의자왕의 대리통치기다.

그러다가 무왕인 서명이 죽자마자 반대세력을 일본으로 쫓아낸다.

3) 박창범 인식에 대한 비판

- 신라의 일식기록이 모두 지나사서에 있다고 한다.

삼국의 위치와 천문관측

박창범교수는 삼국의 천문관측 위치를 중국대륙으로 잡게 됨으로써 중국을 우리가 통치했다는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었다.

그리고는 삼국은 한반도에 없었다는 주장은 활개를 치게 되었다.

박교수는 신라의 천문기록 중에서 초기의 기록의 최적관측지는 양자강유역이라고 발표했다. 후대의 최적관측지는 신라의 영토이지만 초기의 최적관측지가 양자강유역이라고 발표함에 따라 그 해석도 분분하다. 신라의 초기 영토가 양자강지역이라는 설과, 신라가 양자강지역을 다스리다 한반도로 옮겨온 것이다라는 설, 가야세력이 양자강지역에 있다가 한반도로 오면서 가져오게 된 천문기록이라는 설등...

과연 박교수의 주장대로 초기신라의 천문기록의 최적 관찰지는 양자강일까? 박교수는 일식현상을 분석해 도출된 결과라고 한다. 그리고 양자강지역이 신라의 천문관측지로 나오는 시기는 ad201년까지라고 한다.

이시기 신라의 천문기록 중에서 중국문헌에 나타나지 않는 독자적인 것들만 살펴보자

1. 남해11년, 월일 없음, 밤에 유성이 있었다. 2. 탈해23년 2월, 혜성이 동방에서 보였다. 3. 상동 또 북방에서 보였는데 20일에 사라졌다. 4. 파사25년 1월 별똥이 비처럼 왔는데 땅에 닿지는 않았다. 5. 지마9년 2월 큰 별이 월성서쪽에 떨어졌다. 6. 지마17년 8월 긴별이 하늘에 두루 미쳤다. 7. 일성20년 10월 혜성이 동방에서 보였다. 8. 상동 또 동북방에서도 보였다. 9. 내해5년 7월 태백이 낮에 보였다.

이상한 모습이 보이지 않는가? 박교수가 초기신라의 최적천문관측지가 양자강에 있었다는 증거로 사용한 일식기록이 전혀 없다. 모두 유성에 관한 기록정도다. 초기신라(201년 이전)의 천문기록 중에서 중국사서에 등장하지 않는 기록은 모두 9개. 그러나 3번과 8번은 하루에 나타난 상황이기에 7일의 천문기록이 있는 셈이다. 그중에서 천문현상 발생날짜를 알 수 있는 것은 탈해23년 2월조가 유일하다. 나머지는 모두 발생 개월만 나와 있고 구체적 날짜가 없다.

박교수가 사용한 초기 신라의 일식기록의 특징은 매우 구체적인 날짜가 있다는 것이다. 또한 모두 중국문헌에 같이 나타나고 있는 것들이다. 혁거세재위 때 일식기록이 7번 나타난다. 이때의 기록을 보자

1. 혁거세 4년 4월1일 해에 식이 있었다. 2. 혁거세 24년 6월 그믐날 상동 3. 혁거세 30년 4월 그믐날 상동 4. 혁거세 32년 8월 그믐날 상동 5. 혁거세 43년 2월 그믐날 상동 6. 혁거세 56년 1월1일 상동 7. 혁거세 59년 9월 그믐날 상동

이 모든 기록은 일식이 있었던 달만 기록된 것이 아니라 구체적인 날짜까지 기록되어 있다. 위의 7개의 기록은 한서오행지에 그대로 나온다.

이런 초기신라의 기록은 한서오행지의 기록과 동일하며 지마, 아달라, 벌휴, 내해임금때의 일식기록은 모두 후한서오행지에 나오는 기록과 동일하다.

이런 현상은 삼국사기 초기천문관측 최적지가 한반도가 아닌 이유를 너무나 구체적으로 설명해준다. 굳이 슈퍼컴퓨터를 동원할 필요도 없다. 일식에 관해 독자기록만 등장하는 것은 신라기 전체에 단 한번도 나오지 않는다. 모두 중국기록과 중복되는 기록이다.

이를 바탕으로 박창범교수는 일식최적관측지를 추적한 것이다. 삼국사기와 중국사료에 동일하게 나오는 일식기록을 가지고 최적관측지를 추적하고는 "어 이상하다. 관측지가 중국으로 나오네" 라는 엉뚱한 소리를 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게 해놓고는 <천문과 우리역사> 55페이지로 가면 당당하게 <삼국사기의 일식관측지는 한반도가 아니다>라고 말하고 있다. 이런 사실을 발표하고 학계가 매우 긍정적으로 평가했다고 자평하고 있다. 학계의 사람들은 모두 멍청한 사람들인가 보다. 책에는 오재성이란 분이 찾아왔고 깊은 인상을 남겼다고 하고 있다. 이 말은 오재성이란 분의 주장을 알고 있는 사람이라면 박창범이 무슨 소리를 하는 것인지 잘 알 것이다. 박창범은 학자이지만 코메디언인 셈이다.

---> 이 글은 바비님을 비롯하여 수많은 사람들에게 공격받은 글이다.

여담이지만 바비님의 순발력이 부럽다.

어디서 그런 퍼뜩이는 재치가 나오는지!

그야말로 무명 사냥꾼이다.

신라기록이 모조리 지나사서에 나온다고 거짓이라고.

그렇다면 지나에 나온 기록 모조리 들어가야지 왜 일부만 들어갔나?

나머지 천문기록은 날짜가 없는데 일식은 날짜가 나온다고?

일식이 어디 다른 날 일어나는가?

그믐이나 1일에 일어나는 것이 상식이지 않는가?

같은 일식을 지나는 기록하고 신라는 기록하지 말라는 법 있는가?

왜 그렇게 조국을 뒤처진 나라로 까뭉개기에 열심인가?

그대 혹시 정말로 지나가 심어놓은 동북공정의 스파이인가?

그것보다는 오히려 신라의 일식기록이 왜 중기에는 전멸하는지 그것이 더 궁금하지 않는가? 바로 백제의 부용국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말기에는 백제의 기술자와 고리의 기술자를 받아들여 마침내 다시 일식기록에 나서는 것이다.

그리고 여담이지만 앞에서 지적했듯이 일본서기(백제서기) 기년과 신라본기 기년은 약간 착오가 난다.

이것은 지금까지 내가 정리한 바로는 1년 차이가 난다.

어쩌면 일식기록도 착오가 있을지 모른다는 것이다.

어디에서부터 어디까지 착오가 난 것인지 모르지만 그것은 아마 백제와 고리에서 475년의 개로왕 패망기사가 신라본기엔 474년에 난 것과 같다.

4) 낙랑군의 논리

- 대동강이 낙랑군이라고 생떼를 쓴다.

윤내현의 논리가 재야의 교과서처럼 사용되고 있다. 그러나 윤내현의 주장중의 상당부분은 또 다른 역사왜곡에 불과한 것이 아닌가.

그 중 가장 심각한 것은 낙랑의 위치에 대한 터무니없는 주장이다. 낙랑이 난하 유역에 있었음을 동의할 수 없는 삼단논법으로 증명한 후 평양의 낙랑은 다른 낙랑국이라 주장하고 있다. 그리고 그 후 서기44년에 동한의 광무제가 바다를 건너 낙랑을 정벌해 군현을 만들었다는 삼국사기조를 인용해 그 후에는 고구려에 의해 멸망할 때까지 중국의 군사기지였다고 주장한다. 기막힌 사료의 취사선택에다 희한한 논리로 역사를 마음대로 쓰는 것이 아닌가? 즉 동한(후한)시기에만 중국의 군사기지 낙랑이 평양지역에 있었을 뿐 서한(전한)시기에는 아예 중국의 영향이 없었으며 낙랑, 대방군 모두 난하유역에 있었다는 것이다.

평양의 정백리127호분에서 낙랑태수연왕광지인이라는 인장이 발굴되고, 황해도 봉산군 문정면 태봉리의 대형 전축분에서 대방태수장무이전이 출토되었음에도 이는 모두 유민이 자기가 살던 곳의 명칭과 직위를 가져왔다고 주장해버린다. 여전히 낙랑군과 대방군은 난하유역인데 그 이유는 난하에 조선현이 있기 때문이란다. 그리고 열수가 난하의 지류이기 때문이란다.

참으로 편리하기 짝이 없는 논리이다. 그러나 어느 정도 알만한 학자라면 어떤 미친놈이 이 논리를 받아들이겠는가? 그래서 윤내현은 사학계의 왕따인 것이다.

평양지역이 낙랑군임을 잔소리 말고 받아들여야 할 이유는 너무나 많다.

-낙랑토성지역에서 발굴된 반량전을 제조하기 위한 주물틀, (군현의 치소도 아닌 곳에서 반량전이나 오수전을 제조하는 것은 거의 전례가 없다.)

-낙랑예관, 낙랑부귀의 명문수막새.(단순한 군사기지에 이정도의 명문수막새는 무리)

-지절4년(bc66년)명 칠곽이 나온 정백동37호, 영시3년(bc14년)명 일산대가 나온 정백동2호, 시원2년(bc85년)명 귀잔이 나온 석암리194호, 수화원년(bc8년)명 칠반이 나온 석암리 200호등 수많은 전한시대의 유물 ('어찌하여 서한시대에 조성된 유적은 하나도 보이지 않고 그보다 훨씬 늦은 동한시대의 유적만 존재하는가라는 의문을 갖지 않을 수 없다'라는 윤내현의 주장은 잘 몰라서 생긴 의문일뿐..)

-한의 낙랑군 25현 가운데 23개현의 명칭이 드러난 봉니 (발굴과정에서 나온 것도 존재하므로 무조건 위조라 말할 수는 없다. 또한 윤내현이 주장하는 '봉니가 출토된 곳은 공문서를 받은 곳이 된다'라는 말은 봉니가 어떤 용도로 사용되는 지를 잘 모르고 하는 소리일 뿐이다. 봉니는 문서뿐 아니라 상자를 봉해 보관하는데도 사용된다. 공문서를 받은 곳에서 봉니가 발견되었다면 그 문서는 개봉도 안 된 편지인 것이다. 봉니는 그 문서를 개봉하는 순간에 파괴되고 마는 마른 진흙덩어리임을 알아야 한다.)

-낙랑군 25개현중의 하나인 점제현의 위치를 보여주는 평남 용강군의 점제현신사비, 정백동1호분출토 부조예군, 정백동2호분출토 부조장인등의 인장 (점제현신사비는 일제의 위조 혹은 갈석에서 이치, 부조예군인장은 고조선의 인장 등으로 설명하는데 아무리 애를 써도 한도가 있다. 서한(전한)이 설치한 낙랑군과 25개 현의 중심이 대동강 유역임을 피하기는 어렵다)

-난하 유역에 낙랑군과 대방군의 치소가 있었는데 그곳에서 낙랑이란 글자가 단 한자라도 발견되었다는 보고가 없다.

도대체 난하에 낙랑군이 설치되었다고 주장하는 일부 엉터리주장은 무슨 배짱으로 그리하는지 궁금할 뿐... 신채호선생이나 박은식선생이 이런 주장을 한다면 너무나 당연히 수긍할 수 있다. 나라를 일본에 잃은 백성이 2000년전에도 그러한 꼴이 있었다는 것을 어떻게 인정할 수 있겠는가? 일제시기에 평양낙랑을 부정하는 것은 다른 당위성이라도 있지만 오늘날 역사를 왜곡해 가면서까지 그리하는 이유를 도저히 알 수가 없다.

---> 정말 누가 역사를 왜곡하는지 모르겠다. 지나 연호만 나오면 무조건 지나 땅인가? 근세조선은 모조리 명나라 청나라 땅이겠네.

서기 연호가 나오면 무조건 미국이나 서양 땅이겠네.

한마디로 고대인들의 역동성을 모르는 소치다.

더구나 그 때(지금도 그렇지만) 동아시아의 중심은 중원이다.

중원을 중심으로 돌아가는 천지에서 중원의 연호를 쓴 것이 무조건 중원의 영역인가? 오히려 그런 연호가 집중되어 나오는 땅은 큰 세력의 중심부일 가능성이 큰 것이다.

그 땅은 어디까지나 마한이고 백제였다.

한나라 수많은 군 중에 모두 군명이나 현명이 쓰인 명문이나 봉니가 전부 나왔는가?

어찌 낙랑군에서 꼭 나와야만 되는가?

낙랑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지껄이는 소리. 위에서 이미 무수하게 논했다.

낙랑이라면 무조건 낙랑군만 생각하는 그 머리란!

낙랑과 대방이 어째서 지나인가? 바로 조선이 아닌가?

조선 땅의 원래 명칭이 아닌가?

한씨들이 낙랑에서 피난 온 것을 모르는가?

즉 그들도 마한 안에서 낙랑인인 것이다.

그들이 왕권을 장악하면 당연히 지명도 따라오는 것이다.

물론 윤내현이 말하는 낙랑국도 절대 아니다.

무명이 툭하면 꺼내는 <후한서지리지>를 봐라!

위에서 말했듯이 단편적으로 낙양에서 한단까지가 1100리이니 낙랑군 5000리는 죽었다 깨어나도 요하를 넘어오지 못한다.

왜 하필 한단인가? 유주나 요동 낙랑군과 같은 동북로이기 때문이다.

이들 지역을 가려면 한단을 거쳐야 하기 때문이다.

더구나 내지는 가깝게 느꼈을 것이고 변방을 멀리 느꼈다.

이는 지나사서의 지리지를 읽다보면 누구나 느끼는 바고 실제로도 그렇다.

진정 간단한 산수도 못하는가?

5) 백제의 논리 -

호남지역은 백제도 아니었다고 한다.

오늘날의 희망으로 옛 역사가 바뀌어주지를 않습니다. 어떤 논리로도 요동과 나란히 나오는 요서가 광서성까지 가지 않습니다.

요즘 방송과 일부학자들이 함부로 했던 거짓말이 상식화되어 가고 있군요. 광개토대왕비 석회도말작전, 백제담로의 해외경영(필리핀까지 경영했다고 하더군요.), 백제왕이 일본천황이 되었다 등등 참 민망한 거짓말 그동안 많이 했습니다.

백제는 대제국이 아니며 해외경영(요서경략은 제외)을 했다는 확실한 증거는 거의 없습니다. 하와이에 조선인들이 사탕수수농장으로 이민을 갔다고 해서 하와이가 조선 땅이란 논리를 펴는 분들은 없습니다. 일본 아스카문명도 마찬가지입니다. 백제는 일본 땅에 독자권력을 세우지 못했습니다. 백제세력은 왜에 오히려 흡수되었지요. 백제는 6세기가 되도록 해외경영은커녕 전남지방도 제대로 장악하지 못했습니다. 전남지역의 고고학자 10명에게 물어보십시오. 과연 백제가 전남전북을 제대로 장악했다고 보는지... 역사는 감계기능을 하라고 존재하는데 거짓말을 하면 역사의 존재의의를 허물어뜨리게 되죠.

---> 그래, 정말 옳은 소리다. 생각해 보라.

그대 말대로 겨우 한강 유역뿐인 백제가 고구려와 그리 치열하게 일진일퇴 하나?

그런 나라가 어떻게 요서는 경략하나?

또 그렇다면 광개토왕의 58성이 들어갈 자리는 어디인가?

그런 땅을 가지고 지나사에서 동이의 강국이 되었다고 얘기하나?

어째서 공식기록인 <당서>에 고리보다 큰 영역으로 나오나?

적이 바로 강 건너 코앞에 있는데 수도라는 한성이 풍납토성에서 100여년을 잘만 번영하는가?

신라가 한강유역을 점령하여 고구려와 단절되었는데도 여전히 고구려의 대군이 침입하고 고구려와 대립하는가?

공식 역사서에 그 땅이 발해의 소유가 되었다고 하는가?

발해가 한반도 서남부에 있었다는 얘긴가? 상식을 가진 이가 할 소리요? 앞뒤 맞는 소리를 하시오!!

주류이론은 그것 하나만으로도 모조리 폐기되어야 한다.

무명이 툭하면 다른 이를 비판하면서 사서를 편의부정하고 취사선택한다고 하는데 과연 누가 그런가?

<기록>을 부정하고 멋대로 해석하는 것은 그대가 신봉하는 주류들과 그대 자신이 아닌가?

백제가 굳이 중국 동남부와 동남아시아를 휘저었다고 하는 소리를 하고 싶진 않다.

그렇지만 우리 역사 강역에서의 위치만은 제대로 대접해주어야 하지 않는가? 왜 문헌을 멋대로 해석하고 고고학을 왜곡하여 역사를 개판으로 만드는가?

6) 부여의 논리

- 어쩌다 옳은 소리 한 번 했다.

무명 글 : 진부여솔선백장인이라는 서진시기 도장이 1975년 내몽고자치주에서 발굴되었습니다. 부여가 어디에 있었기에 이런 유물이 내몽고에서 나오게 되었는지 흥미로운 유물입니다. 내몽고 상경박물관측에서는 길림, 흑룡강성에 있던 부여족의 일파가 내몽고지역으로 이치 된 흔적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만,, 이는 기존의 부여의 영역을 염두에 둔 설명으로 보입니다.

혹시 부여국이 생각보다 서북쪽에 있었는가? 부여라는 종족의 영역이 생각보다 광범했었나? 고구려에 멸망한 부여가 그 후 서진시대까지 존속했었나?(아니군요...부여는 400년대에도 존속...) 등등의 의문이 잠깐 들기도 합니다만,,,

부여의 세력권이 대흥안령 지역까지 이어졌을 가능성은 매우 높습니다. 동호에서 이어지는 선비와 오환족이 부여지역에서 발생한 것은 아닐까...

고구려와 백제의 창건자들이 모두 부여출신이니까 부여는 대략 우리민족형성의 3분의 2를 차지하는 셈입니다.

진나라가 부여의 부족장에게 준 도장이 장춘이나 하얼빈 부근이 아닌 내몽고 파림우기 부근에서 나오니 이상해서 하는 이야기입니다.

---> 잘 보고 있소. 이는 내가 말한 부활한 부여다.

즉 고리의 서북에서 부활한 부여인 것이다.

그래서 현도군과 낙랑군을 비롯하여 지나 역대 왕조와 그렇게 많은 접촉이 있었던 것이다.

만주 한가운데 있었다면 가능한 얘기가 아니다.

왜? 고리가 요서에 있었기 때문에.

모용씨가 멀리 만주 한가운데 부여를 쳤을 것 같은가?

바로 하북에서 가까운 부여이기 때문이다.

대표적으로 무명 한 사람을 골랐지만,

결코 그를 인격적으로 모욕하려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어디까지나 고대사 인식 자체가 잘못되었음을 나무라는 것이다.

앞에서 말했듯이 현대사나 사회를 보는 눈은 존경할 만한 점도 많다.

오히려 세세한 면에서는 어느 누구에 못지 않게 뛰어나기도 하다.

17-1

그는 대표적인 식민사학의 나팔수, 동북공정의 앞잡이"

요 따위로 말씀하시면 기분이 팍 상합니다. 그러나 명예훼손소송은 하지 않을테니 너무 걱정은 마시고...

다른 것은 제껴두고 고조선의 위치이야기.. 도대체 제가 한 이야기가 잘못되었다면 어디에서 무엇이 잘못인지 찍어보세요.

1. 진개가 고조선의 서방2000리를 빼앗고 난뒤 만번한을 경계로 하였다. - 위략

2. 이때의 만번한은 난하와 그지류 汗水 부근이므로 패수는 난하다. - 윤내현

3. 그럼 진개가 2000리를 빼앗기전, 고조선의 경계는 난하의 서쪽2000리에 있다?? -저의 궁금점

4. 만약 난하가 패수고 위략의 만번한이 난하유역에 있었다면 고조선을 공격한 연나라의 수도는 최소한 난하의 서쪽 2000리를 넘어서 있다. -저의 중간결론

5. 그렇다면 진개의 동정이 있던 시기 연나라는 황하의 대만곡부인 오르도스지역 너머 있게된다.

6. 그럼 연하도는 어느나라의 것인가? 계성은 어느나라의 성인가? 그곳에서 출토되고 있는 엄청난 유물과 명문은 고조선의 것인가?

7. 연하도 유물이 연나라의 것임은 고고학적으로 명백하다.

8. 그렇기 때문에 난하가 패수라는 말은 위략의 기록과 정면으로 배치된다.

9. 위략의 패수, 만번한은 난하가 아니라 요하유역이다.

자 여기서 몇번이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는지 구체적으로 말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 그냥 당신은 식민사학이오 라고 하면 뺨따구 맞을지도 몰라요.

그리고 전체적으로 어수선하게 이야기를 하시는데 구체적으로 좀 말씀하셔야 하겠네요. 그리고 혼자 기쁨에 넘쳐서 유레카를 외치는 것은 자유입니다만, 독립선언서가 아닌 다음에야 내가 모든 비밀을 밝혀냈다고 해봤자 별로 감동하는 사람은 없을 것 같습니다. 그런 사람은 많이 봐왔거든요.

18

이제 다시 환장할 일이 생긴다.

수로가 42년에 가야를 세웠다고?

그래서 비류백제 삼한백제론이 나왔다고? 천만의 말씀이다.

수로는 3말 4초의 사람이다.

가야사 조작의 키는 의외로 간단하다.

바로 120+30+30+30+30=240 이다. 즉 4갑자 올린 것이다.

그럼 신라본기에 나온 가야의 기사는 거짓인가? 맞다.

42년 가야의 건국은 맞다.

다만 금관국과 가야를 삼국사기는 분명히 하고 있다.

금관국은 282년 이후에 세워졌다.

그것은 오늘날 고고학과도 일치한다.

누가 세워 주었는가? 백제다. 백제 부여씨다. 왜?

삼국사기 파사왕조에 수로의 이야기가 있다.

바로 수로와 파사는 짝이다.

언제나 같이 움직인다.

파사가 5대왕으로 조작되었으니 당연히 수로도 거기에 따랐다.

왜? 수로와 파사는 같이 움직였으니까!

그러기에 수로설화에 파사석탑이 나온다.

그것은 바로 파사왕을 뜻한다.

파사는 5대왕이 아닌 18대 왕이다.

마찬가지로 수로도 그 때 사람이다.

가야연맹? 전기 가야는 금관국이 주도하고 후기 가야는 대가야가 주도했다고?

무슨 풀 뜯어 먹는 소리냐?

가야는 제대로 된 나라도 아니었다.

오직 백제의 따라지, 왜의 따라지였을 뿐이다.

이래도 일본서기를 무시하는가?

그들은 한결같이 가야지방에 대한 지배권을 나타내고 있다.

이는 정확한 것이다.

그것이 비록 <임나일본부>가 아니라도.

그런 가야가 왜를 세웠다고? 웃기지 마라! 피라미가 고래를 낳은 꼴이다.

고고학도 이미 증명하고 있지 않는가? 가야 지방은 북방계 유물로 가득한 것을.

수로-거등-마품-거질미-이시품-좌지-취희-질지-겸지-구형-세종-솔우-서현-유신 13 - 12 - 11 - 10 - 9 - 8 - 7 - 6 - 5 - 4 - 3 - 2 - 1 - 0

즉 수로는 유신의 13대조가 된다.

그러면 수로는 어디에서 왔는가? 과연 그 애비는 누구인가?

이제 허접한 비류백제, 삼한백제론은 끝낼 때가 왔다.

비미호는 일본서기와 아무런 관계도 없다.

수로는 결코 1c의 사람이 아니다.

그런 이론은 무의미한 또 하나의 헛말일 뿐이다.

그렇다면 가야의 시조는 누군가? 삼국사기에서 밝히고 있다. 이진아고왕이다.

이진아고가 누구인지는 아직 모른다.

더 파고들어야 한다.

하지만 당연히 수로는 바로 투후 김일제의 후손인 것이다.

바로 흉노의 자손인 것이다.

이것이 바로 문무왕비의 위력이요, 성씨록의 위력이요, 돈장의 위력인 것이다.

이를 박창화가 절대로 알 리가 없었다.

첨부하자면 무력은 김유신의 할아비가 아니다.

유사 문무왕 조서에 나온 대로 문희는 세종-솔우-서운(서현)-문희의 계통이다.

유신도 마찬가지다.

물론 여기의 세종은 이사부의 아들 세종과는 다르다.

그 점은 너무 길므로 여기서 다루지 않겠다.

그럼 어떻게 해서 무력이 유신의 할아비로 둔갑이 되었는고?

바로 서현의 출세욕 때문일 것이다.

삼국사기와 유사, 화랑세기는 그 답을 이미 제시하고 있다.

돈장엔 그 증거의 일단이 나온다.

19

요의 수도는 임황이요, 이 곳이 서요하의 상류지역임은 누구나 알고 있다.

요동도 요서도 다 요의 땅이었다.

다만 요동은 약간의 요동(搖動)이 있다.

- 혹시 모른다. 요동이 진짜 왕씨 고리의 땅이었을지도 -

어쨌거나, 지나의 어느 시대 어느 기록에서 요나 거란족이 장성(만리장성) 남쪽에서 나라를 세웠다고 한 적이 있는가?

어디 중국을 침략하여(중국이 연운 16주를 떼어주기 전에) 나라를 세웠다고 지적한 적이 있는가? 없다. 결코 없다.

그런데도 안동도호부가 요동이고 만리장성의 기점이 압록강이었다고 망발하는 것은 무슨 심보인가?

무엇을 근거로 그리 떠벌리는가?

만리장성이 요서를 가로질러 요하를 끊고 압록강에 닿았다고 식민사학과 그를 추종하는 이 나라 주류사학계는 아직도 망발을 늘어놓고 있는가?

모두다 학문의 교수대로 보내야 할 것들이 아닌가?

역설적으로 만리장성은 결코 요서를 넘어서지 못했고 안동도호부는 난하 가까이에 있었던 것이다.

그럼 고리의 마지막 평양성은 어디였는가? 바로 오늘날 요동 지역임을 말해준다. 요사는 고대사의 비밀을 모조리 간직하고 있다.

그 뒤에 나온 <송나라 이후의 고지도>를 보더라고 결코 만리장성이 요하를 가로질러 압록강에 닿은 것으로 그려진 것은 없다.

바로 오늘날의 만리장성과 거의 궤적이 일치한다.

즉 명나라가 쌓은 오늘날의 장성이 바로 진시황대에 쌓은 만리장성인 것이다.

이보다 확실한 증거가 있는가? 물론 다른 증거도 고대문헌에 지천으로 널려 있다.

존화사관주의자들, 사대주의, 식민사학, 동북공정의 앞잡이를 자처하는 주류사학과 그 추종세력만 모르고 있는 것이다.

언젠가 song님이 이 싸이트에서 논한 논리가 정확하다.

대릉하변의 조양이 선비족의 수도인 용성이라고? - 지나던 개가 웃는다. -

그곳은 바로 고조선의 터전, 고리의 터전이었다.

바로 한나라 요동의 군현과 고리가 충돌하던 지점이다.

그리고 요는 어쨌거나 연운 16주를 차지한다.

그곳은 장성 이남이었다.

사학자 누구도 연운 16주를 오늘날 장성의 북쪽이라고 하는 사람이 없다.

바로 요나라 시대의 장성이 오늘날 장성의 궤적과 일치하기 때문이다.

식민사학이나 지나의 억지 이론대로 요서를 가로지르고 요하를 건너 압록에 닿았다면 연운 16주가 요동이나 요서에 있었단 말인가?

즉 만리장성은 전국시대에 쌓고 다시 명나라가 그 자리에 그대로 다시 축성한 것이다. 결코 다른 곳으로 옮겨 쌓은 것이 아니다.

그럼 요는 어디에서 성장했는가?

역사에서 지워졌지만 요는 분명히 고리의 영역에서 성장했다.

고리를 이은 발해의 영역 안에서 성장했다.

고리 멸망 후에 한때 강성하기도 했지만 얼마 뒤에 바로 발해의 지배로 편입되었다.

그러나 발해의 약화를 틈타 새로운 대안 세력으로 부상하였다.

발해의 동만주에 뒤이어 서만주에서 일어난 것이다.

거기엔 또 하나의 변수가 있었다.

바로 오늘날 요동지역의 신라였다.

신라가 요동지역에 있었다고? 그렇다.

신라는 요동지역까지 차지하고 있었다.

신라 9주는 잘못된 것이다.

삼국사기와 후대의 기록을 보라!

9주 외에도 주가 몇 개 더 있었다.

삼국사기 지리지는 심히 잘못된 고증일 뿐이다.

잘못되고 날조된 역사의 편린일 뿐이다.

각설하고 이래도 요가 남의 역사인가?

어떻게 요의 역사가 지나사가 될 수가 있나?

민족적 친연성과 풍습, 문화, 역사 강역 어느 쪽도 우리하고 가깝지 되놈의 역사와 가깝지 않다.

고조선, 고리, 발해의 영역에서 일어났으니 당연히 우리역사인 것이다.

이게 다 누구의 죄인가?

바로 김씨의 죄다. 신라김씨의 죄다.

바로 뜻 없이 살아온 이 땅의 지배세력들이다.

20

일본열도 고대사의 위대한 천황으로 통하는 웅략은 누구인가?

고리에 대한 복수를 하려고 계획한 개로왕은 일차로 왜 왕권을 접수하기로 한다.

이미 대륙의 문명에서 멀어지고 문화적으로 떨어진 열도는 불안정하였다.

더구나 부여씨와 목씨의 타협으로 김씨인 윤공이 잠시 자리를 이었지만 부여씨와 목씨의 갈등도 여전했다.

하지만 대륙에선 부여씨가 이미 확실한 위치를 점하고 있었고 열도의 부여씨도 응신의 후손을 비롯한 여러 씨족들이 강성한 상태에서 개로의 동생인 곤지의 등장은 커다란 회오리를 몰고 온다.

그는 거의 무력으로 정권을 잡고 왜왕에 오른다.

그러다가 백제가 다시 고리에 패망하고 수도인 평양이 대파되는 위기를 맞는다.

그러자 그때까지 왜의 영역이었던 충남과 호남지역을 백제에게 준다.

일본서기에서 천황이 구마나리를 주어 백제를 부흥하게 했다는 것이 결코 거짓이 아닌 진실인 것이다.

바로 호남의 왜식 고분들은 그때까지도 그곳이 백제의 직할 영역이 아니었음을 증명한다.

그런 땅을 아낌없이 마구 준다?

바로 왜와 백제가 동족이 아니라면 절대 가능한 얘기가 아니다.

각설하고 웅략인 곤지는 국사를 맏이인 청녕에게 맡기고 백제로 온다.

그러다가 혼란한 권력투쟁의 와중에서 희생된다.

그 시신은 다시 왜로 옮겨져 왜왕의 자격으로 모셔진다.

훗날 청녕이 다시 남조정권에 표를 올린다.

바로 왜왕 무(武)다. 결코 무는 웅략이 아닌 것이다.

왜 지나사서엔 5왕인데 일본서기엔 인덕-이중-반정-윤공-안강-웅략-청녕의 7명인가? 언제 지나사에서 외국역사 기(紀) 썼던가? 열전만 썼지.

인덕은 찬, 진은 반정, 제는 윤공 흥은 안강 혹은 미륜, 무는 청녕이다.

물론 그들의 부자관계 등도 맞지 않다.

지나사서에서 쓴 동이열전은 언제나 참고용일 뿐이다.

오직 일본서기, 성씨록을 참고하여 계통을 밝힐 수 있을 뿐이다.

마찬가지다. 한국고대사도 그리해야 한다.

어디까지나 주는 삼국사기와 유사다.

동성이 왜 동성인가? 바로 동쪽 성에서 온 왕이기 때문이다.

왜는 백제의 동쪽이기 때문이다.

왜와 백제가 한 집안이 아니라면 절대로 가능한 얘기가 아니다.

서기에 천황이 동성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백제왕으로 보낸다.

그 천황이 과연 누구란 말인가? 바로 곤지의 맏아들인 청녕이다.

일본서기는 웅략기에 넣어놓았지만 결코 웅략이 아니다.

그 비밀은 바로 기년조작에 있다.

그러다가 훗날 계체가 왕위에 오른다.

이는 아마도 곤지의 막내이거나 손자일 확률이 높다.

일본서기가 맞다고 본다면(계체 나이를 감안하면) 아마도 곤지의 셋째에서 막내 사이일 것이다.

혹은 개로왕의 다른 아들일지 모른다.

다만 아직 웅략이후로는 잘 알지 못한다.

내가 거기까지 신경 써서 공부할 틈이 없었다.

왜 계체라고 하였을까? 바로 체(體)를 이었기 때문이다.

여담이지만 일본서기는 천황의 호칭을 그냥 아무렇게나 적지 않았다.

바로 그 호칭에 비밀이 담겨 있는 것이다.

훗날 다시 천무가 정권을 쥔다.

생각건대 천무는 원래 김제상의 후손인 백제왕일 확률이 높다.

생각하라! 내가 왜 백제본기에도 없는 백제왕이라고 부르는지!

한 가지는 확실하다.

천무는 김씨다.

그럼 백제사에서 김씨왕이 있었는가?

그렇다. 확실히 있었다. 밝히지 않았는가? 사요왕이다.

그럼 사요가 최초의 김씨 백제왕이었나? 아니다. 누구인가? 바로 숭신이다.

그러기에 神의 칭호를 얻은 것이다.

언감생심이지만 천무가 정권을 잡지 않았다면 어림도 없다.

김씨들은 이래저래 신라와 일본 양쪽에서 역사조작에 착수한다.

서로에게 이득이었으므로. 그들은 역사를 도살한 것이다.

천무 이래 신라와 일본의 빈번한 접촉은 바로 역사조작을 위한 수순이었다.

천무가 정권을 쥔 것은 백제와 고리와 망하고 김씨가 득세하던 바로 그 시절이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어쩌면 일본의 문무천황은 정말로 신라의 문무왕일지도 모른다.

그러다가 환무가 집권한다.

바로 오늘날 일본천황가의 직계다. 바로 부여씨다.

하지만 그들도 뒤틀어진 역사를 바꾸려고 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대륙의 일을 잊고 새로운 나라를 건설하기로 매진한다.

하지만 족보는 필요했다. 그러기에 성씨록이 나왔다.

바로 일본삼서중에서도 성씨록이 핵심인 까닭이다.

바로 부여씨와 해씨 김씨와 박씨와 목씨의 족보인 것이다.

백제는 일명 구다라라 한다. 바로 구다라로 읽어야 한다.

물론 후대에 음가가 변형되었건 어쨌건 백제의 주류인 일본이 구다라라 하였다.

백제를 제대로 모르는 우리는 당연히 거기에 따라야 한다.

물론 우리가 백제의 주류에서 벗어났다는 것은 아니다.

우리에게는 백제의 기록이 깡그리 사라졌기에 몰랐을 뿐이다.

구다라를 구다라라 읽어주는 게 무엇이 잘못된 일인가? 무엇이 창피한 일인가?

각설하고 고구려연구회 등에서 내 놓은 고구려 지도를 보자!

잘못 되어도 한참 잘못되었다.

이렇게 큰 고리가 무엇이 부족해서 콩알만한 백제와 신라를 꺾지 못하여 나라가 망하고 통일을 못했단 말인가?

당시의 기록은 분명히 고리와 더불어 백제를 대등한 나라로 그리고 있다.

76만호대 69만호다.

오히려 백제가 크다.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한참 잘못된 것이다.

한마디로 정의한다.

모두다 거짓이다.

위대한 고구려를 창조하기 위해 역사를 심히 왜곡하고 있다.

북한의 주체사학이나 식민사학이나 다 마찬가지다.

식민사학에서 벗어나기 위해 여러 시도를 하고 있지만 이런 잘못된 인식을 바꾸지 않는 한 고대사 복원은 꿈일 뿐이다.

위대한 것은 고리가 아닌 백제였다.

그들은 망한 부여를 다시 일으키고 모용씨에게 두 번이나 패망하면서도 굴하지 않고 백제를 세우고 역사의 강자로 키워냈으며, 일본열도를 정복하고 바로 한민족의 역사지평을 넓혔다.

물론 거기에는 커다란 힘이 작용했다.

바로 찬란한 문화를 가진 역사 고조선이 있었던 것이다.

일부의 주장처럼 동남아나 해외로 뻗어나갔을 가능성도 얼마든지 있다.

일본서기나 지나의 기록은 분명히 그것을 예측하게 해 준다.

우리는 백제에 대해서 가장 많은 빚을 지고 있다.

우리는 백제에 대해서 피어린 반성의 역사를 써야 한다.

패배주의, 빈정거림, 반(反) 백제주의의 식민사관으로는 결코 백제의 비밀과 역사의 비밀을 풀 수가 없다.

21

신라김씨의 시조는 알지도 아니요, 최초의 김씨왕은 미추도 아니다.

시조와 최초의 김씨왕은 바로 성한이다.

그런데 신라김씨들은 왜 하필 신라본기에서 미추를 김씨왕의 선조로 하였을까?

궁금하지 않는가? 과연 미추가 누구기에? 앞에서 얘기했듯 구도와는 아무런 관계도 없다.

상장돈장에 분명히 미추가 구도의 아들로 등재되기는 했으나 그것이 조작임은 한 눈에 드러난다.

바로 구도-말흔-말구의 계보다.

사기에 미추이사금과 말구는 형제라고 했다.

말이 되는 소린가? 그러면 구도는 미추의 할아비겠네!

그리고 시대로 보아 말구가 과연 내물의 아비가 될 수가 있는가? 절대 아니다.

앞에서 미추는 20대 왕임을 밝혔다.

바로 내물의 전왕이다.

언젠가 김태식씨가 갈문왕을 논하면서 여러 얘기를 했는데 그의 얘기가 거의 정확하다.(거의?) 여기서 길게 따지지는 않겠다.

미추의 어미는 이칠갈문왕의 딸이라고 했다.

그럼 아비는? 당연히 왕이어야 한다. 왜? 이칠은 왕의 장인이기 때문이다.

그럼 미추의 아비가 왕이었나?

그렇다. 고대문헌 다 뒤져서 찾아보시라. 분명히 있다.

화랑세기에 진골정통을 소개하면서 왜 예로부터의 진골이 아니었다고 하였는지 이해가 간다.

<화랑세기>의 역자인 이종욱은 거기서 이상하게 얼버무렸다.

왜? 그 문장의 뜻을 잘 모르기 때문이다.

과연 그 뜻이 무엇인가?

미추가 어째서 진골정통이 아니면 왕비로 맞지 말라고 했는가?

거기서도 미추는 내물의 전왕임이 드러난다.

멀리 13대 왕이라면 가능한 얘긴가?

그러면 유례부터 흘해까지 진골정통을 왕비로 맞았는가?

유례, 기림, 흘해가 맞은 진골정통 왕비 제시해보라!

그것 하나로도 화랑세기는 절대로 위서가 아니다.

박창화가 재미삼아(?) 신라사 지으면서 내가 제시한 위의 신라 왕통을 따랐는가?

아니다. 바로 삼국사기에 나온 대로 했다.

바로 그가 화랑세기를 짓지 않았다는 빼도 박도 못하는 증거다.

그럼 미추의 할아비는? 알 수 있다.

왕이었다. 증조할아비는? 왕이었다.

바로 미추의 증조부터 이어지는 계통만 밝혀도 고대사의 비밀이 1/5은 다 드러난다.

왜 김유신의 혼령이 하필 미추왕릉으로 들어갔나?

유신은 알다시피 수로의 후손이다.

과연 수로와 미추는 어떤 관계였기에?

백제의 신라정벌(298년 이서고국의 침입)에서 어찌 미추왕이 등장하는가?

과연 미추왕은 어디에 묻혔는가? 앞에서 말한 황남대총이다.

황남대총이라고? 그렇다.

경주에 미추왕릉이 있던데? 웃긴다.

대나무가 있다고 미추왕릉인가? 바로 삼국사기에 답이 있다.

대릉에 묻혔다.

각설하고 황남대총은 왜, 가야, 신라, 백제를 아우르는 고고학의 결정판이다.

당시의 모든 비밀을 다 담고 있다.

그걸 엉뚱하게 해석하고 있다. 왜? 문헌을 도외시하기 때문이다.

하긴 <일본서기가 백제서기>임을 알지 못하는 자들에게 무얼 기대할 것인가?

어째서 왕릉에선 금관이 안 나오고 금동관만 5-6개 쏟아지고 은관이 나오며 왕비릉에서 금관이 나오나? 내물과 같은 계열의 왕이었다면 그랬을 것 같은가?

미추를 왜 하필 13대에 집어넣었을까?

왜 혁거세가 13세에 왕위에 올랐다고 했는가?

관련이 없는 것 같은가?

천만에! 고대의 사관은 후세에 비밀을 알려주고 있다.

바로 성한왕에 대한 비밀의 코드다.

그것은 바로 13이다.

그러기에 가장 수치스런 기록인 우로왕의 죽음으로 인하여 우로는 왕에서도 삭제되는 비운을 당해야 했다.

22

고조선이 흩어진 이래 불행을 당한 것은 이 땅의 역사였다.

고리와 백제가 동족끼리 투쟁하다 망한 이후로 발해와 신라가 대립하다 끝내는 요-금-원-청을 거쳐 되놈들의 영역으로 넘어가 그들이 마치 요와 금과 청의 역사를 저들 것처럼 떠벌리게 되었다.

우리가 그들을 마치 다른 민족 다른 역사처럼 인식하게 되었으며, 일본열도는 뿌리를 잃어버리고 마치 독자생성의 논리가 맞는 양 발광하고 있다.

그리하여 대륙과 열도의 같은 형제가 서로를 몰라보고 원수가 되었다.

고리와 백제가 치열하게 투쟁한 것처럼.

그리고 오늘날 한반도의 두 형제는 마치 남보다 더한 원수가 되어가고 있고 타 족속인 되놈들에게는 유학이 들어온 이래 사대주의로 굽실거리며 얼치기 되놈이 되어 소중화를 자처하고 같은 뿌리인 만주인과 몽골인과 일본인은 오랑캐와 왜놈이라고 경멸하고 있다.

그러니 조상의 혼이 돕겠는가?

같은 핏줄을 미워하고 천시하며 남으로 여기고 경멸하는 그런 나라 그런 역사에게 조상들이 무엇이 좋다고 영광을 주고 미래를 주겠는가?

자기의 뿌리를 부정하고 선조로 인식되어야 할 단군의 목이나 자르는 족속들에게 무슨 희망이 있어 번영의 기틀을 주고 영광의 기회를 주겠는가?

황제가 중화 한족의 조상인가? 다만 상징일 뿐이다. 마찬가지다.

단군이 이 나라 사람 모두에게 직접조상은 아니라도 다만 상징일 뿐이다.

징기스칸이 몽골의 상징인 것과 같다.

로물루스 형제가 로마의 상징인 것과 같다. 워싱턴이 미국의 상징인 것과 같다.

오히려 황제란 작자가 한족에게 남긴 핏줄의 비율보다 단군족은 이 나라 이 민족을 비롯하여 만주인 일본인에게 훨씬 많은 핏줄을 남겨주었다.

벗어나라! 몽매에서 깨어나라! 어리석음에서 깨달아라! 민족의 뿌리를, 역사의 뿌리를! 남을 업신여기고 지배하기 위함이 아니다.

스스로 깔아뭉개고 비하하는 못된 습관과 버릇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다.

그 키는 일본삼서가 쥐고 있다.

삼국사기와 유사가 쥐고 있다.

돈장과 세기가 뇌관을 쥐고 있다.

이제 한민족 역사의 네크워크를 구축할 때다.

조선-신라-고려-조선으로 이어온 것만이 우리역사는 아닌 것이다.

바로 잃어버린 북방의 역사를 우리 것으로 해야 한다.

잊고 살았던 열도의 역사를 다시 배워야 한다.

고대사의 복원은 바로 삼국초기의 복원이다.

그것이 복원되지 않는 한 고대사는 없다.

그것이 복원되면 고조선이 복원된다.

후대의 역사인 후신라와 발해도 복원된다.

바로 그것이 핵심이다.

주류학계나 재야학계나 모두 고대에 대한 인식은 고리가 30점, 신라가 10점, 가야도 역시 10점, 백제는 5점 밖에 줄 수 없다.

바로 핵심인 백제와 가야 신라사가 빵점 수준이다.

이 곳에서 만난 분들 중에 내 개인적인 평가로는 유정님이 최고수다.

그 외에 김태식, 바비, 신동훈, 정석근, song님 등이 뒤따른다.

솔직히 유정님은 내 글을 읽는다면 내 뜻을 알아차렸을지도 모른다.

대단한 유정님과 바비님.

나는 그 정도로 미세한 것에서는 솔직히 유정님을 비롯하여 몇몇 분에게 결코 미치지 못한다.

김태식님의 그 박식함은 놀랍다.

가끔 그의 블로그를 들여다보며 동냥을 한다.

하지만 내가 하고자 하는 것은 바로 큰 기틀이다.

줄기가 나와야 잎이 자랄 것이 아닌가? 밖에서는 구자일이란 분이 고수다.

다만 요즘 이상한 데로 빠져서 안타까울 뿐이지만...... 학계에서는 이덕일, 이형구, 김종서, 정형진 등이 앞서간다.

여러분들의 생각과 다르다고 마구 쏟아내어 질문하지 마시기 바란다.

두 번 세 번 읽어보고 고대사서 다시 들여다보고, 지도 그려가면서, 계통도 그려가면서 생각하기 바란다.

개인별로 한 코너에 한 가지 씩만 질문해 주셨으면 한다.

물론 다 답변할지는 모르지만 시간을 내서 언젠가 한꺼번에 답변해 주겠다.

근거 없는 비방이나 어쭙잖은 증거 들이대면서 반박하지 말라.

웬만한 배짱과 증거로 내가 이런 주장을 한다고 보는가?

어느 누구보다도 철저하게 챙긴다.

주류사학의 이론은 이제 모조리 폐기처분해야 한다.

지나와 동북공정의 하수인들은 이제 역사를 훔치는 것을 넘어 문명을 통째로 도적질하려 하고 있다.

그것이 지나의 주장대로 진실이라면 노여워할 이유도 없다.

그러나 거짓말이 뻔하고 억지가 뻔한데도 이러한 때에 아직도 식민사학의 나팔수 동북공정의 앞잡이 노릇을 하면서 그것을 자각하지 못함은 스스로 얼굴에 침을 뱉는 격이다.

고구려 연구 한답시고 소위 역사학자란 인간들이 국민의 피 같은 세금 일년에 100억씩이나 쓰면서 무얼 연구하겠다는 건가?

모두 사기꾼들일 뿐이다.

문헌을 뒤지고 종합해서 논문을 쓰는 것이 아니고 다른 쓰레기 논문 짜깁기해서 논문을 쓴다.

그러니 또 다른 쓰레기가 될 뿐이다.

삼국이 부체제 부족국가 형태였다고?

천년 이상을 고대국가로 자란데서 어느 날 갑자기 퇴보하여 부족국가가 되나!

그 돈을 차라리 다른 데 써라.

그 돈으로 지나사서 일본사서 번역하고 보급하는데 써라.

당신들 주류들이 과연 일본서기 하나 제대로 번역했나?

성씨록 번역했나? 지나사서 하나라도 온전하게 번역했나?

그것이 우리가 배달국과 조선과 고리와 신라와 백제의 조상들에게 사죄하는 길이다. 고리는 1차 방정식이다. 부여는 2차, 가야는 3차, 신라는 4차, 백제는 5차 방정식이다.

1차 방정식도 제대로 풀지 못하는 주제에 5차를 풀겠다고?

언감생심 꿈도 꾸지 말라.

고리와 부여를 풀어야 가야, 신라, 백제(왜)가 나온다.

역으로 백제를 풀면 모든 것이 풀린다.

그 백제의 역사는 사라진 것이 아니다. 바로 일본삼서에 고스란히 존재한다.

고고학은 필요하다.

그러나 위험하다.

바로 문헌이 제대로 해석되지 못한 고고학은 위험한 것이다.

그것은 역사왜곡의 시발점이 될 수도 있다.

툭하면 하는 말이 한반도와 만주지역에 문헌이 없다고 한다.

물론 중원에 비해 절대적으로 부족한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역사이래로 문헌이 공백인 적은 없었다.

다만 몰랐을 뿐이다. 그 문헌이 제대로 해석된다면 이제 고고학은 새로운 시대를 맞게 된다. 역사의 기록이 있는 곳에서 고고학은 당연히 문헌역사학의 시녀일 뿐이다.

고고학이 주가 되는 것은 세세한 부분과 역사기록이 없는 곳에서의 추측뿐이다.

23

여러분들은 지금까지 듣지도 보지도 못했고 결코 생각도 하지 못했던 충격의 순간들을 지나왔다.

천조대신이 도모왕이고 도모는 결코 동명이 아니라는 것,

박제상이 아니고 김제상이며 그가 윤공천황이라는 것,

신라왕통이 조작되었다는 것,

성한이 신라왕이고 혁거세이며 문무왕비가 정확하다는 것,

신라소년에 의한 백제왕 암살이 마한의 분서왕이라는 것,

신라는 백제가 세웠다는 것,

응신이 침류왕이라는 것,

수로가 3~4c 사람이라는 것과 역시 백제가 금관국을 세웠다는 것,

파사가 신라 18대 왕이며 제상의 5대조이며 백제왕 사요의 사위라는 것,

백제에 김씨왕이 있었다는 것,

원래 왜왕이 목씨라는 것,

박씨의 시조가 왜 목씨 왕족이며 신라의 초대왕인 호공이라는 것,

고리의 평양이 요서에 있었고 훗날의 안시성이라는 것,

근초고왕이 공격한 평양성이 안시성이라는 것,

백제의 수도 한성이 평양이라는 것,

비류왕의 어머니가 소서노일지도 모른다는 것,

그녀가 신라정벌의 주역이라는 것과 그것을 기록한 일본서기가 사실이라는 것,

미추왕의 아버지도 왕이었으며 선대도 모두 왕이었다는 것,

결코 미추가 정통신라김씨가 아니라는 것,

알지는 박씨일 가능성이 많다는 것 등 모두가 놀랄 새로운 사실일 것이다.

하지만 어쩌랴!

진실이 그러한 것을.

그 진실의 시작은 바로 부여가 부활했다는 것을 모르기 때문이다.

하지만 삼국사기만 정밀하게 들여다봐도 부여가 부활했음을 알 수 있다.

바로 고구려본기 태조왕기에 그 답은 나와 있다.

어쭙잖은 문구 하나, 증거 하나로 역사를 판단하지 말라.

모든 증거를 종합하고 체계화하여야만 ?

그 진실의 시작은 바로 부여가 부활했다는 것을 모르기 때문이다.

하지만 삼국사기만 정밀하게 들여다봐도 부여가 부활했음을 알 수 있다.

바로 고구려본기 태조왕기에 그 답은 나와 있다.

어쭙잖은 문구 하나, 증거 하나로 역사를 판단하지 말라.

모든 증거를 종합하고 체계화하여야만 진실에 접근할 수 있는 것이다.

물론 내 주장도 전부라고 하지는 않겠다.

세세하게는 착오가 있을 것이다.

하지만 큰 덩어리로는 어디까지나 진실이다.

나는 결코 추측이나 소설을 쓰지 않는다.

어디까지나 역사서에 나온 것을 그대로 재해석하여 제대로 인식시켜 줄 뿐이다.

지금까지 나온 고고학을 참고하고 적용할 뿐이다.

바로 삼국사기와 일본서기의 조작의 고리를 밝히면 되는 것이다.

다시 말하지만 모든 것은 바로 고대사서에 다 있다.

내가 그것을 바르게 해석하여 여러분에게 보여주는 것뿐이다.

그리고 진정으로 역사를 원한다면 참고할 만한 뛰어난 저서들을 소개하겠다.

왜 그런지는 스스로 판단하시기 바란다.

살아있는 한국사 1, 고조선은 대륙의 지배자였다.

- 이덕일(일본삼서만 제대로 알면 무서운 존재가 될 분)

발해연안에서 찾은 한국문화의 비밀 - 이형구(고고학계의 최고 수작)

요서지역의 청동기 연구 - 복기대

화랑세기 또 하나의 신라 - 김태식(화랑세기 관한한 타의 추종을 불허)

고깔모자를 쓴 단군, 실크로드를 달려온 신라왕족, 수시아나에서 온 환웅천왕 - 정형진(뛰어난 역작)

후한서 동이열전 연구 - 기수연(기존 역사학계 최고 수작)

고대사의 비교언어학적 연구 - 강길운(정말로 꼭 필요함)

삼국지 바로 읽기, 대쥬신의 역사 - 김운회(생각의 지평을 넓히기 위해서)

중국북방이족과 조선상고사 - 나동현(많은 자료가 있어서 추천)

고조선과 한사군의 위치 비정 연구’에(후한서지리지의 수학적 연구 ) - 김종서(아직 확보하지 못했음 누군가 구해주시면 좋을 듯) 90점 - 물론 이 분의 <한사군위치의 연구>는 책으로 나온 것이 있다.

아나타는 한국인 - 박영미(인문서로 쓴 한일고대사)

일본속의 한국문화 유적을 찾아서 - 김달수(일본이 백제란 것을 알았다면)

백제와 대화일본의 기원 - 홍원탁(아직은 인식 부족)

한국문화의 뿌리를 찾아서, 부여기마족과 왜 - 존 카터 코벨(외국인이 본 뛰어난 혜안) 금문의 비밀 - 김대성(아직은 필자도 어려움. 그러나 뛰어난 역작) 한자로 풀어보는 한국 고대신화 - 김용길 (역시 뛰어남) 언어속에 투영된 한민족의 고대사 - 정연규(참고할 만함) 고조선과 부여의 제문제 - 한국고대사연구회(주류학계의 일단을 볼 수 있다.) 기후변화 - 김연옥(이 외에도 다른 기후변화에 관한 논문도 좋을 듯) 실크로드와 한국문화 - 정수일(이분의 저작은 문화교류사에서 일가견이 있다.) 중국역사지리 - 류제현(중국역사지리에 관한 저작으로 참고할 만함) 고조선 부여사 연구 - 백산자료원(어렵지만 봐둘 것)

그 밖에 일본서기 - 전용신 선생님,

고사기 - 권오엽 선생님,

조선상고사 - 신채호 선생님,

화랑세기 - 이종욱,

지나사 동이열전 부분과 지리지 부문(통전 수경주 요동관계 포함),

요서 요동 관계 기록 일체,

한국고대 금석문, 고대사 사료 집성(한치윤의 해동역사에 대부분 들어있음. 국사편찬위에서도 제공함),

정약용의 아방강역고,

도교 경전(노자, 장자, 열자, 포박자, 회남자, 주역)그 외에 많은 참고자료를 두루 섭렵해야 한다.

외골수와 아집은 또 다른 조작만 낳을 뿐이다.

다시 말하건대, 돈장과 세기는 바로 키포인트다.

결코 박창화가 끼적거린 것이 아니다.

그 가치를 알아야 진정한 고대사를 복원할 수 있다.

그것은 결코 당시 고대사서를 거스르는 게 아니다.

철저하게 보완하고 있다.

학자들이 쓴 논문이나 저서를 참고하는 것을 대부분 제외한 것은 그들이 잘못된 인식으로 역사를 논하고 있기 때문이다.

몇몇을 제외하면 거의 참고할 필요가치가 없다.

논문 얘기가 나왔으니 더한다면 김태식씨가 논한 논문이론이 참으로 와 닿는다.

그러면서 푸코의 <광기의 역사>를 추천했다.

정말로 한 눈에 쉽게 읽어가야 논문이지, 무슨 주석 각주를 주렁주렁 매달고 그들만이 읽는 논문으로 전락한다면 그것은 이미 학문이 아니다.

자신이 없기 때문이다.

무슨 서론 본론 결론이 필요한가?

그저 논문 중에 자연히 드러나면 되는 것이다.

우리나라 대학이나 학계의 논문형태의 수준은 초등학생 수준보다도 못하다.

자세한 것은 김태식씨의 글을 참조하기 바란다.

카터 코벨이 위 저서에서 미술사가답게 고대 일본벽화를 얘기하면서 배에 실은 말에 대해 얘기한다.

그러면서 부여족이 일본을 정벌했다고 단언하고 있다.

혜안이 아닐 수 없다.

분명한 것이다.

열도에는 말이 없었음을 모든 학자들이 인정하고 있다.

그런데도 일본의 주류는 자생이론이다.

일본열도에서 자생한 세력이 한반도를 침공했다는 것이다.

위에서 내가 논했듯이 자기 열도도 통일하지 못한 세력이 무슨 수로 밖으로 힘차게 뻗어 나가나?

그러면서 코벨은 구미학자들이 부여족이 일본을 정벌한 것을 주장한 것을 나열하고 그것은 의심할 수 없는 일이라고 했다.

에가미가 기마민족정복설을 주장한 이래 많은 일본의 사학자들은 정말로 부여족이 정벌했음을 감지하고 또 주장하고 있다.

물론 소수지만. 그런데도 이 땅의 학자란 것들은 부여는커녕 백제마저도 부정한다.

그러니 임나일본부설에 끌려 다닐 수밖에.

누누이 말했듯 일본의 원류는 백제가 아니다. 바로 백제 그 자체다.

일본서기는 분명히 적고 있다.

바로 비류왕이 열도로 건너가 정복한 시기를. 일본서기의 기년만 풀면 그 답이 나온다. 코벨은 그것을 알지 못하였지만 분명히 짐작하는 혜안을 가지고 있었다.

우리나라 역사학자 중에 과연 코벨만한 혜안을 갖춘 이가 있던가?

삼국사기와 일본삼서는 바로 동전의 양면이다.

결코 따로 놀지 않는다.

일본삼서를 해석하려면 삼국사기가 있어야 하고 삼국사기를 바로 잡으려면 일본삼서가 있어야 한다.

그 촉매를 하는 역할이 상장돈장이요, 화랑세기다.

삼국사기는 자식을 자식이라 부르지 못하는 한 맺힌 기록이요, 일본삼서는 부모를 부모라 부르지 못하는 피 맺힌 기록이다.

그 아픔을 감싸주고 밝혀주어야 할 후손의 책무를 망각한 채 그저 편가르기와 비아냥, 악의에 찬 경멸성 어조로 역사에 대해 지껄이는 자들은 반드시 역사의 철퇴를 맞게 되리라!

아직도 일본서기와 고사기를 소설이라 폄하하는 자들이 많다.

화랑세기와 상장돈장을 소설이라고 지껄이는 얼간이들이 많다.

표현이 지나치지만 나는 그렇게 밖에 표현할 수 없다.

거듭 말하지만 박창화 선생의 다른 저작이 종이비행기라면 두 저작은 최첨단 우주왕복선이다. 내용을 가지고 판단해야지 자구나 용어 등으로 판단하는 자체는 어디서 굴러온 개뼈다귀인가?

김부식이 삼국사를 쓰면서 구삼국사를 너무도 많이 깎아냈다.

소위 고대문자가 졸렬하네, 거치네, 어쩌고 하면서 유교사관으로 역사를 덮었다.

그가 한 것은 거의 없다. 오히려 우리 고유의 것은 많이 깎아내고 중국사서 참고하여 빠진 부분만 채웠을 뿐이다.

그런 것은 그리 안했어도 아무 하자도 없는 것이었다.

안타까운 일이지만 차라리 일본서기처럼 원본 그대로 전해오는 편이 훨씬 나았다.

그리고 그 아래에다 수많은 고대전적 참고하여 <삼국지>에다 배송지가 주석을 단 것처럼 많은 주석을 다는 것이 좋았다.

그러면 오히려 고대사에 대해 우리는 더 많은 진실을 살필 수 있었을 것이다.

말을 더하자면 한단고기에 대해서다.

한단고기는 절대로 위서가 아니다.

물론 한단고기가 100% 진서라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분명히 저본이 있다.

그것이 무엇인지는 모르지만 반드시 저본을 바탕으로 쓰여 진 것이다.

증거는 많다.

지금까지 재야에서 주장한 증거는 모두 아니올시다이다.

바로 상장돈장과 화랑세기를 비롯하여 일본삼서가 제시하는 증거를 한단고기 중간중간에 섬뜩하게 제시하고 있다.

이유립이나 누군가가 그걸 지어내었다면 내가 제시한 위의 사실들을 모두 알고 있었다는 얘기와 똑같다.

한 가지만 제시한다면 태백일사에서 한결같이 마한을 대동강 평양일대로 직시하고 있다.

그것 하나만으로도 한단고기는 절대로 위서가 될 수가 없다.

바로 역사서적(특히 우리나라와 일본의 고기류)의 위서여부는 문구가 아닌 역사적 사실을 제대로 전하고 있느냐로 판단해야 한다.

물론 한단고기는 많은 부분을 심도있게 검토해야 하고 많은 가필과 위조를 걸러내야 한다.

내가 제시하는 고대사 관련 논거에서는 될 수 있으면 한단고기는 제시하지 않으려 한다.

한단고기가 없어도 중고사(부여 건국~고리 멸망)는 충분하기 때문이다.

고리가 망한 것으로 우리역사의 암울은 시작되었다.

겉으로만 보면 그렇다.

하지만 진정한 암울함은 백제가 망함으로 그리 되었다.

백제는 드러나지는 않았지만 고리의 방패였다.

백제가 망하니 순망치한격으로 고리도 망한 것이다.

바로 우리역사의 암흑은 백제가 망함으로 시작되었다.

신라는 백제의 존재와 기록을 깡그리 없앰으로써 그들의 치부를 감추려 했다.

그리해야만 그들의 비밀을 유지할 수 있었다.

그것이 오늘날 우리를 헤매게 하고 이천년이나 역사의 굴곡을 둘러쓰게 한 죄니 그 신라김씨의 죄는 크다 할 것이다.

비아냥대지 마라!

스스로 잘못이 있다면 고치는 것이 진정한 학문의 길이요, 학자의 도리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일본서기가 조작이라는 등의 수작 집어치우고, 세기와 돈장이 위서라는 헛소리 그만들 하시고, 삼국사기와 일본서기가 매우 정교하게 조작된 사서라는 것을 아시고 새롭게 출발들 하시기 바란다.

정말로 최소한 기수연씨 같은 생각을 가지기 바란다.

끝으로 일본서기에

왜 신무가 76년, 개화 60년, 숭신 68년, 수인 99년, 신공 69년, 응신 41년, 인덕 87년, 윤공 42년 등인지 다 이유가 있다.

그들은 결코 아무렇게나 역사를 쓰지 않았다.

철저하게 계산하고 심사숙고해서 그렇게 썼다.

역설적으로 그 방법론을 찾아내면 바로 일본서기가 어떻게 기년조작을 했는지, 해당 인물이 과연 누구인지 속속들이 드러난다.

삼국사기의 계통이 어떻게 조작되었는지 뿌리 채 드러난다.

위에서 일부를 제시했다.

그들은 지하에서 그 혁명을 기대하고 있을 것이다.

역사학은 역사학으로 끝나지 않는다.

그것은 모든 인문학의 도화선이 되기 때문이다. 역사학의 혁명은 바로 인문학의 혁명이 된다.

불개혁 필혁명(不改革 必革命) - 개혁하지 않으면 혁명이 온다.

출처 : tong - 和而不同님의 우리 역사. 문화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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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extarea name='source_title' style='display:none;'>엉뚱거미의 블로그</textarea>

<textarea name='title' style='display:none;'>[본문스크랩] [펌]어느 네티즌의 고대사 반박</textarea>

<textarea name='source_contents' style='display:none;'><table style="table-layout: fixed" cellspacing=0 cellpadding=0 width="100%" border=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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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사는 광복되었는가? 언젠가 문천님이 자비왕비가 파호라는 사실이 고대사의 핵폭탄이 될 것이라고 했던 일이 생각난다. 그것이 비록 작은 일은 아니지만 다음의 것에 비해선 새발의 피에 불과하다. 그것은 무엇인가? 언젠가 내가 얘기했던 일본삼서 - 일본서기, 고사기, 신찬성씨록 - 다. 거기에 우리고대사의 7~9할이 들어있다. 진정한 핵폭탄은 그것이다. 그동안 성찰한 성과를 일부나마 공개한다. 과정은 거의 없고 답만 제시할 것이다. 왜 그런 답이 나왔는지 여러분 스스로에게 물어보라. 무시해도 좋고 비아냥대도 좋다. 그러나 그것이 언젠가 그러는 자들의 가슴에 비수로 꽂힐 것이다. 귀 있는 자 듣고 눈 있는 자 보아라. 가슴을 열고 머리를 비워라. 지난 나의 글들을 반추하여 새로운 사실을 응시하라.

이른바 주류학계라는 이병도 이기백류의 반동 식민사관이 아직도 이 나라 고대 역사학계를 지배하고 있다. 하지만 눈부시게 발전한 고고학과 삼국사기 기록의 타당성이 계속해서 밝혀지면서 이미 주류의 기반은 무너지고 있다. 그런데도 이 싸이트에서 자칭타칭 논객이라고 하는 몇몇 허섭스레기를 비롯한 많은 역사학자란 자들이 역사를 우스개 거리로 만들고 있다. 윤내현, 이덕일, 이형구, 김종서 등이 연구성과를 내놓고 새로운 견해를 제시해도, 이도학, 이종욱 등이 주류에서도 새로운 의견을 내고, 정형진, 구자일 등이 제도권 밖에서 의미심장한 소리를 내도, 박영미 등이 주변학문에서 놀랄만한 연구를 제공해도, 그 철밥통은 요지부동이다. 이른바 송호정을 비롯한 몇몇 반골들은 더 심한 반동 논리를 내놓고 있다. 그들 허접들이 주장한 것들은 아무 근거도 없는 억지임에도 불구하고.

물론 위 사람들이 맞는다는 말은 아니다. 그래도 새로운 내일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 그들이 결정적으로 모르는 것은 일본삼서다. 그 진실을 모르기 때문에 더 이상 나아갈 수 없는 것이다. 그야말로 이 싸이트의 대표적인 주류신봉자 무명의 글을 보자. 1) 윤내현을 비판한 진개의 침입논리 - 고조선이 대동강이라고 강변한다. 2) 왜와 백제의 논리 - 백제가 왜의 속국이었을 뿐이라고 빈정댄다. 3) 박창범 인식에 대한 비판 - 신라의 일식기록이 모두 지나사서에 있다고 한다. 4) 낙랑군의 논리 - 대동강이 낙랑군이라고 생떼를 쓴다. 5) 백제의 논리 - 호남지역은 백제도 아니었다고 한다. 6) 부여의 논리 - 어쩌다 옳은 소리 한 번 했다.

자세한 것은 이 글을 읽다 보면 자연히 드러날 것이고 나중에 종합해서 살피기로 한다. 그 논리가 과연 맞는가? 하나같이 자기모순일 뿐이다. 그가 제도권 안의 인사임이 틀림없는 데 숨어서 아닌 척 하는가? 이들이 바로 식민사학의 나팔수요, 동북공정의 앞잡이다. 그들의 논리가 맞다면 수많은 사람들이 목청 높여 역사가 잘못되었다고 떠들지 않을 것이다. 역설적으로 한국과 일본에서 고대사에 대한 관심이 유난히 높고 백화만발의 학설이 떠도는 것도 그만큼 잘못된 역사를 배우고 있다는 반증인 것이다. 제대로 된 성찰도 없는 것이 무슨 역사학인가? 역사학도 실제학이 되어야 한다.

그런데 우리 역사학은 담론 위주다. 고구려가 어디서 어떻게 건국되고 몇 년 몇 년에 무슨 일이 있었으며, 광개토왕 58성이 어디 일대고, 백제가 어디서 건국되고 시조가 누구이며, 위례성과 한성은 어디인지, 삼국사기 초기기록 하나하나 모두 맞는지, 가야시조가 수로인지, 신라김씨의 계통은 어떻게 되는지, 부여씨의 계통은 어떻게 되는지 등의 실체를 밝히는 것이 중요하지, 무슨 백제의 의의, 고구려의 역할, 삼국통일의 의의 등이 중요한가? 신라가 통일했다는 논리는 맞는가? 다시 말하지만 이제 식민사학의 논리를 쳐부수고 주류를 하루아침에 무너뜨려야한다. 그 공격무기는 있는가? 있다. 바로 일본삼서다.

역사를 바꾸는 것은 언제나 아웃사이더다. 결코 주류가 이뤄내지 못한다. 지나간 모든 역사가 그러했다. 징기스칸도 알렉산도도 나폴레옹도 모두 아웃사이더였다. 사마천도, 세익스피어도, 이태백도 그렇다. 갈릴레이도 아인슈타인도 패러데이도 플레밍도 코페르니쿠스도 모두 아웃사이더였다. 어지러운 한, 일 고대사도 결국은 아웃사이더의 손에서 결정 날 것이다. 이미 수많은 아웃사이더들이 그 철옹성을 부수고 있다.

고대사의 핵폭탄이란 제호로 23편을 연재한다. 끝까지 두세 번 읽고 진지하게 생각해보라. 자기의 논리, 생각과 맞지 않는다고 격하게 내깔려 질문하지 마라. 질문은 1편당 개인별로 1건씩만 해 달라. 진지하게 생각하고 다시 한 번 사서를 보고, 왜 저 사람이 이런 생각을 가졌는지 생각해 달라. 말로 안 되는 개소리 잡소리는 상대도 않겠다. 시간을 내서 얼마 뒤에 한꺼번에 질문에 응하겠다. 여러분 스스로에게 묻고 각자 의견을 내서 토론도 해보라. - 말이 경어체가 아니지만 여러 사람을 대상으로 한 문서 작성상 그런 것이고 뜻이 그런 것은 아니니 이해해 주시기 바란다.

2

우리역사의 비밀이란 싸이트를 운영하는 송준희, 오재성의 논리는 맞는가? 한마디로 아니올시다이다. 한마디로 엉뚱한 도그마에 빠져 있다. 뜨거운 가슴만 있고 차가운 머리는 없는 이들이다. 그런데도 왜 그곳을 들락거리는가? 죽어버린 식민사학의 억지논리보다는 낫기 때문이다. 최소한의 소중한 자료들은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각설하고 어째서 일본삼서가 왜 핵폭탄인가? 바로 백제의 기록이기 때문이다. 그것이 터지지 않고 알아채지 못한 것은 무엇 때문인가? 바로 뇌관이 없었기 때문이다.

여기서 잠깐, 낙랑군이 대동강 일대라고 주장하는 허황된 주류 이론을 보자. 상식으로 보아 그게 맞는가? 그 일대는 왕릉급 무덤과 유물로 가득하다. 낙랑군은 한나라 때 유주의 일부에 불과하다. 그게 과연 낙랑군일 수 있는가? 그 당시 지나사 어디에 군소재지 중에서 낙랑군만한 유적이 있는가? 수도인 낙양과 장안 일대를 빼고는 없다. 심지어 유주의 치소인 계(북경 서남부)에도 그만한 유적은 없다. 상식으로 보아 그곳은 절대 낙랑군이 될 수 없다. 그곳이 낙랑군이 아니라는 것은 <한서, 후한서, 진서, 삼국지>에 지천으로 널려있다. 여기서 그걸 다 거론하진 않겠다.

그럼 낙랑국인가? 그것도 논리에 맞지 않는다. 단 한번 기록에 나온 실체가 그렇게 대단한가? 그곳이 낙랑국이고 고리가 점령했다면 무엇이 부족해서 고리가 통일을 못하고 신라에 망했단 말인가? 자세한 것은 19편에서 논한다.

바로 그곳은 마한의 수도인 위례성이요, 달지국이요, 통합백제의 수도인 한성인 것이다. 그 정도는 되어야 고리와 맞짱을 뜰 수가 있다. 한강유역에 무슨 고분다운 고분이 얼마나 있는가? 고작 적석총 몇 기일 뿐이다. 과연 적석총이 백제의 양식인가? 오히려 대가야나 금관가야보다도 못하고 신라에 비해서도 훨씬 떨어진다. 그 정도 영역과 문화로 어떻게 고리를 상대로 싸우는가? 어림없는 소리다. 백제는 무엇이고 통합백제는 무엇인가? 근거는 있는가? 있다. 일본삼서다. 화랑세기 상장돈장이다. 그곳에서 나온 수많은 한씨관련 유물은 충분히 증거가 되고도 남는다.

화랑세기, 상장돈장? 그렇다. 바로 그것이 핵폭탄의 뇌관이다. 그것이 없었기 때문에 일본삼서라는 핵폭탄이 터지지 않은 것이다. 그것이 박창화가 지어낸 것이라고? 웃기지 마라! 그것이 박창화가 지어냈다고 하는 소린 유아원 애들보고 우주생성의 원리라는 초끈이론을 이해한다고 하는 편과 같다. 무엇보다 박창화가 그것을 지어낼 이유가 없다. 지어낼 능력도 없다. 박창화의 다른 저작을 종이비행기로 본다면 돈장과 세기는 최첨단 우주왕복선이다. 그것이 위서라면 동양사서(삼국사기, 유사, 일본서기, 고사기, 성씨록, 사기, 한서, 삼국지, 진서, 후한서 등)는 모조리 위서가 된다. 왜? 진실을 담고 전하고 있으니까? 박창화는 그 진정한 가치를 절대 알지 못했다. 그것을 알았다면 그는 상장돈장을 더욱 정성들여 필사했을 것이다.

무엇이 진실이고 무엇을 담고 있는가? 고대의 사관은 정직했다. 한, 중, 일 어느 나라를 통틀어서 말이다. 비록 그들이 권력자의 억압으로 왜곡된 역사를 썼어도 반드시 그 증거를 남겨놓았다. 어느 시대 어느 사서건 마찬가지다. 그리고 반드시 허점이 있기 마련이다. 그것을 찾으면 된다. 일본서기는 어떻게 왜곡되었는가? 한마디로 기년조작이다. 물론 일부 계통조작이 가해지긴 했어도 근본적인 틀은 기년이다. 알아낼 수 있는가? 있다. 삼국사기가 있기 때문이다. 알아냈는가? 대충 그렇다. 가장 중요한 신무부터 웅략까지 일목요연하게 뽑아낼 수 있다. 여기서 공개할 수는 없다.

삼국사기는 정확한가? 아니다. 심하게 왜곡되었다. 다만 타당할 뿐이다. 그 실체를 벗겨낼 수 있는가? 있다. 일본삼서가 있기 때문이다. 그 조작의 틀은 한마디로 계통조작이다. 그 계통을 밝히는 것은 일본삼서가 없으면 안 된다. 무엇이 그런 것을 가능케 했는가? 바로 화랑세기와 상장돈장이다. 왜? 김씨들이 조작하고 날조한 역사가 낱낱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일본서기도 삼국사기도 다 김씨들이 썼기 때문이다. - 김씨들이 조작한 역사, 그 천인공노할 범죄를 캐내기 위해 여행을 떠나자.

3

언젠가 내가 고대사 최대 비밀은 부여씨와 김씨의 동시 등장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

그것은 타당한가? 타당하다.

바로 김씨와 부여씨의 계통과 연대기를 밝히면 신라와 백제 가야의 역사가 드러나고 왜, 부여, 마한의 역사가 캐내어지며 고리 역사의 실체가 밝혀지고 북부여, 고조선의 역사가 빛을 내게 된다.

이후의 후신라와 발해의 역사 전개를 비롯한 여러 이론에서 부족하고 비밀에 쌓인 수백 수천 가지의 의문이 한꺼번에 풀어진다.

그것이 바로 일본삼서의 위력이요 그 일본삼서를 깨우는 세기와 돈장의 위력인 것이다.

산책과 안사, 탐정 등이 일본서기를 비롯한 일본삼서에 대해 여러 의견을 내 놓고 있으나 한마디로 인식부족이다.

조작설과 분식론의 산책설, 비류백제론의 김성호, 삼한백제론의 안사, 칠지도에 근거한 왜국 건국론의 탐정, 무녕왕에서 시작된 홍원기와 홍원탁의 대화왜론 등은 허점투성이다.

왜? 그들은 일본서기 자체가 백제의 기록임을 깨닫지 못하기 때문이다.

특히 신무부터 응신에 이르는 일본서기 핵심의 기록을 잘못 알기 때문이다.

그것은 초기백제와 부활한 부여의 실상을 고스란히 전하고 있다.

특히, 신무에서 응신까지가 제일 중요하다.

- 그 실상은 누가 지웠는가? 바로 신라다.

신라김씨다. 왜? 백제의 부용국이었기 때문에.

지나사서에서 거짓말 하는 것 같은가?

아니다. 그들은 정확히 적고 있다.

그러면 신라는 언제부터 백제의 부용국이 되었을까?

그렇다가 어떻게 동등해졌을까?

그들은 또한 응신부터 계체에 이르는 백제와 왜의 헤게모니 장악투쟁을 모르고 있다. 왜?

신라김씨들이 조작한 역사를 모르기 때문에.

돈장에는 나와 있는가?

그렇다.

그 조작의 논리가 낱낱이 드러나 있다.

신무, 응신, 신공, 숭신이 누구인지 송두리째 드러난다.

고대사의 신대로 포장된 인물들이 누구인지 한꺼번에 드러나고 일본서기와 어떻게 연결되는지, 과연 어디까지가 중첩인지 무섭도록 밝혀진다.

각설하고 일본에선 어쩌면 화랑세기와 상장돈장을 분석하여 그 위력을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

이미 그 계통을 파악하여 두려워 발표하지 않고 있을지도 모른다.

아니라도 좋다.

일본이 백제의 주류로 밝혀지는 그 순간은 모든 게 허물어진다.

가히 혁명이 된다. 천하가 뒤집어진다.

그야말로 모든 역사를 새롭게 써야 하기 때문이다.

역사만 새로 써지는 게 아니다.

모든 인문학을 허물고 다시 세워야 하기 때문이다.

역사가 바뀌면 인식이 바뀌고, 인식이 바뀌면 가치관이 바뀐다.

가치관이 바뀌면 의지가 바뀌고, 의지가 바뀌면 다시 역사가 바뀐다.

이것이 바로 진정한 역사학의 가치인 것이다.

그 가치는 바로 박창화가 의도하지 않았지만 그의 붓끝에서 시작되었다.

박창화의 <우리나라 강역고>란 책이 전에 나온 적이 있다.

나도 소장하고 있지만 그것을 읽으면 실소를 금할 수 없다.

그 정도 역사인식과 지리 인식을 가진 분이 세기와 돈장을 지었다고?

차라리 유아원 애들보고 시뢰딩거의 파동방정식을 풀라고 하는 것이 낫다.

<강역고>가 움막이라면 돈장과 세기는 타지마할이다.

움막이나 지을 정도인 시골농부가 타지마할을 혼자 설계해서 지었다는 얘기나 마찬가지다.

다시 말하지만 세기와 돈장은 절대 위서가 아니다.

그것이 위서라면 고대 동양사서가 모두 위서가 된다.

광개토비와 문무왕비가 모조리 거짓이 된다.

진골정통과 대원신통이 색공을 바치는 집단이라고? 코미디 하는가?

겉으로만 보면 그렇다. 하지만 속내를 들여다보라 그게 무엇인지.

진골은 김씨고 대원은 박씨라고? 신라가 모계라고?

2부 체제의 대표로 왕과 갈문왕이 있었다고?

그런데 어째서 왕은 이사금 마립간 등으로 불리는가?

갈문왕도 갈문이사금 갈문마립간이 되어야 하지 않는가?

역사가 무슨 장난거리인가?

어째서 화랑세기에 대원신통 소개하면서 진골정통인 선혜가 대원신통을 잇나?

대원은 박씨라는 이론대로라면 선혜는 김씨이자 박씨겠네!!

그리고 남해왕이 왜 나오는가?

바로 대원의 시작이기 때문이다.

대원? 대원이 무엇이기에? 상장돈장을 보라! 대원신통의 계보가 일목요연하게 나온다. 그런데 어째서 선혜가 대원신통을 이었을까?

박씨의 시조가 누구인지도 모르면서.

혁거세라고? 웃기지 마시라. 혁거세는 김씨다.

김씨의 시조다.

신라김씨의 시조다. 알지가 아니었더냐?

알지는 신라김씨의 또 다른 시조일 가능성이 있을 뿐이다.

왜 문무왕비와 후대의 기록이 차이가 나는지 신라김씨들의 음모가 낱낱이 드러난다. 김씨들은 기분 나쁠 필요도 없다.

그대들 대부분이 진정 김씨인지도 의심스럽기 때문에...

4

‘삼국통일 이룩한 화랑의 옛 정신을....’

맞는가? 통일이란 무엇인가?

역사학적으로 통일이란 무엇인가?

갈라진 문화를 가진 민족이나 나라를 다시 합치는 것이 아닌가?

진시황의 지나 통일,

비스마르크의 독일 통일,

베트남의 통일 등이 다 그러하다.

그런데 우리나라 주류의 역사학자란 것들과 거기에 넘어간 국민들이 짖어대는 논리가 있다.

신라가 외족을 끌어들여 반역사적인 통일을 했다고 하면 고리와 백제는 외국이었을 뿐이라고 말한다.

웃긴다.

외국을 망하게 한 것이 통일인가?

침략이 아닌가? 점령이 아닌가?

지나에서 고리가 자기 역사라고 주장하고 그 선대인 부여와 고조선도 자연히 자기 것이니 내놓으라면 대응논리는 있는가?

스스로 외국이라 해놓고. 백제의 주류가 일본이라고 밝혀지고 일본이 백제를 다시 찾겠다고 하면 다 내주겠는가?

기가 막힐 뿐이다. 대한민국이 아닌 경상민국 또는 경북민국이 될 것인가?

삼국이 어떤 관계였는지,

부여의 역사가 어떻게 전개되었길래 고리와 백제로 갈라졌는지,

부여는 조선을 어떻게 대체하였는지,

부여씨와 김씨는 어떤 고리로 역사를 이어왔는지,

왜국은 어떻게 건국되었는지,

일본서기가 직시한 일본열도 왜국의 건국시조는 과연 누구인지,

과연 일본서기의 백제와 삼국사기의 백제가 동일한 지칭인지,

동명은 누구이고 주몽은 누구이며 어떤 관계였고,

온조는 누구인지 비류는 구대는 누구인지,

성한은 누구이고 혁거세는 누구인지,

그런 것들을 밝힐 생각은 않고 희한한 통일논리로 역사를 더럽히고 역사 앞에 죄를 짓고 있다.

주로 주장하는 자들이 대부분 신라주의자 영남패권주의자들이다.

수구반동집단이다.

그들은 역사를 분탕질해놓고도 다시 이 나라를 조각내고 있다.

바로 지역감정이란 논리로.

어찌 지역감정인가?

그야말로 특정지역의 지역패권주의를 교묘하게 얼버무리고 있다.

각설하고 신라는 결코 통일하지도 통일할 의지도 없었다.

그들 김씨들은 단지 자기들의 권력유지에만 급급했을 뿐이다.

역사의식 민본의식은 애초에 없었다.

우리는 단군조선이 갈라진 이래 한 번도 통일되지 못한 불행한 민족이다.

그것은 거의 김씨의 죄다.

이제 그 죄를 낱낱이 밝혀나갈 것이다.

왜? 제대로 된 역사, 올바른 역사를 쓰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것이 후대에 얼마나 악영향을 끼쳤는지 가슴을 치게 되리라.

5

고리가 산적집단인가?

- 산꼭대기에 나라를 세웠다고?

오녀산성이 고리의 졸본이라고?

지하의 주몽이 웃는다.

요즘 한창 고리 드라마 열풍이다. 주몽, 연개소문, 대조영

- 나는 하나도 보지 않는다.

그야말로 식민사학의 나팔수 동북공정의 앞잡이들이 자기들의 논리를 충실히 반영하는 것이다.

그들의 선전장이기 때문이다.

멋대로 놀아나는 지식인 방송인 국민들이 안타까울 뿐이다.

관구검기공비는 그것을 증명한다.

삼국지는 분명히 기록했다.

그것은 환도를 쳐부수고 고구려왕을 몇 차례 추격하여 옥저의 끝자락에 암석을 새겨 공을 기록했다고

- 그곳은 고리의 중심이 아니었으며 변경이었을 뿐이다.

삼국지 오서 오주전(손권전)을 보라!

고구려에 대해 뭐라고 써 놨는지?

통설대로라면 바다도 없던 고리가 오나라와 배로 통교하는가?

고리는 어디에서 세워졌는가? 바로 요서다.

졸본은 서요하와 노합하가 만나는 일대이고 국내성은 그 약간 남쪽에,

다시 남쪽에 평양성(안시성)이다.

이것은 6편에서 논한다.

그러기에 모본왕 때 지나의 북부인 태원 등을 공격했던 것이 가능한 것이다.

저 멀리 압록강 중류에 쳐박혀 있던 고리라면 가능하겠는가?

고리는 새로 건국되었는가?

아니다. 해모수의 부여를 동명의 부여가 이어받고 다시 주몽이 이어받은 것뿐이다.

정확히 말하면 부여의 계승일 뿐이다.

언제 고씨라 칭하였는가? 바로 6대 태조대왕 때부터다.

그러기에 태조란 칭호를 얻은 것이다.

왜 고씨라 성을 바꾸었는가?

바로 부여가 부활했기 때문이다.

부여를 버리고 새로운 역사를 세우기 위해서다.

부여가 부활했다고? 그렇다. 부여는 분명히 대무신왕 때 멸망당했다.

그런 부여가 부활한 것이다.

어디서 어떻게 누구에 의해서 어떤 계기로?

각설하고 부여의 부활은 역사를 바꾸었다.

그것은 어떤 의미로 한민족의 불행의 서막이었다.

아니 행운이 될 수도 있었다.

김씨만 아니었다면 광개토대왕만 아니었다면(?) 이것은 9편에서 논한다.

첨언하자면 태조란 호칭은 동양사에서 바로 고리의 태조대왕이 처음이다. 이래도 시호법이 오직 지나에서 시작되었는가? 우리가 바로 황제의 나라 천자의 나라가 아니던가? 어찌 지나사에 태조대왕보다 앞선 태조란 칭호가 있었던가?

6

옥저는 어디에 있었는가? 요서에 있었다.

요동만 바다를 끼고 있었다.

그래서 북옥저 정벌기사가 주몽왕 때 나오고 남옥저의 구파해 망명기사가 온조왕 때 나온 것이다.

북옥저가 어디고 남옥저가 어디인가? 그리고 동옥저는 무엇인가?

삼국지는 거기에 대해 답을 주고 있다.

후대인들이 삼국지를 잘못 이해하고 있을 뿐이다.

정확히 말하면 낙랑을 대동강에 비정하느라 온갖 억측과 곡해를 하고 있을 뿐이다.

허접들! 바로 (본)옥저와 동옥저를 착각하고 있는 것이다.

본옥저는 어떻게 되었는가?

바로 고리의 소유가 된 것이다.

그것이 잠깐 위나라의 세력권이 되기도 했다.

그러다가 진나라로 이어졌다.

그 잠깐이 역사를 갈랐다.

바로 새로운 백제를 탄생시킨 것이다.

그만큼 관구검의 고리 침공은 커다란 역사의 회오리를 몰고 왔다.

애초에 그곳은 한나라 현도군과 임둔, 진번군이 설치되었다.

곧바로 임둔 진번이 폐지되고 현도군은 쫓겨 갔다.

쫓겨 간 곳은 난하와 대릉하 노합하가 삼각으로 만나는 지점이었다.

군이라기보다는 명목상의 군에 불과했다.

바로 그 위에 부여가 있었다.

그러기에 부여의 낙랑침공이 가능했던 것이다.

바로 후한서의 기록이 정확하다는 것이다.

낙랑군을 대동강에 비정해 놓고 후한서기록이 잘못되었다고?

주류라고 뻐기는 자들이 과연 역사학자냐?

<후한서지리지>에 있다.

낙양에서 동북쪽 한단까지 1100리라고.

지도 놓고 비율로 따져봐라! 죽었다 깨어나도 같은 동북방향 5000리인 낙랑군은 오늘날 요하를 넘어오지 못한다.

공손씨가 요동에서 황해도까지 다스렸다고?

무슨 오지랖 떠시나!!

그런 공손씨가 아무리 사마의가 뛰어나다지만 일거에 요동 양평성 무너졌다고 황해도까지 한꺼번에 무너지나?

그대들 주류 이론대로라면 핵심지역이 그 정도 밖에 안 되었던 고리도 수나라 대군과 당나라대군을 수없이 물리쳤다.

그 정도 세력이라면 촉나라와 버금가는 세력이다.

공손씨는 겨우 천진일대에서 대릉하에 이르는 정도였다.

공손씨가 동이를 통제했다고? 맞는 말이다.

통제의 의미를 모르는 식민사관의 나팔수들이 있을 뿐이다.

연안항로를 이용하던 그 시절에 만주와 한반도, 일본열도의 모든 세력은 반드시 그 지역을 거쳐야 중원으로 갈 수 있었다.

그래서 훗날 대방군이 중요해진 것이다.

그러기에 통제한다는 표현을 쓴 것이다.

그것을 공손씨가 마치 동이를 지배한 것처럼 오도하고 있는 것이다.

부여가 현도군 또는 요동군에 속한다는 말도 마찬가지다.

바로 현도나 요동군을 통해 지나 조정과 접촉하는 것을 표현한 것이다.

그것을 속국이라고 하는 사람들이 많다.

역사는커녕 책도 읽을 줄 모른다.

다시 평양성이 고리의 수도가 되었다.

바로 한나라의 안평현이다.

그래서 옮겨간 현도군에 서안평현이 생긴 것이다.

안평은 바로 <괄지지>에 말한 왕검성이다.

원래 예맥의 땅이다. - 역사에는 한결같이 말갈로 나온다. -

그것은 훗날 안시성이 된다.

바로 고리가 수도를 요동 장안성으로 옮기고 난 다음부터다

장안성이 평양성으로 불리자 기존 평양이 안시성이 된 것이다.

그 남쪽의 옥저 치소 동이현은 비사성이 된다.

바로 요나라의 해주다.

발해의 남경남해부다.

남해부가 북청이라고? 요사가 엉터리라고? 착각하지 마라.

요사는 약간의 착오가 있을 뿐이다.

왜 착오가 생겼을까? 바로 김씨 때문이다.

그래서 안시성을 치던 당나라 병사들이 비사성의 군대를 부른다고 표현한 것이다.

비사성이 요동반도 끝이라고?

<삼국지>와 <삼국사기>가 다르다고? 그렇지 않다.

삼국지와 삼국사기는 똑같다. 똑같은 말을 다르게 썼을 뿐이다.

삼국지가 부분적으로 자세하고 삼국사기가 체계가 있을 뿐이다.

주류학계가 그것을 알 리가 없다.

머리를 열지 않고 가슴을 묶어두기 때문이다

7

언젠가 무명의 왜=일본열도를 한참 나무란 적이 있다.

그가 늘 하는 말로 왜는 해상능력이 있었고 군사력이 뛰어났단다.

무슨 근거로? 삼국지를 보라!

큐슈만 해도 수많은 소국들로 갈라진 섬나라가 무슨 수로 숭신천황대에 가야와 신라의 싸움에 간섭하고(성씨록 참조) 신라왕을 두 번씩이나 죽이고 바꾸며 한결같이 삼국사기에 왜로 쓰여졌는가?(왜 여왕 비미호만 예외다.)

- 어째서 예외였는지 이 글에서 밝히지는 않겠다. -

현대의 고고학을 비롯한 여러 연구도 결코 야마대 정권이 6~7c 전에는 열도를 통일하지 못했음을 밝히고 있다.

무명이나 일부의 말마따나 천 번을 양보해서 삼국지의 비미호의 왜가 혼슈섬 야마대 왜라고 쳐도 저희들 열도도 제대로 통일 못한 자들이 무슨 수로 몇 천리 바다 건너 신라를 대규모로 친단 말인가? 웃기지 마라.

일에는 순서가 있는 법이다.

지나사도 세계사 어디를 봐도 내부통일이 먼저고 밖으로 뻗어가는 것이다.

한나라 수나라 당나라, 비스마르크의 독일, 징기스칸의 몽골, 알렉산더의 그리스 등 모두 마찬가지다.

더구나 섬에서 자기 주변도 통일도 못한 주제에 무슨 힘이 남아돌고 무슨 이득이 얼마나 있었기에 밖으로 싸돈단 말인가?

결코 왜는 열도가 아니다.

일본서기를 쓴 세력은 바로 부여요 백제인 것이다.

속시원히 밝힐 수 있는가? 있다.

삼국사기가 있고 삼국지가 있고 돈장과 세기가 있다.

거리낄 것이 없다. 아니 일본서기 스스로 백제요 부여임을 말하고 있다.

- 나는 부여요, 백제이니라! 후대의 인간들아, 들어라! -

눈을 부릅뜨고 찾아보라. 내가 거짓말하고 있는지.

<문제에 답이 있다.>는 격언이 있다. 마찬가지다.

삼국사기의 비밀은 바로 삼국사기안에 답이 있고 일본서기의 비밀은 바로 일본서기 안에 답이 있다.

고대의 사관은 문제를 내고 답을 모조리 제시해 놓았다.

그것을 알아차리지 못한 후인들이 바보일 뿐이다.

마찬가지다.

한강 유역에 있던(주류학설대로라면) 별로 크지도 않던 백제가 무슨 주변도 통일하지 못하고 산동으로 진출하고 중국 동해안으로 북경지방으로 진출한다는 이론을 펼치는가?

그것은 적어도 백제가 한반도 전체와 남만주 일대를 영유하고 있어야 가능한 얘기다. 열본열도 경영도 마찬가지다.

지금의 이론은 허점투성이다.

고고학으로 이미 호남지방 정도는 6c까지도 백제의 영역이 아닌 것으로 밝혀지고 있다.

기껏 한강유역 뿐이 백제가 무슨 역량이 있어서 백제가 고리와 맞짱을 뜨고(주류이론) 열도를 경영하고 해외로 나간단 말인가?(재야 및 비주류 이론대로라면)

- 그러기에 주류는 일본서기에 나오는 백제의 실체를 끝없이 부정하고 진보역사이론은 백제를 치켜세우면서도 주류학설 따라 백제가 한강유역이라고 한다. - 바보들!

역으로 요동과 한반도를 전부 백제의 영향권이라고 한다면 위 얘기는 가능한 것이 된다.

즉 백제는 열도를 경영하고 해상능력을 바탕으로 뻗어나갈 수 있게 된다.

충남과 호남으로 갇힌 백제가 고리와 계속 충돌하고 신라를 그토록 밀어붙일 수 있는가?

더구나 한강유역은 신라가 차지하여 고리와는 국경이 단절되었는데도 여전히 충돌하고 있다.

주류의 이론대로 하면 그야말로 모순이 아닌가? 이 무슨 도깨비장난인가?

그 작은 땅에 76만호 5도독부가 들어갈 땅이 어디 있단 말인가?

- 마한과 백제의 수도는 평양이다. 100% 확신해도 좋다. -

빼도 박도 못할 증거는 수없이 널려있다. 여기서 일일이 밝히지는 않겠다.

8

초고왕, 귀수왕, 진사왕, 아화왕, 직지왕, 곤지, 무녕왕, 동성왕, 성명왕, 의자왕 모든 백제 왕들의 시호를 정확히 적었다.

그런데, 도모왕=동명왕? 도모가 동명이라고? 웃긴다.

일본서기를 쓴 세력이 도모가 동명임을 몰라서 도모라고 적었는가? 아니다.

그들은 알고 있었다. 정확히 도모가 맞는 것이다.

도모는 누군가? 바로 부여왕이다.

어떤 부여왕인가? 바로 대무신왕에게 망하고 연나부에 안치되었다가 독립한 새로운 부여의 창시자다.

그가 바로 천조대신의 칭호를 얻은 것이다. 동명은 절대로 100% 도모가 아니다.

<속일본기>에 도모왕은 백제의 시조이자 원조로 나온다.

그럼 천조대신은 백제의 시조이자 일본서기 세력의 시조와 원조가 된다.

즉 백제=일본서기의 세력이다.

이것으로 고대사는 한마디로 게임 끝이다.

부여 도모왕이 천조대신인데 무슨 얘기가 필요한가?

그야말로 고대사는 게임 끝인 것이다.

도모의 계열을 밝힐 수 있는가? 있다.

해부루-금와-대소로 이어지는 후예다.

갈사왕 도두와도 관련이 된다.

어제 즉위해서 언제 돌아갔는가? 알 수 있는가? 알 수 있다.

과연 지상에 강림한 천조대신의 손자는 누구인가? 알 수 있다.

그럼 고사기의 신들은 누구인가? 간단하다. 모두 한국 고대사의 제왕들이다.

지나사서에 부여시조는 동명으로 되어있다.

어찌된 것인가? 맞다. 바로 북부여의 시조일 뿐이다.

그러나 틀리기도 하다.

해부루의 동부여를 그들이 알 리 없었다.

그들이 접한 것은 원래 북부여와 새로 부활한 동부여이기 때문이다.

원부여는 고리가 되었고 새로 부활한 동부여가 고리의 서북쪽에서 이어지다가 일파가 몰려가 백제를 이룬 것이다.

그들이 그 과정을 기록하지 못한 것은 외국의 일이기도 하거니와 하필 그 때가 중원이 대혼란기였기 때문이다.

나중에 때로 부여는 백제로 불리기도 한다. 언제?

신찬성씨록에 도모의 10대손으로 귀수왕이 나온다.

물론 이는 백제 귀수왕이 아닌 근귀수왕이다.

왜 그런지는 여기서 설명하지 않겠다.

바로 신찬성씨록이 거의 정확한 기록이다.

내가 하필 일본삼서중에서도 성씨록을 제일로 치는 이유다.

<삼국지 부여전>

<삼국지 관구검전>

<후한서 부여전>

<진서 부여전>

<성씨록>

<삼국사기> <일본서기> 다 동원하여 근귀수왕이 10대손임을 증명해보라!

여러분이 그것을 찾아내야지만 정말로 역사를 할 자격이 있는 것이다.

천조대신이 근초고왕이라고? 아서라! 지하에 계신 도모왕이 놀라신다.

9

그러다가 부여는 모용씨의 침입을 받는다.

때마침 관구검 전쟁으로 위나라 영향권에 들어있던(당시는 위를 대체하여 사마씨의 진이 들어섰다.) 옥저로 대대적으로 피난 간다.

그것이 역사를 갈랐다.

그 세력의 일부는 다시 부여로 돌아왔지만 대부분은 백제를 접수하고 왜를 점령하고 변진한을 점령하며 신라를 먹어치우고 최종적으로는 마한을 점령한다.

그리고 마침내는 열도(규슈와 혼슈 서부)마저 정복해 버린다.

그것은 순식간에 이루어졌다.

마치 근세사에서 일본이 대동아공영권을 부르짖고 순식간에 아시아태평양일대를 먹어치운 것과 비슷하다.

한반도와 열도 남만주가 백제의 영향력 아래에 놓인 것이다.

그것은 불완전한 통일이기도 했다.

그런 백제는 요서의 부여와 합작으로 원수지간인 고리와 숙명의 한 판 대결을 펼친다. 바야흐로 동족상잔의 비극이 시작된 것이다.

이것이 바로 고리와 백제가 충돌한 근본적인 원인이다.

어째서 백제가 북중국을 제치고 남중국의 동진과 먼저 교류했는지 그 이유가 드러난다.

bc 18년에 건국된 백제가 아무런 충돌 없이 고리와 잘 지내다가 근초고왕 때 마한을 정벌하고 북진하다가 고리와 충돌했다고? 무슨 블랙코미디인가?

350여년을 평화롭게 지내던 사이가 어느 날 갑자기 철천지원수가 되나?

주류 이론대로라면 남쪽도 제대로 간수하지 못한 백제가 무슨 수로 고리와 충돌하나?

현대 고고학으로 호남지방은 백제의 영향권도 아니었는데 겨우 한강유역만한 조그만 땅덩이를 가지고 고리와 맞짱 뜨나?

고리와 싸우면서 한편으로 남쪽에서 마한을 정벌하나?(고리 고국원왕과 최초로 충돌한 것은 369년, 그런데 주류들이 일본서기에서 따온 마한 정벌론은 369년이다.)

무슨 백제의 힘이 그리 남아도나?

근초고왕이 친 평양은 바로 요서의 평양이었다. - 100% 확신해도 좋다. -

바로 훗날의 안시성이요 조선의 원래 왕검성이다.

백제는 언제나 부여의 후신임을 자처했다.

삼국사기의 기록대로 고리에서 갈라져 나왔다면 고리와 철천지원수가 되어 싸웠을 것 같은가?

바로 온조왕으로 포장된(?) 세력은 마한이었다.

그대로 한씨 마한만 해씨 마한으로 대체했지 마한이란 이름을 바꾼 것은 아니었다.

백제라고 한 것은 신라김씨다.

왜? 훗날 그것이 백제가 되었기 때문이다.

이는 신라본기에도 그대로 통용된다. 왜에도 그대로 통용된다.

그러기에 고리 태조왕기에 마한이 등장한 것이다.

바로 해씨의 마한인 것이다.

김부식이 눈이 둥그레졌다.

마한이 망했는데 나왔다고.

하지만 <삼국지>를 보라.

한씨를 대체한 그들도 계속 마한이었다.

바로 신라김씨의 농간을 김부식 그가 알 리 없었다.

그러기에 마한과 고구려는 몇 백 년을 사이좋게 지냈던 것이다.

각설하고 해씨는 훗날 백제의 8대성이 된다.

어느 날 갑자기 부여씨에게 정복당했지만 그들도 역시 부여의 핏줄이었다.

그리고 한동안 동명의 제사도 계속된다.

바로 부여씨의 포용정책이다.

마한이 소국으로 이루어진 부족국가였다고?

<삼국지>를 봐라! 분명히 진왕이 다 통제한다고 되어있지 않은가?

주나라가 분봉한 제, 진, 노, 허, 정 등의 나라가 다 독립국이었나?

간단히 말하면 행정구역 아닌가?

일본서기에 나오는 출운국, 축자국, 근강국, 대화국 등이 다 독립국이었나?

바로 마한의 행정구역이 국인 것이다.

오늘날, 도, 군 등과 같은 것이다.

왜 문헌을 저희들 편의대로 해석하는가?

어떻게든 한국고대사를 우매하게 만들기 위한 작태다.

상식적으로 따져봐라. 바로 옆에 중원은 그리 강대한데 바로 옆의 모든 기후조건이나 문화조건도 비슷한 동이국가들은 언제나 비실비실한가?

하지만 백제는 겉으론 강했지만 안으론 허약했다.

급작스럽게 정복된 지역들은 아직 절대적 통합이 이루어지지 않았고 많은 국력이 열도를 비롯한 점령지역을 정비하느라 소비되고 있었다.

결정적으로 근귀수왕의 급서와 진사왕의 쿠데타가 일어난다.

그리고 백제가 둘로 찢어진다.

진사왕은 누구인가? 바로 김씨다.

이 틈을 타고 고리는 극적으로 한숨을 돌리고 위대한 대왕 광개토의 등장을 맞는다.

순식간에 힘은 역전된다. 백제는 엄청난 영토를 잃는다.

이 모든 것을 순식간에 이룬 자가 누구인가? 바로 비류왕이다.

정확히는 비류왕의 어머니와 함께 하였다.

바로 일본서기에서 신공으로 등재된 여인이다.

즉 신공은 이중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하나는 비류왕의 어미요, 하나는 응신천황의 어미다.

그녀와 비류왕은 한국사에 있어서 가장 위대한 정복자였다.

광개토왕은 거기에 비하면 한참 떨어진다.

그녀가 정말로 백제본기에 나오는 소서노일 가망성이 많다.

- 아직 거기까지에는 단언하지 못한다. -

비류왕은 누구인가? 바로 일본무존=야마토다케루다.

그러기에 천황으로 등재되지 못한 것이다. 왜? 왜왕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당시 왜왕은 누구였는가? 계왕 즉 경행천황이다.

훗날 잠깐 백제왕이 된다. 계왕이다.

어째서 경행기가 일본무존으로 가득한지 아시는가?

바로 백제왕이기 때문이다.

아무렇게나 무존이란 칭호를 올리는가?

바로 정복왕이기 때문이다. 계왕은 왜왕에 불과했다.

그런데 어째서 백제왕이 되었는가?

거기에 바로 근초고왕과 근귀수왕의 시호에 대한 비밀이 있다.

일본서기 신공기에 그 답이 나온다.

삼국사기에 그 답이 나온다.

다음 왜왕은 누구인가 성무다. 성무는 누구인가? 바로 무내숙녜다.

그럼 응신은? 바로 침류왕이다.

그가 침류왕이란 것은 일본서기에 자세하게 나와 있다.

바로 기년조작의 위력이다.

기년조작의 방법론만 밝히면 침류임을 감춘 것이 침류라는 위력으로 다시 태어난다. 진사왕의 쿠데타로 밀려난 그가 한반도 남부에서 세력을 키우고 열도 서부에서 힘을 키워 동부 근기일대 지역을 점령한다.

그리고 백제로 건너가 진사를 죽이고 아화를 세운다.

이제 대륙과 열도의 세력이 역전된 것이다.

전지의 인질기사는 바로 여기에서 나온 것이다.

마치 백제가 왜의 속국처럼 보인다.

이것을 무명은 마치 백제가 왜의 속국이라고 단정한다.

일면식 접촉도 없던 백제와 왜가 어느 날 갑자기 주종관계가 되나? 왜?

바로 신라의 농간과 조작을 모르기 때문이다.

백제를 버린 왜의 김씨세력을 모르기 때문이다. 바로 신라김씨의 죄악 때문이다.

10

위에서 얘기한 신공 49년 - 주류들이 369년이라고 엉뚱하게 둘러대는 - 에 대해 살펴보자.

그것은 결코 369년이 아니다.

북쪽에서 고리와 싸우면서 한편으로 남쪽에서 친히 마한정벌(주류들의 코미디 이론이다. 본문엔 분명히 신라정벌이다.)을 하는가? 정답만 제시한다. 347년이다.

눈을 크게 뜨고 백제본기를 보라 그 해가 언제인지? 근초고왕 2년이다.

바로 일본서기식으로 따지면 근초고왕 원년이다.

어째서 근초고왕기의 초반부가 공백인지 짐작 가는가?

바로 신라의 의도적인 삭제다.

거꾸로 신공원년을 계산해보라. 299년이다. 그 전해는 298년이다.

신라본기를 눈을 크게 뜨고 보라! 과연 무슨 일이 있었는지.

여담이지만 신라본기는 지금까지 내 연구로는 백제본기나 일본서기와 정확히 1년 차이가 난다.

어디서부터 어떻게 차이 나는지 모르지만 각종 자료를 대비하면 신라본기가 잘못되었음을 알 수 있다.

297년 유례이사금조에 이서고국이 신라를 침범한다.

그리고 무슨 이상한 미추왕의 댓잎군사 등이 나타난다. 과연 그 의미가 무엇인가?

물론 위에서 말했듯이 신공기는 중첩이다.

바로 백제를 세운 비류왕의 어머니(소서노?)와 일본의 전신인 야마대왕조를 세운 침류왕 응신의 어머니(아이부인)를 기리는 이야기다.

그러기에 신공이란 칭호를 올린 것이다. 결코 아무렇게나 올린 칭호가 아니다.

기년에서 주(主)가 비류왕모이고 부(副)가 아이부인이다.

기사에선 반대다. 따라서 이 부분은 기년과 기사가 중첩되어 있다.

어째서? 일본서기 기년의 기준이 바로 응신천황이기 때문이다.

바로 일본의 실질적인 건국자임이 드러나는 대목이다.

이렇게 물을 수도 있을 것 같아서 미리 해둔다.

신공 49년 전에도 근초고왕이 나오는데요?

신공 55년에 근초고왕이 붕어했으니 기년이 맞지 않는데요?

내가 그것도 모르고 이렇게 단언하는 줄 아시는가?

그렇게 간단하다면 일본서기의 체면이 깎이지요!!

신공기와 응신기는 바로 일본서기의 핵심중의 핵심이다.

그 비밀의 답만 공개하겠다. 그가 침류왕임을 보여주는 하나의 증거다.

41-19=22, 1+19+2=22, 390-(69+22)=298, 298+69+41-5=403, 298+69+22=389이다.

389가 무엇인가? 바로 왜국 건국 전년이다.

백제에서 물러나 일본으로 건너간 응신이 정식으로 왜 건국을 선포한 것은 390년이다.

말했듯이 응신이 침류왕임은 이외에도 많은 증거가 수두룩하다.

바로 일본서기의 기년의 중심은 응신이기 때문이다.

바로 일본서기의 작자들은 응신(침류)을 일본 왜국의 건국시조로 여겼기 때문이다.

과연 403은 무엇인가? 22는 무엇이며 19는 무엇이고 또 5는 무엇이란 말인가?

무엇을 뜻하는지는 스스로 머리를 비우고 가슴을 열고 생각하고 찾아보시라!

바로 고대의 사관은 정직하게 역사를 쓴 것이다.

비록 권력에 눌려 감추었지만 그들은 후세에 분명히 진실을 알리려 애를 썼다.

억지 논리로 가득 찬 주류학계,

부체제나 들먹거리며 역사의 발전단계를 거꾸로 돌리는 한심한 이들,

삼국초기 기년조정이나 한다고 하는 작자들,

임나일본부는 두둔하면서 백제는 똥으로 보는 비아냥꾼들,

- 이 모든 식민사학의 나팔수 동북공정의 앞잡이 - 들에게는 결코 보이지도 않고 생각해도 모를 것이다.

왜? 가슴을 열지 않고 머리를 비우지 않기 때문이다.

바로 신공황후의 신라정벌은 사실을 얘기하고 있다.

엄청난 고대사의 비밀을 여러분은 지금 접하고 있다.

그러기에 신라가 백제의 부용국이 된 것이다.

지나사에 잠깐 스치는 그 기사가 왜 진실인지 낱낱이 드러난다.

왜 신라김씨가 철저히 백제를 말살하려 했는지 그 비밀이 송두리째 드러난다.

응신원년이 백제본기와 2갑자 차이나기 때문에 2갑자 인상한다고?

그러면서 하는 말이 일본서기를 쓰는 저자들이 착오해서 그랬다고? 아주 웃기는 말이다.

그들이 몰라서 인덕 87년 등의 황당한 일을 했겠나? 바로 120년의 수치는 다음과 같다. 27+57+5+28+2+1=120이다. 무엇을 뜻하는지는 일본서기를 보시라!

각설하고 대륙의 군사력을 가지고 열도로 밀려간 응신에게 무내는 당해낼 수가 없었다. 그래서 왜왕을 양보한다.

그러다가 응신 사후에 무내의 아들과 응신의 후계자 사이에 권력투쟁이 벌어진다.

그 결과 무내의 아들인 인덕이 즉위한다.

무내가 누구기에? 바로 목(木)씨다.

백제 8대성의 하나인 것이다.

바로 백제의 원래 왕성이었던 것이다.

그 인덕의 후손이 바로 목만치다.

그가 소아씨로 바꾼다.

또 이렇게 물을지도 모른다.

목라근자의 아들이 목만치라면 여러모로 맞지 않는데요?

대답해 준다. 성씨록을 보시오!

목씨는 원래 왜의 왕족이었다.

신라본기의 호공은 바로 목씨다.

그가 목씨이기 때문에 신라 박(朴)씨가 된 것이다.

- 이제 박씨의 뿌리도 그 실체가 밝혀진다. -

성씨록에서 신무천황의 혈연이 신라의 시조가 되었다고 한 것이 정확한 것이다.

즉 신라의 시조는 혁거세가 아닌 호공인 것이다.

그가 바로 박씨의 시조인 것이다.

박혁거세가 박씨의 시조라는 박씨들의 족보는 최상급 코미디다.

신라 김씨가 쓴 각본에 놀아난 것이다.

오늘날 박씨의 많은 부분은 바로 왜 목씨의 후손이다.

그런데도 왜놈이라고 경멸할 것인가?

여러분 조상에게 침 뱉고 형제에게 욕하는 꼴이다.

11

실성왕기에 왕은 알지의 후예라고 한다.

아니, 현재 이론대로라면 김씨치고 알지의 후예가 아닌 사람이 누가 있던가?

왜 굳이 알지의 후예라고 했는가?

바로 실성은 성한왕 계열이 아니기 때문이다.

누구기에? 바로 알지의 계열로 가야김씨이거나 혹은 박씨다.

가야김씨는 수로가 아니던가?

시조가 수로라고? 웃긴다.

이것은 18편에서 논한다.

알지가 박씨라고? 그렇다. 현재로는 그럴 확률이 많다.

성한왕이 알지라고? 세한이라고? 웃기지 마라! 성한은 성한일 뿐이다.

이것은 16편에서 논한다.

바로 역사를 개작한 주역이 누구인지 드러나는 대목이다.

바로 김씨 중에서도 가야김씨다.

가야김씨가 주역이고(김유신 일당) 신라김씨가 조연이다.(김춘추 일당)

탈해는 누구인가? 왕이던가? 아니다. 쫓겨났을 뿐이다.

그러기에 후세에 왕으로 등재된 것이다.

왜? 가야의 출자를 속이기 위하여(?) 신라를 감추기 위해, 말 그 대로 탈(脫) 해(解) 즉 해씨에게서 벗어난 것이다.

해씨가 누구였던가?

부여의 왕족이 아니었던가?

각설하고 탈해는 <왜국 동북천리> 용성국에서 왔다고 했다.

동북 천리라고? 그렇다. 그것이 탈해설화의 핵심이다.

그것 하나로도 고대사는 끝장이 난다.

왜 문무왕 때 꿈에 나타났는가? 바로 역사 개작의 시기를 알려준다.

12

거칠부는 대승하여 10개 군을 공취하였다.’

그런데 조령에서부터 강원도 한강유역 임진강에서 멀리 개마고원 일대까지 점령했다. 어느 날 갑자기 신라가 커진 것이다.

그런데 고리와의 충돌은 별로 없다. 몇 번 툭탁거릴 뿐이다.

더구나 전략상으로 고리 수도인 평양을 훨씬 뛰어넘어 북쪽으로 100km 이상 전진한 신라는 언제든지 배후에서 고리 수도를 위협할 수 있는 것이다.

이는 그야말로 고리와 신라의 대전쟁을 의미한다.

그런데도 그런 기미가 전혀 없다.

오히려 한강유역을 뺏겼다지만 왕이 죽은 백제와는 죽어라 싸운다.

이 무슨 코미디 같은 얘긴가?

한마디로 고리 수도가 평양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는 상식이다.

역사는 결코 상식을 뛰어넘지 않는다.

그런데도 고리 수도가 대동강 평양이라고 버젓이 거짓을 가르친다.

고고학을 전혀 엉뚱하게 해석하고 있는 것이다.

황초령비와 마운령비는 평양이 고리의 수도가 아니라는 명백한 고고학적 증거다.

지나는 길에 한마디 한다면 위덕왕 원년에 고리가 대병을 동원하여 웅천을 친 기록이 있다.

이를 두고 이도학은 중부권에 고구려의 유적을 들먹이면서 그의 저서인 <한국고대사, 그 의문과 진실>에서 고구려의 병력이 백제 수도(웅천성)를 공격했다고 논한 적이 있다.

코미디가 아닐 수 없다.

당시 주류 이론대로라면 신라가 이미 한강유역을 차지하고 멀리 개마고원까지 진격했던 때다.

그래서 내세운 이론이 고구려군이 춘천- 음성의 루트를 따라 백제를 공격했다고 한다. 이 무슨 블랙코미디인가?

군사전문가에게 물어보기 전에 상식을 가진 사람에게 물어보라.

그것이 가능한 얘긴가.

그러면 먼저 신라를 돌파해야하는데 고구려가 무슨 대단한 이익이 있다고, 혹은 백제와 무슨 철천지원수라고 그리하나?

그리고 북쪽 국경 놔두고 신라와 고리가 청주일대(낭비성)에서 싸우는가? 절대 아니다.

바로 주류들의 생각에 대고구려의 환상이 늘 어른거린다는 것이다.

이도학은 내가 존경하는 몇 안 되는 주류학자다.

바로 이도학의 잘못이 아니라 한국 주류사학계의 잘못된 현실이다.

그럼 웅천이 어디냐? 바로 또 다른 백제다.

즉 당시 충청 호남 외에 또 다른 백제다.

그러기에 수나라 당나라의 고리 침공 때 백제와 고리가 대립한 기록이 존재하는 것이다. 그러기에 백제 5도독부가 나온 것이다.

광개토왕의 58성은 어디로 사라졌는가?

전에 논했지만 식민사학은 이 58성을 몽땅 임진강에서 한강 사이에 몰아넣었다.

거기에 무슨 58성이 들어갈 자리가 있던가?

아니, 한강유역을 잃은 상태에서 백제의 수도 한성은 풍납토성에서 잘만 버티는구나! 그걸 역사라고 가르치고 있다. 쯧쯧!

신라의 10군은 조령에서 개마고원까지 뻗어가면서 광개토의 58성은 코딱지만한 땅이라고 한다.

그때는 삼국이 본격적으로 전쟁하던 시기도 아니어서 성도 별로 없었다.

통상적으로 성은 군이나 현을 지칭한다.

그런데도 58성(58군현)은 그리 작고 10성은 그리 크더냐?

그 정도 차지했다고 광개토의 칭호를 얻나? 광개토란 호칭이 부끄럽다!

주류학계와 식민사학의 주장으론 광개토는커녕 코딱지토도 못된다.

그러면서 위대한 광개토왕이라고 입이 마르게 칭찬한다.

저희들 이론으로 깔아뭉개고도.

그럼 58성은 얼마인가?

백제가 망할 때 200성이라고 했다.

무려 1/3이다.

더구나 백제는 5도독부다.

고리가 안동도호부 하나 신라가 계림도독부 하나다.

왜 그런지는 이미 설명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오늘날 남한 땅 만큼의 넓이다.

백제는 그 많은 땅을 잃은 것이다. 어디서? 어떻게?

그런 신라가 대동강~원산만의 땅으로 통일했다고?

웃겨도 아주 웃긴다.

자기 영역보다 작은 구역으로 통일하는 것도 있나?

도대체 패강이 어딘지도 모르는 작자들이다.

역사상 최고의 쪼다는 누구인가?

고리 장수왕이다.

살기만 오래 살았지 뭐 하나 제대로 해 놓은 게 없다.

그는 당연히 신라를 없애버리고 백제를 삼켜야 했다.

당시 고리의 능력은 충분히 그럴 수 있었다.

그러나 내부 정비와 권력강화에만 몰두했다.

바로 고리 멸망의 단초를 제공한 것은 장수왕이었다.

통일의 초석을 닦은 비류왕과 근초고왕의 백제가 스러지고 다시 주도권이 고리로 왔을 때 일거에 밀어붙여야 했다.

그랬으면 훗날의 역사는 바뀌었을 것이다. 비록 일부는 열도에서 독립했을망정 ...

13

언젠가 어떤 자가 무예도보통지 들먹이면서 잘못에 한마디 사과도 없이 무슨 실존인물에 관한 각종설화 들먹이면서 위 얘기를 설화라 우긴 적이 있다.

설화인가? 아니다.

이첨이 자기가 본 것을 적고 그것이 관창일 것이라고 논한 것이다.

실존인물이 본 사실이 설화인가?

하지만 이첨도 몰랐다. 아니 알 리가 없었다.

김씨들의 농간을.

죽은 백제왕은 바로 분서왕이다. 백제의 분서왕이 아니다. 마한의 분서왕이다.

어째서 백제왕이라고 했는가?

바로 마한을 백제로 둔갑시켰기 때문이다.

마한이 훗날 백제의 주류가 되었기 때문이다.

백제는 어디로 갔는가? 바로 열도로 갔다. 왜왕이 되어서.

그렇다면 백제본기는? 그렇다 마한본기+백제본기다.

분서왕은 낙랑태수에게 죽은 것으로 되어 있는데?

정확한 표현이다.(마한의 입장에서) 그러나 감춘 표현이다.(신라의 입장에서)

왜 근초고왕이 남조의 정권으로부터 영낙랑태수를 제수 받고 후대의 신라왕들이 낙랑공 혹은 낙랑왕을 제수 받았는지 식민사학의 나팔수와 동북공정의 앞잡이들은 죽었다 깨어나도 모를 것이다.

대동강유역에서 낙랑의 유물이 왜 많이 나오는지 죽어도 모를 것이다.

백제가 낙랑군과 싸웠다고? 웃기지 마시라!

지나사 어디에 낙랑군이 백제와 충돌했다고 나와 있더냐?

백제왕을 죽인 큰 사건이 낙랑군과 관계되었다면 과연 지나사에 누락되었을 것 같은가? 백제본기의 낙랑은 거의 모두 신라다.

식민사학의 나팔수 동북공정의 앞잡이들은 이것을 천 년 만 년 지나도 알 길이 없다.

하늘이 과연 아직도 이 민족 이 역사를 저버리지 않았다는 생각이 든다.

이런 기사가 동국여지승람에 남아 있는 것은 그야말로 천운이다.

역사는 다시 한 번 뒤틀어진다.

그 주동자가 누군가? 바로 비류왕이다. 김씨는 하수인일 뿐이다.

뒤에서 얘기하겠지만 신공 5년은 303년이자 389년이기도 하다.

신라의 인질기록이 정확하다는 것을 일본서기는 보이고 있다.

303년에 인질탈출이란 치욕을 당한 백제가 가만있었겠는가?

신라를 닦달했을 것이다.

그런 신라는 살아남기 위해 뭔가를 보여줘야 했다.

거기서 선택된 것이 황창랑의 마한왕 암살특명이다.

그리고 304년에 그 일이 벌어진다.

각설하고 이 소년의 암살행동은 신라김씨에게 커다란 행운이 된다.

그것은 역사에서 사라질 뻔했던 신라김씨가 부활하는 계기가 된다.

당연히 신라김씨들은 그 소년을 음악으로 기려서 추앙한 것이다.

고대에 음악은 아무나 할 수 있었던 것이 아니다.

예악(禮樂)이라고 해서 그것은 특별한 계층에만 허용되었던 것이다.

그것이 고려를 지나 조선초까지 전해왔던 것이다.

분서왕의 죽음으로 마한왕조는 끝이 난다.

이제 새로운 백제가 열린 것이다.

근초고왕이 남쪽을 정벌했으니 마한을 정벌했다고? 무슨 코미디하냐?

일본서기 어디에 마한 정벌이 나오느냐?

신라를 정벌했다고 하지 않았느냐?

왜 역사를 너희들 멋대로 장난치느냐?

통합백제의 시조는 바로 비류왕인 것이다.

이는 어쩌면 비류설화의 원형일 수 있다.

오늘날 한반도 남부지역 곳곳에서 발견되는 북방계 유물은 바로 백제 정벌의 흔적인 것이다.

그러기에 가야지방을 비롯한 한반도 중남부의 유물이 일본열도보다 빠른 것이다.

그것을 마치 가야가 일본을 세웠다고 잘못 이해하고 있는 것이다.

바로 고고학의 무서운 허점이다.

무슨 허점? 문헌을 우선하지 않으면 잘못 이해될 수도 있는 허점이다.

14

백제가 가장 화려했던 비류왕부터 근구수왕까지 아이러니하게 백제사는 공백이다.

특히 비류왕 중간부터 근초고왕 중반까지는 거의 비어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왜? 신라의 조작 때문이다.

그래야 자신들의 실체를 감출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삭제한 것이다. 모조리 잘라낸 것이다.

아울러 같은 시기 고리의 기록도 덩달아 모조리 잘려나갔다.

왜? 백제와 고리에 신라김씨를 두고 무슨 일이 있었기에?

파사가 왜 일본서기에 등장하는가?

바로 백제가 세운 신라왕이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파사는 신라의 시조가 된다.

그럼 호공은 무엇이고 성한이 시조라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신라본기의 시조요, 신라김씨의 시조일 뿐이다.

신라라는 이름으로서의 나라의 시조는 파사왕이다.

어제 세웠고 누가 세웠는가?

백제 비류왕의 어머니(소서노?)가 세우고 300년경에 세웠다.

그러기에 인질이 필요했던 것이다.

실성이 인질을 보냈다고? 조작이다.

아니, 고대의 사관이 조작의 흔적을 남긴 것이다.

어째서? 미사흔은 인질이었지만 실성이 보낸 인질은 아니었던 것이다.

바로 내물이 응신천황인 침류왕에게 보낸 인질이다.

그런 비리비리하던 신라를 키운 것이 누구던가? 고리다.

광개토왕이 백제와 왜의 사이를 비집고 그들에게서 빼앗은 한반도의 영토를 거의 신라에게 주었다.

공짜로 주었는가? 아니다. 왜?

그 대답은 실성과 복호가 쥐고 있다. 제상이 쥐고 있다.

실성이 인질이라고? 복호가 인질이라고? 인질일 수도 있다.

그러나 근본적으로 인질이 아니다. 복잡한 무언가가 있다.

그 무언가가 무엇인가? 바로 중원고리비에 그 답이 있다.

특히 실성은 절대 인질이 아니었다.

실성은 과연 무엇이었는가? 그는 고리와 신라 사이에 어떤 존재였는가?

눌지왕기에 그 답이 있다.

건흥 4년이 언제던가? 광개토비에 답이 있다.

건흥 4년은 눌지왕대를 벗어날 수가 없다.

바로 장수왕의 즉위 연호다. 중원고리비의 건립연호다.

왜 고리가 신라를 키웠는가? 수수께끼가 아닐 수 없지 않는가!!

프리미엄이 있었다.

무슨 프리미엄? 바로 신라의 프리미엄이다.

그것이 왜 고리가 신라를 살려주었는지 어째서 신라, 백제, 왜가 그렇게 관련되는지 싸잡아 드러난다.

그리고 눌지왕대에 신라 국경은 임진강에서 원산만이었다.

이때 신라는 이미 거기까지 차지하고 있었다.

이는 신라본기로도 충분히 증명된다.

현대 고고학으로도 증명된다.

다만 엉뚱하게 고고학을 해석하고 있을 뿐이다.

다 고리 강성대국주의 때문이다.

왜? 고리가 위대했다고 해야 논문장사가 되니까! 이게 주류학계의 썩은 현실이다.

그 점은 소위 재야사학계도 마찬가지다.

오직 고리를 위해서 역사를 조작하고 있다.

그런 신라가 조령 이남에 진흥왕 이전까지 묶여 있다가 거칠부의 10군 공취로 개마고원까지 치고 올라가나?

한심한 사람들! 남쪽의 적석고분은 모조리 고리 것이었다고?

그런 신라가 갑자기 친백제를 표방한다.

왜? 윤공천황 때문이다. 윤공이 누구기에?

15

역사는 다시 한 번 요동친다.

박제상 아니, 김제상이 일본천황이었다니!

삼국사기와 유사에 신라의 충신으로 왜국에서 순절한 박제상이 왜왕이었다니!

일본서기를 보면 윤공은 굉장히 친신라적이다.

의사가 신라에서 오고 승하하자 신라사신이 대대적으로 다녀간다.

그리고 통곡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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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역사는 다시 한 번 요동친다.

박제상 아니, 김제상이 일본천황이었다니!

삼국사기와 유사에 신라의 충신으로 왜국에서 순절한 박제상이 왜왕이었다니!

일본서기를 보면 윤공은 굉장히 친신라적이다.

의사가 신라에서 오고 승하하자 신라사신이 대대적으로 다녀간다.

그리고 통곡한다.

나는 화랑세기를 보면서 황아가 치술의 원을 풀기 위해 벌지와 덕지 두 아들에게 무예에 힘쓰고 보기에게는 의술에 힘쓰라는 것을 보면서 윤공이 제상이란 것을 직감했다.

돈장엔 제상은 파사-거리-흠실-아도-물품-제상으로 파사왕의 5대손이다.

즉 삼국사기 본기보다 열전의 기록이 맞다

조작한 자들이 열전에서 틈을 보인 것이다.

어쩌면 정직한 사관이 훗날의 진실규명을 위해 남겨놓은 키포인트일지도 모른다.

당연히 제상은 김씨다.

영해박씨가 박제상의 후손이라고? 이런~ 먼 선대에서 누군가 조작했구나!

그런 족보는 버려라.

어째서 박제상이라고 착각하게 되었나?

멍청한 김부식 때문이다. 아니 그도 몰랐다.

신라 왕통이 조작된 것을.

신라왕통이 조작되었다고? 그렇다.

지금의 삼국사기 기년으로 미추가 내물과 실성의 장인이란 것이 어디 말이 되는가?

일부 사람들은 말한다. 그래서 삼국사기 기년을 조정해야 한다고.

그럼 고리기년 백제기년 모조리 조정해야 하겠네!

그럼 고리 기년과 차이가 없는 지나사 기년도 모조리 수정해야 하겠네!!

유사와 사기의 다른 점에서 미사흔과 복호의 인질기록이 굉장히 차이가 난다.

유사에선 미사흔이 내물왕 때 인질로 갔지만 사기에선 실성이 보낸 것으로 되어 있다. 단연코 유사가 맞다.

거기에서 왜왕의 사신이 ‘백제의 죄를 어쩌고저쩌고 하면서...’ 인질을 요구한다.

그 왜왕은 바로 침류왕 응신이요, 백제의 죄는 진사왕의 쿠데타다.

바로 김씨의 쿠데타다.

그러기에 신라는 인질을 보낼 수밖에 없었다.

왜? 왜의 손아귀에 있었으므로.

실성 때는 고리가 이미 백제를 몰아내고 신라를 접수했거늘 무슨 인질을 보낼 필요가 있단 말인가?

다분히 정통김씨계열이 아닌 실성을 깎아내리고 계통을 조작하기 위한 수법이다.

일본서기에서 박제상의 기록이 5c에 들어가야 되는데 잘못 삽입되었다고? 웃기는 소리다.

일본서기가 정확하다. 왜? 당시의 강자인 백제의 기록이기 때문이다.

미질허질지 외 2명의 사신이 불타 죽은 것은 4c초다(303년?).

결코 박제상, 아니 김제상이 아니다.

한마디 덧붙이자면 진사왕은 어쩌면 제상의 아버지인 물품일지도 모른다.

현재 이건 어디까지나 <삼국지>를 통한 추측일 뿐이다.

그럴 가능성은 충분히 있고도 남는다. 여기서 일일이 따질 시간은 없다.

앞서 신공의 기년이 중첩이라고 말했다.

그럼 신공 5년의 인질기사는 몇 년인가?

소서노의 기년으로 하면 303년이요, 아이부인의 기년으로는 389년이다. 389년?

무슨 냄새가 나지 않는가?

바로 삼국유사를 보라! 390년에 미사흔 인질기록이다.

과연 그러면 또 다른 인질사건이 303년 이었단 말인가?

그랬을 가능성 거의 100%다.

위의 분서왕 기사에서 살펴본 대로다.

정말로 우연이지만 일본서기가 얼마나 정교하게 조작된 진실을 담고 있는지 실감이 난다. 바로 윤공의 기년을 풀면 그가 제상임이 백일하에 드러난다.

왜 윤공이 42년인가? 답을 제시하면 윤공몰년은 453년이다. 453-42=412이다.

눈을 크게 뜨고 신라본기를 보라! 그 때 무슨 기사가 적혀 있는지?

사기나 유사의 기록을 보자.

제상이 복호를 구하고 고리를 탈출한다.

각본은 코미디요, 능력은 슈퍼맨이다.

그런 얘기가 가능하다고 보는가? 미사흔을 구하는 과정을 보자.

그 먼 오사카만에서 신라까지 탈출시키는 것이 가능한가? 절대 불가능하다.

왜가 무슨 해적 집단인가?

한낱 신라사신의 말을 믿고 대마도에 병력을 보내고 그것도 모자라 인질과 사신까지 딸려 보내는가?

코미디도 그런 코미디가 없다.

모조리 날조된 것이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파사왕대에 있었던 인질사건을 김제상에게 덧붙인 것이다.

화랑세기는 그것이 조작임을 한 눈에 보여주고 있다.

바로 왜국의 공주인 보미다.

왜국의 공주를 데려온 자가 인질에서 탈출했다고? 하늘이 노하신다.

바로 왜왕인 인덕천황이 보미를 딸려서 신라로 보내주었다.

그것도 유사의 기록이 맞다.

사기처럼 418년이 아니라 유사처럼 425년이다.

일본서기엔 426년이다.

여기서도 신라기록과 1년 착오가 있다.

지나 사서엔 뭐가 나오는가?

바로 왜 5왕의 하나인 제(濟)다. 바로 김제상의 이름이다.

제상이라고 조작한 이유는 바로 상(上) -임금- 이기 때문이다.

제상은 일본에 앞서 신라와 백제에서도 왕 혹은 왕에 버금가는 인물이었다. 그렇다.

삼국사기처럼 일개 내마의 벼슬을 가진 자가 어떻게 왕의 공주에게 장가를 드나?

신분제가 극명한 고대사회(신라나 백제를 막론하고)에서 절대로 가능한 일이 아니다. 결코 아니다.

그러기에 제상이 일본으로 가고 난 뒤에 치술은 눌지의 후궁이 된 것이다. 그런 치술은 제상에게 원망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어째서 제상이 왜왕이 될 수 있었을까?

바로 신공황후인 아이부인의 친척이기 때문이다. 고사기에 분명히 밝히고 있다.

신공은 신라의 핏줄이라고.

바로 신라본기에 나온 이찬 급리의 딸이 왜왕의 아들에게 가서 낳은 여아이다.

그 여인이 훗날 백제 근귀수왕의 황후가 된다.

바로 아이부인이다.

아이부인이 낳은 아들이 바로 침류왕 응신이다.

바로 야마대왕조를 개창한 실질적인 일본의 건국시조다.

이제 신공의 신라정벌의 의미를 알겠는가?

한편으로는 비류왕모에 의한 정벌의 진실이요, 한편으론 신라에게 나라를 잃은 백제인들이 붓끝에 의한 복수를 한 것이다.

신라의 핏줄인 신공황후(여기서는 아이부인)에게 신라를 욕보이게 한 것이다.

그런 신공이 비미호라고? 열도에서 임신한 몸으로 신라를 점령했다고?

웃기지 마시라! 백제는 당시에 신라를 아예 없애버리지 않은 조상에 대한 한을 이렇게 표현한 것이다.

비미호는 왕이었다.

당연히 일본서기의 세력이 열도라면 천황으로 등재되어야 한다.

그들은 거짓말하지 않았다.

비록 기년을 조작했을망정 신공은 분명히 황후임을 밝혔다.

비류왕모(소서노?)도 아이부인도 다 황후였다.

16

이제 충격 백배, 비밀의 문 한가운데로 여러분은 이미 들어섰다.

1대가 거서간 2대가 차차웅 그리고 쭉 이사금? 탈해가 왜 하필 호공의 집을 빼앗는가? 불과 14살짜리 애가 대보(大輔)가 되나? 허루에게 이찬보다 상급의 벼슬을 주겠다.

그래서 주다란 벼슬을 주었다? 주다가 후일 각간이 되었다?

일성이 덕이 없어 동생인 파사를 왕으로 앉혔다.

그런데 그보다 훨씬 뒤에 일성이 왕으로 앉는다? 아달라가 후손이 없었다.

그런데 후기신라에 아달라 후손이 버젓이 왕으로 등극한다?

골정과 이매가 죽고 이매의 아들인 내해가 등극했는데 골정의 아들이며 자기의 사위인 조분이 등극한다?

태자인 우로가 왕이 되지도 못한다.

첨해가 아버지 골정을 추봉하면서 세신갈문왕으로 한다? 우로가 여러 번 서불한을 역임했다고?

서불한보다 더한 직급이 있던가? 한 번 오르면 그만 아닌가?

그런데 별 볼 일없던 첨해는 버젓이 왕이 된다?

13대 미추의 딸이 먼 훗날 내물과 실성의 왕비가 된다? 유리하고 유례하고 헷갈리기도 한다? 신하들에게 이 아이는 우리 집안을 일으킬 아이라고 말하여 흘해가 왕이 된다?

그 정도 말할 정도는 왕이어야 되지 않겠는가?

그런 흘해는 참으로 늙은 나이에 올라 오래도록 왕위를 유지한다?

내물과 실성이 서로의 왕비를 공유한다(상장돈장에서) 그런데 내물은 무척 긴 기간을 왕위에 있었다?

마누라는 꼬부랑 할머니가 되었을 것인데 어찌 실성의 애를 낳나?

무슨 일급 코미디 영화각본 같지 않는가?

1호공(박) - 2남해(해) - 3유리(해) - 4허루(허) - 5?(허) - 6?(허) - 7일성(박) - 8아달라(박) - 9성한(김) - 10벌휴(석) - 11나해(석) -12 ?(김) - 13우로(석) - 14첨해(석) - 15세리지(김) - 16기림(석) - 17흘해(석) - 18파사(김) - 19?(김) - 20미추(김) - 21내물-22실성-23눌지-24자비-25소지-26지증-27법흥-28진흥-29진지-30진평

?는 몰라서가 아니고 일부러 제시하지 않았다. 지금까지 역사를 한다는 학자 중에 과연 누가 진평이 30대임을 밝힌 적이 있는가?

밝혀보려고 노력이나 했는가? 잘 보라! 1대 호공, 9대 성한, 13대 우로, 18대 파사, 30대 진평이다.

‘대대로 왕위를 전해 30대 김진평에 이르러.... 운운’이 이래도 잘못인가?

고대의 기록이 정확한 것이다.

김진평은 신라 30대 왕이었던 것이다.

파사왕이 근초고왕 언저리에 있는 일본서기의 기록이 맞는가?

멀리 옛날인 삼국사기의 기록이 맞는가?

단연코 일본서기가 맞다.

미추가 13대인데 백여 년도 더 뒤에 내물과 실성이 사위가 된다.

그게 제대로 된 기록인가?

삼국사기(정확히 구 삼국사)는 철저히 조작된 기록이다.

특히 신라와 백제본기가 그렇다.

백제와 신라가 모두 잘못 쓴 역사에 대해 책임이 있지만 신라가 다 뒤집어써야 한다. 왜? 최종 승자이기 때문이다.

혁거세는 없다.

우로는 왕이었다.

혁거세는 과연 누구인가?

바로 9대 성한왕이다.

신라사에서 한결같이 시조 혹은 태조로 나오는 인물이다.

그럴 리가 ~~ ?? 사실이다. 확신해도 좋다.

그러기에 유사에서 아달라조에 연오랑 세오녀의 기사가 나온 것이다.

그것이 결코 우연히 아니다.

바로 왜와 신라의 엄청난 비밀을 내포하고 있는 것이다.

일본서기에 그 무렵의 기록이 나온다.

신대에도 있고 역사에도 있다. 과연 무엇이라고 했는지 가슴을 훤히 열고 눈을 크게 뜨고 뒤져 보라! 왜 눌지부터 마립간이라 불렀는지 이해가 간다.

그것이 무엇이던간에. <삼국사기>는 조작되었지만 정곡을 찌르고 있다.

한마디만 더한다면 위의 왕호와 씨성은 잘못 되어 수정할 수는 있다.

그러나 현재로는 거의 정확하다고 믿는다.

어라 조분이 안 보이네? 탈해도 안 보이네?

18대 파사왕의 인질 기록이 옮겨 갔다.

바로 삼국사기 18대 실성으로 옮겨 갔다.

고대의 사관은 인질의 기록과 불타 죽은 사신의 기록이 바로 18대 파사왕대에 있었던 점을 알려주고 있다.

혜안을 가진 자가 그것을 알아채기 바란 것이다.

성한부터 파사까지 김씨와 석씨가 교대로 왕위를 주고받고 있다.

그런데 김씨는 후세에 건재하건만 석씨는 씻은 듯 사라졌다.

왜? 과연 무엇 때문에? 무슨 일이 있었기에? 왜? 중기신라가 내물에서부터 시작되는지 한 눈에 알 수가 있다.

바로 그때부터 조작이 없기 때문이다. 조작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삼국사기나 유사에 파사의 부인은 사성부인 김씨라고 한다.

사기처럼 파사가 1c의 왕이라면 그 당시 김씨가 무슨 세력이 강하기에 김씨 황후가 탄생하나? 더구나 유사는 사요왕의 딸이라고 했다.

유사가 잘못되었다고? 천만에.

유사는 바로 김씨들이 조작하다 흘린 고대사의 편린을 보여주고 있다.

사요는 김씨왕이었다.

그런데 왜 신라본기에 없는가? 바로 백제왕이었다.

놀라운 일이 아닌가?

어째서 백제가 파사를 신라왕으로 세웠는지 이해가 가시는가?

바로 백제의 사위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백제본기에도 사요왕은 없지 않은가?

당연하지. 김씨들이 파사를 조작한 주제에 사요를 떡하니 백제왕으로 올리겠는가?

허황후의 뿌리가 어디에서 출자했는지도 극명하다. 바로 신라다.

인도에서 장강을 거쳐서 왔다고? 무슨 소설이 그렇게 재미있더냐?

바로 허씨 왕족의 후예인 것이다.

김씨들이 감춘 것이다. 수로가 가야를 세웠다고? 일면 맞고 일면 틀리다.

바로 가야에서 금관국을 세웠다.

허황후가 신라허씨임이 밝혀질까 두려워 감춘 것이다.

왜? 부여 백제와 신라 왜 가야의 5차 연립방정식이 풀어지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문무왕의 15대조는 성한이 맞는가? 맞다.

법흥이 모용씨라고? 미추가 위나라에 속한 선비족 후예라고?

개가 웃을 일이다.

신라김씨가 동해안 루트를 타고 남하했다고? 말놀음일 뿐이다.

성한-차웅-세리지 -파사-지마-조분?-내물-복호-습보-지증-입종-진흥-진지-용춘-춘추 15 - 14 - 13 - 12 - 11 - 10 - 9 - 8 - 7 - 6 - 5 - 4 - 3 - 2 - 1

자, 계산하면 성한은 180~220년대여야 맞다.

결코 알지가 될 수 없다.

더구나 세한은 아니다.

알지-세한-아도-수류-욱보-구도-미추는 더더구나 아니다.

미추는 절대로 구도의 아들이 될 수 없다.

구도와는 아무런 관련도 없다. 단지, 신라김씨들의 조작일 뿐이다.

미추를 13대 왕으로 끼워 넣어 삼국사기를 조작한 신라김씨들의 수작일 뿐이다.

바로 세한을 성한으로 조작하기 위한 술수다. 아래와 같이.

세한-아도-수류-욱보-구도-말구-내물-복호-습보-지증-입종-진흥-진지-용춘-춘추-문무 15 - 14 - 13 - 12 - 11 - 10 - 9 - 8 - 7 - 6 - 5 - 4 - 3 - 2 - 1 - 0

하지만 정직한 고대의 사관은 그 흔적을 남겨 놓았다.

삼국사기에 들어있다. 무수히 들어있다.

고고학이 그것을 증명한다.

무슨 고고학? 바로 황남대총이다.

난 이미 운모-옥모-홍모-아이혜-광명-내류-아로-조생-선혜에서 그 실마리의 일단을 보았다.

무슨 실마리? 왜 오릉의 전설이 생겼다고 생각하는가? 알정이 과연 신라사 초기의 우물인가? 계림이란 숲이 정말로 알지가 매달린 숲인가? 지하에서 성한이 웃는다. 자세한 것은 21편에서 논한다.

김대성이란 분이 <금문의 비밀>이란 책에서 문무왕비의 위력이 동양삼국을 들끓게 할 날이 올 것이라고 했다.

그렇다. 문무왕비의 진실이 드러나는 순간 동양삼국은 뒤집어진다.

물론 그 책에서 나온 김씨들의 세계는 <한서> 김일제전과 약간 다르다.

저자가 잘못 인용했다.

그나저나 일제의 후손인 김성金星을 성한왕이라고 이 분은 주장하는데 어디에서 김성이 나오나요? 난 아무리 찾아봐도 안 나오던데.

17

이제 이 싸이트의 대표적인 주류신봉자 무명에 대해서 종합하여 비판해 보자.

물론 뛰어난 점도 있고 날카로운 면도 있다.

현대사와 사회를 보는 눈은 존경할 만한 점도 있다.

하지만 역사학의 큰 얼개에서 그는 대표적인 식민사학의 나팔수, 동북공정의 앞잡이일 뿐이다.

그것이 그가 원했든 원하지 않았든. 그의 글에 띄어쓰기와 오타로 인해 엉망인 글이 많아 바로 잡아 그대로 올리고 비판한다.

지금까지 나온 것을 종합한 것이다.

1) 윤내현을 비판한 진개의 침입논리 - 고조선이 대동강이라고 강변한다.

고조선의 위치를 가장 광범위하게 잡고 있기에 인기 있는 교수 윤내현. 그의 주장에서 다시 이해하기 힘든 부분 두 번째를 살펴보겠습니다.

<燕乃遣將秦開攻其西方,取地二千餘里,至滿番汗為界,朝鮮遂弱 - 위략> (연이 이에 장군 진개를 보내 그 서방을 공격해 2천리 땅을 취하고 만번한을 그 경계로 하였다. 그랬더니 조선은 마침내 약해졌다.)

윤내현은 위략에 나오는 滿番汗과 浿水의 위치를 난하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위략에 나오는 패수는 지금의 난하 또는 그 지류였음을 알게 되고 만 번한은 난하와 그 지류인 汗水 유역에 있었음이 확인된다.-윤내현의 한국고대사신론

고조선은 서방 2천리를 연나라에 빼앗기고도 그 경계가 현재의 난하라는 이야기합니다. 그렇다면 서방 2천리를 빼앗기기 이전의 고조선의 서쪽 한계는 어디일까요? 연나라의 수도인 계나 연하도뿐 아니라 오르도스지역까지 고조선이 다스리고 있었어야 가능합니다. 윤내현의 주장에 따르면 연나라는 갈 곳이 없는 문제가 생깁니다.

문제는 이것이 아닙니다. 이해 할 수 없는 이런 주장을 윤내현이 하고 있는 주 근거는 바로 汗水입니다. 조금 이야기가 복잡해집니다만 汗水는 한서지리지에 대한 주석에서 응소가 언급한 강 이름입니다.

한서지리지에 요동군에 문 번한현이 있고 番汗현조에 浿水出塞外西南入海 구절이 있습니다. 이 浿水에 대해 응소가 汗水出塞外西南入海라는 주석을 붙였습니다. 그러자 수경주에서 난하 상류의 한 지류로 나오는 汗水가 바로 문제의 패수라고 윤내현은 결론짓습니다. 이를 바탕으로 만,번한도 난하유역 일 수 밖에 없다. 라고 합니다.

과연 그럴까요? 당장 응소의 주석의 汗水가 난하 상류의 그 강이 맞다고 치더라도 그 다음 구절인 西南入海를 만족시킬 수 없습니다. 윤내현 자신이 수경본문을 인용해 <패수는 임패현을 지나 동으로 바다에 들어간다>는 구절을 두고 난하를 이 조건에 맞는 강으로 지정해놓고는 이제 汗水한수문제가 나오니까 汗水한수가 서남입해한다는 조건이 있음에도 汗水한수가 패수라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한번은 강이 동쪽으로 흘러 바다에 간다고 난하를 패수라고 해놓고 그 다음은 서남으로 바다로 들어가는 정반대 방향의 강, 汗水가 패수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편리할 때 마다 편리한 구절만 가져와 논리를 전개하다보니 자가당착적인 모순에 빠진 겁니다.

이런 이상한 논리로 패수와 만번한을 난하유역에 가져다 놓는 이 기괴한 논리를 받아들이라는 건가요? 참 제정신으로는 받아들이기 힘들 것 같습니다. 당장 윤내현의 논리로 나가면 연나라가 오갈 데 없고 연하도의 엄청난 성 흔적도 고조선의 흔적이 되는 문제가 발생하게 됩니다.. 제가 잘못 보고 있는 건가요?

---> 물론 윤내현이 다 맞는다는 것은 아니다. 그도 내가 보기엔 오류투성이다. 하지만 무명은 스스로의 글에서 무식함을 드러내고 있다. 바로 <燕乃遣將秦開攻其西方,取地二千餘里,至滿番汗為界,朝鮮遂弱 - 위략> 이다. 왜 그런가? 바로 이 글의 핵심글자는 바로 서방(西方)이기 때문이다. 고조선이 대동강이라면 가능한 얘긴가? 고조선이 요동이라면 가능한 얘긴가? 바로 고조선이 요서이어야만 가능한 얘기다. 내말이 틀렸는지 지도를 놓고 보시오!

그리고 그 후에도 고조선은 요서였다. 즉 연의 침입이 있은 후에도 중심지는 요서였다는 것이다. 어째서? 역시 그대가 말한 <위략>의 이 부분 다음에 삼국지에 주석으로 딸린 <위략>을 보라! 분명 우거를 설득하던 상 역계경의 세력이 동쪽의 진국으로 간 것이다. 여기서도 핵심은 바로 <동쪽>이다. 요동에서 동쪽에 무슨 진국이란 세력이 있었던가? 대동강 유역이 조선이라면 그 동쪽은 동해바다가 아닌가? 이 글을 만족하는 지리적 위치는 요서밖에 없다. 그러기에 훗날 수양제가 고리를 침공할 때 무슨 낙랑도니, 현도도니, 부여도니 하는 말들이 나오는 것이다. 바로 요하(난하)를 건너 요서를 지나기 때문이다. 물론 이 때 고리의 수도는 요서 평양(안시성-왕검성)을 떠나 장안성(새로운 평양성인 오늘날 요동)에 있었다. 오히려 사료를 취사선택하는 것은 무명이 아닌가?

사실 <위략>의 이 글도 문제는 있다.

땅은 선이 아닌 면적이기 때문이다.

사기와 한서 흉노열전엔 동호(명백히 조선을 말한다. -자세한 것은 생략하겠다)가 천 여리를 물러났다고 되어 있다.

무슨 뜻인가? 중심지, 바로 수도를 1000리 혹은 2000리 물러나 옮겼다는 뜻이다.

이는 후대의 역사를 보아 정확한 표현이다.

그렇다면 애초 고조선의 수도는 바로 오늘날 난하나 북경서북일대라는 얘기가 된다. 이는 후대에 조선의 도읍이 북평일대라는 기록이 결코 거짓이 아니라는 증거다.

오늘날 요서의 찬란한 고대유물이 과연 누구의 것이었냐는 답이 나온다.

송호정처럼 그것이 동호였다고 동호가 무슨 나라였더냐?

그리고 동호는 바로 조선이 아니었던가?

그리고 지나의 기록이나 주장이라면 무조건 신뢰하는 그 버릇은 여전하시구먼.

연이 역수에서 요동에 걸친 나라였다면 제와 조를 능가하는 강국이었을 것이다.

그런데도 사기나 전국책 등에서 연은 항상 최약체로 그려지는 것은 무슨 아이러니인가?

그리고 그렇듯 위대한 진개의 기록이 막상 사기나 전국책에 나오지 않는 것은 또 무슨 이유인가?

진정 모두가 조작되었거나 후대에 다른 기록을 참조했다고 봐야 된다.

다른 기록? 그렇다. 오히려 지나에서 조선의 기록을 참조했을 수도 있다.

그러면 그 조선이 과연 고조선인가?

절대 아니다. 바로 변한조선이다.

후대의 기자조선이라 불리는 존재다.

바로 기자의 후손이 변한이 되었기 때문이다.

즉 연이 친 조선은 변한조선이요, 위만이 침탈한 나라는 기자조선이요, 한나라가 친 것은 위만조선이다.

즉, 무명의 수많은 머릿속의 이론은 근본부터 삐뚤어져 있다.

2) 왜와 백제의 논리 - 백제가 왜의 속국이라고 빈정댄다.

신찬성씨록 大原眞人 <出自謚敏達孫百濟王也> 대원진인은 민달천황의 손자인 백제왕의 후손이다. 이를 보고 봐라 민달의 손자가 백제왕이니 민달이 백제인 아니냐? 야호~ 라고 쾌재를 부르는 사람이 많다.

이는 어찌 보면 참 재수 없는 소리다. 민달이의 손자가 백제왕? 왜놈이 자기 왕족을 백제왕으로 파견했나?

그럼 백제는 일본의 완전 속국이네.

완전 백제를 왜국의 속국으로 보는 재수 없는 케이스.

그런데 이 구절을 왜 그리 좋아들 하는지...

그런데 백제왕의 후손이 왜 일본에서 계속 사나? 그런데 하나 참고할 것은 백제왕족을 백제왕이라 표현한 부분이 신찬성씨록에는 보인다. 하여튼 백제, 중국에서 문화를 수입해다가 일본에 전해줬는지 갔다 바쳤는지 불확실하고, 군사력은 띨띨해 일본의 군사원조를 툭하면 바라는 띨띨한 국가를 뭐 그리 대단하다고 자꾸 그러는지..내참. 하여튼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곤지와 무령왕의 케이스는 매우 복잡합니다.

삼국사기와 일본서기에서 인용한 백제기록들이 서로 틀립니다.

그런데 대체로 일본서기의 기록이 더 정확합니다.

일본서기를 토대로 보면

곤지는 461년(웅략5년, 개로왕7년)에 일본으로 간다.

간 사유는 웅략을 섬기던 백제여자池津媛이 간통하는 바람에 웅략이 불에 태워 죽인다.

그런 사건 때문에 개로왕이 자기 동생곤지를 일본으로 보내게 되는데(인질성격이 강함) 동생 곤지는 약간 열을 받아서 형인 개로에게 당신 마누라를 달라고 한다(아마 세컨드겠지) 그런데 그 여자는 이미 임신 중. 사월에 떠났는데 6월에 이끼섬 부근의 각라도에서 이 여자가 아이를 낳자 할 수 없이 아이와 여자를 백제로 돌려보낸다. (그 아이는 무령왕이 된다. 그래서 무령왕은 461년생.) 그리고 곤지는 일본으로 간다. (그래서 일본현지에 곤지신사가 있게 된다.) 곤지는 그 후 어떻게 되었는지 일본서기에는 더 이상 나오지 않는다. (삼국사기에는 477년에 백제의 내신좌평이 되고 그 해 죽는다고 나온다. 아마 백제로 돌아온 모양.)

일본서기는 479년에 기사에서 곤지 아들 이야기가 나온다.

그 사이에 아들이 다섯 명으로 늘어났는데, 백제의 문근왕(아마 삼근왕)이 죽자 웅략천황은 곤지의 둘째 아들이 총명해 웅략하다는 이유로 백제의 왕으로 삼으면서 축자국 군사500명을 주어 백제로 돌려보냈다고 한다.(백제왕을 일본천황이 선택? )

그래서 그가 동성왕으로 즉위하게 된다. (물론 삼국사기는 동성왕이 어디서 왔는지 기록하지는 않고 있다.)

(그런데 여기서 돌아오지 않은 곤지의 아들이 성씨를 이루고 사는데 그들이 바로 飛鳥戶造라고 신찬성씨록은 기록하고 있다.)

그리고 무령왕은 동성왕 다음으로 즉위하게 되는데 왕5년인 505년에 자기 아들(斯我君)을 다시 일본으로 천황을 섬기라고 보낸다(인질성격). 이 사아군의 아들이 법사군이고 왜군의 선조다. 라고 일본서기는 기록하고 있고,.

도대체 어떻게 이럴 수가 있을까?

이 사실을 모두 거짓이라고 말해야 하지만 저는 그럴 자신이 없습니다.

이 시기의 일본서기의 백제관련 사료가 생각보다 상당히 정확하다는 것이 이미 상당히 밝혀져 있어서 그렇습니다. 시기야 약간 다르지만 일본의 지원으로 왕이 즉위하는 경우까지 삼국사기에도 나오니 말이죠. 전지왕이 일본에 인질로 가 있었다는 것은 삼국사기에 나오고 그리고 즉위하는데 왜 일본병사가 호위를 하고 왔다라고 구체적으로 언급이 되는데... 사실 전지왕은 아신왕의 맏아들 태자였습니다.

둘째왕자도 아니고 일국의 태자가 일본으로 인질로 가야할 만큼 당시의 백제는 허약했거나 일본의 지원이 절실했겠죠. 그런데 전지왕은 일본천황에게 울면서 귀국을 청했다고 합니다. 전지왕은 즉위과정에서부터 일본에 상당히 예속된 상태임을 부정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王薨 王仲弟訓解攝政 以待太子還國 季弟禮殺訓解 自立爲王 전支在倭聞訃 哭泣請歸 倭王以兵士百人衛送 - 삼국사기

위험하지만 이 전지왕의 즉위와 동성왕의 즉위가 유사하지 않는가라는 의문을 가집니다.

이런저런 이유로 백제를 소재로 하여 대왜 민족적 자긍심을 고양시키려는 시도는 실패할 확률이 높다는 생각입니다. 우리 역사에 자랑스러운 일이 얼마나 많은데 굳이 백제와 왜의 정치군사적 관계를 가지고 긍지를 느끼려 하는지...

군사력으로 긍지를 느끼려면 중국의 통일정권과 정면승부를 몇 차례나 치루면서 몇 차례 승리를 거두고 중국 통일왕조 하나를 멸망시킨 고구려의 사례를 드시든지, 아니면 국제적 역학관계에 대한 현실적이고 정확한 이해를 바탕으로 삼국을 차례로 무너뜨리고 한반도 통일왕조 수립에 성공한 신라의 현실적인 노력을 거명하면서 국제화의 중요성을 재인식하는 계기로 삼으시던지, 그도 저도 아니라면 백제의 문화전파를 일본서기를 통해서 입증해 진정한 힘인 문화의 힘을 강조하시든지 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하거든요.,.

---> 악의에 찬 반 백제 이론이다.

왜놈이라 경멸하고 있다.

그들이 역사적으로 형제간임을 안다면 그랬을까?

스스로 조상을 욕한다고 느낀다면 그러겠는가? 영남인이라 그런가?

신라주의자라 그런가?

아화 전지, 구이신, 동성, 무녕, 무왕. 즉 열도에서 백제 왕권에 관계된 왕만 6명이다. 백제와 한 집안이 아니라면 가능한 얘긴가?

경행, 성무, 침류, 이중, 웅략, 서명 등 백제에서 왜 왕권에 간여한 것만 6건이다.

한 집안이 아니라면 가능한 얘긴가? 곤지가 인질이라고? 성씨록을 보라!

어떻게 웅략이 곤지가 되는지. 일본서기 기년을 보라!

어떻게 곤지가 웅략이 되는지! 물론 껍데기만 보니 무엇을 알 것인가!

무엇보다도 그는 왜가 무엇인지 모른다.

내가 지금까지 한 이야기의 핵심은 바로 왜(倭)다.

왜가 바로 왜(why)가 되었기에 고대사가 미궁에 쌓여 있고 엉망진창이 된 것이다.

바로 신라와 백제의 이야기는 바로 왜다. 그것이 바로 고대사의 핵심인 것이다.

나는 분명히 밝힌다. 왜는 백제라고.

여기서 그것을 모조리 내놓지 못하는 점이 미안할 뿐이다.

그러나 찾아보라. 일본서기, 고사기, 신찬성씨록에 그들이 백제였음을 누누이 밝히고 있다.

특히 성씨록은 아예 노골적으로 밝히고 있다.

바로 무명처럼 색안경을 쓴 자들에게 보이지 않을 뿐이다.

내친 김에 한마디만 더하자.

화랑세기에 진흥왕이 말년에 풍질이 걸려서 황후, 미실, 보명, 월화, 옥리 등 다섯 여인과 즐거움에 탐닉했다고 한다.

그 때 나는 상장돈장이 있었는지도 몰랐다.

그런데 혹시 옥리가 백제 성왕의 딸이 아닐까 생각했다.

나중에 상장돈장을 보니 그 추측이 맞았다.

즉 옥리가 낳은 딸이 진평왕과 관계하여 선화를 낳았다.

그 선화가 바로 무왕과 결혼하였다.

즉 삼국유사의 기록은 사실인 것이다.

선화는 신라의 핏줄이기도 하거니와 백제의 핏줄이기도 한 것이다.

그렇다면 무왕은 누구인가? 바로 민달의 손자다.

괜히 백제왕이라고 한 것이 아니다.

<성씨록은 바로 사실을 전하고 있다.> 무왕은 결코 법왕의 아들이 아니다.

바로 민달의 손자이며 백제왕인 것이다.

삼국유사에 왜 무왕의 설화가 전해지는지 명백해진다.

삼국사기는 정사지만 세세한 고대사의 비밀은 오히려 삼국유사가 더 깊이 전하고 있다. 앞에서 말한 미사흔의 기록도 그렇다.

각설하고 무왕은 나중에 서명천황이 된다.

그러기에 일본서기에서 왜국이 백제대사를 짓고 백제궁을 짓고 백제옷을 입고 조회를 하는 것이다.

그들이 백제가 아니라면 어림도 없는 것이다.

스스로 백제임을 그 보다 더 표현할 수는 없다.

단순히 왜 왕권에 백제계가 많이 포진해서 그렇다고? 껌 씹는 소리들 말아라!

백제본기 무왕기의 마지막 부분은 의자왕의 대리통치기다.

그러다가 무왕인 서명이 죽자마자 반대세력을 일본으로 쫓아낸다.

3) 박창범 인식에 대한 비판

- 신라의 일식기록이 모두 지나사서에 있다고 한다.

삼국의 위치와 천문관측

박창범교수는 삼국의 천문관측 위치를 중국대륙으로 잡게 됨으로써 중국을 우리가 통치했다는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었다.

그리고는 삼국은 한반도에 없었다는 주장은 활개를 치게 되었다.

박교수는 신라의 천문기록 중에서 초기의 기록의 최적관측지는 양자강유역이라고 발표했다. 후대의 최적관측지는 신라의 영토이지만 초기의 최적관측지가 양자강유역이라고 발표함에 따라 그 해석도 분분하다. 신라의 초기 영토가 양자강지역이라는 설과, 신라가 양자강지역을 다스리다 한반도로 옮겨온 것이다라는 설, 가야세력이 양자강지역에 있다가 한반도로 오면서 가져오게 된 천문기록이라는 설등...

과연 박교수의 주장대로 초기신라의 천문기록의 최적 관찰지는 양자강일까? 박교수는 일식현상을 분석해 도출된 결과라고 한다. 그리고 양자강지역이 신라의 천문관측지로 나오는 시기는 ad201년까지라고 한다.

이시기 신라의 천문기록 중에서 중국문헌에 나타나지 않는 독자적인 것들만 살펴보자

1. 남해11년, 월일 없음, 밤에 유성이 있었다. 2. 탈해23년 2월, 혜성이 동방에서 보였다. 3. 상동 또 북방에서 보였는데 20일에 사라졌다. 4. 파사25년 1월 별똥이 비처럼 왔는데 땅에 닿지는 않았다. 5. 지마9년 2월 큰 별이 월성서쪽에 떨어졌다. 6. 지마17년 8월 긴별이 하늘에 두루 미쳤다. 7. 일성20년 10월 혜성이 동방에서 보였다. 8. 상동 또 동북방에서도 보였다. 9. 내해5년 7월 태백이 낮에 보였다.

이상한 모습이 보이지 않는가? 박교수가 초기신라의 최적천문관측지가 양자강에 있었다는 증거로 사용한 일식기록이 전혀 없다. 모두 유성에 관한 기록정도다. 초기신라(201년 이전)의 천문기록 중에서 중국사서에 등장하지 않는 기록은 모두 9개. 그러나 3번과 8번은 하루에 나타난 상황이기에 7일의 천문기록이 있는 셈이다. 그중에서 천문현상 발생날짜를 알 수 있는 것은 탈해23년 2월조가 유일하다. 나머지는 모두 발생 개월만 나와 있고 구체적 날짜가 없다.

박교수가 사용한 초기 신라의 일식기록의 특징은 매우 구체적인 날짜가 있다는 것이다. 또한 모두 중국문헌에 같이 나타나고 있는 것들이다. 혁거세재위 때 일식기록이 7번 나타난다. 이때의 기록을 보자

1. 혁거세 4년 4월1일 해에 식이 있었다. 2. 혁거세 24년 6월 그믐날 상동 3. 혁거세 30년 4월 그믐날 상동 4. 혁거세 32년 8월 그믐날 상동 5. 혁거세 43년 2월 그믐날 상동 6. 혁거세 56년 1월1일 상동 7. 혁거세 59년 9월 그믐날 상동

이 모든 기록은 일식이 있었던 달만 기록된 것이 아니라 구체적인 날짜까지 기록되어 있다. 위의 7개의 기록은 한서오행지에 그대로 나온다.

이런 초기신라의 기록은 한서오행지의 기록과 동일하며 지마, 아달라, 벌휴, 내해임금때의 일식기록은 모두 후한서오행지에 나오는 기록과 동일하다.

이런 현상은 삼국사기 초기천문관측 최적지가 한반도가 아닌 이유를 너무나 구체적으로 설명해준다. 굳이 슈퍼컴퓨터를 동원할 필요도 없다. 일식에 관해 독자기록만 등장하는 것은 신라기 전체에 단 한번도 나오지 않는다. 모두 중국기록과 중복되는 기록이다.

이를 바탕으로 박창범교수는 일식최적관측지를 추적한 것이다. 삼국사기와 중국사료에 동일하게 나오는 일식기록을 가지고 최적관측지를 추적하고는 "어 이상하다. 관측지가 중국으로 나오네" 라는 엉뚱한 소리를 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게 해놓고는 <천문과 우리역사> 55페이지로 가면 당당하게 <삼국사기의 일식관측지는 한반도가 아니다>라고 말하고 있다. 이런 사실을 발표하고 학계가 매우 긍정적으로 평가했다고 자평하고 있다. 학계의 사람들은 모두 멍청한 사람들인가 보다. 책에는 오재성이란 분이 찾아왔고 깊은 인상을 남겼다고 하고 있다. 이 말은 오재성이란 분의 주장을 알고 있는 사람이라면 박창범이 무슨 소리를 하는 것인지 잘 알 것이다. 박창범은 학자이지만 코메디언인 셈이다.

---> 이 글은 바비님을 비롯하여 수많은 사람들에게 공격받은 글이다.

여담이지만 바비님의 순발력이 부럽다.

어디서 그런 퍼뜩이는 재치가 나오는지!

그야말로 무명 사냥꾼이다.

신라기록이 모조리 지나사서에 나온다고 거짓이라고.

그렇다면 지나에 나온 기록 모조리 들어가야지 왜 일부만 들어갔나?

나머지 천문기록은 날짜가 없는데 일식은 날짜가 나온다고?

일식이 어디 다른 날 일어나는가?

그믐이나 1일에 일어나는 것이 상식이지 않는가?

같은 일식을 지나는 기록하고 신라는 기록하지 말라는 법 있는가?

왜 그렇게 조국을 뒤처진 나라로 까뭉개기에 열심인가?

그대 혹시 정말로 지나가 심어놓은 동북공정의 스파이인가?

그것보다는 오히려 신라의 일식기록이 왜 중기에는 전멸하는지 그것이 더 궁금하지 않는가? 바로 백제의 부용국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말기에는 백제의 기술자와 고리의 기술자를 받아들여 마침내 다시 일식기록에 나서는 것이다.

그리고 여담이지만 앞에서 지적했듯이 일본서기(백제서기) 기년과 신라본기 기년은 약간 착오가 난다.

이것은 지금까지 내가 정리한 바로는 1년 차이가 난다.

어쩌면 일식기록도 착오가 있을지 모른다는 것이다.

어디에서부터 어디까지 착오가 난 것인지 모르지만 그것은 아마 백제와 고리에서 475년의 개로왕 패망기사가 신라본기엔 474년에 난 것과 같다.

4) 낙랑군의 논리

- 대동강이 낙랑군이라고 생떼를 쓴다.

윤내현의 논리가 재야의 교과서처럼 사용되고 있다. 그러나 윤내현의 주장중의 상당부분은 또 다른 역사왜곡에 불과한 것이 아닌가.

그 중 가장 심각한 것은 낙랑의 위치에 대한 터무니없는 주장이다. 낙랑이 난하 유역에 있었음을 동의할 수 없는 삼단논법으로 증명한 후 평양의 낙랑은 다른 낙랑국이라 주장하고 있다. 그리고 그 후 서기44년에 동한의 광무제가 바다를 건너 낙랑을 정벌해 군현을 만들었다는 삼국사기조를 인용해 그 후에는 고구려에 의해 멸망할 때까지 중국의 군사기지였다고 주장한다. 기막힌 사료의 취사선택에다 희한한 논리로 역사를 마음대로 쓰는 것이 아닌가? 즉 동한(후한)시기에만 중국의 군사기지 낙랑이 평양지역에 있었을 뿐 서한(전한)시기에는 아예 중국의 영향이 없었으며 낙랑, 대방군 모두 난하유역에 있었다는 것이다.

평양의 정백리127호분에서 낙랑태수연왕광지인이라는 인장이 발굴되고, 황해도 봉산군 문정면 태봉리의 대형 전축분에서 대방태수장무이전이 출토되었음에도 이는 모두 유민이 자기가 살던 곳의 명칭과 직위를 가져왔다고 주장해버린다. 여전히 낙랑군과 대방군은 난하유역인데 그 이유는 난하에 조선현이 있기 때문이란다. 그리고 열수가 난하의 지류이기 때문이란다.

참으로 편리하기 짝이 없는 논리이다. 그러나 어느 정도 알만한 학자라면 어떤 미친놈이 이 논리를 받아들이겠는가? 그래서 윤내현은 사학계의 왕따인 것이다.

평양지역이 낙랑군임을 잔소리 말고 받아들여야 할 이유는 너무나 많다.

-낙랑토성지역에서 발굴된 반량전을 제조하기 위한 주물틀, (군현의 치소도 아닌 곳에서 반량전이나 오수전을 제조하는 것은 거의 전례가 없다.)

-낙랑예관, 낙랑부귀의 명문수막새.(단순한 군사기지에 이정도의 명문수막새는 무리)

-지절4년(bc66년)명 칠곽이 나온 정백동37호, 영시3년(bc14년)명 일산대가 나온 정백동2호, 시원2년(bc85년)명 귀잔이 나온 석암리194호, 수화원년(bc8년)명 칠반이 나온 석암리 200호등 수많은 전한시대의 유물 ('어찌하여 서한시대에 조성된 유적은 하나도 보이지 않고 그보다 훨씬 늦은 동한시대의 유적만 존재하는가라는 의문을 갖지 않을 수 없다'라는 윤내현의 주장은 잘 몰라서 생긴 의문일뿐..)

-한의 낙랑군 25현 가운데 23개현의 명칭이 드러난 봉니 (발굴과정에서 나온 것도 존재하므로 무조건 위조라 말할 수는 없다. 또한 윤내현이 주장하는 '봉니가 출토된 곳은 공문서를 받은 곳이 된다'라는 말은 봉니가 어떤 용도로 사용되는 지를 잘 모르고 하는 소리일 뿐이다. 봉니는 문서뿐 아니라 상자를 봉해 보관하는데도 사용된다. 공문서를 받은 곳에서 봉니가 발견되었다면 그 문서는 개봉도 안 된 편지인 것이다. 봉니는 그 문서를 개봉하는 순간에 파괴되고 마는 마른 진흙덩어리임을 알아야 한다.)

-낙랑군 25개현중의 하나인 점제현의 위치를 보여주는 평남 용강군의 점제현신사비, 정백동1호분출토 부조예군, 정백동2호분출토 부조장인등의 인장 (점제현신사비는 일제의 위조 혹은 갈석에서 이치, 부조예군인장은 고조선의 인장 등으로 설명하는데 아무리 애를 써도 한도가 있다. 서한(전한)이 설치한 낙랑군과 25개 현의 중심이 대동강 유역임을 피하기는 어렵다)

-난하 유역에 낙랑군과 대방군의 치소가 있었는데 그곳에서 낙랑이란 글자가 단 한자라도 발견되었다는 보고가 없다.

도대체 난하에 낙랑군이 설치되었다고 주장하는 일부 엉터리주장은 무슨 배짱으로 그리하는지 궁금할 뿐... 신채호선생이나 박은식선생이 이런 주장을 한다면 너무나 당연히 수긍할 수 있다. 나라를 일본에 잃은 백성이 2000년전에도 그러한 꼴이 있었다는 것을 어떻게 인정할 수 있겠는가? 일제시기에 평양낙랑을 부정하는 것은 다른 당위성이라도 있지만 오늘날 역사를 왜곡해 가면서까지 그리하는 이유를 도저히 알 수가 없다.

---> 정말 누가 역사를 왜곡하는지 모르겠다. 지나 연호만 나오면 무조건 지나 땅인가? 근세조선은 모조리 명나라 청나라 땅이겠네.

서기 연호가 나오면 무조건 미국이나 서양 땅이겠네.

한마디로 고대인들의 역동성을 모르는 소치다.

더구나 그 때(지금도 그렇지만) 동아시아의 중심은 중원이다.

중원을 중심으로 돌아가는 천지에서 중원의 연호를 쓴 것이 무조건 중원의 영역인가? 오히려 그런 연호가 집중되어 나오는 땅은 큰 세력의 중심부일 가능성이 큰 것이다.

그 땅은 어디까지나 마한이고 백제였다.

한나라 수많은 군 중에 모두 군명이나 현명이 쓰인 명문이나 봉니가 전부 나왔는가?

어찌 낙랑군에서 꼭 나와야만 되는가?

낙랑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지껄이는 소리. 위에서 이미 무수하게 논했다.

낙랑이라면 무조건 낙랑군만 생각하는 그 머리란!

낙랑과 대방이 어째서 지나인가? 바로 조선이 아닌가?

조선 땅의 원래 명칭이 아닌가?

한씨들이 낙랑에서 피난 온 것을 모르는가?

즉 그들도 마한 안에서 낙랑인인 것이다.

그들이 왕권을 장악하면 당연히 지명도 따라오는 것이다.

물론 윤내현이 말하는 낙랑국도 절대 아니다.

무명이 툭하면 꺼내는 <후한서지리지>를 봐라!

위에서 말했듯이 단편적으로 낙양에서 한단까지가 1100리이니 낙랑군 5000리는 죽었다 깨어나도 요하를 넘어오지 못한다.

왜 하필 한단인가? 유주나 요동 낙랑군과 같은 동북로이기 때문이다.

이들 지역을 가려면 한단을 거쳐야 하기 때문이다.

더구나 내지는 가깝게 느꼈을 것이고 변방을 멀리 느꼈다.

이는 지나사서의 지리지를 읽다보면 누구나 느끼는 바고 실제로도 그렇다.

진정 간단한 산수도 못하는가?

5) 백제의 논리 -

호남지역은 백제도 아니었다고 한다.

오늘날의 희망으로 옛 역사가 바뀌어주지를 않습니다. 어떤 논리로도 요동과 나란히 나오는 요서가 광서성까지 가지 않습니다.

요즘 방송과 일부학자들이 함부로 했던 거짓말이 상식화되어 가고 있군요. 광개토대왕비 석회도말작전, 백제담로의 해외경영(필리핀까지 경영했다고 하더군요.), 백제왕이 일본천황이 되었다 등등 참 민망한 거짓말 그동안 많이 했습니다.

백제는 대제국이 아니며 해외경영(요서경략은 제외)을 했다는 확실한 증거는 거의 없습니다. 하와이에 조선인들이 사탕수수농장으로 이민을 갔다고 해서 하와이가 조선 땅이란 논리를 펴는 분들은 없습니다. 일본 아스카문명도 마찬가지입니다. 백제는 일본 땅에 독자권력을 세우지 못했습니다. 백제세력은 왜에 오히려 흡수되었지요. 백제는 6세기가 되도록 해외경영은커녕 전남지방도 제대로 장악하지 못했습니다. 전남지역의 고고학자 10명에게 물어보십시오. 과연 백제가 전남전북을 제대로 장악했다고 보는지... 역사는 감계기능을 하라고 존재하는데 거짓말을 하면 역사의 존재의의를 허물어뜨리게 되죠.

---> 그래, 정말 옳은 소리다. 생각해 보라.

그대 말대로 겨우 한강 유역뿐인 백제가 고구려와 그리 치열하게 일진일퇴 하나?

그런 나라가 어떻게 요서는 경략하나?

또 그렇다면 광개토왕의 58성이 들어갈 자리는 어디인가?

그런 땅을 가지고 지나사에서 동이의 강국이 되었다고 얘기하나?

어째서 공식기록인 <당서>에 고리보다 큰 영역으로 나오나?

적이 바로 강 건너 코앞에 있는데 수도라는 한성이 풍납토성에서 100여년을 잘만 번영하는가?

신라가 한강유역을 점령하여 고구려와 단절되었는데도 여전히 고구려의 대군이 침입하고 고구려와 대립하는가?

공식 역사서에 그 땅이 발해의 소유가 되었다고 하는가?

발해가 한반도 서남부에 있었다는 얘긴가? 상식을 가진 이가 할 소리요? 앞뒤 맞는 소리를 하시오!!

주류이론은 그것 하나만으로도 모조리 폐기되어야 한다.

무명이 툭하면 다른 이를 비판하면서 사서를 편의부정하고 취사선택한다고 하는데 과연 누가 그런가?

<기록>을 부정하고 멋대로 해석하는 것은 그대가 신봉하는 주류들과 그대 자신이 아닌가?

백제가 굳이 중국 동남부와 동남아시아를 휘저었다고 하는 소리를 하고 싶진 않다.

그렇지만 우리 역사 강역에서의 위치만은 제대로 대접해주어야 하지 않는가? 왜 문헌을 멋대로 해석하고 고고학을 왜곡하여 역사를 개판으로 만드는가?

6) 부여의 논리

- 어쩌다 옳은 소리 한 번 했다.

무명 글 : 진부여솔선백장인이라는 서진시기 도장이 1975년 내몽고자치주에서 발굴되었습니다. 부여가 어디에 있었기에 이런 유물이 내몽고에서 나오게 되었는지 흥미로운 유물입니다. 내몽고 상경박물관측에서는 길림, 흑룡강성에 있던 부여족의 일파가 내몽고지역으로 이치 된 흔적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만,, 이는 기존의 부여의 영역을 염두에 둔 설명으로 보입니다.

혹시 부여국이 생각보다 서북쪽에 있었는가? 부여라는 종족의 영역이 생각보다 광범했었나? 고구려에 멸망한 부여가 그 후 서진시대까지 존속했었나?(아니군요...부여는 400년대에도 존속...) 등등의 의문이 잠깐 들기도 합니다만,,,

부여의 세력권이 대흥안령 지역까지 이어졌을 가능성은 매우 높습니다. 동호에서 이어지는 선비와 오환족이 부여지역에서 발생한 것은 아닐까...

고구려와 백제의 창건자들이 모두 부여출신이니까 부여는 대략 우리민족형성의 3분의 2를 차지하는 셈입니다.

진나라가 부여의 부족장에게 준 도장이 장춘이나 하얼빈 부근이 아닌 내몽고 파림우기 부근에서 나오니 이상해서 하는 이야기입니다.

---> 잘 보고 있소. 이는 내가 말한 부활한 부여다.

즉 고리의 서북에서 부활한 부여인 것이다.

그래서 현도군과 낙랑군을 비롯하여 지나 역대 왕조와 그렇게 많은 접촉이 있었던 것이다.

만주 한가운데 있었다면 가능한 얘기가 아니다.

왜? 고리가 요서에 있었기 때문에.

모용씨가 멀리 만주 한가운데 부여를 쳤을 것 같은가?

바로 하북에서 가까운 부여이기 때문이다.

대표적으로 무명 한 사람을 골랐지만,

결코 그를 인격적으로 모욕하려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어디까지나 고대사 인식 자체가 잘못되었음을 나무라는 것이다.

앞에서 말했듯이 현대사나 사회를 보는 눈은 존경할 만한 점도 많다.

오히려 세세한 면에서는 어느 누구에 못지 않게 뛰어나기도 하다.

17-1

그는 대표적인 식민사학의 나팔수, 동북공정의 앞잡이"

요 따위로 말씀하시면 기분이 팍 상합니다. 그러나 명예훼손소송은 하지 않을테니 너무 걱정은 마시고...

다른 것은 제껴두고 고조선의 위치이야기.. 도대체 제가 한 이야기가 잘못되었다면 어디에서 무엇이 잘못인지 찍어보세요.

1. 진개가 고조선의 서방2000리를 빼앗고 난뒤 만번한을 경계로 하였다. - 위략

2. 이때의 만번한은 난하와 그지류 汗水 부근이므로 패수는 난하다. - 윤내현

3. 그럼 진개가 2000리를 빼앗기전, 고조선의 경계는 난하의 서쪽2000리에 있다?? -저의 궁금점

4. 만약 난하가 패수고 위략의 만번한이 난하유역에 있었다면 고조선을 공격한 연나라의 수도는 최소한 난하의 서쪽 2000리를 넘어서 있다. -저의 중간결론

5. 그렇다면 진개의 동정이 있던 시기 연나라는 황하의 대만곡부인 오르도스지역 너머 있게된다.

6. 그럼 연하도는 어느나라의 것인가? 계성은 어느나라의 성인가? 그곳에서 출토되고 있는 엄청난 유물과 명문은 고조선의 것인가?

7. 연하도 유물이 연나라의 것임은 고고학적으로 명백하다.

8. 그렇기 때문에 난하가 패수라는 말은 위략의 기록과 정면으로 배치된다.

9. 위략의 패수, 만번한은 난하가 아니라 요하유역이다.

자 여기서 몇번이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는지 구체적으로 말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 그냥 당신은 식민사학이오 라고 하면 뺨따구 맞을지도 몰라요.

그리고 전체적으로 어수선하게 이야기를 하시는데 구체적으로 좀 말씀하셔야 하겠네요. 그리고 혼자 기쁨에 넘쳐서 유레카를 외치는 것은 자유입니다만, 독립선언서가 아닌 다음에야 내가 모든 비밀을 밝혀냈다고 해봤자 별로 감동하는 사람은 없을 것 같습니다. 그런 사람은 많이 봐왔거든요.

18

이제 다시 환장할 일이 생긴다.

수로가 42년에 가야를 세웠다고?

그래서 비류백제 삼한백제론이 나왔다고? 천만의 말씀이다.

수로는 3말 4초의 사람이다.

가야사 조작의 키는 의외로 간단하다.

바로 120+30+30+30+30=240 이다. 즉 4갑자 올린 것이다.

그럼 신라본기에 나온 가야의 기사는 거짓인가? 맞다.

42년 가야의 건국은 맞다.

다만 금관국과 가야를 삼국사기는 분명히 하고 있다.

금관국은 282년 이후에 세워졌다.

그것은 오늘날 고고학과도 일치한다.

누가 세워 주었는가? 백제다. 백제 부여씨다. 왜?

삼국사기 파사왕조에 수로의 이야기가 있다.

바로 수로와 파사는 짝이다.

언제나 같이 움직인다.

파사가 5대왕으로 조작되었으니 당연히 수로도 거기에 따랐다.

왜? 수로와 파사는 같이 움직였으니까!

그러기에 수로설화에 파사석탑이 나온다.

그것은 바로 파사왕을 뜻한다.

파사는 5대왕이 아닌 18대 왕이다.

마찬가지로 수로도 그 때 사람이다.

가야연맹? 전기 가야는 금관국이 주도하고 후기 가야는 대가야가 주도했다고?

무슨 풀 뜯어 먹는 소리냐?

가야는 제대로 된 나라도 아니었다.

오직 백제의 따라지, 왜의 따라지였을 뿐이다.

이래도 일본서기를 무시하는가?

그들은 한결같이 가야지방에 대한 지배권을 나타내고 있다.

이는 정확한 것이다.

그것이 비록 <임나일본부>가 아니라도.

그런 가야가 왜를 세웠다고? 웃기지 마라! 피라미가 고래를 낳은 꼴이다.

고고학도 이미 증명하고 있지 않는가? 가야 지방은 북방계 유물로 가득한 것을.

수로-거등-마품-거질미-이시품-좌지-취희-질지-겸지-구형-세종-솔우-서현-유신 13 - 12 - 11 - 10 - 9 - 8 - 7 - 6 - 5 - 4 - 3 - 2 - 1 - 0

즉 수로는 유신의 13대조가 된다.

그러면 수로는 어디에서 왔는가? 과연 그 애비는 누구인가?

이제 허접한 비류백제, 삼한백제론은 끝낼 때가 왔다.

비미호는 일본서기와 아무런 관계도 없다.

수로는 결코 1c의 사람이 아니다.

그런 이론은 무의미한 또 하나의 헛말일 뿐이다.

그렇다면 가야의 시조는 누군가? 삼국사기에서 밝히고 있다. 이진아고왕이다.

이진아고가 누구인지는 아직 모른다.

더 파고들어야 한다.

하지만 당연히 수로는 바로 투후 김일제의 후손인 것이다.

바로 흉노의 자손인 것이다.

이것이 바로 문무왕비의 위력이요, 성씨록의 위력이요, 돈장의 위력인 것이다.

이를 박창화가 절대로 알 리가 없었다.

첨부하자면 무력은 김유신의 할아비가 아니다.

유사 문무왕 조서에 나온 대로 문희는 세종-솔우-서운(서현)-문희의 계통이다.

유신도 마찬가지다.

물론 여기의 세종은 이사부의 아들 세종과는 다르다.

그 점은 너무 길므로 여기서 다루지 않겠다.

그럼 어떻게 해서 무력이 유신의 할아비로 둔갑이 되었는고?

바로 서현의 출세욕 때문일 것이다.

삼국사기와 유사, 화랑세기는 그 답을 이미 제시하고 있다.

돈장엔 그 증거의 일단이 나온다.

19

요의 수도는 임황이요, 이 곳이 서요하의 상류지역임은 누구나 알고 있다.

요동도 요서도 다 요의 땅이었다.

다만 요동은 약간의 요동(搖動)이 있다.

- 혹시 모른다. 요동이 진짜 왕씨 고리의 땅이었을지도 -

어쨌거나, 지나의 어느 시대 어느 기록에서 요나 거란족이 장성(만리장성) 남쪽에서 나라를 세웠다고 한 적이 있는가?

어디 중국을 침략하여(중국이 연운 16주를 떼어주기 전에) 나라를 세웠다고 지적한 적이 있는가? 없다. 결코 없다.

그런데도 안동도호부가 요동이고 만리장성의 기점이 압록강이었다고 망발하는 것은 무슨 심보인가?

무엇을 근거로 그리 떠벌리는가?

만리장성이 요서를 가로질러 요하를 끊고 압록강에 닿았다고 식민사학과 그를 추종하는 이 나라 주류사학계는 아직도 망발을 늘어놓고 있는가?

모두다 학문의 교수대로 보내야 할 것들이 아닌가?

역설적으로 만리장성은 결코 요서를 넘어서지 못했고 안동도호부는 난하 가까이에 있었던 것이다.

그럼 고리의 마지막 평양성은 어디였는가? 바로 오늘날 요동 지역임을 말해준다. 요사는 고대사의 비밀을 모조리 간직하고 있다.

그 뒤에 나온 <송나라 이후의 고지도>를 보더라고 결코 만리장성이 요하를 가로질러 압록강에 닿은 것으로 그려진 것은 없다.

바로 오늘날의 만리장성과 거의 궤적이 일치한다.

즉 명나라가 쌓은 오늘날의 장성이 바로 진시황대에 쌓은 만리장성인 것이다.

이보다 확실한 증거가 있는가? 물론 다른 증거도 고대문헌에 지천으로 널려 있다.

존화사관주의자들, 사대주의, 식민사학, 동북공정의 앞잡이를 자처하는 주류사학과 그 추종세력만 모르고 있는 것이다.

언젠가 song님이 이 싸이트에서 논한 논리가 정확하다.

대릉하변의 조양이 선비족의 수도인 용성이라고? - 지나던 개가 웃는다. -

그곳은 바로 고조선의 터전, 고리의 터전이었다.

바로 한나라 요동의 군현과 고리가 충돌하던 지점이다.

그리고 요는 어쨌거나 연운 16주를 차지한다.

그곳은 장성 이남이었다.

사학자 누구도 연운 16주를 오늘날 장성의 북쪽이라고 하는 사람이 없다.

바로 요나라 시대의 장성이 오늘날 장성의 궤적과 일치하기 때문이다.

식민사학이나 지나의 억지 이론대로 요서를 가로지르고 요하를 건너 압록에 닿았다면 연운 16주가 요동이나 요서에 있었단 말인가?

즉 만리장성은 전국시대에 쌓고 다시 명나라가 그 자리에 그대로 다시 축성한 것이다. 결코 다른 곳으로 옮겨 쌓은 것이 아니다.

그럼 요는 어디에서 성장했는가?

역사에서 지워졌지만 요는 분명히 고리의 영역에서 성장했다.

고리를 이은 발해의 영역 안에서 성장했다.

고리 멸망 후에 한때 강성하기도 했지만 얼마 뒤에 바로 발해의 지배로 편입되었다.

그러나 발해의 약화를 틈타 새로운 대안 세력으로 부상하였다.

발해의 동만주에 뒤이어 서만주에서 일어난 것이다.

거기엔 또 하나의 변수가 있었다.

바로 오늘날 요동지역의 신라였다.

신라가 요동지역에 있었다고? 그렇다.

신라는 요동지역까지 차지하고 있었다.

신라 9주는 잘못된 것이다.

삼국사기와 후대의 기록을 보라!

9주 외에도 주가 몇 개 더 있었다.

삼국사기 지리지는 심히 잘못된 고증일 뿐이다.

잘못되고 날조된 역사의 편린일 뿐이다.

각설하고 이래도 요가 남의 역사인가?

어떻게 요의 역사가 지나사가 될 수가 있나?

민족적 친연성과 풍습, 문화, 역사 강역 어느 쪽도 우리하고 가깝지 되놈의 역사와 가깝지 않다.

고조선, 고리, 발해의 영역에서 일어났으니 당연히 우리역사인 것이다.

이게 다 누구의 죄인가?

바로 김씨의 죄다. 신라김씨의 죄다.

바로 뜻 없이 살아온 이 땅의 지배세력들이다.

20

일본열도 고대사의 위대한 천황으로 통하는 웅략은 누구인가?

고리에 대한 복수를 하려고 계획한 개로왕은 일차로 왜 왕권을 접수하기로 한다.

이미 대륙의 문명에서 멀어지고 문화적으로 떨어진 열도는 불안정하였다.

더구나 부여씨와 목씨의 타협으로 김씨인 윤공이 잠시 자리를 이었지만 부여씨와 목씨의 갈등도 여전했다.

하지만 대륙에선 부여씨가 이미 확실한 위치를 점하고 있었고 열도의 부여씨도 응신의 후손을 비롯한 여러 씨족들이 강성한 상태에서 개로의 동생인 곤지의 등장은 커다란 회오리를 몰고 온다.

그는 거의 무력으로 정권을 잡고 왜왕에 오른다.

그러다가 백제가 다시 고리에 패망하고 수도인 평양이 대파되는 위기를 맞는다.

그러자 그때까지 왜의 영역이었던 충남과 호남지역을 백제에게 준다.

일본서기에서 천황이 구마나리를 주어 백제를 부흥하게 했다는 것이 결코 거짓이 아닌 진실인 것이다.

바로 호남의 왜식 고분들은 그때까지도 그곳이 백제의 직할 영역이 아니었음을 증명한다.

그런 땅을 아낌없이 마구 준다?

바로 왜와 백제가 동족이 아니라면 절대 가능한 얘기가 아니다.

각설하고 웅략인 곤지는 국사를 맏이인 청녕에게 맡기고 백제로 온다.

그러다가 혼란한 권력투쟁의 와중에서 희생된다.

그 시신은 다시 왜로 옮겨져 왜왕의 자격으로 모셔진다.

훗날 청녕이 다시 남조정권에 표를 올린다.

바로 왜왕 무(武)다. 결코 무는 웅략이 아닌 것이다.

왜 지나사서엔 5왕인데 일본서기엔 인덕-이중-반정-윤공-안강-웅략-청녕의 7명인가? 언제 지나사에서 외국역사 기(紀) 썼던가? 열전만 썼지.

인덕은 찬, 진은 반정, 제는 윤공 흥은 안강 혹은 미륜, 무는 청녕이다.

물론 그들의 부자관계 등도 맞지 않다.

지나사서에서 쓴 동이열전은 언제나 참고용일 뿐이다.

오직 일본서기, 성씨록을 참고하여 계통을 밝힐 수 있을 뿐이다.

마찬가지다. 한국고대사도 그리해야 한다.

어디까지나 주는 삼국사기와 유사다.

동성이 왜 동성인가? 바로 동쪽 성에서 온 왕이기 때문이다.

왜는 백제의 동쪽이기 때문이다.

왜와 백제가 한 집안이 아니라면 절대로 가능한 얘기가 아니다.

서기에 천황이 동성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백제왕으로 보낸다.

그 천황이 과연 누구란 말인가? 바로 곤지의 맏아들인 청녕이다.

일본서기는 웅략기에 넣어놓았지만 결코 웅략이 아니다.

그 비밀은 바로 기년조작에 있다.

그러다가 훗날 계체가 왕위에 오른다.

이는 아마도 곤지의 막내이거나 손자일 확률이 높다.

일본서기가 맞다고 본다면(계체 나이를 감안하면) 아마도 곤지의 셋째에서 막내 사이일 것이다.

혹은 개로왕의 다른 아들일지 모른다.

다만 아직 웅략이후로는 잘 알지 못한다.

내가 거기까지 신경 써서 공부할 틈이 없었다.

왜 계체라고 하였을까? 바로 체(體)를 이었기 때문이다.

여담이지만 일본서기는 천황의 호칭을 그냥 아무렇게나 적지 않았다.

바로 그 호칭에 비밀이 담겨 있는 것이다.

훗날 다시 천무가 정권을 쥔다.

생각건대 천무는 원래 김제상의 후손인 백제왕일 확률이 높다.

생각하라! 내가 왜 백제본기에도 없는 백제왕이라고 부르는지!

한 가지는 확실하다.

천무는 김씨다.

그럼 백제사에서 김씨왕이 있었는가?

그렇다. 확실히 있었다. 밝히지 않았는가? 사요왕이다.

그럼 사요가 최초의 김씨 백제왕이었나? 아니다. 누구인가? 바로 숭신이다.

그러기에 神의 칭호를 얻은 것이다.

언감생심이지만 천무가 정권을 잡지 않았다면 어림도 없다.

김씨들은 이래저래 신라와 일본 양쪽에서 역사조작에 착수한다.

서로에게 이득이었으므로. 그들은 역사를 도살한 것이다.

천무 이래 신라와 일본의 빈번한 접촉은 바로 역사조작을 위한 수순이었다.

천무가 정권을 쥔 것은 백제와 고리와 망하고 김씨가 득세하던 바로 그 시절이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어쩌면 일본의 문무천황은 정말로 신라의 문무왕일지도 모른다.

그러다가 환무가 집권한다.

바로 오늘날 일본천황가의 직계다. 바로 부여씨다.

하지만 그들도 뒤틀어진 역사를 바꾸려고 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대륙의 일을 잊고 새로운 나라를 건설하기로 매진한다.

하지만 족보는 필요했다. 그러기에 성씨록이 나왔다.

바로 일본삼서중에서도 성씨록이 핵심인 까닭이다.

바로 부여씨와 해씨 김씨와 박씨와 목씨의 족보인 것이다.

백제는 일명 구다라라 한다. 바로 구다라로 읽어야 한다.

물론 후대에 음가가 변형되었건 어쨌건 백제의 주류인 일본이 구다라라 하였다.

백제를 제대로 모르는 우리는 당연히 거기에 따라야 한다.

물론 우리가 백제의 주류에서 벗어났다는 것은 아니다.

우리에게는 백제의 기록이 깡그리 사라졌기에 몰랐을 뿐이다.

구다라를 구다라라 읽어주는 게 무엇이 잘못된 일인가? 무엇이 창피한 일인가?

각설하고 고구려연구회 등에서 내 놓은 고구려 지도를 보자!

잘못 되어도 한참 잘못되었다.

이렇게 큰 고리가 무엇이 부족해서 콩알만한 백제와 신라를 꺾지 못하여 나라가 망하고 통일을 못했단 말인가?

당시의 기록은 분명히 고리와 더불어 백제를 대등한 나라로 그리고 있다.

76만호대 69만호다.

오히려 백제가 크다.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한참 잘못된 것이다.

한마디로 정의한다.

모두다 거짓이다.

위대한 고구려를 창조하기 위해 역사를 심히 왜곡하고 있다.

북한의 주체사학이나 식민사학이나 다 마찬가지다.

식민사학에서 벗어나기 위해 여러 시도를 하고 있지만 이런 잘못된 인식을 바꾸지 않는 한 고대사 복원은 꿈일 뿐이다.

위대한 것은 고리가 아닌 백제였다.

그들은 망한 부여를 다시 일으키고 모용씨에게 두 번이나 패망하면서도 굴하지 않고 백제를 세우고 역사의 강자로 키워냈으며, 일본열도를 정복하고 바로 한민족의 역사지평을 넓혔다.

물론 거기에는 커다란 힘이 작용했다.

바로 찬란한 문화를 가진 역사 고조선이 있었던 것이다.

일부의 주장처럼 동남아나 해외로 뻗어나갔을 가능성도 얼마든지 있다.

일본서기나 지나의 기록은 분명히 그것을 예측하게 해 준다.

우리는 백제에 대해서 가장 많은 빚을 지고 있다.

우리는 백제에 대해서 피어린 반성의 역사를 써야 한다.

패배주의, 빈정거림, 반(反) 백제주의의 식민사관으로는 결코 백제의 비밀과 역사의 비밀을 풀 수가 없다.

21

신라김씨의 시조는 알지도 아니요, 최초의 김씨왕은 미추도 아니다.

시조와 최초의 김씨왕은 바로 성한이다.

그런데 신라김씨들은 왜 하필 신라본기에서 미추를 김씨왕의 선조로 하였을까?

궁금하지 않는가? 과연 미추가 누구기에? 앞에서 얘기했듯 구도와는 아무런 관계도 없다.

상장돈장에 분명히 미추가 구도의 아들로 등재되기는 했으나 그것이 조작임은 한 눈에 드러난다.

바로 구도-말흔-말구의 계보다.

사기에 미추이사금과 말구는 형제라고 했다.

말이 되는 소린가? 그러면 구도는 미추의 할아비겠네!

그리고 시대로 보아 말구가 과연 내물의 아비가 될 수가 있는가? 절대 아니다.

앞에서 미추는 20대 왕임을 밝혔다.

바로 내물의 전왕이다.

언젠가 김태식씨가 갈문왕을 논하면서 여러 얘기를 했는데 그의 얘기가 거의 정확하다.(거의?) 여기서 길게 따지지는 않겠다.

미추의 어미는 이칠갈문왕의 딸이라고 했다.

그럼 아비는? 당연히 왕이어야 한다. 왜? 이칠은 왕의 장인이기 때문이다.

그럼 미추의 아비가 왕이었나?

그렇다. 고대문헌 다 뒤져서 찾아보시라. 분명히 있다.

화랑세기에 진골정통을 소개하면서 왜 예로부터의 진골이 아니었다고 하였는지 이해가 간다.

<화랑세기>의 역자인 이종욱은 거기서 이상하게 얼버무렸다.

왜? 그 문장의 뜻을 잘 모르기 때문이다.

과연 그 뜻이 무엇인가?

미추가 어째서 진골정통이 아니면 왕비로 맞지 말라고 했는가?

거기서도 미추는 내물의 전왕임이 드러난다.

멀리 13대 왕이라면 가능한 얘긴가?

그러면 유례부터 흘해까지 진골정통을 왕비로 맞았는가?

유례, 기림, 흘해가 맞은 진골정통 왕비 제시해보라!

그것 하나로도 화랑세기는 절대로 위서가 아니다.

박창화가 재미삼아(?) 신라사 지으면서 내가 제시한 위의 신라 왕통을 따랐는가?

아니다. 바로 삼국사기에 나온 대로 했다.

바로 그가 화랑세기를 짓지 않았다는 빼도 박도 못하는 증거다.

그럼 미추의 할아비는? 알 수 있다.

왕이었다. 증조할아비는? 왕이었다.

바로 미추의 증조부터 이어지는 계통만 밝혀도 고대사의 비밀이 1/5은 다 드러난다.

왜 김유신의 혼령이 하필 미추왕릉으로 들어갔나?

유신은 알다시피 수로의 후손이다.

과연 수로와 미추는 어떤 관계였기에?

백제의 신라정벌(298년 이서고국의 침입)에서 어찌 미추왕이 등장하는가?

과연 미추왕은 어디에 묻혔는가? 앞에서 말한 황남대총이다.

황남대총이라고? 그렇다.

경주에 미추왕릉이 있던데? 웃긴다.

대나무가 있다고 미추왕릉인가? 바로 삼국사기에 답이 있다.

대릉에 묻혔다.

각설하고 황남대총은 왜, 가야, 신라, 백제를 아우르는 고고학의 결정판이다.

당시의 모든 비밀을 다 담고 있다.

그걸 엉뚱하게 해석하고 있다. 왜? 문헌을 도외시하기 때문이다.

하긴 <일본서기가 백제서기>임을 알지 못하는 자들에게 무얼 기대할 것인가?

어째서 왕릉에선 금관이 안 나오고 금동관만 5-6개 쏟아지고 은관이 나오며 왕비릉에서 금관이 나오나? 내물과 같은 계열의 왕이었다면 그랬을 것 같은가?

미추를 왜 하필 13대에 집어넣었을까?

왜 혁거세가 13세에 왕위에 올랐다고 했는가?

관련이 없는 것 같은가?

천만에! 고대의 사관은 후세에 비밀을 알려주고 있다.

바로 성한왕에 대한 비밀의 코드다.

그것은 바로 13이다.

그러기에 가장 수치스런 기록인 우로왕의 죽음으로 인하여 우로는 왕에서도 삭제되는 비운을 당해야 했다.

22

고조선이 흩어진 이래 불행을 당한 것은 이 땅의 역사였다.

고리와 백제가 동족끼리 투쟁하다 망한 이후로 발해와 신라가 대립하다 끝내는 요-금-원-청을 거쳐 되놈들의 영역으로 넘어가 그들이 마치 요와 금과 청의 역사를 저들 것처럼 떠벌리게 되었다.

우리가 그들을 마치 다른 민족 다른 역사처럼 인식하게 되었으며, 일본열도는 뿌리를 잃어버리고 마치 독자생성의 논리가 맞는 양 발광하고 있다.

그리하여 대륙과 열도의 같은 형제가 서로를 몰라보고 원수가 되었다.

고리와 백제가 치열하게 투쟁한 것처럼.

그리고 오늘날 한반도의 두 형제는 마치 남보다 더한 원수가 되어가고 있고 타 족속인 되놈들에게는 유학이 들어온 이래 사대주의로 굽실거리며 얼치기 되놈이 되어 소중화를 자처하고 같은 뿌리인 만주인과 몽골인과 일본인은 오랑캐와 왜놈이라고 경멸하고 있다.

그러니 조상의 혼이 돕겠는가?

같은 핏줄을 미워하고 천시하며 남으로 여기고 경멸하는 그런 나라 그런 역사에게 조상들이 무엇이 좋다고 영광을 주고 미래를 주겠는가?

자기의 뿌리를 부정하고 선조로 인식되어야 할 단군의 목이나 자르는 족속들에게 무슨 희망이 있어 번영의 기틀을 주고 영광의 기회를 주겠는가?

황제가 중화 한족의 조상인가? 다만 상징일 뿐이다. 마찬가지다.

단군이 이 나라 사람 모두에게 직접조상은 아니라도 다만 상징일 뿐이다.

징기스칸이 몽골의 상징인 것과 같다.

로물루스 형제가 로마의 상징인 것과 같다. 워싱턴이 미국의 상징인 것과 같다.

오히려 황제란 작자가 한족에게 남긴 핏줄의 비율보다 단군족은 이 나라 이 민족을 비롯하여 만주인 일본인에게 훨씬 많은 핏줄을 남겨주었다.

벗어나라! 몽매에서 깨어나라! 어리석음에서 깨달아라! 민족의 뿌리를, 역사의 뿌리를! 남을 업신여기고 지배하기 위함이 아니다.

스스로 깔아뭉개고 비하하는 못된 습관과 버릇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다.

그 키는 일본삼서가 쥐고 있다.

삼국사기와 유사가 쥐고 있다.

돈장과 세기가 뇌관을 쥐고 있다.

이제 한민족 역사의 네크워크를 구축할 때다.

조선-신라-고려-조선으로 이어온 것만이 우리역사는 아닌 것이다.

바로 잃어버린 북방의 역사를 우리 것으로 해야 한다.

잊고 살았던 열도의 역사를 다시 배워야 한다.

고대사의 복원은 바로 삼국초기의 복원이다.

그것이 복원되지 않는 한 고대사는 없다.

그것이 복원되면 고조선이 복원된다.

후대의 역사인 후신라와 발해도 복원된다.

바로 그것이 핵심이다.

주류학계나 재야학계나 모두 고대에 대한 인식은 고리가 30점, 신라가 10점, 가야도 역시 10점, 백제는 5점 밖에 줄 수 없다.

바로 핵심인 백제와 가야 신라사가 빵점 수준이다.

이 곳에서 만난 분들 중에 내 개인적인 평가로는 유정님이 최고수다.

그 외에 김태식, 바비, 신동훈, 정석근, song님 등이 뒤따른다.

솔직히 유정님은 내 글을 읽는다면 내 뜻을 알아차렸을지도 모른다.

대단한 유정님과 바비님.

나는 그 정도로 미세한 것에서는 솔직히 유정님을 비롯하여 몇몇 분에게 결코 미치지 못한다.

김태식님의 그 박식함은 놀랍다.

가끔 그의 블로그를 들여다보며 동냥을 한다.

하지만 내가 하고자 하는 것은 바로 큰 기틀이다.

줄기가 나와야 잎이 자랄 것이 아닌가? 밖에서는 구자일이란 분이 고수다.

다만 요즘 이상한 데로 빠져서 안타까울 뿐이지만...... 학계에서는 이덕일, 이형구, 김종서, 정형진 등이 앞서간다.

여러분들의 생각과 다르다고 마구 쏟아내어 질문하지 마시기 바란다.

두 번 세 번 읽어보고 고대사서 다시 들여다보고, 지도 그려가면서, 계통도 그려가면서 생각하기 바란다.

개인별로 한 코너에 한 가지 씩만 질문해 주셨으면 한다.

물론 다 답변할지는 모르지만 시간을 내서 언젠가 한꺼번에 답변해 주겠다.

근거 없는 비방이나 어쭙잖은 증거 들이대면서 반박하지 말라.

웬만한 배짱과 증거로 내가 이런 주장을 한다고 보는가?

어느 누구보다도 철저하게 챙긴다.

주류사학의 이론은 이제 모조리 폐기처분해야 한다.

지나와 동북공정의 하수인들은 이제 역사를 훔치는 것을 넘어 문명을 통째로 도적질하려 하고 있다.

그것이 지나의 주장대로 진실이라면 노여워할 이유도 없다.

그러나 거짓말이 뻔하고 억지가 뻔한데도 이러한 때에 아직도 식민사학의 나팔수 동북공정의 앞잡이 노릇을 하면서 그것을 자각하지 못함은 스스로 얼굴에 침을 뱉는 격이다.

고구려 연구 한답시고 소위 역사학자란 인간들이 국민의 피 같은 세금 일년에 100억씩이나 쓰면서 무얼 연구하겠다는 건가?

모두 사기꾼들일 뿐이다.

문헌을 뒤지고 종합해서 논문을 쓰는 것이 아니고 다른 쓰레기 논문 짜깁기해서 논문을 쓴다.

그러니 또 다른 쓰레기가 될 뿐이다.

삼국이 부체제 부족국가 형태였다고?

천년 이상을 고대국가로 자란데서 어느 날 갑자기 퇴보하여 부족국가가 되나!

그 돈을 차라리 다른 데 써라.

그 돈으로 지나사서 일본사서 번역하고 보급하는데 써라.

당신들 주류들이 과연 일본서기 하나 제대로 번역했나?

성씨록 번역했나? 지나사서 하나라도 온전하게 번역했나?

그것이 우리가 배달국과 조선과 고리와 신라와 백제의 조상들에게 사죄하는 길이다. 고리는 1차 방정식이다. 부여는 2차, 가야는 3차, 신라는 4차, 백제는 5차 방정식이다.

1차 방정식도 제대로 풀지 못하는 주제에 5차를 풀겠다고?

언감생심 꿈도 꾸지 말라.

고리와 부여를 풀어야 가야, 신라, 백제(왜)가 나온다.

역으로 백제를 풀면 모든 것이 풀린다.

그 백제의 역사는 사라진 것이 아니다. 바로 일본삼서에 고스란히 존재한다.

고고학은 필요하다.

그러나 위험하다.

바로 문헌이 제대로 해석되지 못한 고고학은 위험한 것이다.

그것은 역사왜곡의 시발점이 될 수도 있다.

툭하면 하는 말이 한반도와 만주지역에 문헌이 없다고 한다.

물론 중원에 비해 절대적으로 부족한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역사이래로 문헌이 공백인 적은 없었다.

다만 몰랐을 뿐이다. 그 문헌이 제대로 해석된다면 이제 고고학은 새로운 시대를 맞게 된다. 역사의 기록이 있는 곳에서 고고학은 당연히 문헌역사학의 시녀일 뿐이다.

고고학이 주가 되는 것은 세세한 부분과 역사기록이 없는 곳에서의 추측뿐이다.

23

여러분들은 지금까지 듣지도 보지도 못했고 결코 생각도 하지 못했던 충격의 순간들을 지나왔다.

천조대신이 도모왕이고 도모는 결코 동명이 아니라는 것,

박제상이 아니고 김제상이며 그가 윤공천황이라는 것,

신라왕통이 조작되었다는 것,

성한이 신라왕이고 혁거세이며 문무왕비가 정확하다는 것,

신라소년에 의한 백제왕 암살이 마한의 분서왕이라는 것,

신라는 백제가 세웠다는 것,

응신이 침류왕이라는 것,

수로가 3~4c 사람이라는 것과 역시 백제가 금관국을 세웠다는 것,

파사가 신라 18대 왕이며 제상의 5대조이며 백제왕 사요의 사위라는 것,

백제에 김씨왕이 있었다는 것,

원래 왜왕이 목씨라는 것,

박씨의 시조가 왜 목씨 왕족이며 신라의 초대왕인 호공이라는 것,

고리의 평양이 요서에 있었고 훗날의 안시성이라는 것,

근초고왕이 공격한 평양성이 안시성이라는 것,

백제의 수도 한성이 평양이라는 것,

비류왕의 어머니가 소서노일지도 모른다는 것,

그녀가 신라정벌의 주역이라는 것과 그것을 기록한 일본서기가 사실이라는 것,

미추왕의 아버지도 왕이었으며 선대도 모두 왕이었다는 것,

결코 미추가 정통신라김씨가 아니라는 것,

알지는 박씨일 가능성이 많다는 것 등 모두가 놀랄 새로운 사실일 것이다.

하지만 어쩌랴!

진실이 그러한 것을.

그 진실의 시작은 바로 부여가 부활했다는 것을 모르기 때문이다.

하지만 삼국사기만 정밀하게 들여다봐도 부여가 부활했음을 알 수 있다.

바로 고구려본기 태조왕기에 그 답은 나와 있다.

어쭙잖은 문구 하나, 증거 하나로 역사를 판단하지 말라.

모든 증거를 종합하고 체계화하여야만 ?

그 진실의 시작은 바로 부여가 부활했다는 것을 모르기 때문이다.

하지만 삼국사기만 정밀하게 들여다봐도 부여가 부활했음을 알 수 있다.

바로 고구려본기 태조왕기에 그 답은 나와 있다.

어쭙잖은 문구 하나, 증거 하나로 역사를 판단하지 말라.

모든 증거를 종합하고 체계화하여야만 진실에 접근할 수 있는 것이다.

물론 내 주장도 전부라고 하지는 않겠다.

세세하게는 착오가 있을 것이다.

하지만 큰 덩어리로는 어디까지나 진실이다.

나는 결코 추측이나 소설을 쓰지 않는다.

어디까지나 역사서에 나온 것을 그대로 재해석하여 제대로 인식시켜 줄 뿐이다.

지금까지 나온 고고학을 참고하고 적용할 뿐이다.

바로 삼국사기와 일본서기의 조작의 고리를 밝히면 되는 것이다.

다시 말하지만 모든 것은 바로 고대사서에 다 있다.

내가 그것을 바르게 해석하여 여러분에게 보여주는 것뿐이다.

그리고 진정으로 역사를 원한다면 참고할 만한 뛰어난 저서들을 소개하겠다.

왜 그런지는 스스로 판단하시기 바란다.

살아있는 한국사 1, 고조선은 대륙의 지배자였다.

- 이덕일(일본삼서만 제대로 알면 무서운 존재가 될 분)

발해연안에서 찾은 한국문화의 비밀 - 이형구(고고학계의 최고 수작)

요서지역의 청동기 연구 - 복기대

화랑세기 또 하나의 신라 - 김태식(화랑세기 관한한 타의 추종을 불허)

고깔모자를 쓴 단군, 실크로드를 달려온 신라왕족, 수시아나에서 온 환웅천왕 - 정형진(뛰어난 역작)

후한서 동이열전 연구 - 기수연(기존 역사학계 최고 수작)

고대사의 비교언어학적 연구 - 강길운(정말로 꼭 필요함)

삼국지 바로 읽기, 대쥬신의 역사 - 김운회(생각의 지평을 넓히기 위해서)

중국북방이족과 조선상고사 - 나동현(많은 자료가 있어서 추천)

고조선과 한사군의 위치 비정 연구’에(후한서지리지의 수학적 연구 ) - 김종서(아직 확보하지 못했음 누군가 구해주시면 좋을 듯) 90점 - 물론 이 분의 <한사군위치의 연구>는 책으로 나온 것이 있다.

아나타는 한국인 - 박영미(인문서로 쓴 한일고대사)

일본속의 한국문화 유적을 찾아서 - 김달수(일본이 백제란 것을 알았다면)

백제와 대화일본의 기원 - 홍원탁(아직은 인식 부족)

한국문화의 뿌리를 찾아서, 부여기마족과 왜 - 존 카터 코벨(외국인이 본 뛰어난 혜안) 금문의 비밀 - 김대성(아직은 필자도 어려움. 그러나 뛰어난 역작) 한자로 풀어보는 한국 고대신화 - 김용길 (역시 뛰어남) 언어속에 투영된 한민족의 고대사 - 정연규(참고할 만함) 고조선과 부여의 제문제 - 한국고대사연구회(주류학계의 일단을 볼 수 있다.) 기후변화 - 김연옥(이 외에도 다른 기후변화에 관한 논문도 좋을 듯) 실크로드와 한국문화 - 정수일(이분의 저작은 문화교류사에서 일가견이 있다.) 중국역사지리 - 류제현(중국역사지리에 관한 저작으로 참고할 만함) 고조선 부여사 연구 - 백산자료원(어렵지만 봐둘 것)

그 밖에 일본서기 - 전용신 선생님,

고사기 - 권오엽 선생님,

조선상고사 - 신채호 선생님,

화랑세기 - 이종욱,

지나사 동이열전 부분과 지리지 부문(통전 수경주 요동관계 포함),

요서 요동 관계 기록 일체,

한국고대 금석문, 고대사 사료 집성(한치윤의 해동역사에 대부분 들어있음. 국사편찬위에서도 제공함),

정약용의 아방강역고,

도교 경전(노자, 장자, 열자, 포박자, 회남자, 주역)그 외에 많은 참고자료를 두루 섭렵해야 한다.

외골수와 아집은 또 다른 조작만 낳을 뿐이다.

다시 말하건대, 돈장과 세기는 바로 키포인트다.

결코 박창화가 끼적거린 것이 아니다.

그 가치를 알아야 진정한 고대사를 복원할 수 있다.

그것은 결코 당시 고대사서를 거스르는 게 아니다.

철저하게 보완하고 있다.

학자들이 쓴 논문이나 저서를 참고하는 것을 대부분 제외한 것은 그들이 잘못된 인식으로 역사를 논하고 있기 때문이다.

몇몇을 제외하면 거의 참고할 필요가치가 없다.

논문 얘기가 나왔으니 더한다면 김태식씨가 논한 논문이론이 참으로 와 닿는다.

그러면서 푸코의 <광기의 역사>를 추천했다.

정말로 한 눈에 쉽게 읽어가야 논문이지, 무슨 주석 각주를 주렁주렁 매달고 그들만이 읽는 논문으로 전락한다면 그것은 이미 학문이 아니다.

자신이 없기 때문이다.

무슨 서론 본론 결론이 필요한가?

그저 논문 중에 자연히 드러나면 되는 것이다.

우리나라 대학이나 학계의 논문형태의 수준은 초등학생 수준보다도 못하다.

자세한 것은 김태식씨의 글을 참조하기 바란다.

카터 코벨이 위 저서에서 미술사가답게 고대 일본벽화를 얘기하면서 배에 실은 말에 대해 얘기한다.

그러면서 부여족이 일본을 정벌했다고 단언하고 있다.

혜안이 아닐 수 없다.

분명한 것이다.

열도에는 말이 없었음을 모든 학자들이 인정하고 있다.

그런데도 일본의 주류는 자생이론이다.

일본열도에서 자생한 세력이 한반도를 침공했다는 것이다.

위에서 내가 논했듯이 자기 열도도 통일하지 못한 세력이 무슨 수로 밖으로 힘차게 뻗어 나가나?

그러면서 코벨은 구미학자들이 부여족이 일본을 정벌한 것을 주장한 것을 나열하고 그것은 의심할 수 없는 일이라고 했다.

에가미가 기마민족정복설을 주장한 이래 많은 일본의 사학자들은 정말로 부여족이 정벌했음을 감지하고 또 주장하고 있다.

물론 소수지만. 그런데도 이 땅의 학자란 것들은 부여는커녕 백제마저도 부정한다.

그러니 임나일본부설에 끌려 다닐 수밖에.

누누이 말했듯 일본의 원류는 백제가 아니다. 바로 백제 그 자체다.

일본서기는 분명히 적고 있다.

바로 비류왕이 열도로 건너가 정복한 시기를. 일본서기의 기년만 풀면 그 답이 나온다. 코벨은 그것을 알지 못하였지만 분명히 짐작하는 혜안을 가지고 있었다.

우리나라 역사학자 중에 과연 코벨만한 혜안을 갖춘 이가 있던가?

삼국사기와 일본삼서는 바로 동전의 양면이다.

결코 따로 놀지 않는다.

일본삼서를 해석하려면 삼국사기가 있어야 하고 삼국사기를 바로 잡으려면 일본삼서가 있어야 한다.

그 촉매를 하는 역할이 상장돈장이요, 화랑세기다.

삼국사기는 자식을 자식이라 부르지 못하는 한 맺힌 기록이요, 일본삼서는 부모를 부모라 부르지 못하는 피 맺힌 기록이다.

그 아픔을 감싸주고 밝혀주어야 할 후손의 책무를 망각한 채 그저 편가르기와 비아냥, 악의에 찬 경멸성 어조로 역사에 대해 지껄이는 자들은 반드시 역사의 철퇴를 맞게 되리라!

아직도 일본서기와 고사기를 소설이라 폄하하는 자들이 많다.

화랑세기와 상장돈장을 소설이라고 지껄이는 얼간이들이 많다.

표현이 지나치지만 나는 그렇게 밖에 표현할 수 없다.

거듭 말하지만 박창화 선생의 다른 저작이 종이비행기라면 두 저작은 최첨단 우주왕복선이다. 내용을 가지고 판단해야지 자구나 용어 등으로 판단하는 자체는 어디서 굴러온 개뼈다귀인가?

김부식이 삼국사를 쓰면서 구삼국사를 너무도 많이 깎아냈다.

소위 고대문자가 졸렬하네, 거치네, 어쩌고 하면서 유교사관으로 역사를 덮었다.

그가 한 것은 거의 없다. 오히려 우리 고유의 것은 많이 깎아내고 중국사서 참고하여 빠진 부분만 채웠을 뿐이다.

그런 것은 그리 안했어도 아무 하자도 없는 것이었다.

안타까운 일이지만 차라리 일본서기처럼 원본 그대로 전해오는 편이 훨씬 나았다.

그리고 그 아래에다 수많은 고대전적 참고하여 <삼국지>에다 배송지가 주석을 단 것처럼 많은 주석을 다는 것이 좋았다.

그러면 오히려 고대사에 대해 우리는 더 많은 진실을 살필 수 있었을 것이다.

말을 더하자면 한단고기에 대해서다.

한단고기는 절대로 위서가 아니다.

물론 한단고기가 100% 진서라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분명히 저본이 있다.

그것이 무엇인지는 모르지만 반드시 저본을 바탕으로 쓰여 진 것이다.

증거는 많다.

지금까지 재야에서 주장한 증거는 모두 아니올시다이다.

바로 상장돈장과 화랑세기를 비롯하여 일본삼서가 제시하는 증거를 한단고기 중간중간에 섬뜩하게 제시하고 있다.

이유립이나 누군가가 그걸 지어내었다면 내가 제시한 위의 사실들을 모두 알고 있었다는 얘기와 똑같다.

한 가지만 제시한다면 태백일사에서 한결같이 마한을 대동강 평양일대로 직시하고 있다.

그것 하나만으로도 한단고기는 절대로 위서가 될 수가 없다.

바로 역사서적(특히 우리나라와 일본의 고기류)의 위서여부는 문구가 아닌 역사적 사실을 제대로 전하고 있느냐로 판단해야 한다.

물론 한단고기는 많은 부분을 심도있게 검토해야 하고 많은 가필과 위조를 걸러내야 한다.

내가 제시하는 고대사 관련 논거에서는 될 수 있으면 한단고기는 제시하지 않으려 한다.

한단고기가 없어도 중고사(부여 건국~고리 멸망)는 충분하기 때문이다.

고리가 망한 것으로 우리역사의 암울은 시작되었다.

겉으로만 보면 그렇다.

하지만 진정한 암울함은 백제가 망함으로 그리 되었다.

백제는 드러나지는 않았지만 고리의 방패였다.

백제가 망하니 순망치한격으로 고리도 망한 것이다.

바로 우리역사의 암흑은 백제가 망함으로 시작되었다.

신라는 백제의 존재와 기록을 깡그리 없앰으로써 그들의 치부를 감추려 했다.

그리해야만 그들의 비밀을 유지할 수 있었다.

그것이 오늘날 우리를 헤매게 하고 이천년이나 역사의 굴곡을 둘러쓰게 한 죄니 그 신라김씨의 죄는 크다 할 것이다.

비아냥대지 마라!

스스로 잘못이 있다면 고치는 것이 진정한 학문의 길이요, 학자의 도리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일본서기가 조작이라는 등의 수작 집어치우고, 세기와 돈장이 위서라는 헛소리 그만들 하시고, 삼국사기와 일본서기가 매우 정교하게 조작된 사서라는 것을 아시고 새롭게 출발들 하시기 바란다.

정말로 최소한 기수연씨 같은 생각을 가지기 바란다.

끝으로 일본서기에

왜 신무가 76년, 개화 60년, 숭신 68년, 수인 99년, 신공 69년, 응신 41년, 인덕 87년, 윤공 42년 등인지 다 이유가 있다.

그들은 결코 아무렇게나 역사를 쓰지 않았다.

철저하게 계산하고 심사숙고해서 그렇게 썼다.

역설적으로 그 방법론을 찾아내면 바로 일본서기가 어떻게 기년조작을 했는지, 해당 인물이 과연 누구인지 속속들이 드러난다.

삼국사기의 계통이 어떻게 조작되었는지 뿌리 채 드러난다.

위에서 일부를 제시했다.

그들은 지하에서 그 혁명을 기대하고 있을 것이다.

역사학은 역사학으로 끝나지 않는다.

그것은 모든 인문학의 도화선이 되기 때문이다. 역사학의 혁명은 바로 인문학의 혁명이 된다.

불개혁 필혁명(不改革 必革命) - 개혁하지 않으면 혁명이 온다.

출처 : tong - 和而不同님의 우리 역사. 문화통 </textare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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