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 오티즘

아헤에헤 작성일 07.09.07 04:52: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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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티즘 (자폐증)





현석은 오늘도 짜증섞인 눈물을 흘리며 신경질을 부린다. 좋아하는 것을 못하게 하는 엄마가 증오 스럽다. 현석은 어째서 자신이 그토록 좋아하는 일들을 하지 못하게 하는지 도통 알수가 없다. 그 때문에 신경질이 나 죽겠는 모양인지 울상으로 잔뜩 찌푸려진 얼굴이 그 심정을 대변해주고 있다. 베란다 유리창을 볼펜으로 긁을때 나는 끼긱 거리는 소리가 그에겐 무척이나 즐거운 소리였다. 언젠가 동물의 왕국이란 프로그램 에서 나온 돌고래가 내는 소리와 비슷한게, 자신이 꼭 그 이쁘게 생겼었던 돌고래와 소통하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그런 현석의 악취미 때문에 볼 포인트가 빠져 잉크가 줄줄 세는 박살난 볼펜이 쓰레기 봉투에 허구헌날 가득했고, 노란 규격봉투에 검은색 잉크가 오물처럼 덕지덕지 묻어나기 일쑤였다. 그 것을 참지 못했던 유정은 볼펜을 집안에서 모두 없애 버렸다. 그러나 이가 없으면 밥을 못먹을 쏘냐. 젓가락 으로 그짓을 대신하는 현석이다 . 도저히 그의 악취미를 막을 방법이 없는 유정이었다. 더욱 힘든건 같은 층에 사는 아파트 주민들이 밤낮 없이 찾아와 소음에 대해 불편을 호소한다는 것이었다.



유정은 현석때문이 아니라도 세상사에 찌들어 언제나 피곤한 일상을 보내고 있었다. 남편은 바깥일을 한다는 핑계로 정신연령이 다섯살 밖에 되지 않는 현석을 나몰라라 피하기만 했고, 그때문에 보통 아이보다 손이 수십배는 더 가는 현석을 하루종일 돌봐야 하는 것은 오직 자신 뿐이었다. 차라리 자폐아 학교에 보낼까 생각도 했었지만, 의심이 많고, 자신의 일은 자신이 해결해야 직성이 풀리는 그녀의 억척같은 성격탓에 현석을 아무에게나 맡길수 없었다. 더군다나 젊은시절 남편과의 애틋한 사랑의 결실인 현석을 나몰라라 한다니 상상도 할수 없는 일이었다.



남편과의 꿈 같던 신혼 시절 현석을 낳고 울며 기뻐했던 자신이 아직 가슴속에 남아 있는 유정이었다. 산부인과 에서 출산의 고통과 탈수 현상을 겪으며, 희미해지는 의식속에 눈물을 흘리면서 하늘에 맹세 했었던 기억이 문득 떠올랐다. 이 아이를 반드시 훌륭하게 키워 내리라. 자신과 남편이 만들어낸 생명체를 결코 허투루 돌보지 않으리라 맹세 했었다. 그랬기 때문에 유정은 심각한 자폐증을 앓고 있는 현석을 자신의 일을 핑계삼아 외면할수 없는 것이다. 그것이 손톱만큼 일지라도. 어찌 됐든 현석은 자신의 뱃속에서 열달동안 배불러 낳은 소중한 아이 였으니까 말이다. 그러나 그 강철 같던 단단한 다짐마저도 일순간에 무너지게 하는 것이 바로 현석의 악취미였다.



"놔! 놔!"

"우리 현석이..... 이러면 엄마가 저녁밥에 콩 잔뜩 넣어줄꺼야."

"그러던지 돼지야!"



유정은 웃으며 대화로 고집불통인 현석을 어르려 했다. 현석의 고집이 요즘들어 더욱 세진것 같았다. 뾰루퉁한 볼에 한껏 숨을 머금고 풍선처럼 부풀려보는 현석이다. 유정은 현석의 그런모습이 이제는 더이상 귀엽지도, 사랑스럽 지도 않았다. 정신연령이 다섯살 에서 멈추었다고는 하지만, 몸은 계속해서 성장하기 때문에, 현석은 아이의 정신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다 큰 어른의 몸을 가지고 있었다. 힘은 또 어찌나 쎈지 연약한 여자의 몸으로는 건장한 남자가 되버린 현석을 도저히 이길수 없었다.



현석이 볼펜을 마치 '햇님 달님' 이란 동화 속의 동아줄 이라도 되는양 죽을듯 힘을 주어 붙들고, 고집을 피우는 통에 그녀는 땀을 뻘뻘 흘리며 애를 먹고 있었다. 결국 현석이 극도로 싫어 하는 반찬인 '콩' 을 이용해 이 상황을 타개하려 했지만 녹록치 않았다. 현석에겐 그깟 콩반찬 을 먹는것에 대한 두려움 보다, 볼펜을 잃는다는 것이 더 무서웠기 때문이다.



"이이익!"



쿠당탕.



어찌나 기를 쓰고 달려 들었었는지 유정은 손아귀에 가득한 땀조차도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더이상 주민들의 경멸스런 눈초리도, 현석의 짜증나는 취미생활도 참을수 없었던 그녀였기에 더욱 처절하게 달려들었다. 그러나 결국 손아귀에 고인 땀에 볼펜이 주우욱 미끄러져 버렸다. 그탓에 그녀는 거실 바닥에 엉덩방아를 찧고 말았다. 엄마를 힘으로 제압했다는 사실에 너무나도 기분이 좋은 현석이었다. 이제 엄마 조차도 자신을 막을수 없다는 것이다. 집안의 절대강자 였던 엄마 마저 말이다. 늦잠을 자도, 콩반찬을 안먹어도, 유리긁는 소리도 마음껏 들을수 있을 것만 같았다. 이제 이집에서 더이상 자신을 제제 할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현석은 날아갈 것마냥 기분이 좋았다.



"히히히"



끼이이이이익.





"우..우..흐으읍.."



유정은 눈가가 촉촉히 젖어왔다. 그동안 억눌러왔던 감정이 폭발해 마음 같아서는 펑펑 울어버리고 싶었지만, 유정은 눈물이 흐르는것을 가까스로 막았다. 아래층에서 성이 난듯 쿵쿵 거리며 계단을 올라오는 소리가 들렸기 때문 이었다. 이윽고, 초인종을 미친듯이 누르는 소리에 유정은 베란다 문을 열고 뛰어내려 버리고만 싶은 충동이 들었다. 남편은 이럴때 도대체 어디서 무얼 하고 있는 것일까. 유정은 괜시리 남편인 철준이 보고싶었다.



띵동 띵동!

끼이이이이익!



불규칙하게 뒤섞여 듣기 껄끄럽고, 불쾌한 소리 라는 뜻의 소음. 그 소음 중에서도 사람의 심기를 가장 뒤틀려 놓는다는 두 종류의 소음이 그녀의 귀를 미친듯이 괴롭히고 있었다. 관자놀이 가 다 지끈 거릴 정도였다. 유정은 두 소음중 어느 하나라도 막아야만 한다 싶었다. 어차피 현석은 이미 무리였다. 두손으로 꽉쥔 볼펜을 광기 어린 눈으로 뚫어 져라 쳐다보며 뭐라뭐라 중얼 거리는 모습이 마치 실수로 살짝 건드리기 라도 하면 미친듯이 물어 뜯는 도사견 처럼 위험천만해 보였다. 현석을 막을수 없다면 결국 한가지 수 밖에 없다. 초인종 소리를 멈추고 아랫층 사람을 맞이 하는 수 밖에.



유정은 눈물이 눈시울에 방울질 틈도 주지 않고, 촉촉히 젖은 눈가를 소매로 훔치곤 현관문으로 달려갔다. 초인종 소리가 가까워 지자 유정은 아랫집 여자의 무서운 인상이 떠올라 오금이 저려왔다. 허나 무서운 인상의 그녀가 등장하면 그렇게 안좋은 일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현석의 악취미를 멈출수 있는 것 또한 아랫집 여자 뿐이었기 때문이다. 이상하게도 현석은 항상 고집통을 부리며 유리를 긁다가도 아랫집 여자의 무서운 인상과 맞닥뜨리면 기겁을 하며 자신의 방으로 도망치곤 했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녀는 정신이 미숙한 어린 아이에겐 충분히 공포스런 외모의 소유자 였으니까.



"또 시작이군요."



현관문을 열자마자 얼음장 같은 얼굴로 하는 말이 그것 이었다. 역시나 칼로 반듯이 자른듯한 예리 하면서도 각진듯 단단한 말투였다. 유정은 그녀에게서 사람의 냄새가 나지 않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로로 길게 찢어진 족제비 같은 눈매가 그녀를 정면으로 바라볼수 없을 정도로 위압감을 심어주었다.



"미..미안해요. 매번 정말 미안합니다."



주눅든 모습으로 유정은 그녀에게 사과의 말을 했다. 이웃에게 고개를 조아리는게 도대체 몇번 이었던가. 수도없이 그래왔지만 아직도 자존심을 몽땅 짓밟히는 듯한 이기분은 도저히 익숙해지지 않는 유정 이었다. 그 와중에도 등뒤에선 현석의 취미생활이 계속 되고 있다. 아랫집 여자는 유정의 사과를 들은채 만채 그녀를 떠밀치며 집안으로 들어섰다. 광폭한 멧돼지 같은 퉁퉁한 몸뚱아리가 드디어 현석의 시야앞에 들어섰다.



굉장한 위압감이다. 언젠가 그림 동화책에서 본 호랑이 라는 동물보다 더 무섭게 생긴 그녀였다. 현석은 그녀가 필시 자신과 같은 사람이 아닐거라 생각했다. 동물. 그중에서도 맹수에 해당하는 과가 아닐까 생각했다.





끼긱



유릿가루를 잔뜩 묻힌 볼펜이 멈추었다. '히히' 거리던 웃음 소리도 멈추었다. 현석은 공포에 질린 눈으로 한참 동안이나 그자리에서 움직이지 못했다. 그녀가 날카로운 이빨을 들이밀고 자신에게 달려들 것만 같았기 때문 이었다. 이 아파트란 서식지에서는 그녀가 우두머리 라고, 생각하는 현석이었다. 생긴것도 오금이 저리도록 무서웠고, 덩치도 산만한 게 도저히 이길수 없을 것 같았다. 현석은 그녀가 마치 오늘부로 힘에서 자신에게 밀린 엄마를 밀치고, 이 아담함 보금자리에서 최강의 자리에 올랐던 거만한 자신에게 ' 더이상 까불었다간 목을 물어 뜯어 주겠어' 라고 협박 하는 듯했다.



툭.

"으아아아아 괴물이다!"



현석은 바닥에 쌓인 수북한 유릿가루 사이로 볼펜을 떨어 트리더니 이내 자신의 방으로 허겁지겁 도망쳤다. 아랫집 여자는 그제서야. 성난 눈을 깜빡이며 돌아서 유정을 바라보았다.



"자폐아 자폐아!. 봐주는대도 한계가 있습니다. 장애인 있고, 일반인 있는 세상 아닙니다. 어딜가도 사람은 모두 공평하게 대우를 받아야 해요. 우리가 참아주는 것도 이것이 마지막 일겁니다. 아이에게 장애가 있기 때문에 차별 하는게 아니에요. 잘 아실거라 생각합니다. 아이를 키우기 힘들다면 자폐아 특수 학교에 보내야 할것이 아닙니까? 아무쪼록 저의 말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다시 이런 소란이 벌어지면 그땐 가만두지 않겠어요."



쉬지 않고 내뱉는 말에 숨이 턱턱 막혀올만도 했을텐데. 그녀는 얼굴 표정 하나 바뀌지 않고, 한숨에 그 긴말을 다 내뱉었다. 그런 그녀의 말에 숨통이 막혀오는건 오히려 유정이었다. 이윽고, 현관문을 쾅 닫더니 아랫집 여자는 올라올때 처럼 계단을 쿵쿵 거리며 내려갔다. 어쩌면 그 쿵쿵 거리는 소리는 성이나서 내는 소리가 아니라 비대한 몸때문에 나는 소리일 지도 몰랐다. 유정은 그녀가 나간 자리에 서서 한참을 움직이지 못했다. 자신의 힘으로는 더이상 현석을 통제할 방법이 없었다. 불가항력 이었다. 허나 아랫집 여자의 말도 무시할순 없는 노릇 이었다. 유정은 쉽사리 대책이 떠올르지 않았다. 자폐아 학교라는 달콤한 유혹이 그녀의 머릿속에서 잠시간 맴돌았다. 유정은 이내 고개를 가로저었다. 유정은 저녁 시간이 되어 남편이 돌아오면 이 이야길 들려주면서 진지한 대화를 해야 겠다고 생각하며, 그때까지 현석이 얌전히 있어주길 바랄 뿐이었다.





철준은 눈이 휘둥그레졌다. 근 몇년간은 받아본적이 없는 대우를 받고 있었다. 상냥한 아내와 이 휘어질것만 같은 상다리는 다 무엇이란 말인가. 허나 유정의 버릇을 알고 있던 철준은 이 마다하기 힘든 대우를 뿌리치며 퉁명스레 말했다.



"현석이는?.....뭐야? 할말있는 거야?."



유정은 무언가 중요한 말을 할때나, 힘든 부탁을 하려 할때 애교섞인 아부를 떨곤 했었다. 그런 그녀를 가장 잘아는 철준이었기 때문에 그렇듯 담담하게 대처할수 있었던 것이리라. 유정은 다 눈치채 버린 철준의 입에 간장이 잘 벤 도톰한 장조림 조각 하나를 넣어주면서 대답했다.



"응."



철준은 모처럼 다정한 유정의 대우를 더 받고 싶긴 했지만, 그뒤에 숨겨져있을 간사한 그녀의 속셈이 괘씸해 더이상은 이 아부를 받고 있을수 없었다. 거기다 내뱉는 말또한 행동과 너무나 다르게 짧고 굵지 않은가. 이건 대체 자신의 기분을 띄워 놓겠다는 건지 상하게 만들겠다는 건지 도통 알수가 없었다.



"말해 그럼."



"우리 이사가자."



"또 그 이야기야?."



"이번엔 좀 달라."



유정은 심호흡을 크게 한번 하고 이어 말했다.



"오늘 아랫집 여자가 또 왔다갔어. 당신도 알지? 우리 현석이 악취미. 아파트 사람들이 더이상 못견디 겠대."



유정은 '사실 나도 그래 나도 더이상은 견디기 힘들어......' 라고 덧붙이고 싶었지만 그럴수 없었다. 그것은 곧 자신이 현석을 돌보는 것을 힘들어 한다고 남편에게 고해바치는 것이나 마찬가지 였기 때문이었다. 언제나 현석을 자폐아 학교에 보내길 원했던 철준에게 현석을 자신이 도맡아 키우겠다고 고집을 부렸던 유정이었다. 그런 그녀가 그런 말을 내뱉는 다는건 남편의 의견에 동의한다는 말이나 마찬가지 였다. 결코 그것만은 용납할수 없었다.



"몇번을 말해? 이집 마련할려구 대출 받은거 메꿀려면 내가 몇년을 개고생을 해야되는지 몰라서 그래? 이사? 제발 우리 현실을 제대로 보란 말이야!"


"당신은 바깥일이 중요하고, 돈이더 중요할지 몰라! 하지만 난 아냐! 내 아들이 더 중요하다고! 우리 아들! 우리아들 차별하는 이 더러운곳에서 더이상은 못키워!"



"차별? 무슨 차별? 이동네에서 우리 현석이보고 자폐증이라고 놀리는 애새끼들 하나 있어? 당신에게 뭐라 그러는 여편네 하나 있냐고! 없잖아! 아무도 우리현석이 한테 뭐라고 안해! 시끄럽게 구니까 조용해달라는 거잖아! 차별이 아니야! 우리애가 이상한 거라구! 당신이 애를 가둬 놓고 있다고! 당신 울타리에서 못벗어 나게 하고 있단 말야! 그게 애를 더 힘들게 만들고 있다고는 생각 안해?"



"내가...... 내가 우리 현석이를 저렇게 만들었다고.....?"



유정은 철준의 말에 너무도 기가 막혔다. 바깥일 한답시고, 그가 현석을 제대로 돌본적이나 있었던가. 유정은 철준에게서 만정이 떨어졌다. 유정은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서 현실을 피하는건 자신이 아니라 오히려 철준이라고 생각했다.



"너..... 우리 현석이 생일 언제인 줄은 알어.....?"


"갑자기 뜬금 없이 무슨 소리야?"



"대답해 개자식아..... 우리 현석이 생일 기억나냐구!"



"무슨 말이 하고 싶은거야!"



"모르지! 알리가 없지! 니가 우리현석이에 대해서 아는게 뭐야! 니 아들이라는 것 빼고는 아무것도 모르잖아! 관심도 없으면서 관심 있는 척 배려하는 척 하지마! 아픈 애를 어떻게 생판 모르는 사람한테 맡길수가 있어? 현석이가 나혼자 낳은 애야? 니가 씨뿌려서 낳은 새끼잖아!"



"...... 손가락으로 겨우겨우 세던 지 나이도 열살 넘으니까 못세는 애새끼야. 나는 이제 지긋지긋해. 너랑 나 늙고 병들어 뒤질때까지 저 새낀 평생 다섯살이야. 부모 하나 못알아 볼테지. 자 이제 어떡할거야? 니가 현석이 병이라도 고칠꺼야? 말해봐!"



결국 속마음을 말해버린 철준이었다. 항상 둘러 말하던 그에게 원하던 속마음을 들었으나, 알고 있었으면서도 철준의 이기어린 진심에 슬픔이 솟구치는 유정이었다.



"내가...... 내가 같이 아파해주면 돼..... 내아이니까...... 내가 현석이 만큼 아파해 주면 그걸로 돼......"



"에이 씨팔!!"



쨍그랑. 철준이 던진 젓가락에 장조림 을 담아두었던 접시가 깨지면서 검은빛깔의 간장이 사방팔방 튀었다. 철준은 고개 숙여 울고 있는 유정을 뒤로 한채 집을 뛰쳐 나왔다. 밤공기가 차가웠다. 철준은 생각했다. 어떻게 자신의 인생이 이지경이 되어 버렸을까. 결론은 하나였다. 장애가 있는 나의 아들. 세상이 버린 나의 아들.



"으....흐으으으윽..."



철준이 나가고 없는 황량한 식탁위엔 방금전 다툼이 있었던 흔적이 사방팔방 덕지 덕지 묻어 있었다. 유정의 새하얀 브라우스 위에도 간장이 몇방울 튀었는지 점처럼 묻어 있었다. 유정은 뺨을 타고 흐르는 뜨거운 눈물을 닦아내 보지만 눈물샘은 마르지 않는 샘물인양 슬픔이라는 펌프질을 받아 계속해서 눈물방울을 솟아낸다.



어쩌다 이지경까지 되었을까. 유정은 철준이 너무나 미웠다. 그도 조금만 책임감을 가지고 현석을 돌보아만 주었다면, 지금처럼 힘들지는 않았을텐데. 가정이 파탄나는 상황까진 가지 않았을텐데. 유정은 자리에서 일어나 현석의 방으로 향했다. 이른 저녁부터 잠이 들어있던 현석이 깨지 않도록 조심히 문을 열고 들어간다. 문을 열자 방안 어둠속에서 새근거리는 현석의 숨소리만이 들려온다.



유정은 발소리를 내지않게 조심조심 몇발짝 다가가 인형을 안고 침대에 누워자는 현석을 지긋이 바라본다. 가까스로 막았던 눈물이 다시금 흐른다.



"흐..읍.."



행여나 현석이 깰까 입을 틀어막고 눈물을 흘리는 유정이다. 유정은 눈물속에서 아른거리는 현석을 보며 속으로 다짐한다. ' 니 아빠는 너를 버렸지만, 엄마는 절대 그러지 않을게. 항상 니옆에서 엄마도 너와 함께 아파해 줄께.'




현석은 눈을 뜨자 마자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늦잠을 자고 싶었지만, 그보다 꿈자리가 너무나 무서워서 더이상 눈을 감고 있을수가 없었다. 현석은 간밤에 꿈속에서 볼펜으로 신나게 자동차 유리를 긁었었다. 본네트에 올라타 앞유리를 어찌나 신나게 긁었는지, 쾌감이 극에 달했었다. 그러나 어찌된 영문인지 유리창이 피를 흘리고 있었다. 마치 살아있는 생물처럼 긁힌 자리에서 피가 새어나오고 있었다. 그리고 유리창을 긁을때마다 끼이익 거리던 소음 대신 여자의 비명소리가 들렸었다. "꺄아아아아아악!"



놀라 잠을깬 현석은 서둘러 볼펜을 찾았다. 과연 현실에서도 꿈처럼 유리창에서 피가 흘러 나올까 궁금했던 것이다. 볼펜을 들고 바쁜 걸음으로 베란다 앞에 앉았다.



"응? 어라?"



어제까지만 해도 긁힌 자국이 지저분하게 하얗게 일어나 있던 베란다의 유리창이 이상하게도 깨끗했다. 그새 엄마가 새걸로 갈아놓은 것일까 하고 생각하는 현석이었다. 서둘러 볼펜을 유리창에 가져다 댄 현석은 그제서야 유리창이 깨끗한 사실을 알아 차렸다. 유리창이 없었던 것이다. 현석은 볼펜을 든손을 허공에서 휘젓고 있었다.



"이...이이익."



서둘러 유리를 찾았다. 긁을 유리. 현석은 집안을 이리저리 뛰어다니며 유리를 찾았다. 그러나 어디에도 유리가 보이지 않았다. 검은 브라운관을 뽐내던 티비도, 볼록하게 튀어나온 모니터도, 심지어는 어저께까지만 해도 우유를 따라마시던 유리컵 조차 보이지 않았다. 그제서야 현석은 이 모든 것이 엄마의 짓이란걸 눈치챘다.



"아아아아악!"



현석은 괴성을 질렀다. 제 힘으로 아무것도 할수 없게 되면 아이들이 흔히 보이는 패턴. 현석은 더욱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고 싶었지만, 문득 어제 보았던 호랑이 같은 아랫집 아줌마의 무서운 인상이 떠올라 멈추었다.



유정은 현성의 괴성에 놀라 잠이 달아나 버렸다. 간밤에 얼마나 울었던지 눈이 퉁퉁 부어서 잘 떠지지도 않을 정도였다. 그런 눈을 비비며 거실로 나오자 거실 심통이 제대로 난 현석이 눈에 들어 왔다.



"왜그러니? 무슨일이야 현석아."



"유리가. 유리가 없어!"



"...... 이상하다. 유리가 왜없지. 엄마는 아닌데."



유정은 현석의 눈을 마주치지 않은채 모른채 했다. 분명 자신이 유리를 다 치웠지만, 이야기 화제를 다른곳으로 돌려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언제까지고 현석을 달래야 하리라.



"유리유리. 유리!"



유정은 계속해서 유리를 찾으며 우는 현석을 뒤로한채 기지개를 켜며 하루를 시작했다. 근 1년 전부터 각방을 쓰던 철준의 방을 한번 열어 보았지만, 어디에도 들어왔던 흔적이 없었다. 이런일이 이따금씩 있었기에 유정은 아무렇지 않게 생각했다. 유정은 베란다 문을 활짝 열고 세탁물통을 세탁기에 틀어넣고 동작 버튼을 눌렀다. 그러면서 힐끔 힐끔 현석의 동태를 살피는 것도 잊지 않았다.



처음에는 계속해서 유리를 찾다가도 유정이 무관심으로 일관하자, 차츰 진정되가는 현석이 보였다. 유정은 진작에 이렇게 할걸 그랬다고 생각했다. 이내 현석은 퉁퉁 소리를 내며 돌아가는 세탁기에 시선이 고정됬다. 세탁기가 갑자기 멈추었다. 마치 현석이 쳐다보자 멈춘것처럼 오묘하게도 그시점에 딱 멈추었다. 간단한 아침을 준비하려던 유정은 앞치마를 두른채 퉁 하고 멈춰버린 세탁기를 살펴보려 달려갔다.



"이게 왜이러지."

"탈수. 탈수."



현석이 앙증 맞게 말했다. 그의 말대로 세탁기는 탈수 버튼이 깜빡 거리고 있었다. 탈수 중에 멈추어 버린것이다. 유정은 세탁기 뚜껑을 열어보았다. 수건, 옷가지, 양말 여러가지 세탁물이 한데 섞여 있었다. 그런데 하나같이 다 찢어져 헝크러 져 있었다.



"이게 왜 고장이......"



세탁기는 굉장히 오래된 것이었다. 십년전 쯤 현석의 돌잔치때 잘살던 옆집 이웃이 선물해 주었던 것이다. 그때만 해도 인심이 참 좋았었는데 지금은 왜이렇게 각박한지 새삼 느끼는 유정이었다. 정비업체에 문의를 해보는 유정이었다. 정비업체는 한시간뒤 도착할테니까 그때 집을 비우지 말라는 말을 하며 전화를 일방 적으로 끊었다. 바쁜 시기 여서 그렇겠지 하며 유정은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현석아 이리와 아침먹자."



조촐하고 산뜻한 아침 식탁 이었지만, 식탁위엔 황량한 쇠그릇소리만 울렸다. 쇠그릇 속에는 각각 샐러드와 식빵, 잼 등 다소 어울리지 않는 음식들이 들어 있었다. 집안에서 유리그릇이 다 사라졌으니 그럴만도 했다. 그러나 그딴것은 지금의 현석에겐 아무 상관 없는 것이었다. 게걸스럽게 아침식사를 끝낸 현석은 이내 다시 세탁기 앞에 앉았다. 깜빡 거리던 탈수 버튼이 신기했던 것이다. 현석은 눈을 초롱초롱 하게 빛내며 탈수버튼과 물이 빠지다 못해 찢어 발겨진 옷가지들을 번갈아 보았다.



"호오......"



이미 머리속에서 유리를 긁고 싶다는 생각은 떠난지 오래였다. 그것은 유리긁는것이 식상해서가 아니라, 더 재미 있는 것이 생겼기 때문이었다.



띵동띵동.



유정은 설거지를 하다 쇠그릇을 놓쳐버렸다. 초인종 소리에 언제나 느껴오던 압박감이 그녀를 그렇게 만들었다. 언제나 이웃들의 성난 표정이 함께 오버랩 되었던 초인종 소리였다. 문을 열자 호남형의 정비사가 들어왔다. 머리크기보다 조금은 작아보이는 듯한 캡을 눌러 썼고, 파란색 유니폼을 입은 남자였다.



"이댁 세탁기가 고장이 났다면서요?"



"아 네. 들어와요."



"그래요 한번 봅시다."



나이는 그닥 많지 않아 보였지만, 남자의 몸놀림에선 전문가의 연륜이 묻어 나왔다. 바쁜 걸음으로 들어온 남자는 이리저리 세탁기를 훑어보더니 결론을 내렸는지 유정에게 말했다.



"세탁기가 참 오래됐네요?"



"네 꽤 오래전에 구입한거라......"



"이게. 탈수가 고장이 난것 같은데......"



"맞아요 탈수하다 옷이 다 저렇게 됐어요."



유정은 남자의 말에 동의하면서 세탁물통에 담겨진 찢어진 옷가지들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남자는 그것을 보더니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탈수는 말이죠. 원심력을 이용해서 물을 빼는 거거든요. RPM이 말이죠...... 그러니까 모터의 분당 회전량이 1000회나 1500회가 되면 정상적으로 세탁물에 물이빠져요. 근데 세탁물이 저지경이 된것을 보니까. 분당회전량이 정상 이상으로 높은것 같은데요? 조금 특이한 케이스에요. 모터가 낡으면서 성능이 업그레이드 된것도 아니고......"



"아무튼, 고칠수는 있나요?"



"아. 물론이죠. 그런데 지금은 저희가 조금 바쁜 시기라..... 삼일 후 정도에 저희가 정비사 한명 더 데리고 올테니까 그때까지만 기다려 주실수 있겠습니까?"



"수건같은건 하루하루 빨아야 되는데..... 손빨래 해야겠네요. 알았어요 그렇게 하죠."



남자는 머리숙여 인사를 하고, 들어올때 처럼 바쁜 걸음으로 집을 나갔다. 아무래도 일이 많이 밀린듯, 무척이나 바빠 보였다. 유정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앞으로 해야할 손빨래가 걱정 스러운게 아니었다. 안좋은 시기에, 안좋은 일만 겹치는 것 같아 불안했기 때문이었다. 자주 있는 일이 었지만, 철준이 집에 들어오지 않는 것마저도 불안했다. 유정은 철준의 회사에 전화를 걸었다.



"여보세요."



"네 주식회사 AR커뮤니케이션 꿈과 가치를 창조하는 엔쵸 그룹 사업장 김태수 입니다. 어쩐 일이 십니까."



직업적 멘트가 완숙한 남자였다. 유정은 그를 알고 있었다. 남편의 직송 상사 였으니 모를리가 없었다.



"저어.. 유철준 과장 와이프 되는 사람 입니다만......"



"아 유과장 안사람 이시군요! 오랜만 이네요. 그렇지 않아도 제가 전화 드릴려고 했습니다만."



"네?"



어째서 그가 전화를 하려고 했다는 것인지 얼른 이해가 되지 않는 유정이었다.



"유과장이 오늘 출근을 안했잖습니까. 무슨일 있는가 해서요. 결근 사유 말씀 하실려고 전화하신거 아닌가요?"



"네에?!"



이런일은 한번도 없었다. 남편은 집을 나가도 회사는 절대 결근 하는 일이 없었던 사람이었다. 그만큼 직업 정신은 투철하던 사람이었는데, 어찌된 영문인지 알수가 없었다.



"여보세요.....?"



김태수의 물음에도 유정은 대답하지 않았다. 뭐라 대답해야 될지 몰랐다. 그에게 집안 내 사정을 말하고 싶은 마음은 눈꼽 만큼도 없었다. 유정은 대답없이 전화를 끊어 버렸다.



"현석아."



유정은 세탁기를 요리조리 훑어보는 현석을 불러 세웠다. 어찌나 세탁기에 몰입했는지 자신을 쳐다보지도 않는 현석의 고개를 자신을 바라보도록 두손으로 고정시켰다.



"엄마말 잘들어. 엄마 아빠 찾으러 갔다 올테니까. 집에서 조용히 있어야 된단다. 현석이 집 좋지? 또한번 시끄럽게 하면 우리집에서 못사는 거 알지? 엄마 금방 갔다 올테니까 조용히 있어야 돼. 알겠지?"



"응 알았어. 갔다와."



목을 잡고 있던 유정의 두손이 힘겹다. 현석이 계속 세탁기를 보려 고개를 돌리려 했기 때문이었다. 아무튼 대답을 했다는 것은 자신의 말을 들었다는 것이니 유정은 서둘러 집을 나섰다. 더이상 지체할 수 없었다. 아파트를 내려오자 마자 유정은 서둘러 택시를 잡고 인근 파출소로 향했다. 실종이었다. 남편이, 철준이 실종 된것이라 생각하는 유정이었다.



"그러니까 아줌마. 실종인지 가출인지 저희가 어떻게 압니까!"



"실종이라니깐요. 저희남편 한번도 회사 출근 안한적 없어요!"



"자주 가출 했다면서요? 그럼 이번엔 꼭지가 많이 돌아서 나갔을 수도 있겠네......아줌마 저희도 바뻐요. 집나간지 하루밖에 안된 사람을 실종 했다고 단정 짓고 수사 인력 붙일순 없어요. 우리가 뭐 놀고 먹는 사람들인줄 아세요? 바깥에 나가봐요. 범죄자가 널렸다구요!"



"알았어요! 가출 신고라도 하면 될거 아니에요!"



"진작에 그러실 것이지....."



유정은 가출 신고 접수를 서둘러 하고선 경찰서를 나왔다. 아무리 생각해도 대한민국 이란 나라는 살만한 곳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유정이었다. 세금은 있는대로 뜯어가면서, 어떻게 국민이 원할땐 아무것도 도와주는 것이 없는 것인지 유정은 억울함과 짜증만 밀려왔다.



"개새끼들..... 내가 찾으면 돼!"



유정은 씩씩거리며 친지들 의 집과 남편의 친구들의 집 너나 할거 없이 찾아가 보았지만, 철준의 행적을 찾을수가 없었다. 하늘엔 붉은 노을이 퍼져있었다. 오전 아홉시깨나 나와서 해가 지는 시간까지철준을 찾으며 돌아다녔던 것이다. 절망 적이었다. 어제 이후로 다시는 눈물을 흘리지 않으리라 생각했지만, 또다시 눈시울이 붉어졌다.



띠리리리링.



유정이 눈가에 눈물을 닦아 내려고 하는 찰나 바짓춤에서 휴대폰이 요란하게 울렸다. 모르는 번호였다. 유정은 행여나 철준일까 서둘러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당신이야?!"



"하유정씨 되시죠?"



기대를 져버리는 중저음의 남자 목소리. 어디선가 들어본 목소리였다. 기억을 되짚어 본 유정은 곧 목소리의 주인공을 알수 있었다. 경찰이었다.



"네. 남편 찾았어요?"



"그게...... 서로 좀 와주셔야 겠습니다만......"



"무슨 일인데요?"



유정은 말끝을 흐리는 경찰의 목소리에 덜컥 겁이났다. 철준이 혹시나 잘못 되기라도 한걸까. 유정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러나 현실은 언제나 그랬듯 그녀를 외면 하고 말았다. 서에 도착한 유정은 청천 벽력 같은 말을 듣고야 말았다.



"어제 새벽 세시경인데..... 퍽치기라고 아시려나. 간단하게 말해서 절도인데, 쇠공 이나 각목 같은걸로 행인의 머리를 한번 가격 하고 금품을 훔쳐가요. 남편이 그걸 당하셨는데...... 상태가 매우 안좋은가 봅니다."



유정은 그자리에서 허물어졌다. 믿을수 없는 상황에 다리에 힘이 풀려버렸다. 어찌해서 이런 일만 일어나는 것일까. 자신이 전생에 무슨 커다란 죄악이라도 저질렀나. 모든것이 원망 스러운 그녀였다.



"산소마스크를 끼고 힘겹게 살아있다고는 하나..... 의사가 그러는데 장담은 못한답니다. 식물인간이 될지, 뇌사 상태가 될지, 아님 그냥......"



"......그 병원이 어디죠.....?"



유정은 경찰의 마지막 말을 듣고 싶지 않았다. 분명히 '죽음'을 언급하는 말이었을 터였다. 그말을 절대로 듣고 싶지 않았다. 누구 하나 철준의 죽음을 인정한다는 것은 두고 볼수도, 용서 할수도 없는 일이었다.



"아 인근에 세브......"



유정은 경찰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서둘러 병원으로 달려 갔다. 간호사에게 따지듯이 물어 철준이 응급실에 있다는 것을 알아냈다. 유정은 응급실에서 숨쉬는 것도 힘겨운듯 산소마스크를 끼고 잠들어 있는 철준을 찾았다. 그모습을 보니 다시금 다리에 힘이 풀려버리는 유정이었다. 자신 때문 이라고 생각하는 유정이었다. 어저께 남편을 화나게만 하지 않았어도 이런일은 없었을 것이었다. 유정은 이 모든게 자신 탓이라고 생각했다.



"으흐으윽... 미안해 여보.... 다시는 안그럴테니 일어나 제발....."



철준의 굳어 버린 손아귀를 두손으로 꼬옥 잡으며 기도하고 또 기도했다. 그렇게 한참을 철준의 얼굴을 바라보고 있을까. 마음이 진정 되자 유정은 문득 집에 현석이 혼자 남겨져 있다는 사실이 기억났다. 유정은 또다시 정신 없이 병원을 빠져나와 정신없이 택시를 타고 아파트로 향했다.



"아저씨 좀 빨리좀 달려보세요!"



마음이 다급한 유정이었다. 행여나 무슨 일이라도 있을까 걱정되었다. 불안했다. 유정은 모든것이 불안했다.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는 시간이 천년 만년 같았다. 아파트 현관문에 열쇠를 꽂아넣고 돌리는 순간까지도 불안에 떨었다.



'문을 열면 현석이가 밥솥에 콩대신 사탕 넣고 날 보며 웃겠지. 그래 그럴거야 별일 없을거야.....'



끼이이익.



현관문이 열렸다. 사방이 어두컴컴 했다. 퉁퉁. 퉁퉁. 어두운 집안에서 퉁퉁 거리는 소리만이 들려왔다. 어디서 많이 들었던 소리. 세탁기였다. 유정은 생각했다. 고장난 세탁기가 왜 갑자기 움직일까. 문득 생각나는게 있었다. 집을 나서기전 세탁기에 시선이 고정 되어 있던 현석.



"현석아!"



깜빡깜빡. 탈수버튼이 빠알간 빛을 내며 깜빡이고 있었다. 유정은 뚜껑을 열어볼 용기가 나지 않았다. 뚜껑을 열면. 그땐.



"타아....알.....수우...... 타아....알.......수우........"



낯익은 목소리. 현석의 기어들어가는 목소리가 어딘가에서 들려오고 있었다. 유정은 믿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그소리는 분명 세탁기 속에서 들려오는 소리였다. 눈물이 수도꼭지를 튼듯 쏟아졌다. 유정은 결국 세탁기 뚜껑을 열었다.



"현석아아!!!!"



현석은 알몸으로 세탁기 속에서 머리를 기댄채 힘없이 누워있었다. 하얀 피부가 핏기가 싹가신 시체처럼 투명해져 있었고, 머리카락은 몽땅 다빠져 세탁기 속이 온통 검은 머리카락으로 항칠이 되어 있었다.



"타아....알.....수우...... 타아....알.......수우........"



커다랗게 뜬 눈으로 힘겹게 몇번을 말하더니. 이내 현석의 입에선 아무말도 나오지 않았다. 눈은 커다랗게 뜨고 있었지만, 숨소리 조차 들려오지 않았다.



유정은 기겁해서 119에 신고할 생각 조차 하지 못했다. 현석의 숨소리가 멈춘 그때 결국 유정은 실신하고 말았다.









-3개월후-



현석을 잃고, 엎친대 덮친격 철준은 식물인간이 되었다. 도저히 살길이 막막했던 유정은 결국 남의 집에서 파출부일을 하게 되었다. 남편이 죽은 것이 아니었기에, 생활 보조금 도 나오지 않았다. 더군다나 빠듯한 생활 살림에 생명 보험 하나 가입 하지 않았던 철준 이었다. 정말이지 국가는 유정을 위해 아무것도 해주지 않았다.



낳아 주었으니, 죽든지 까무러 치든지 알아서 하라는 것이었다. 그런 서러움에 하루하루를 살아가던 어느날. 유정은 아무도 없는 싸늘한 아파트 거실 안에 홀로 앉아 있었다. 대낮 이었지만, 한밤인듯 고요했다. 현석의 시끄럽던 유리긁는 소리도 더이상 들려오지 않았다.



지이이이잉.



베란다로 카 크레인이 움직이는 모습이 보였다. 아무래도 누군가가 이사를 오는 모양이었다. 옆집이었다. 정신 없이 사는 통에 옆집 사람들이 이사가는 모습도 보지 못했었다.



띵동띵동.



"예......누구세요......"



유정은 오목한 현관 렌즈구멍으로 바깥을 내다보았다. 처음보는 여자였다. 입가에 미소가 왠지 낯설게 느껴지지 않았다. 희망이 가득 담긴 미소. 유정은 문을 열어주었다. 문밖엔 렌즈로는 보이지 않던 작은 남자 아이도 한명 있었다. 여자는 손에 들린 떡접시를 유정에게 내밀면서 말했다.



"옆집에 새로 이사온 사람이에요. 이웃에게 인사차 떡좀 나눠주고 있어요."



"아......네......"



그녀는 생글 생글 웃고 있었다. 뭐가 그렇게 즐거운지 웃는 모습이 죽은듯 무표정 한 유정과는 정반대의 얼굴이었다. 남자아이도 싱글벙글 웃고 있었다. 뭐가 그렇게 즐거운지. 그런대 남자아이의 얼굴이 어딘가 이상했다. 웃는 얼굴이 마치 어딘가 좀 모자란 듯한 얼굴. 유정은 남자 아이를 빤히 쳐다보았다. 유정의 그 모습에 여자는 표정이 약간 어두워 지며 이야기 했다.



"저희 아들이에요. 약간의 장애를 가지고 있는데...... 자폐증 이에요. 큰 병은 아니니까. 걱정 마세요. 이웃들에게 해가 가는 일은 없을거에요....."



"자폐증...자폐증이라... 큰병은 아니지요. 분명히..... 하지만 이세상은 그아이의 병을 더욱 커다랗게 만들어 갈거에요. 조심하세요."



"네?....네....."







떡을 건내주고 돌아선 여자는 이삿짐을 하나씩 풀고 있는 남자에게 가서 말했다.



"우리 옆집 사는 여자. 혼자 사는가 본데. 분위기가 암울한게 이상해."



남자는 박스를 뜯다 말고 해맑은 웃음을 지으며 여자에게 말했다.



"이런 사람도 있고, 저런 사람도 있는거지. 무슨 상관이야. 앞으로는 우리 식구 일에만 신경쓰라구."



"그래..... 그렇겠지. 우리 영준이 키우기도 벅찰텐데. 남 신경 쓸 정신이 어딨겠어."



여자는 웃으며 이제 막 소년티를 내는 아이를 꼬옥 안으며 말했다.



"엄마는 절대 너 다른 사람한테 안맡겨..... 엄마가 너 덜 아프게 평생 같이 아파해줄께."



여자는 이 다짐을 평생 지킬 것이라 생각하며 아이를 안은채 남자를 바라보았다. 남편의 동의를 구하는 것이었으리라. 남자는 어색한 웃음을 흘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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